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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을 말씀하시면서 먼저 팔복을 가르치신 다음으로 가장 먼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모여든 무리들에게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소금’과 ‘빛’, 두 비유는 마치 쌍둥이처럼 동시에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믿는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향해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성도들이 세상을 향한 소금과 빛으로서의 책임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빛’이라 하면 세 가지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햇빛, 달빛, 별빛’과 같은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보며 그 빛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어두움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나 합니다. 두 번째 인공적인 빛이 있습니다. 촛불이나 등잔불은 물론 전기불이 있습니다. 요즘은 레이즈와 같은 여러 가지 빛이 있습니다. 인공적인 빛으로 밤을 낮처럼 밝히며 불편 없이 활동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 번째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만 빛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의 의미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어쩌다 캄캄한데서 불빛 하나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도 반갑고, 빛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누구라도 빛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흑암이 임하는 사흘 동안 애굽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빛이 전혀 없었습니다. 낮이 밤 보다 더 캄캄했습니다. 얼마나 어두웠든지 손으로 더듬을 만한 흑암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곧 무지와 무능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손 치더라도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두움은 혼돈입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헬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며 대낮에도 등불을 켜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종교적인 어두움은 미신이요 우상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우니까 토정비결에서부터 사주, 궁합, 신수 등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에 빠집니다. 심지어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여부를 점쟁이에게 많은 복채를 주고 물어 본다고 합니다. 사업을 하기 위해서 점쟁이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이화여대 앞에 점쟁이가 많답니다. 지식이 있어도 영적 어둠에 빠지면 무지와 혼돈에 빠집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점쟁이를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빛이 되어야 할 사람이 빛이 되기보다는 어둠에 빠져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마음의 빛, 영적인 빛이 없고서는 지혜도, 능력도, 돈도, 힘도, 지식 그 모두가 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빛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금은 자체에서 짠 맛을 내지만 빛은 스스로 빛을 내지를 못합니다. 달빛은 아름답고 밝습니다. 그러나 달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반사합니다. 밤하늘에 빤짝이는 별들이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반사합니다. 달이나 별들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지만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밝은 빛을 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스스로가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빛의 근원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빛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빛이라’고 하신 빛은 원어로 ‘그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한 빛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빛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빛이 없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세상은 온통 어두움으로 가득찼습니다. 미신과 우상 숭배로 충만하였으며, 문화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어둠은 차츰 사라지고 빛으로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밝아지고 인간 역사가 밝아졌습니다. 미신이 물러가고 자연과학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직도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나라들은 영적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미신과 우상 숭배에 매여 어둠속에 살고 있습니다.
미신은 인간을 무지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미신에 매여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일찍 바가지를 들고 집집마다 가서 찰밥을 한 숟가락씩 얻어서 마을 한 쪽에 디딜방아 머리에 걸쳐 앉아서 얻은 밥을 먹었습니다. 그래야 한 해를 병도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살 수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고 보니 그 모든 것들이 영적 무지에서 했던 참으로 어리석은 미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빛’은 자기가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 되신 예수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빛을 받느냐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밝은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달도 햇빛을 정면으로 받을 때는 밝은 보름달이 되지만 햇빛을 비스듬히 받으면 초생달이나 그믐달처럼 아주 작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햇빛을 아주 받지 못하면 달은 빛을 비추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과의 관계에 따라서 빛의 밝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맞대듯이 예수님과 정면으로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그 생활 전체가 밝고 빛이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관계가 멀어질수록 생활이 어둠으로 덮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좋으면 좋을수록 보름달처럼 그 생활이 밝게 살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는 예배와 섬김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성도는 그의 얼굴에 빛이 나고 생활이 밝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섬김이 없으면 영적 어둠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수 믿는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수심이 있고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봅니다. 예배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 빛을 비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둥 마는 둥 하면 빛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치면 어둠은 곧 바로 사라집니다. 성도가 세상의 빛이 되면 어둡던 세상은 곧 바로 밝아집니다. 마치 산 위에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는 것처럼 빛이 된 성도는 숨길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무엇을 하면 노출이 잘 됩니다. 당장 소문이 납니다. 밝은 빛 가운데 있다 보니 작은 일이라도 숨김없이 드러나고 맙니다. 잘못하는 것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 등불을 커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해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이란 곡식의 량을 헤아리기 위한 그릇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서 ‘말’ 아래다 두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구를 높이 달듯이 등불은 높이 등경 위에 두어서 밝히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마가복음 4:21에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 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고 했습니다. ‘평상’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요즘 말로 ‘평상’은 침대입니다.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등경 위에 둡니다. 그와 같이 너희가 빛이 되어서 높이 들려져서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필이면 ‘말’과 ‘평상’이라고 말씀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말’과 ‘평상’을 말씀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말’은 물건을 사고 팔 때 량과 부피를 재고 가격을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울 추를 속이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신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있습니다. ‘빛’을 ‘말’ 아래 숨긴다는 것은 저울 추를 속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을 등경 위에 두워 많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치게 하라는 말씀은 정직한 삶을 살아라는 말씀입니다. 불의의 소득은 빛을 가리웁니다. 잠언16:8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득을 앞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쌀이나 보리쌀을 살 때 이웃집에서 샀습니다. 그때 어느 집사님 집에서 쌀 한 되를 사면 불신자보다 되를 좋게 줍니다. 따지고 보면 한 줌 정도를 더 주는 것이지만 그때 그분을 보면서 예수 믿는 집사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분의 이름도 성도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집사로서 작은 빛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분이 생각이 납니다.
다음으로 ‘평상 아래’란 말씀입니다. 평상은 잠을 자는 침대로 쉬는 것이요 안일주의를 뜻합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해야 되겠는데 자꾸만 쉬고 싶고 매사를 쉽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의 의미합니다. 요즘 말하면 한탕주의 입니다. 교회 일도 땀 흘리며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쉽게만 하겠다는 것은 빛을 평상 아래 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라면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는 때로는 크나큰 희생을 치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안일주의에 빠지면 빛을 가리우게 됩니다. 빛이 된다는 것은 희생입니다. 촛불은 초가 녹아지면서 빛을 냅니다.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습니다. 희생이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을 비교해 봅시다. 소금은 녹아 없어지므로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 합니다. 실체가 녹아서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고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내적이고 빛은 외적입니다. 빛은 위에서 아래로 비춥니다. 소금은 개인적이라면 빛은 사회적입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똑같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이는 곧 예수 믿는 사람의 사명이 개인적이면서 사회적이라야 합니다. 성도의 사명이 그만큼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의 사람 앞에서 감히 불의한 일은 할 수 없어야 합니다. 밝은 빛은 어두움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짙기 때문에 빛이 약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밝습니다. 어둠이 설 자리가 없게 하는 것이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이 설 자리가 없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빛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이 빛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로서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이나 빛의 공통점은 말이 없습니다. 소금은 소리를 내지 않고 아주 조용히 녹아 없어지고, 빛도 소리 없이 계속 타오르며 비춥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말이 없어야 합니다. 무엇을 한답시고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고 묵묵히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떠들고 소리치지 않아도 자연히 다 알려지게 됩니다. 산위에 등불이 많은 사람들에게 비쳐지듯이 절대로 숨기어지지 않습니다. 뒤늦게 알려졌을 때 그것이 더 아름다운 빛이 됩니다. 말없이 베푼 선행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빛처럼 말없이 행함이 진정한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으며, 빛과 사귀는 가운데 충분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선행을 베풀고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신용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빛이 되어 어둠을 몰아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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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