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앙드레말로 / 김봉구 / 지식을만드는지식
인간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다.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조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획일화할 수 있을까.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각자의 길을 간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사상이란 이름으로 떠 다른 이유로 각자의 길을 간다. 어떤 길도 잘못된 길이라고 바른길이라고 말할 수 없고, 양분할 수도 없다.
죽음 앞에서 행동이 온전히 그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없다. 어떻게 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로 영어 번역본의 제목은 Men's Fate인가 보다. 인간의 운명···.
당시의 사회주의(코뮤니즘)의 이해 정도에 따라 소설의 이해도가 달라질 것 같다.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스토리가 이 책 한 권에 들어있다. 다른 내용을 덧붙일 수 없는 이유다.
기요, 아버지 프랑스, 어머니 일본인, 청산가리
지조르 (기요의 아버지), 프랑스인, 일본
메이 (기요의 아내), 독일인, 일본, 러시아
첸, 중국인, 장장군 테러 실패
카토프, 러시아,
에멜리크, 코뮤니스트, 벨기에, 가족을 잃고 적극적
페랄, 프랑스, 자본가, 페랄재단
클라피크, 프랑스, 골동품 ,무기거래, 상파이 탈출
발레즈
기억나지 않는 등장인물들...
* * * * *
'암살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인다는 행위만은 아니다···.' 5
고통이란 그것이 금방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때만 어떤 의미를 가지는 법이야. 72
고통이란 죽음보다 삶을 생각케 하거든요. 아마 애를 낳는 진통을 연상케 하니까 그럴 테지···. 73
이어 메이는 '그 사람이 이만저만 졸라 대지 않았거든요'라고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바로 죽음을 앞에 둔 사람에게 그런 건 정말 대수로운 일이 아닌데···.'하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저 역시 내일 죽을 지 몰라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기요는 몹시 굴욕적인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런 고통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경멸해야 할 그러한 고통이었다. 77
내가 알고 있던 메이는 아냐. 나는 오직 내가 아는 정도밖에는 메이를 알지 못하며, 그것도 내가 메이를 사랑하는 방법 안에서만 알고 있는 것이다. 85
기요의 어머니가 죽은 뒤로는 메이만이 그를 '기요 지조르'라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 유일한 일심동체의 공모자였다. '완전히 동의를 얻고 정복하고 선택한 공모자',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어둠이 유달리 자신과 빈틈없이 조화되는 것처럼 느꼈다. 마치 그의 생각은 이미 밝은 빛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어 있다는 듯이.
'세상 사람들은 나의 동지가 아니다. 그들은 나를 주시하는 자들, 나를 판결하는 자들이다. 내 동지는 나를 주시하지않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 있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비열한 짓을 하더라도, 또는 배반하더라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한 일을, 또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같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해 주는···. 나는 오직 메이와 함께 - 비록 그것이 상처뿐일지라도 그 사랑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병든 자식을 지키고 앉아 있는 부모들처럼···.'
그것은 결코 행복은 아니다. 그것은 어둠과 일치하는 점이 있는 원초적인 것이다. 그것이 그의 육체 속에 뜨거운 그 무엇을 불끈 치솟게 했다. 이 뜨거운 것은 언제나 뺨에 뺨을 대는, 움직이지 않는 포옹 속에서 끝나곤 했다. 오직 그것만이 자기 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그것만이 죽음에 견줄 만큼 강렬한 것이다. 87~88
사람을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이란 없는 법 101
그는 처음 첸을 보았을 때 이미 이 청년은 당장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써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자비심이 없는 첸은 명상이나 내면적 정신생활로서만 종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104
기요 역시 관념은 그저 사색만 할 것이 아니라 생활화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105
기요는 자기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일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루에 열두 시간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있을 수 없으며, 자기 생활도 사실상 없는 거나 다름없다'라고 그는 단정했다. 106
'이젠 어디를 가든지 내 마음속의 정적을 찾을 수 있다' 316
남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고통을 무릅쓰고라도 남의 입장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야. 328
당신이 저를 지배하려는 데서 어떤 고통이 제게 생겼더라도 당신은 그 고통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358
일본에서 교육받은 탓도 있겠지만 그는 늘 '자기'만의 '죽음', 즉 자기의 삶과 어울리게 죽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피동적인 것이지만 자살한다는 것은 행동이다. 그들 중의 누구를 데리러 오기만 하면 그때 그 맑은 정신으로 자살하리라. 502
그는 자기 시대에서 가장 강력한 의미와 가장 위대한 희망을 지닌 것을 위해 싸웠다. 그는 자기가 같이 살려고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죽으려는 것이며, 여기 누워 있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렇듯이 자기 인생의 어떤 의미를 주기 위해서 지금 죽어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음이라도 받아들일 만한 인생이 아니라면 대체 그런 인생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혼자 죽지만 않는다면 죽기도 쉬운 법이다. 동지애에 넘친 떨리는 속삭임 속에서 죽는 죽음, 지금은 패배자들이 모여 죽는 죽음···. 이 참담한 피투성이의 전설이 나중에 찬란한 황금의 전설로 변모할 것이다! 이미 죽음과 대면한 이 마당에 어찌 제물로 바친 인간의 이 속삭임이 들리지 않을 것인가. 죽음에 대한 인간의 용감한 마음이야말로 죽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영혼에 못지않은 피난처라고 그에게 외치는 그 속삭임을! 504
인간의 존엄을 위해 죽음을 선물하는 과정 511‐512
아무도 돕지 못하는 고통이란 어리석은 것이다. -지조르 516
그렇다 확실히 인간의 가치는 오로지 그들이 변혁해 놓은 것으로써만 결정되는 것이다. 550
메이, 기요가 죽은 뒤로는 죽는다는 것에 나는 무관심해졌다. 말하자면 나는 동시에 죽음과 삶에서 해방된-흠, 해방이라··-어쨌든 해방된 셈이야. 554
고통 위에 세워지지 않은 인간의 존엄성이란 있을 수 없어요. 556
공허 556
모든 것에서 해방되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서까지도 해방되어 그는 고마운 마음으로 자기 파이프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눈부신 햇빛 속에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저 모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개미 떼처럼 들끓는 그 사람들도 저마다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남모르게 치명적인 기생충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모두 미치광이다. 그러나 본시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이 광증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노력의 일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는 문득 상하이에서 안개가 자욱히 낀 밤에 '인간이란 모두 신이 되기를 꿈꾸는 거요···' 하는 자기 말에 귀 기울이고 듣던 페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앰프 불빛에 비친 그 모습을 558
그러나 그 낡은 중국조차도 기요의 인생의 의의가 지금 그 아버지의 얼굴에서 사라지듯이 그렇게 씻은 듯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조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랑하던 유일한 것을 빼앗겼다. 그래도 너는 내가 예전의 나대로 변치 않기를 바라는구나. 내 사랑이 네 사랑만 못하다고 생각하느냐? 네 생활이 변하지 않을 정도의 네 사랑보다 말이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육체가 변하지 않듯요···."
지조르는 메이의 손을 쥐면서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하다'라는 말을. 우리는 그걸 서로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다.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의 긴 세월이 필요한거다. 60년간의 갖가지 희생과 의지와 그 밖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가.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나가 버리고 정말로 그가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는 거란다."
메이는 절망한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도 알 테지만 나는 정말 기요를 사랑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랐어···."
그는 여전히 메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그 손을 끌어당기며 자기의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메이, 내 말을 잘 들어라.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사랑해야 돼.
"전 사람을 사랑하려고 모스크바로 가는 건 아녜요."
그는 햇볕이 구석구석 내리쬐는 황홀한 항만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는 자기 손을 빼냈다.
“메이, 복수의 길에서 생활과 마주치는 일도 있는 법이란다・・・ . "
"그렇다고 일부러 이쪽에서 생활을 불러들일 생각은 없어요."
메이는 일어났다. 작별의 뜻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지조르는 두 손으로 메이의 두 뺨을 잡고 키스했다. 기요도 마지막 날 이렇게, 바로 이런 식으로 키스를 했던 것이다. 그 후 어느 누구의 손도 메이의 얼굴에 닿은 적이 없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울지 않아요."
메이는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나 쓸쓸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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