예방접종 풍경.부산 임시수도 기념관. ⓒ 박지욱
7~8년 전, 어느 일요일 밤 TV에서 영화 ‘감자’를 봤다. 주인공 복희 역을 맡은 배우가 한창 열연을 펼치는데, 필자는 그녀의 어깨에 유난히 크고 또렷이 보이는 흉터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불주사’자국 같았다.
소설은 1925년에 발표되었고, 영화는 1987년에 만들어졌다. 불주사는 1950년대에 도입되었으니 복희 어깨에 보이는 커다란 불주사 자국은 일종의 ‘옥의 티’라는 싱거운 생각을 하고 혼자 키득거리며 웃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웃고 넘어가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제일 무서운 것이 ‘6학년 불주사’였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불주사는, 초등학교 6학년이면 누구나 다 맞아야 했던 그 시대의 ‘통과 의례’였다. 알코올램프 위에서 춤을 추는 시뻘건 불꽃에 지진 주삿바늘로 맞는 예방 주사였기에 ‘불주사’로 불렸던 이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결핵을 예방하는 ‘비씨지(BCG) 백신’이었다.
콜레라, 장티푸스를 매년 맞았지만 단 한 번도 불에 지진 바늘로 맞은 기억이 없지만 유독 이 주사는 불에 바늘을 지져 맞았기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6학년이 되는 것보다 불주사 맞을 걱정 때문에 끙끙 앓았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BCG는 결핵 예방 주사이지만 주사를 맞고도 결핵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이에 엉터리 주사가 아니냐는 쓴소리도 많았고, 해외에 이민 가서 걸린 적도 없는 결핵 감염 의심자로 몰려 정밀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이유가 이 불주사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BCG는 Mycobacterium bovis bacille Calmette-Guérin의 약자로 우리말로 풀면 ‘깔메트-게랭의 소 결핵균’이란 뜻이다.
깔메트와 게랭이 이 백신을 만든 데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알베르 깔메트. ⓒ 위키백과
알베르 깔메뜨(Albert Calmette, 1863~1933)는 해군 군의관을 꿈꾸어 프랑스 해군 군의학교를 졸업한 후 프랑스 식민지인 아프리카, 사이공, 뉴펀들랜드와 파리의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다양한 감염병과 면역학을 연구한 세균학자였다.
깔메트는 1895년 벨기에 접경 도시 릴의 파스퇴르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는데, 당시 릴 인구 22만 명 중 15%가 결핵 환자란 사실을 알고 결핵을 퇴치할 연구를 시작했다.
1897년 이 연구소에 까미유 게랭 (Camille Guérin, 1872~1961)이라는 수의사가 들어온다. 어릴 때 결핵으로 아버지를 잃었던 탓일까? 게랭의 연구는 결핵에 집중되어 1906년 혈액 속에 결핵균이 있다면 면역을 얻는다는 사실을, 1908년에는 쓸개물(담즙)로 결핵균을 배양하면 독성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독성을 없앤 약한 결핵균을 미리 몸속에 주사해 결핵을 예방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은 1908년부터 의기투합하여 결핵 연구를 함께 했다. 세계 각처에서 말라리아, 수면병, 펠라그라, 흑사병, 우두, 광견병 등을 연구했던 풍부한 임상 경험을 가진 감염병 전문가인 깔메트와 백신 과학자이자 결핵 면역성 연구를 해온 게랭, 이 두 사람의 만남이 결핵 역사의 새 장을 열게 할 줄 그들은 그때 알았을까?
깔메트와 게랭은 사람의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을 대신해 소의 결핵균(Mycobacterium bovis)을 이용해 사람 결핵을 예방하는 백신을 만들기로 했다. 소 결핵균에 대한 면역은 사람 결핵균에게도 유효한, 일종의 교차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소 결핵균의 독성을 약하게 만드는 배양이 시작되었다. 1914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화는 연구소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군이 연구소에 난입해 연구에 쓰는 소를 끌고 가고, 연구를 수상히 여겨 깔메트를 끌고 가 총살시킬 뻔도 했다.
1921년 마침내 13년 노력이 성공하여 독성을 완전히 없앤 소 결핵균이 배양되었다. 이제 사람 결핵 예방을 위한 접종 주사제의 원료가 될 이 변종균은 Mycobacterium bovis bacille Calmette-Guérin 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것을 줄여서 BCG 라 부른다. 엄밀하게 말하면 BCG는 깔메트와 게랭이 실험실에서 창조한 ‘변종’ 소 결핵균이므로 불주사의 정확한 이름은 ‘BCG 백신’이다.
우리나라에서 BCG 백신은 6.25전쟁 중에 도입되었고, 결핵 왕국이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떼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국가에서는 생후 1개월 이내에 맞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현재 접종률은 98.2%에 이른다.
하지만 미국 등을 포함한 일부 선진국들은 BCG 접종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BCG 백신을 맞은 우리 국민은 결핵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이므로 결핵 감염 의심자로 몰리는 것이다.
아울러 결핵에 걸린 환자들이라 해도 어릴 때 BCG 백신을 맞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는 BCG 백신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어린이 결핵을 예방하려 나온 예방 접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CG 백신을 맞았다고 해서 평생 예방되는 것은 아니다.
BCG 백신은 생후에 한 번 맞는데,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에게 불주사로 한 번 더 맞혔다. 아마도 결핵이 만연했던 현실 때문에 만든 고육지책이라 추정된다. 하지만 추가 접종이 성인 결핵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어 지금은 ‘6학년 불주사’를 맞히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