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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간 화요일. - 내가 흔들릴 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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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가 흔들릴 때
어제 야고보서는 시련과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두 공통점은 그것들이 우리를 흔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이 외부의 무엇이 나를 흔드는 것이라면
유혹은 유혹자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내부의 무엇,
곧 욕망이 있기에 유혹자가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술을 싫어하면 술친구가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유혹을 받지 않지요.
배가 이미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유혹이 되지 않고요.
물론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고
아담과 하와도 뱀이라는 유혹자가 과일을 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또 봤더라도 과일이 탐스럽지 않았다면 따먹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욕구가 아예 없었으면
욕망이나 욕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유혹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유혹을 받을 때 남탓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어쨋거나 우리 인간은 시련과 시험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욕망 때문에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이고,
저도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미풍에도 흔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도 아침에 일어나니 마음이 불안해지며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체가 모셔져있지 않지만 기도방에 들어가
저의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께 그대로 열어보여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주신다는 느낌이 들고,
저도 주님을 꽉붙잡고 매달리게 되었고
그래서 기도방을 나올 때는 주님과 제가 더 단단하게 하나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흔들리면 더 꽉 붙잡게 되지요.
나무에 올랐는데 밑에서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 오히려 더 꽉 붙잡잖아요?
시험과 시험이 나의 믿음을 흔들 때,
악마가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하여 나의 마음을 흔들 때,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풍랑을 보다 물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주님만 보고
주님을 더 꽉 붙잡아야 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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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일까?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그렇습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당신만이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한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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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의 누룩을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하고 자녀가 되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들은 선해 보이지만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엄격함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다. 온순함이 선물입니다. 선함, 너그러움, 용서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사고방식, 행태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나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사이, 헤로데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오늘 한 발 주님께로 다가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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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가 서로 엇갈려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 근처 평원에서 두 차례나 빵의 기적 사건을 겪은 후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서 급히 서둘러서 호수를 건너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은 빵의 기적 사건에서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주고는 정작 자신들이 먹을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처 빵을 챙겨오지 못한 형편을 짐짓 모르시는 척 느닷없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하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정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굶주릴 뻔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면서도 사실 더 관심을 두셨던 것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 기적의 뜻을 깨닫는 것이었는데,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깨닫기를 바라셨던 스승과 여전히 마음이 열리지 못한 제자들 사이에 평행선 같은 문답이 오고 갔습니다.
제자들은 빵의 기적에서 늘어난 빵과 배불리 먹게 된 군중의 열광적 반응만이 아니라, 먹고도 남은 빵 조각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리고 하필 그 광주리와 바구니의 숫자는 왜 열둘과 일곱이었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8) 하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전 것이지요.
제자들이 사도가 된 후에 그들의 제자가 되어 배운 교부들은 이를 이렇게 풀이해 주었습니다. 5천 명도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에서 남은 빵 조각들이 제자들의 수효와 같은 열두 광주리였던 것은 군중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고 오직 제자들만 알 수 있었던 화두(話頭)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될 때에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이루어진 열두 지파 체제로 구성되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고 만 열두 지파 체제를 대신할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뜻을 알아들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열두 제자의 하나였던 이스카리옷 유다가 스승을 밀고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서 죽고 난 후, 나머지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우선 제일 먼저 마티아를 뽑아서 열두 사도 체제를 보강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예언자적인 표징으로 행하신 역사적인 선택을 계승하고자 했던 것입니다(사도 1,15-26).
하지만 열두 광주리는 이 보다 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빵의 기적은 열두 사도가 주춧돌이 된 교회에서 성체성사로 세상 끝 날까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바구니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내려주신 일곱 은사와 교회가 제정한 일곱 성사를 아울러 의미하는데, 이 은사들과 성사들이야말로 성체와 성혈처럼 영적인 빵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이 예수님 말씀을 풀이해 주었듯이,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공동체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그러므로 악의와 사악함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7-8). 실제로 헤로데의 누룩은 악의의 묵은 누룩이었고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사악함의 누룩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른 시대에 이집트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던 이스라엘 백성은 빵의 반죽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할 때에 미처 누룩을 발효시켜 반죽을 부풀게 할 여유가 없이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 ‘누룩 없는 빵’은 파스카 축제의 상징으로 남았고, 그래서 오늘날 미사에서도 면병에는 누룩을 넣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룩의 상태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은 빵의 기적 대신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 뵙고 있는데,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는 미사에서 정작 눈으로 보고 귀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성체와 성혈의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가 아니라,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거룩하게 변화될 신자들의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신비가 이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 하고 외치는 것이고, 이 환호에 화답하여 신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부활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유혹과 시련의 십자가는(야고 1,12) 인내와 믿음을 발휘해야 부활의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야고보 사도가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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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달력에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사람과 아무런 일정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일의 많고 적음으로는 행복도를 측정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저의 일정표는 늘 가득했습니다. 저의 일정을 우연히 본 사람들은 “이렇게 바빠서 어떻게 살 수 있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쁘면 좋은 거잖아요. 그만큼 저의 쓸모가 있다는 것이니까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 일정은 빈칸만 있습니다. 일정이 몇 개 되지 않아서 굳이 일정표를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 바빴으니 이제 조금 쉬라고 그러나 봐요. 이 시간 동안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쓰면서 바쁜 시간을 미리 준비해야지요.”
바쁘거나 한가하거나 상관없이 모두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 무조건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그 순간을 누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남자들끼리의 여행이라 아무도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에게 가서 빵을 구걸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빵이 없다는 걱정이 잘못된 이해를 가져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표징을 요구하며 불신앙을 표시하고, 헤로데 임금의 부도덕함을 눈감아주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함을 꾸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빵의 기적을 직접 본 제자들이 아닙니까? 따라서 예수님만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걱정해야 할 것은 주님 뜻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찾고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이 찾아와도 걱정 없이 지금 이 순간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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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힘든 진실은 우리는 ‘시간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라이더 캐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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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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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8년간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23년 전인 1999년 10월 1일입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 승용차에 짐을 실고 제가 살아야 할 본당으로 떠났습니다. 당시는 의정부교구가 분할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저의 첫 본당 주임신부 부임지는 경기도 파주의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본당신부가 되면서 보좌신부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당 마당의 잡초도 보이고, 성당 마당을 둘러싼 담벼락의 균열도 보이고, 칠이 벗겨진 성모상도 보이고, 비가 오면 누수가 있는 성당 한 모퉁이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지켜지는 본당의 재정 상황이 보였습니다.
‘주일헌금, 감사헌금, 교무금, 미사예물’은 본장 재정에서 수입에 해당합니다. 성당을 운영하기에는 부족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3년 생활하면서 한 번도 재정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습니다. 예전에 근처에서 군대생활을 했다는 분이 후원금을 주기도 했습니다. 성당 누수 때문에 걱정했을 때는 지역 본당에서 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여름 가뭄에는 교구 사회복지 단체에서 양수기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저 아이들하고 재미있게 놀고, 농사짓는 곳에 방문하고, 군인들 미사 오면 간식 장만해주고, 도시 성당하고 농산물 직거래하고 3년을 살았는데 아무 걱정 없었습니다. 오히려 혈압이 있었는데 3년 시간이 지나면서 혈압도 좋아졌습니다.
2019년 8월 21일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를 맡아서 뉴욕으로 왔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열심히 홍보를 해서 재정도 안정적이었습니다. 기분 좋게 살림살이도 장만하고, 직원들 복지활동도 하고, 힘차게 신문사의 닻을 올렸습니다. 2020년에 많은 행사를 기획하였습니다. 54명의 순례자와 함께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LA와 밴쿠버에 신문 홍보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버지니아에도 사순특강을 하기로 했습니다. 2월부터 5월까지 대략 잡아도 10곳을 방문하여 신문도 홍보하고, 강의도 하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코로나19는 미국에도 도착하였고, 신문사에서 기획했던 모든 일정이 취소되었습니다.
도시는 움직임이 멈추었습니다. 생필품 이외에 가게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당의 미사도 멈추었습니다. 넉넉하게 느껴졌던 재정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한들 해결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미국 정부에서는 개인들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였습니다. 신문사에도 재난지원금이 지급되었습니다. 한숨을 돌리니 이웃이 보였습니다. 함께 힘들어하던 신부님들이 보였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신부님들과 캠핑도 가고, 자전거도 타고, 등산도 하면서 친교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오미크론 때문에 겨우 재개되었던 신문의 홍보가 다시 중단되었지만 이제는 큰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저와 비슷한 심정이었습니다. 빵이 없다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열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때문에 걱정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을 수 있다면, 먼저 나눌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린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온갖 좋은 선물과 은사는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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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
- 천국天國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2일차-
강론쓰는 시간은 새벽 2시, 장소는 제주도 강정 마을 평화 센터 숙소 3층 구럼비 3번 방입니다. 참 오랜만에 수도원의 도반道伴 형제들과 단기간의 순례 여정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또한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방장 형제의 “오랜만에 움직인거죠?” 물음에 “예, 불암산이 움직였습니다.” 화답했습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제 정주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산같은 정주의 삶을 살다가 설레는 기쁨으로 떠남의 순례 여정에 오르니 새삼 죽음의 떠남이 연상되었습니다. ‘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지상 천국의 삶을 살아야 설레는 기쁨으로 하느님의 나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같은 설레는 기쁨의 선종을 맞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영감처럼 순간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지상 천국의 기쁨을 사는 것이 최상, 최고의 죽음 준비임을 깨닫습니다.
오랜만에 불암산을 떠나니 황당한 일에 잠시 시끄러웠습니다. 떠나기 전날 으레 있으려니 했던 지갑속에 주민등록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참 난감했습니다. 여권으로 대체 가능한가 찾아보니 이미 시효가 만료된지 2년이 지났습니다. 주민등록증도 필요없어 거의 잊고 지내다 보니 종적 묘연한 사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어 혹시나 몇분 지인들에게 전화를 해도 답이 못되어 공동체 형제들에게 공론화하고 저녁도 거른 채 또 주민등록증을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 주민등록증! 책상 서랍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잊었던 은전을 찾은 여자처럼 환호하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은총에 감사하여 즉시 분실을 알렸던 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전에 원장수사는 텔레그램으로 찍어 놨던 주민등록증 사본을 보냈고 이어 끝기도 끝난후에는 출력한 주민증 사본을 들고 왔고 저는 자상한 배려의 형제애에 감동했습니다. 잠시의 소동을 통해 공동체 형제들과 지인의 관심과 애정愛情을 확인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공항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일일이 주민증과 얼굴을 대조했습니다.
“세속에
살아도
마음은 높고 푸른
하늘이다”
제주도 비행중 신비로운 흰구름에 푸른 하늘을 보며 순간 떠오른 시입니다. 공항에 도착하니 수도원 피정을 2차례 해줬던 김근수 요셉 신학자님이 반가이 기다렸다 시종일관 제 여행짐을 운반해 주었습니다. 오후 일정 가이드는 태풍서귀의 저자인 강홍림 사도 형제가 기꺼이 함께 해 줬습니다.
“제주도 면적은 갈릴리의 90%입니다.”
제주도를 버림받았던 이방의 갈릴리에 빗댄 듯 했고, 갈릴리의 예수님처럼 제주도의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세속에 살아도 치열한 구도자와 수행자가 되어 예언자적 사명감에 성서에 관한 많은 주석을 출간하고 있는 참 경이驚異로운 평신도 신학자입니다. 저는 주저없이 형제님을 제주도의 수호성인守護聖人이라 격찬激讚했습니다.
삶에는 이면사裏面史가, ‘비하인드 스토리behind story’가 있는 법입니다. 이면사를 알고 보면 더욱 연민의 깊은 마음과 눈으로 바라보며 모두를 수용하게 됩니다. 제주도濟州島의 제주라는 뜻은 “건너에 있는 별볼일 없는 땅”이라는 것이며 보물섬으로 알았던 제주도가 옛날에는 중죄인들의 유배지 섬으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과 같았고, 제주목의 관아를 방문했을 때는 제주 목사는 그대로 오늘날의 교도소 소장과도 같아 죄수들을 관장하는 것이 주업무였다는 가이드 형제의 설명이었습니다.
이어신축교난에 이어 4.3 사건등, 그야말로 수난으로 점철된 땅이요 죄수들의 후손들도 많아 한 많은 사연들로 인해 주민들 안에 잠재해 있는 피해의식, 저항의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공부해야할 제주도의 역사요 이면사임을 절감했습니다. 이어 제주항에 들려 노래비 앞에서 “떠나가는 배”라는 가곡의 이면사도 들었고 시간되면 이 가곡을 배우겠다 생각했습니다.
민속박물관은 월요일 휴무로 관람은 좌절되었고 이어 이시돌 센타를 방문하여 제주도의 은인이자 수호성인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의 골룸반 외방선교회 출신의 임피제 신부(1928-2018)의 헌신적 노력과 헌신에 감격했습니다. 4년전 선종했다는 이 성인사제같은 분의 평전이 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부님의 고백도 한 눈에 들어왔고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이 땅에 첫 발을 딛으며 제 마음에 떠오른 예수님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글옆에는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습니다. 복음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이요 실제적입니다. 최후심판의 잣대는 바로 이런 작은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달렸다는 것이며 이 또한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을 두드리는 회개의 촉구 말씀입니다. 이어 제주 맥주 공장에 들려 소량의 독특한 색깔과 향기의 네 종류의 맥주도 시음했고 저녁 식사후 평화 센터에 오후 8시 귀가함으로 오후 한나절의 순례 여정을 알뜰히 끝냈습니다.
우리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자 더 구체적으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참으로 늘 강조하는 바 순례 여정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의 시점時點입니다. 제 경우는 하루로 하면 오후 4시, 일년사계로 하면 초겨울입니다. 이런 자각이 늘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을 떨쳐 버리고 본질적 깊이의 단순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인간을 눈멀게 하는 마음의 고질병이 늘 강조하는 바, 무지의 병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눈 먼 인간, 바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 정의입니다. 바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부단한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빛입니다. 깨달음을 통해 깨끗한 마음에 깨어 있는 정신이요, 늘 새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늘 복음도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의 죽비같은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새삼 청해야 할 바, 회개의 은총, 깨달음의 은총임을 절감합니다. “에파타!”. 참으로 열려야 하는 마음의 눈이요, 마음의 귀임을,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깨달음의 빛이요 깨달음을 통한 마음의 순수와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깨달음이 천상은총임을 야고보 사도가 통쾌하게 밝힙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것도,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것도 은총의 깨달음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문제를 해결함이 아니라 문제를 해소시키는 깨달음입니다. 몰라서 오해와 착각이지 깨달음을 통해 삶의 실상을 알면 저절로 문제는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제 강론도 빛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는 천상선물 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순례 여정중의 우리 모두를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낳으시고 ‘생명의 화관’을 앞당겨 씌워 주시어 오늘도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강론을 요약합니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시편94,12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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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말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무라실까 싶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두 번이나 일으키셨습니다(마르 6,30-44; 8,1-10 참조).
제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군중에게 그 빵을 나누어 주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에
먹을 빵이 없는 상황이 닥치자 다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오천 명을, 한 번은 사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분을 자기들 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교회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나라로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우리가 대개 염려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나 필요한 물품,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는 많은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그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의지하는
법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거센 풍랑에 배가 파선되지 않을까 염려하였고(마르 4,35-41 참조),
오늘은 배 안에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염려가 결국 불필요한 것이었듯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염려하는 많은 부분도 불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시고,
그분께서 험난한 항해의 여정 속에 늘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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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하신다.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던 누룩이란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사용하는 누룩은 바로 빵을 구울 때 다음에 빵을 굽기 위하여, 밀가루 반죽을 조금 떼어놓아 발효되게 한다. 즉 썩힌다. 이것을 또 빵을 구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썩는다는 의미에서 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즉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의미하지만, 복음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즉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그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그 체험을 통해서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 의지하여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그것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생각하며,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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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마르 8, 17)
조급하고 성급한
우리들 마음입니다.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기에 빵이 없다고
단정짓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내려놓고 빵이 되는
실천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빵은 여전히
우리의 생명으로
우리의 생활안에서
사랑으로 존재하십니다.
삶과 빵은
분리될 수 없듯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리가운데
오셨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생생한 삶이 있듯
살아계신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일상안에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빵이 계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있는 곳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도무지 믿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당신께서 친히
빵이 되심으로
진정한 삶의 기쁨을
보여주십니다.
빵이
진정한 사랑이고
빵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빵이 있는 곳에
빵이 되는 실천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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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 8,14-17)”
이 이야기를 기록된 순서대로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누룩이라는 말에서 빵을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는 것만 걱정하다가 혼나는 이야기입니다.
(순서를 바꿔서,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가르치신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누룩’은 ‘나쁜 영향력’을 상징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물질적인 복으로만 생각했고(루카 16,14-15),
‘물질적으로 부유한 사람’을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은, “가난은 하느님의 저주이고,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가난한 서민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현세의 부귀영화만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나쁜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걱정스러운 상황이니까 걱정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걱정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대하느냐,
또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느냐?”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주님께 떠넘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까지 전부 다 주님께 떠넘기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불성실’과 ‘게으름’이고,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에서, 제자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입니다.
(빵이 없다고 자기들끼리만 걱정하고 수군거린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음을 나타냅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8-21).”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또 바로 앞에 계신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기적을 잊어버렸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몇 명이나 먹였느냐?” 라고 묻지 않으시고, “빵이 얼마나
남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기적의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열두 광주리의 빵’과 ‘일곱 바구니의 빵’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몸의 배부름만 바라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여라.”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아마도 제자들도 군중의 그런 분위기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그때의 분위기와
들뜬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에
어느 정도 물든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생활이든지 신앙생활이든지 교회 운영에 관한 일이든지 간에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일들을 만나서 걱정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는 모습에 대해서
“그것은 예수님을 잊어버린 것이다.” 라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염려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과 할 수 있는 일들은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걱정과 염려와 고민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때,
사도들은 하늘만 쳐다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을 도왔습니다(2코린 8,1-5).
오늘날에도 ‘성전 신축’ 등을 하면서 고생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믿으면서도,
사람이 할 일을 하면서 많은 걱정들과 고통들을 감수하게 됩니다.
그 걱정들과 고통들은 곧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시지만,
그래도 ‘나의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어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다.”
라는 말만 하고, 그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성전 신축’ 등의 일을 하면서 고생하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니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도와주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어라.” 라는 말만 하면,
그 말은 ‘빈말’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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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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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인사는 위에서 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16~17절)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수님 사도단 가운데서도 핵심 제자단의 일원이었던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핵심 제자임으로 인한 자부심도 대단했을 것입니다.
스승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기대도 컸을 것입니다.
야고보 어머니의 인사청탁 사건을 통해서 그런 야심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야고보 사도는 성격이 불같았습니다. 여차하면 분노를 폭발시켰고. 예수님과 제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에 분개한 그는 예수님의 의견을 묻습니다.
“주님, 저들이 저희뿐만 아니라 주님조차 받아들이지 않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하늘에서 불벼락을 내려 싹 한번 쓸어버리라고 할까요?”
젊은 시절, 예수님과 사도단의 돌격 대장 같이 과격했던 야고보 사도였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복음 선포 여정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별의별 상처를 다 감내했었고, 뾰쪽하게 모난 곳은 여지없이 깎여 내려간 야고보 사도의 고백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고백이 너무나 겸손하고 진솔합니다.
그 어떤 과정이나 위선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의 고백은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터득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난 초탈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고보서 1장 16~17절)
세상적인 영예와 물 좋은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그가 평신도 혹은 성직자요 수도자라 할지라도,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스승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 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욕심이 있다면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할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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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누구에게 먹고살 걱정을 없애시는가?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하셨을 때 남은 빵의 양을 되새기시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찾는 이는 빵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 빵을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영적인 ‘양식’, 곧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 그것부터 해결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물론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안내하는 사람이 굶기고 금강산을 구경시키겠습니까? 항상 순서가 바뀌어서 문제입니다.
밥에 대한 욕망은 탐욕을 자아내서 나를 더럽힙니다.
예수님은 그 욕망을 없애주시러 오신 분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갖는다고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배고프게 됩니다.
아이들은 내일 걱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부모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밥걱정한다면 부모들은 서운할 것입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사는 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밥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밥걱정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그런 것을 배울 마음이 없습니다.
먼저 밥부터 달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르치려고 하는 것만 받아들이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식탐을 조절 못 하는 아이는 훈육이 힘듭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아이의 폭식을 제지 못 하는 엄마’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아이는 식탐을 절제하지 못하는데 엄마는 그 식탐을 제지하지 못합니다.
항상 웃는 표정으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합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엄마 없이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얼굴을 밝게 해야 했습니다.
자신을 키워주는 이들과 친구들마저 자신을 버리는 것이 두렵기에 항상 얼굴을 밝게 꾸미며 그들의 애정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미워할까 봐 모든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아이의 식탐을 먼저 없애주어야 무슨 가르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탐을 없애주어야 하는데 엄마는 이를 위해 미움받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키우는 것입니다.
아이의 배고픔은 엄마의 배고픔입니다.
식탐은 왜 오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사제이기에 모든 것을 ‘사랑의 부재에서 오는 헛헛함’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것을 음식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tvN ‘엑소시스트’에 ‘식탐 폭발 어린아이가 된 우리 엄마’로 유튜브에 짧게 올라온 한 38세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극단적인 예를 일반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사랑의 부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예일 것입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두 살배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먹는 것에 집착합니다.
그만 먹으라고 하는 제작진에게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그녀도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압니다.
그 이유는 결혼한 첫날부터 아이 셋을 낳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도 분명 무슨 상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연히 받아야 하는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은 헛헛함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밥에 담겨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밥이 땅기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지만 없습니다.
그래서 더 먹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식탐이 그래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양식이신데 ‘영’(靈)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 몸을 살게 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말씀이신 성자를 육체와 결합하시어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육체를 입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말은 육체까지도 책임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 방식은 항상 그렇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양식을 바라는 이들이 육체까지 걱정할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밀떡과 포도주 안에 담겨 우리에게 오십니다. 절대 영으로만 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육체가 먼저 만족하지 않으면 영적인 것은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식탐에 찌든 아이처럼 육체적인 것만 걱정한다면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어떻게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위 예에서 아이는 엄마를 육체적으로만 배를 불려 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영적인 양식을 먹어 영혼을 건강하게 하려고 물질적인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다음 수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세상 걱정하는 사람에게 말씀은 스며들지 못합니다.
켈커타의 사랑의 선교회 모원에 사는 300여 명의 수련 수녀들이 음식이 없어 모두 굶게 생긴 일이 있었습니다.
주방 담당 수녀는 마더 데레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마더 데레사가 몇몇 후원자들에게 전화해서 도와달라고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 중이었으며 그 어린 수녀에게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매가 이번 주 주방 담당인가요? 그렇다면 경당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먹을 것이 없다고 말씀드리세요.
그 문제는 해결됐군요.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그리고 십 분 후 현관 초인종이 울렸고, 처음 보는 어떤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마더 데레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녀님을 보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데레사 수녀님, 공립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지금 막 들어왔습니다.
수업이 취소되어서 7,000개의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시락을 처리하게 도와주시겠습니까?”
‘안나의 집’을 운영하며 매일 수백 개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김하종 신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돈도 그렇지만 짜놓지도 않았는데 그때그때 적절하게 봉사자들이 와 주는 것을 보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일단 우리가 먹을 걱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르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 가르침과 함께 항상 먹을 것도 주십니다. 먹고살 것은 주님 뜻에 맡깁시다.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하느님 나라에 사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만 노력합시다.
그러면 먹을 것은 항상 그 말씀과 함께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밥과 함께 옵니다.
그러니 밥을 먼저 찾지 맙시다.
사랑이 고픈 것입니다.
사랑을 찾으면 밥도 따라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은 빵에 담겨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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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6 주간 화요일-묵상과 기도
야고보 사도는 시련을 이겨내라. 생명의 화관을 받는다. 유혹을 받을 때, 하느님으로 부터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에서 유혹을 받는 것임을 알라. 온갖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는 빛의 아버지께서 주신다.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사의 누룩은 조상들의 법과 율법의 명령과 금령만을 가진 이들이고, 헤로데의 누룩은 힘과 권력만의 가치로 사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늘상 선과 진리, 생명과 평화의 길을 걸어라. 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야고 1,12-18
그때에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14-21
실천
우리는 종종 어렵고 힘든, 고통과 험경의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스스로 잘못하지 않고 더불어 죄를 짓지 않았다고 여길 때도 고통과 괴로움, 좌절과 절망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는가?도 생각합다. 이런 고통의 환경과 고통이 극복되지 않았다.고 여기면 그분을 원망하고 또한 마음에서 그분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유혹'의 시간, 자리입니다. 그는 이런 시련이 닥칠 때 그것이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하고 생각도 말하지도 말라. 왜냐면 하느님은 유혹을 받으실 분도, 유혹하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욕망에 따랐고 욕망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는가? 욕망에서 죄가, 죄에서 죽음의 길, 그 문화를 따른 적은 없는가?를 생각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뜻으로 그들을 위하여 뜻을 정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다.는 깨닫는 시간과 자리가 되고 더욱 그분께 나아가는 계기가 되도록 합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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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우물에 가서 숭융 찾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원래 이 속담의 의미는 성미가 급한 사람을 비유해서 말할 때 인용할 수 있는 속담입니다. 원래의 의미가 가지는 의미보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는 뉘앙스를 묵상하면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속담을 가지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숭융은 무엇인가요? 밥을 짓고난 후에 솥에 있는 밥을 이용해서 물을 붓고 끓인 게 숭융입니다. 우물에서 숭융을 마시려면 먼저 우울을 이용해서 밥을 지어야 할 게 먼저입니다. 그런 연후에야 숭융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우물에 있는 우물과 숭융은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물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마실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갈증이 나서 물이 필요하다면 어느 물을 먹어도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느 물로써도 갈증을 해결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갈증이 났을 땐 숭융보다는 우물 물이 더 나을 것입니다. 가령 식후에 입가심으로 물을 먹는다면 이땐 차라리 숭융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배 안에 있는 하나의 빵만을 본 것입니다. 아마도 그 빵만으로는 먹을 식량으로서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을 한 나머지 자기들에게는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봤을 땐 양이 부족한 것이지 빵이 없었던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양의 부족을 언급한 게 분명한 듯합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아직도 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이미 행하신 빵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목격을 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달리 생각해보면 허황된 욕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빵으로 다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빵을 더 많이 만드실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일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서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융통성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완고함이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이전의 기적을 체험한 것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도 없지 않아 있으셨겠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을 보지 못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이 가장 클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빵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빵으로서의 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한 개밖에 남은 빵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빵이 아니였을 것입니다. 그 빵은 어쩌면 예수님 당신을 상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아니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의미를 차용하면 그렇습니다. 우문현답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빵도 중요하지만 실제는 이것을 기회로 다른 것을 강조하신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당신의 본질을 빵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제자들이 좀 더 잘 알기를 바리셨던 것도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존에 급급한 빵에 의미를 두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빵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당신이 실제 빵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빵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생존을 위한 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살기 위한 빵입니다. 빵을 만들려면 그 속에는 누룩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룩 중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상징하는 의미는 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좀 더 확장을 하면 하늘나라를 동경하는 영적인 삶에 치중하는 것보다 세상적인 삶에 더 치중하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현세에서의 살아가기 위한 빵도 물론 중요하지만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라고 하시는 촉구일 수도 있습니다.
우물에 가서 숭융을 찾는 속담을 통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슈가성의 우물이 연상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했던 물은 단순한 목마름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생각하신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로서의 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물과도 같은 그런 빵에 주목하라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우물에 가서도 그저 단순히 숭융만 찾을 게 아니라 근원적인 숭융을 만들 수 있는 더 본질적인 우물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우물이 바로 하느님께서 빵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처럼 그런 기적은 바로 이런 우물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숭융을 찾는 사람은 아닌지 묵상해보면 재미있는 묵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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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야고1,12~18)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3~15)
야고보는 1장 2-12절에서 시련을 당할 때에 성도가 취해야 할 신앙 자세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 13-18절에서 시험으로 이끄는 유혹의 원천인 인간 내면의 욕심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사와 선물에 대하여 말한다.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로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온갖 좋은 선물들만 주시는 분임을 말한다.
2절과 12절에서는 '시험'이 '시련'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13절에서는 죄를 짓도록 유도하는 '유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 '페이라스모스'(pheirasmos)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단련하기 위한 '시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여기서의 '페이라조'(pheirazo)는 인간의 욕심으로 죄를 지으려 하는 '유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을 시험하신다고 하는 언급들이 자주 발견된다 (창세22,1 ; 탈출15,25 ; 신명8,2 ; 13,3 ;33,8 ; 2사무24,1 ; 시편26,2).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테스트하는 성격의 시험일 뿐,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아니다.
죄에 빠지게 하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마귀가 하는 것으로(마태4,1-11),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의 성향을 가진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종종 자신에게서 발생한 죄의 유혹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창세3,12-13 ; 잠언19,3).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죄의 유혹들의 배후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3)
본문은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 누구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직설법 현재 시제 동사가 쓰였다는 것은 이 사실이 시,공을 초월하여 항상 진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느님께서 마치 죄를 부추겨 악에 빠지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탈출4,21 ; 7,3 ; 10,1.20 ; 2사무24,1; 1열왕22,19-23). 여기에 대해 우리는 로마서 1장 28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가 계속 고집을 부려 하느님의 뜻을 어기도록 내버려 두심으로써, 오히려 온 천하에 주 하느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사실을 더욱 드러내셨다(탈출10,1.2).
또한 하느님께서는 강대한 나라를 이루어 교만에 빠진 다윗의 마음을 사탄이 부추기는 것을 허용하심으로써(1역대21,1)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떠나 이미 악의 화신이 되어 버린 아합 왕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어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마음을 그 욕심이 이끄는 대로 꾀어 죽게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1열왕22,19-23).
이러한 세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표면적인 것과 달리 하느님께서 악을 조장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유혹에 빠지게 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14)
'사람은 저마다'라고 번역된 '헤카스토스'(hekastos)는 '각 사람'이라 말할 수 있고, 인간 누구나 예외없이 자기의 욕심에 의해서 시험받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욕망'으로 번역된 '에피튀미아스'(ephithimias)의 원형 '에피튀미아'(ephithimia)는 '~을 향하여'란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hi)와 그 자체로 이미 '열망' 혹은 '뜨거운 감정'이란 뜻이 있는 명사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갖게 되는 '갈망', '열망'이란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싫어하고, 죄악된 자아만을 충족하기를 좋아하는 것을 나타내므로 부정적 의미로 쓰였다.
'욕망에'에서 '~에'로 번역된 전치사 '휘포'(hypo)는 '~아래에'라는 문자적 의미와 더불어 '~의 영향력 하에서' 라는 비유적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욕심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사로잡혀'(끌려)로 번역된 '엑셀코메노스'(ekselkomenos)는 사냥감이 덤불에서 끌려 나오듯이 사람이 자기의 욕심에 무력하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하여 본절에서 수동태로서 그 무력한 태도가 강조된다.
'꼬임에 넘어가는'으로 번역된 '델레아조메노스'(deleazomenos)는 낚시나 사냥에서 물고기나 사냥감을 낚시 바늘이나 덫을 사용하여 현혹시켜 걸리게 하듯이 사람으로 하여금 욕심의 유혹에 걸리도록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 역시 수동태로서, 별다른 저항없이 무력하게 꼬임에 넘어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야고보는 사냥이나 낚시에서 사용되는 두 단어의 수동태를 연속으로 사용하여 유혹을 받는 그 원인이 다른 제3자나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를 짓고 싶어하는 각 개인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 주고있다.
이같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욕심에 의해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이므로 죄에 빠진 그 원인을 하느님께 결코 돌릴 수 없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5)
이 구절은 욕망(욕심)이 갖는 치명적 결과를 보여주는 너무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악의 진행과정을 인간의 생물학적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잉태와 출산, 성장과 죽음의 모습이다.
'잉태하여'로 번역된 '쉴라부사'(shillabusa)의 원형 '쉴람바노'(shillambano)동사는 마치 여자가 은밀하게 아이를 가지듯이 마음에 욕심의 씨가 뿌려진다는 의미와 더불어 욕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다음 '욕심'에 눈이 멀어 유혹된 인간의 내면에서 '욕심'은 그를 사로잡아 '죄'(하마르티아 ; hamartia)를 낳는다. 즉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그 '죄'를 낳는 것이다. (잠언7,15-23)
여기서 죄는 태아로 의인화되고 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죄는 갓난 아기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죄를 방치하면 성장한다.
여기서 '다 자라면'(성장한 후)로 번역된 '아포텔레스데이사'(aphotelestheisa)의 원형 '아포텔레오'(aphoteleo)는 '완성하다', '다끝내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는 수동태 분사로 쓰였으며, '성취될 때'(when is accomplished), 또는 '완전히 자랄 때'(when is full-grown)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자란 죄가 도달하는 최종 목표는 '죽음'이다(로마5,12 ; 6,20-21 ; 7,11). 여기서 '죽음'(다나토스; thanatos)은 바로 영적인 죽음, 즉 최후 심판때의 두 번째 죽음(묵시20,14)을 의미한다. 하느님과의 영원한 결별(분리)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최종 결과인 '죽음'은 12절의 '생명의 화관'과 반대 개념을 이룬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전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17-18)
이제 야고보는 17-18절에서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심을 밝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좋은 것들만 내려주시는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다.
여기에서 '선물'로 번역된 '도시스'(dosis)와 '은사'로 번역된 '도레마'(dorema)는 동의어이다. '도시스'는 주로 행위에 강조점이 있고, '도레마'는 주어진 결과에 강조점이 있는 단어일 뿐이고, 둘 다 영역으로는 'gift'이다.
'위에서'라는 의미는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이며, 이어지는 '빛의 아버지에게서'도 동일한 의미이다.
'빛의 아버지'는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의 완곡한 표현이다. 좋고 완전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으로부터만 내려옴을 강조한다.
'뜻을 정하시고'로 번역된 '블레테이스'(buletheis)의 원형 '블로마이'(bulomai)는 야고보서 1장 14,15절에 나오는 사악한 욕망(욕심)의 반대 개념을 지니기도 한 동사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유로운 결단, 그리고 아름답고 선한 의지에 의해 피조물들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이는 외부의 간섭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로써 인생에 대한 거듭남의 역사를 행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낳으시어'로 번역된 '아페퀴에센'(aphekiesen)의 원형 '아포퀴에오'(aphokieo)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이 동사가 부정 과거 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거듭남이 일회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즉 거듭남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한순간에 이루어진다.
'첫 열매', 즉 '아파르케'(apharche)는 원래 구약의 전문적인 제사 용어인데, 이스라엘이 모든 인간과 동식물의 첫 열매를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소유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말론적 새 창조(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첫 열매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낳았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 즉 복음으로 낳았다는 의미이다. (1베드1,23 ; 2코린6,7 ; 에페1,18 ;콜로1,5 ; 2티모2,15 ; 로마10,13-17).
2022년 02월 15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말 단단히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무라실까 싶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두 번이나 일으키셨습니다(마르 6,30-44; 8,1-10 참조).
제자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군중에게 그 빵을 나누어 주고 남은 조각을 모으는 역할도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에 먹을 빵이 없는 상황이 닥치자 다시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오천 명을, 한 번은 사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해 주신 분을
자기들 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교회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의 나라로 항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우리가 대개 염려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행사를 준비하는 일이나 필요한 물품, 재원을 확보하는 일에는 많은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그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예수님께 의지하는 법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거센 풍랑에 배가 파선되지 않을까 염려하였고(마르 4,35-41 참조),
오늘은 배 안에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염려가 결국 불필요한 것이었듯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염려하는 많은 부분도 불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이시고,
그분께서 험난한 항해의 여정 속에 늘 함께하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마르8,14~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15)
마르코 복음 8장 15절의 두 동사는 모두 현재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명령임을 드러낸다.
'너희는 주의하여라'에 해당하는 '호라테'(horate; take heed; be careful)의 원형 '호라오'(horao)는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실체를 알고서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그리고 '조심하여라'에 해당하는 '블레페테'(blepete; beware; watch out)의 원형 '블레포'(blepo) 역시 사물이나 현상을 눈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통찰하는 것과 어떤 것에 유의하고 조심하는 것을 뜻하는 동사이다.
한 문장에서 동일하게 비슷한 뜻의 동사가 함께 연속해서 명령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자세히 살피고 주의해야 할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누룩'에 해당하는 '쥐메스'(zymes; leaven)의 원형 '쥐메'(zyme)는 밀가루 반죽에 넣어 부풀어 오르게 하는 '효모'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침투성과 영향력이 강한 악(惡)의 상징적, 비유적 매개체로 성경에서 쓰이고 있다.
따라서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타인에게 강하게 미칠 수 있는 악한 성향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리사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분명한 표징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불신과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형식주의에서 비롯한 그들의 독선과 위선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는 그를 추종하는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성향에서 비롯되는 불경건과 불신앙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께 눈에 보이는 표징을 구했다.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6장 11절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 으로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사이에 '사두가이들'과 '헤로데'라는 차이가 있다.
사두가이들은 천사, 영적 존재와 영적 세계 그리고 부활을 부정하는 등 비신앙적이고 세속적인 성향을 가진 자들이며, 성전 중심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헤로데 당원들도 역시 정치적이며 불경건하고 비신앙적인 삶을 사는 세속주의자, 현세주의자들이므로, 두 집단이 공통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바리사이, 사두가이, 헤로데 모두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강조하여 기록했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헤로데를 강조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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