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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240707맥추감사주일 (살전5:18)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으면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살던 부부가 의견 충돌로 사사건건 다투다가 급기야는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반씩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반씩 나누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땅도 반씩 나누었고, 집도 팔아서 반씩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녀가 11명이었습니다. 서로 많은 자녀를 맡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도저히 타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마을에서 존경받는 랍비를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 더 낳을 때까지 살아라!” 두 사람은 랍비의 말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리, 아이를 만들어 이혼을 하자.”라고 말한 후,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아이를 낳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부부는 즉시 ‘이혼하지 말고 함께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이 선명하게 알아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몰라 당황할 때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몰라 답답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기도도 해보고 상담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정 기도하지 않아도, 믿음의 선배들에게 상담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도저히 모를 때 있잖아요? 그럴 때도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뭘 하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어떻게 하든지...어떤 결정을 하든지.... 감사해야하는 것만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분명한 것부터 하면 됩니다. 분명한 것이 뭐예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뭐예요? 감사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1. 다 잃어도 믿음과 감사는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시대는 <남녀칠세부동석>이였잖아요. 그래서 ㄱ자 예배당이 생기고, 아니면 예배당 한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강대상은 가운데 두고 한편에는 남자, 한편에는 여자를 앉게 해서 서로 눈짓도 하지 못한 채 예배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교회에서 예배하는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예배당 마루바닥에 쳐놓았던 휘장을 걷어내고 남반과 여반으로 나누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름에는 해가 드는 곳에 남자들이 앉고 음지에 여자들이 앉았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반대로 양지에 여자가 앉고 음지에 남자가 앉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이쪽 절반은 남자들이 앉았고, 저쪽 절반은 여자들이 앉았었습니다.
또 한 선교초기에는 교회마다 풍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시대가 조금 좋아지니까 피아노를 놓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이 한때는 예배당에 피아노를 들여놓을 것인가? 아니면 전처럼 풍금으로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에서 피아노를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예배에 피아노를 도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하자 다른 교회들도 피아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마루바닥에 앉아서 예배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감리교회가 제일 먼저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자 정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반발하였습니다. “무릎을 꿇고서 예배를 드려야지, 어떻게 불경스럽게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그러나 10년쯤 지나자 그들도 예배당에 의자를 설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의 치마와 남자들의 신사복이 구겨지기 때문에 의자가 있는 교회를 사람들이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의자를 들여놓고서 예배드리는 것을 공식화 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90년대부터 저녁예배가 점점 없어지고, 오후찬양예배로 바뀌기 시작 했습니다. 이때도 많은 교회들이 어떻게 저녁예배를 안 드리고 오후예배를 드리느냐고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가 되어서 수요예배가 없어지기 시작하고 셀 예배나 가정예배로 대체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수요예배가 없어지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AI시대라 이미 독일에서는 AI 목사가 시범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도 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는 내 대신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한 AI 가 대신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날이 오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옛날 양반이 노비에게 운동도 대신 하게 했던 것처럼....)
많은 분들이 2000년대가 들어서면서 기독교 4대절기 중에서 제일먼저 사라질 절기가 맥추감사절이라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맥추감사절을 드리지 않는 교회도 생겨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고 삶의 모습들이 바뀌어 가더라도 절대로 바뀌거나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서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큰일 납니다.
인간에게서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모습으로 인간이 변할까요? 어떤 모습일까요?
여러분! 감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는 뭐라고 욕합니까?
“짐승만도 못한 인간” 또는 “저것이 짐승이지 사람이냐?”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되어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움만 할 것입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가 사라지고...불평과 원망만 있는 세상이 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할까요?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는 사람의 마음은 지옥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으로 인한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물을 주셔서 그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졌어도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불행한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갖지 못해서도 이 은혜를 받았다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믿음과 감사입니다. 재물을 다 잃는다 해도, 건강을 다 잃는다 해도, 믿음과 감사는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귀로부터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과 감사입니다.
2.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좋은 일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든 일도 만나고 때로는 억울한 일도 만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만난 어떤 문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일만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두 친구가 나란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길가에는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새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들판에는 소와 양들이 풀을 한가하게 뜯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정말 아름답다.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시다. 벌레 하나도 하나님이 세밀하게 창조하셨지. 생각해 봐! 저기 소도 처음에는 작은 송아지였지. 저 새들도 알속에서 나왔지.” 같이 걷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이해하지 못 할 것이 하나 있어.”,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소는 몸집이 크니까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해. 새는 몸집이 작으니까 조금만 먹어도 돼. 그런데 새에게는 하나님이 날개를 주셔서 온 천지를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 먹게 하시고, 소에게는 왜 날개를 안 주셔서 주변에 있는 것만 먹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상해.” 그 때 새 한 마리가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면서 똥을 쌌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 새똥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크게 깨닫고 말했습니다. “아!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 감사하다.” 그리고 똥을 닦았습니다. 만일 소가 날아다니며 똥을 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에게 날개가 없는 것도 감사거리입니다. 소가 날아다니다가 자동차 위에라도 내려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 박살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소가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철이 되면 소 주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소를 하루씩 빌려주어 수월하게 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농사짓는 집에서는 그 집에서 소를 배당하는 날 부지런히 논을 갈아야 했습니다.
그 마을에 믿음 생활을 잘하는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이분이 소를 배정받은 날이 하필이면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소 주인을 찾아가서 다른 집에 먼저 소를 빌려주고 그 집과 소 빌리는 날을 바꾸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하였습니다. 이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예배를 그만 두고 논을 갈 것인가? 아니면 예배를 드리고 금년 농사는 포기할 것인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농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 믿더니 돌았나봐.” 그분은 결국 소로 논을 갈지 못 하고 호미로 콩을 심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돌 수가 있는가?” “예수를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지 저렇게 극단적으로 믿으면 되겠어..완전히 미쳤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논의 모가 말라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농부들은 발을 동동 굴렀지만 끝내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논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습니다. 그 해 논농사는 모두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콩 농사는 풍작을 이루었습니다. 이 걸 본 동네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고백하며 많은 이들이 교회로 돌아 왔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3. 만사에 해석을 잘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욥은 모든 재산과 열 자녀를 잃고 난 후에 욥1:21절에서 욥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신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에게 당한 고난에 대하여 해석을 잘 한 것입니다. 해석을 잘하니까 이런 상황을 만났어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한 쪽 다리가 부러졌으면 두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십시오. 두 다리가 부러졌으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십시오. 목이 부러졌으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음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하는데...그러려면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감사거리를 찾아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주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남보다 많이 가지지 못해서 불만을 갖습니다. 해석을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날 공주병에 걸린 할머니가 길을 가는데, 웬 청년이 생선 트럭을 타고 따라오며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설마 내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계속 걸어가는데, 잘 생긴 청년이 계속 “같이 가 처녀!”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를 처녀라고 부르다니, 더 자세히 들어봐야지’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주머니에 들어있던 보청기를 꺼내 귀에 꽂자 매우 뚜렷하게 들렸습니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이 유머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듣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보다 가난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를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캄보디아 감리교신학교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그곳 선교사님이 말씀하는데.. 캄보디아 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엄청난 부자들입니다. 우리는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북한을 보세요... 신앙의 자유도 없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습니다. 굶어죽기 싫어서 몸을 파는 꽃제비들이 생겼고, 탈북자들이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합니다. 이 남한 땅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북한을 찬양합니까... 얼빠진 것이죠...배부르니까 할 일이 없는 거죠..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입니다.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세계에 3분의 1이 전기가 없이 산다는 것 아십니까? 세계에 3분의 1이 수돗물이 없습니다. 우물이 없어서 몇 십리 밖까지 물 길러 다니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가끔 T.V 화면으로 보잖아요... 먹을 것이 부족해서 한 끼 밖에 먹지 못 하는 사람이 8억이나 됩니다. 잠 잘 수 있는 집이 없고, 몸에 옷이 없고, 신발이 없는 사람이 세계에 3분의 1이랍니다.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돈이 없어서 단 한 번도 학교에 가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우리가 없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부요합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넘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갑에 현금을 갖고 조그마한 통장을 가진 사람들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8%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 여기계신 분들은 휴대폰을 다 들고 다닐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러는데... 어느 날 장모님이 그러시드래요...우리 집에서 “개하고 나만 휴대폰이 없다”고 해서 하나 사드렸답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부요하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정말 생각을 잘하고 해석을 잘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 다 잃어도 믿음과 감사는 잃어서는 안 됩니다.
2.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3. 만사에 해석을 잘 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