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 일대를 부르는 명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북촌과 대비되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청계천이 범람하면서 도심부가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천변에 거대한 판자촌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준설이 중단됨에 따라 하천에 퇴적물이 계속 쌓이면서 바닥이 높아져 하천 바닥에 판잣집의 기반이 되는 기둥을 박는 것이 쉬워졌기 때문이다.[14]
지금의 종각 ~ 을지로4가 일대에 해당한다.
지금의 청계7가 ~ 다산교에 해당한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81-3번지에 위치했었으며, 화재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같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의 종합기술 용역업체로, 1965년 5월 건설부 산하 국영기업인 한국종합기술공사로 창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32]
참조주
“서울市高架道路建設計劃”. 건설부. 1967.
김종립 (2013년 8월). “청계고가도로 건설을 통해 본 1960년대 후반 서울의 도시 개발”: 7.
서울특별시공고 제673호 노선인정변경폐지에관한공고 (1984년 11월 16일)
한보경 (2003년 8월 1일). “서울 삼일고가도로 내일 철거”. 《KBS 뉴스 7》. 한국방송공사. 2022년 3월 5일에 확인함.
김인철 (2006년 4월 4일). “삼일고가도 8일 `역사 속으로'”. 《한국경제신문》. 2022년 3월 5일에 확인함.
손정목 (2002년 10월). “기획연재 : 도시 50년사 ⑧ ; 청계천 복개공사와 고가도로 건설”. 《도시문제》 (대한지방행정공제회) 37권 (407호): 99-100.
염복규 (2015). “청계천 복개와‘1960년대적 공간’의 탄생”.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13호): 120-121.
조선총독부 경기도 고시 제32호 (1936년 3월 30일)
“淸溪川에 高架鐵道案 交通完璧과 都市美觀上 最良利用法 府當局은 此의 實現에 邁進 大京城建設前奏曲” (제9816호). 매일신보. 1935년 1월 17일. 3면. ...부 당국에서는 一군 八면이 편입되는 ᄯᅢ에는 대도시의 경성부로써는 전차와 자동차와 ᄲᅥ쓰만으로는 부민의 교통 기관의 완벽을 기할 수 업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이ᄯᅢ에는 지하철도나 고가선 철도가 반다시 필요케 될 것이다 부에서는 청게천을 고가선 철도 시설구역으로 하는 동시에 매몰 공사를 겸하야 시가지의 도로로 개편할 의향을 가지고 잇서 멀지 안은 장래에 조선철도국에 제의하야 구체적으로 협의를 하고 실현에 매진할 참이라고 한다
전우용 (2001). 《청계천과 천변: 공간과"
https://ko.wikipedia.org/wiki/%EC%B2%AD%EA%B3%84%EA%B3%A0%EA%B0%80%EB%8F%84%EB%A1%9C#:~:text=%EC%9D%B4%EB%82%A8%20%EC%9D%BC%EB%8C%80%EB%A5%BC%20%EB%B6%80%EB%A5%B4%EB%8A%94,%EC%B2%AD%EA%B3%84%EC%B2%9C%EA%B3%BC%20%EC%B2%9C%EB%B3%80%3A%20%EA%B3%B5%EA%B0%84%EA%B3%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