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문학(소설)
소설의 유령
이진 지음|푸른사상 소설선 53|146×210×16mm|264쪽
17,900원|ISBN 979-11-308-2110-8 03810 | 2023.11.20
■ 도서 소개
어둠 속 빛의 흔적을 찾아 나서다
이진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소설의 유령』이 <푸른사상 소설선 53>으로 출간되었다. 사회의 어두운 이면 속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려낸 9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에서 작가는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치밀하게 그려내며 우리가 간과했던 빛의 흔적을 찾아 나간다.
■ 작가 소개
이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 자연과학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어린 시절의 꿈을 쫓아 소설가가 되었다. 본격적인 문학 공부의 필요성을 느껴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문예창작학), 문학박사(국어국문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목포대와 광주여대에 출강하다 광주여대 교양학부 교수로 임용되었다. 현재는 소설 쓰기에 주력하고 있으며 인문학 강의와 문학 연구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소설집으로 『창』 『알레그로 마에스토소』 『꽁지를 위한 방법서설』 등이, 장편소설로 『하늘꽃 한송이, 너는』 『허균, 불의 향기』가 있고, 학술서로『『토지』의 가족서사 연구』, 대학교재 『글과 삶』 등이 있다.
■ 목차
▪작가의 말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
도도와 쭈아
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
우주적 사건 지평선 너머
초록 알람
은행나무 협주곡
도미노 게임
평강의 숲
백제의 악(樂), 바다 건너 꽃피다
작품 해설 : 돌봄, 지평선 너머의 언어_ 방승호
■ '작가의 말' 중에서
또 한 권, 나무들의 생명을 앗은 대가로 내 이름자를 새긴 네 번째 소설집을 발간한다.
이미 출간한 두 권의 장편소설까지 포함하면 몇 그루의 나무가 목숨을 잃었는지 알 수 없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드려야 할지,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사죄부터 올려야 할지 문득 망연해진다.
내가 나무의 숨결을 빌려 붙들어놓은 많은 이야기들.
물처럼 흘려보낸들 어땠으리? 바람처럼 날려 보낸들 또 어땠으리? 아무도 아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섭섭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니, 그런 물이나 그런 바람에 대해 알게 뭐람? 출발한 적이 없는데 다다를 곳이 있을 게 뭐람? 발신자가 없는데 수신자가 생겨날 까닭이 뭐람?
늘 이렇게 회의하면서도 난 멈추지 못해왔다.
전생의 업보인 게지, 혹은 타고난 운명인 게지, 하는 따위 검증 불가능한 변명으로 내 소설 쓰기를 정당화하면서.
그러고 보면 누가 뭐래도 그냥 좋은 게지. 이런저런 회의감으로 미안하니 부끄럽니 뇌까리면서도 소설 쓰는 일이 즐거운 게지. 그 도달 지점이 어디든 일단 띄워 보내는 것으로 신나는 게지.
문득 한 생각이 날 사로잡는다.
그렇다면, 그리 좋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면 그건 놀이가 아닐 것인가? 놀이에 동무가 없어서야 무슨 맛인가? 함께 하는 것만으로 좋아 죽고 즐거워 죽고 신나 죽을 그런 동무들이 있을까?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에……, 이렇게 훌쩍 현실 세계를 뛰어넘어 머나먼 시공간 어디로든 손잡고 갈 수 있는 그런 동무들이 있을까?
참으로 운 좋게도 이미 찾아낸 듯하다.
글로 엮인 이야기에 가슴이 뛰는 당신, 여전히 책 읽기를 멈출 수 없는 당신, 지금 이 구절을 읽으며 입가에 설핏 미소를 올려보는 당신……, 오래오래 함께 가는 그런 동무였으면 좋겠다.
■ 작품 세계
이번 소설집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것 중 하나는 돌봄의 문제다. 앞서 살펴보았던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도 서사의 한켠에는 타인에 대한 돌봄의 문제가 전제해 있다. 돌봄이라는 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 차원의 일을 말하지만, 이진 소설은 돌봄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도 언제든지 직면할 수 있는 연대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도도와 쭈아」, 「은행나무 협주곡」은 우리가 간과한 돌봄의 영역을 재인식하게 한다. 일단 두 소설은 돌봄이 단지 모성적 사유가 전담해야 하는 일이라고 제한하지 않는다. 돌봄이란 모든 주체에게 적용되는 범주의 문제라고, 그리고 돌봄의 주체가 고정불변의 범주에서 벗어날 때 윤리적 가치는 깊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소설이 말하는 돌봄은 몫의 분배에서 나아가 친밀성과 책임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중략)
백제 미마지의 설화를 모티프로 한 「백제의 악(樂), 바다 건너 꽃피다」의 중심에는 아라연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미마지가 중국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미마지의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다. 미마지를 움직이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향한 아라연의 마음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아라연의 기다림은 주체를 향한 수동적 기다림이 아니라 운명을 거스르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적극적인 돌봄의 형태로 다시 의미화된다. 돌봄은 희생이기 전에 사랑이고, 사랑이기 전에 누군가를 살피는 마음을 뜻한다. 아라연의 죽음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아라연의 비극은 타자로서의 죽음이기도 하지만, 선험적 질서를 타파하고 우주적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향하려 했던 주체의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진 소설이 말하는 핵심이 있다. 이진 소설은 타자를 제한된 위치에 두지 않고 선험적 질서에 균열을 내며 사건의 지평선 너머를 향한 주체로서 서사를 이끌어간다. 그 끝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서사의 종착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진의 서사는 사건의 종착점을 지나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여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쳤던 빛의 흔적을 다시 돌(아)보게 하므로. 그래, 이진의 서사에서 돌봄이란 돌(아)봄의 다른 말이다. 여기에 이진 소설의 힘이 있고, 그의 사랑이 새롭게 움트고 있다. 잊지 말자. 소설과 우주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니, 당신 역시 하나의 우주라는 진실을.
― 방승호(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출판사 리뷰
이진 작가의 네 번째 소설집 『소설의 유령』은 사람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이 함께 드러나는 9편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사정을 끈질기게 따라가며 모순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의 한 대목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특유의 섬세한 문장과 탁월한 구성으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가혹한 진실을 들여다보며 아픔을 어루만진다.
「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에 등장하는 디지털 장의사는 죽은 소설가의 디지털 장례를 의뢰받는다. 장의사는 그 소설가의 이메일을 일일이 확인하다가 죽은 소설가와 의뢰인에 얽힌 의문의 기록을 발견하게 되고, 이야기는 교차하고 포개지면서 소설가와 의뢰인 사이의 숨겨진 비밀이 드러난다. 「초록 알람」은 대리모 일을 자처하는 주인공이 느껴야 했던 여러 겹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여성이 짊어지고 감수해야만 했던 정체성의 역설과 여성만이 소유해야 하는 모순적 욕구들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한편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그린 「코로나 시대의 싱글 라이프」, 가족을 거느린 아비 고양이 도도에 관한 이야기 「도도와 쭈아」도 오늘을 살아가는 군상들의 생생한 모습을 여실히 담아낸다. 평강공주와 온달의 사랑을 모티프로 한 「평강의 숲」과 백제 미마지의 애절한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백제의 악(樂), 바다 건너 꽃 피다」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 현실에 만연한 사회문제들을 비틀어 조명하는 한편,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면서 작가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 속 빛의 흔적을 따라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떠난다.
■ 작품 속으로
아무래도 조금쯤 미친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정산은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비웃음을 정색시키려 애를 썼다. 소설이 무슨 생명체도 아니겠고, 소설이 죽었다느니 또 죽은 소설을 염습해야 한다느니, 이게 지금 어느 세상 이야기인가? 게다가 디지털 장례라는 건 고인이 디지털 세상에다 끼쳐놓은 자취를 찾아 영원의 침묵 속에다 묻어주는 일이지, 유물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손에 잡히는 물질로 전화되지 않았다 해도 이미 구조화된 소설이라면 유물이 아닐 것인가? (「소설의 유령을 위한 습작」, 70쪽)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여자에겐 거절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 임신일지 모른다는 미묘한 우울감이, 제왕절개 수술을 또 한 번 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그보다는 내 자궁이 진짜 내 아기는 한 번도 키워보지 못한 채로 성능 저하의 늪에 빠져버릴지 모른다는 냉철한 직시가 날 체념 상태로 몰아갔을지도 모른다. 여자와 내가 마흔셋이라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까지 같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감정선을 절대로 넘지 않는다는 내 철칙이 이미 흔들렸는지도 모른다. (「초록 알람」, 121쪽)
“마마께선 저를 온달에게 시집보내리라, 어렸을 적부터 늘 말씀하셨지요. 고구려 온 백성의 아버지인 마마께서 그동안 거짓 약속을 해왔다는 말씀이십니까?”
평강은 아버지 평원왕에게 따지고 들었다. 온달이라는 사내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자인지 알 순 없으나 어려서부터 그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 마치 친동기간이라도 되는 듯한 정감이 있어왔던 터다. 다만 그 이름자 앞에 붙은 ‘바보’라는 수식어가 조금 맘에 걸리긴 했다. 그렇더라도 꼴 보기 싫은 고 도령과의 혼사를 물릴 수만 있다면 바보든 멍청이든 별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한번 울음보가 터지면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널 어르느라 농담 삼아 했던 말을 금과옥조로 새겼더란 말이냐?”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이도록 새겨주셨지요. 한 나라의 지존께서 한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내리신 말씀을 손바닥 뒤집듯 그리 쉽게 뒤집을 순 없는 일입니다.”
(「평강의 숲」, 1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