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다윗의 시밀레 》
시 19:1~14
〈 우리도 시를 써봅시다! 〉
목사로서 시편을 설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시편에 실린 150편의 시는 감히 사람이 흉내내지 못할 빼어난 시들입니다.
시편을 설교하면서,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깊이 묵상합니다.
시편 설교를 하고 시편 설교를 듣는 우리 모두 시인이 됩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함께 시인이 되어 시를 써보고자 합니다.
제가 운을 하나 띄우겠습니다. 오늘의 운(韻)은 태양, 해입니다.
해를 떠올리십시오, 여러분이 해를 떠올리시고, 한 문장으로 해를 표현해 보는 겁니다.
시인 박두진은 ‘해’라는 시를 발표했습니다.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여러분은 해를 어떻게 표현해내시겠습니까?
(5절)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대목에서 ‘뿅’ 갔습니다.
시인 다윗은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해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이런 표현이 있다는 사실! 놀랍잖습니까?
초례청에서 혼례를 치릅니다. 그날 밤,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달아먹습니다.
그리고 신랑 신부, 초야를 치릅니다.
첫날밤,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아침이 밝았습니다. 신방에서 나오는 새신랑의 얼굴을 떠 올려보십시오!
새신랑, 첫날밤을 보내고 비로소 한 남자로서 완성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가정의 가장입니다.
부모님께는 ‘아들’에서 ‘아범’이 되고, 장인 장모에게는 ‘백년 손님’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씨암탉의 주인이 되었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대장부가 되었습니다.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 한 남자의 완성체입니다.
시편 19편을 쓴 시인은 그 신랑을 해에게 비유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해를 이보다 더 적절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감히 말합니다.
☞ 시편이 그저 시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문장입니다. 할렐루야~
〈 시밀레(simile)? 〉
시편을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시편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복중의 복입니다!
☞ 오늘 설교 제목도 저지난 주처럼 독특하지요?
2주전, 2월 16일 주일 설교는 시편 18편을 본문으로, 제목이 “하나님의 메타포”였습니다.
‘메타포 metaphor’는 비유법에서 ‘은유’입니다.
우리가 문장을 쓸 때, 흔히 ‘A는 B이다’ 혹은 ‘A는 B와 같다’라는 비유법을 씁니다.
이 비유는 문학에서 혹은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지난 주에 소설가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를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청준은 이 작품에서 ‘인간은 날개 깃털이 잘린 새다’라고 메타포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소설 전체에서, 마음껏 날아오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깃털 잘린 새로 은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은유법, 메타포의 원조가 누구냐라고 질문했었습니다.
‘메타포의 원조’ 누구입니까? ~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에서 메타포를 사용하십니다.
에덴동산에 생명과,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생명과는 하나님께 순종, 선악과는 하나님 거역을 상징합니다.
생명과는 생명, 선악과는 죽음 / 생명과는 선, 선악과는 악 /
하나님이 이렇게 창조하시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타포이다’ 그래서 그 설교의 제목이 “하나님의 메타포”였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에서 메타포를 쓰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도 메타포를 씁니다.
시편 18편을 “하나님의 메타포”로 설교한 데 이어, 시편 19편은 “다윗의 시밀레”입니다.
시밀레(simile)는 직유를 뜻하는 영어단어입니다.
은유는 메타포, 직유는 시밀레입니다. 시밀레는 음악기호이기도 합니다.
악보에 시밀레 표시(simile, sim.)가 있으면 ‘앞 부분과 같게 연주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19장에는 직유법이 도드라집니다. 5절을 다시 봅니다.
(5절)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 해는 달리기를 기뻐하는 장사와 같다!
왜 여기서 은유를 쓰지 않고, 직유를 썼을까요? ~ 시인 다윗이 여기서 겸손을 보여줍니다.
해는 보는 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비유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둡니다.
☞ 직유의 매력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해를 표현해 보라고, 은유가 아닌 직유를 씁니다.
〈 시밀레의 겸양, 메타포의 선언 〉
시밀레와 메타포 사이에는 바로 이 차이점이 있습니다.
시밀레는 자기의 것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표현에도 존중을 표합니다.
다윗은 동편에 떠오르는 해를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바라 본 해입니다.
시인이 아닌 다른 사람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해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메타포는 다릅니다.
‘내가 이렇게 메타포하니, 당신도 꼭 이렇게 받아주십시오!’라는 강한어조입니다.
시편 19편에는 시밀레가 있지만, 메타포도 있습니다. 함께 찾아볼까요?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 시밀레입니까, 메타포입니까? 메타포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과 같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속자와 같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속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반석이고, 하나님은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달리 해석하면 안 된다고 시인은 ‘메타포’로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과 같고’ 어떤 사람에게는 ‘반석이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반석이시고, 구속자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선포할 때는 시밀레보다는 메타포가 적격입니다.
그러나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을 표현할 때는 메타포 아닌 시밀레가 적격입니다.
다윗이 해를 보고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다’ 했는데, 이것은 진리까지는 아니지요!
해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는 시밀레가 아닌, 메타포로 해야합니다.
14절의 메타포 다음에 어떤 구절이 이어집니까?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 이 구절이 너무 은혜스러워, 복음성가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예배전 부른 ccm입니다!
〈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
시편 19편은 이처럼 문학성이 빼어난 시입니다.
시편 19편을 누가 가장 좋아했을까요? ‘나니아 연대기’를 쓴 C.S 루이스입니다.
C.S 루이스는 19편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을까요?
“시편 중 가장 위대한 시로 간주하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서사시로 간주한다”
여기서, 루이스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9편은 시편 중 가장 위대한 시다’
‘시편 19편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서사시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메타포로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간주한다’는 표현은 메타포가 아니라 시밀레입니다.
루이스가 왜 메타포로 하지 않고 시밀레로 했을까요?
자기가 보기에는 시편 19편에 최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다를 수 있거든요!
이런 경우에는 메타포 말고 시밀레로 해야 합니다.
루이스는 시편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5세기의 신학자 어거스틴, 그는 시편 중에서 32편을 최고로 쳤습니다.
루이스는 어거스틴이 32편을 최고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또 시편 중에서 수많은 이들이 최고로 꼽은 시편은 23편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러니 ‘19편이 최고다’ 이렇게 하지 않고, ‘나는 19편을 최고로 간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명약이 되어 다가갑니다.
힘들어 하는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은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문제로 아파합니다.
마치 종합병원을 찾는 각양각색의 환자들이 해당하는 진료과목을 찾아가야 함과 같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19편으로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은혜받은 구절은 13절입니다.
(13절)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제가 요즘 페이스북에 현 시국과 관련한 저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고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므로 윤석열 대통령은 그 책임을 분명히 져야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신입니다. 이 소신은 탄핵찬성으로 드러납니다. 탄핵반대자들과 대립합니다.
☞ 자기의 소신을 드러내되 죄를 짓지 말라, 그리고 메타포아닌, 시밀레로 해라!
〈 꿀과 송이꿀 〉
우리가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을 선포할 때는 메타포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메타포입니다.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시밀레로 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은 틀릴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당장 다른 사람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로, 내 생각과 내 견해를 드러낼 때는 시밀레로 해야합니다.
“진리는 메타포로, 진심은 시밀레로!”
그런데 진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다보면, 시밀레를 넘어 메타포로 갈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십중팔구 죄가 묻어 따라갑니다.
지금 한국,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로 극렬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탄핵 찬성, 탄핵 반대, 이것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절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중에 저는 “계엄은 잘못이니 그에 응당하는 책임을 져라!”
이렇게 강조하다보면, 제가 죄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저의 심정을 때린 구절은 13절입니다.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19편을 쓴 다윗,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다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메타로로 선언할 것인지, 시밀레로 선언할 것인지 매우 잘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위대한지 잘 압니다.
(10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손에 성경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성경 말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이렇게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 아무나 접합니까?
☞ 성경책은 누구나 구입할 수 있지만, 그 말씀을 송이꿀보다 달게 맛보는 이는 드뭅니다!
〈 하나님만을 높여야 〉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시인 다윗이 이 진리를 표현할 때는 시밀레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메타포로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꿀과 같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은 송이꿀이다”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지요?
하나님의 말씀의 달콤함, 말씀의 힘과 능력은 이 땅의 그 무엇으로도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시편 19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이 기록되고 1천 년이 흘렀습니다.
신약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을 해설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 말씀을 예리하게 직설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히 4:12을 읽으면 소름이 오싹 돋습니다.
세상의 어떤 책의 내용이 이렇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까?’
이렇게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윗은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구약의 시편과 신약 히브리서가 예리하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이 대응은 서로의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19편에 대한 결론을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했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이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사람의 생각, 사람의 뜻을 판단합니다.
그런데 간혹 이 진리를 사람의 행동에 적용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떤 한 사람을 지나치게 높인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우상화입니다. 우리는 절대 사람을 높이면 안 됩니다.
공경은 하되, 사람 이상으로 높이는 것은 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면류관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