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주의자의 죽음 2
나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죽음이란 없고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를 나의 철학적 명제, 즉, ‘우리 인간들은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고 바꾸어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는 애써 죽음과의 연관성을 부정한 말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철학적 명제는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없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죽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옹호이며, 삶의 완성으로써의 예술적인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없이 지루한 것, 어떠한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허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근거가 텅 빈 ‘無’라는 것,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말한다.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것은 死後에나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는 그의 예술적인 죽음과 그 사상(예술)을 토대로 하여, 언제나 늘 푸르고 새롭게 자라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들의 인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예수의 부활처럼 어리석고 우매하기 짝이 없는 모조품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 살고, 두 번 죽고, 그리고, 또다시 영원히 살아가겠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예술의 무대에서 그 아름다운 퇴장을 모르는 삼류 배우의 그것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는 낙천주의의 죽음을 배우게 된다면, 우리 인간들의 질병인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가 하나의 이적처럼, 그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설명해 본다면,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기쁘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목표가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고, 그것은 성공과 실패를 초월해 있다. 우리들의 인생은 회의되거나 부정되기 이전에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소멸을 뜻하고, 이 세상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삶을 살고, 너희들의 죽음을 죽으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 그 예술적인 죽음을 너희들은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사색인의 십계명」 중, 그 네 번째 계명이, 그대들에게 그 ‘예술적인 죽음’을 설명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