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광신대학교 사회복지 대학원 졸업
· 1999년 《금호문화》 우수상
· 2002년 《시조시학》 신인상
· 2013년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작품상
· 2019년 무등시조문학상
· 2024년 광주광역시 정소파 문학상
시조집 『사람이 사람을 견디게 한다』
『메타세콰이어 길에서』
『나무의 걸음』
오늘의시조시인회의, 광주광역시문인협회,
율격, 광주아카데미 동인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회원
시인의 말
아문 상처에 박힌 기억
사금처럼 반짝인다
긁히고 베인 자리마다
얼룩처럼 새겨진 무늬
시간을 닦아낼수록
윤슬처럼 번진다
자작나무 속으로
자작나무 숲 하늘에 노을이 번질 때
힘껏 달려 나무에 기대어 울고 싶다
저 빛이 몸에 스미면 찢긴 마음 아물 것 같다
내 상처를 데리고 그늘 깊이 걸어간다
겹겹이 선 나무들 속속들이 나를 닮았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눈에 띄는 상처들
그늘 속 얼룩무늬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흰 몸의 검은 흉터, 아픔이 만져진다
붉은 빛 혹여 깃들면 어떤 무늬로 드러날까
손 뻗어도 닿지 않는 머나먼 푸른 별
바람에 잎 흔들리자 어깨가 따라 떨린다
가슴에 잎 지는 소리 언덕처럼 수북하다
평형수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물을 싣는다
누구도 볼 수 없는 배 밑바닥 깊숙이
먼 항해 가라앉지 않게 지탱해 줄 적당의 무게
흔들려도 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물
사랑 슬픔, 그리움, 혹은 후회 같은
세상은 늘 출렁이고 나는 자주 기운다
오늘을 살아가는 균형을 잡아 줄
당신이란 이름을 가슴에 채운다
기우는 나를 지탱하는 내 안의 평형수
반려 로봇
값 비싼 반려 로봇 한 마리 어떠세요?
몽실몽실 부드러워 자꾸만 만지게 되는 손만 닿아도 뒹굴며 애교가 장난이 아닌 가식 없이 골골대며 콧소리 내는 귀가하면 프로펠러보다 빠르게 꼬리 흔드는 친구처럼 자식처럼 말귀도 밝아서 부르면 쪼르르 먹이도 산책도 목욕도 필요 없는 언제든 어디든 동행도 가능한 충전으로 멎은 심장도 다시 뛰는
툭하면 외로움 타는 당신, 한정판매 합니다
커피 분쇄기
오래 써 고장난 분쇄기를 해체한다
재활용될 시간과 쓸모없는 조각들
그 틈에 흩어진 향기가 가루처럼 남아있다
빽빽한 손잡이를 시시때때 돌리며
갈리지 않는 버거운 기억을 함께 갈았다
조였던 나사를 풀자 찌꺼기로 쏟아지는 나
목어
네 몸의 나이테는 물결처럼 둥글었지
얼마나 맞아야 삶의 무게 알게 될까
소리로 무늬를 지우는 몸
눈꺼풀 좀 얹어주지
백일홍 너머로 노을 길게 기울 때
기억 없는 심장이라도 다시 심어줄까
비워진 속 두드려도 눈 한번 끔쩍 않는다
해설
차가운 숨, 따뜻한 상처
이송희 시인
삶은 언제나 결핍과 균열의 한가운데서 시작된다. 어떤 상처는 말을 걸어오고, 어떤 고통은 침묵 속에서 자란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일상의 무게에 지쳐 자신을 잠가버리는 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강경화의 시집 『그늘 속 얼룩무늬』는 그런 순간들을 비껴가지 않는다. 오히려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하지 못했던 감정의 조각들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꺼내어 놓는다. 시의 말들은 우리를 위로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에게 묻고, 또 자신을 통과하며 천천히 치유의 방향을 찾아갈 뿐 이다. 강경화의 시편 속의 주체들은 외로움에 파묻히되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상처를 직면하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다. 사회적 소외나 정서적 결핍 속에서도 고통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자기연민이 아니라 '성찰'이다. 이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D.W. Winnicott이 말한 '충분히 좋은 환경'을 스스로 구축해가는 태도와도 닮았다. 아무리 적대적인 현실 앞에서도 자기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려는 끈질긴 내면의 힘이. 이 시집 곳곳에서 조용한 형태로 빛난다.
"붉은빛/저 그늘 어딘가/내가 섞여/달을 지운다"(개기월식」)는 고백처럼, 시적 화자는 타인의 빛 앞에서 자꾸만 그늘에 위치하게 되는 자기 인식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존재는, 단지 소외된 자가 아니다. 마치 '그늘 속 얼룩무늬'처럼, 그 상처와 흔적들을 자신의 일부로 품고 그 안에서 자아를 재구성하는 존재이다. 자신을 '섞여 들어간 존재'로 자각하는 순간, 그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관찰자이자 해석자'가 된다. 고통의 정체를 인식하는 이 조용한 지점이야말로, 이 시집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회복의 출발점이다. 이 시집은 상처의 흔적을 덮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품은 채 살아가는 존재의 방식에 대해 묻는다. "손끝에 피를 묻힌다/너무 오래 담아둔 걸까"(「귀가 운다」)와 같은 날것의 고백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밖으로 꺼내는 용기이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강경화의 시편들은 마치 각
기 다른 균열에서 피어난 꽃처럼, 고통의 서사 너머를 지향한다.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이제는 그것을 '안고 나아가는 존재'로 성숙해 가는 길. 그 길 위에서 '그늘 속 얼룩무늬'의 말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우리와 함께 걷는다.
자작나무 숲속 그늘에서 상처 입은 자아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 "한쪽 발 푹 꺼지며 갈비뼈에 금이 갔다/몇 주먹 흙이면 메워질 구멍 하나"(꺼진 길」)는 외형적으로 작아 보여도 한 생을 주저앉히는 깊은 상처다. 이처럼 겹겹이 선 나무들이 자신을 닮아있듯, 내면의 상처와 고통은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붉은 노을빛 아래서도 아물지 않는 그 상처를 손끝으로 더듬으며 마주할 때, 내면의 어둠과 고통은 비로소 이해되고 위로받을 가능성을 얻는다. 숲의 그늘과 그림자는 그렇게 상처 입은 자아의 무의식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공간이 되어, 치유의 시작을 알린다.
강경화 시인의 시집은 단순히 고통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지만, 그 자리를 들여다보고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 고통은 '멈춰있는 상처'에서 '움직이는 삶'으로 전환된다. 쓰라린 기억 위에 차곡차곡 쌓인 단단한 생각들, 되돌릴 수 없는 아픔을 끌어안고도 꺾이지 않는 일상의 움직임은 시인의 언어를 통해 조용히 흐른다. 그것은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이자, 누구에게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 내면의 풍경을 담담히 밝혀내는 빛이다. 마치 달이 완전히 가려졌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듯, 강경화 시인의 시편들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존재의 증거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