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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다시 보기] 비천함=낮음 / 낮추심=겸손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같이 기도하는 “까떼나”에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인 “마니피캇”이 있습니다. 그 가사 가운데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에서 “그분”은 하느님을, “당신 종”은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러면 성모님께서 비천(卑賤)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전에는 “지위나 신분이 낮고 천하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성모 마리아의 지위나 신분에 대해 낮고 천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을까요? 목수인 요셉과 약혼하였고 혼전에 임신하신 것이 밝혀져 요셉이 파혼하려고 한 얘기와 아기를 낳은 후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피난 간 얘기, 그리고 그 후 헤로데가 죽자 귀국하여 갈릴래아 나자렛으로 자리를 잡아 살았기에 예수님을 “나자렛 예수”라고 불렸다는 정도의 얘기밖에 우리는 모릅니다.
“비천하다”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명사로는(ταπεινοσις-타페이노시스) 4번, “비천함” “굴욕” 등으로, 형용사로는(ταπεινος-타페이노스) 8번, “겸손” “비천한” 등으로, 동사로는(ταπεινοω-타페이노오) 11번 나오는데, 주로 “낮추다” 수동태인 “낮아지다”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의 쓰임새가 일관되지 않고 다양해서 우리의 이해를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는 그분의 “비천함”(명사로 쓰임)을 언급하고(루카 1,48), 예수님께 대해서는 “겸손하신”(형용사로 쓰임) 분으로(마태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고 동사로 사용된 필리 2,8에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새 번역인 “성경”안에서 살펴 보았지만, 이제 다른 번역본을 살펴 보겠습니다.
- 루카 1,48의 명사인 타페이노시스(ταπεινοσις)의 우리말 번역은(가톨릭, 개신교) 대부분 “비천함”으로, 그런데 영어나 독어 번역에서는 “낮추심” “낮은 처지”로, 일어와 중국번역에서도 주로 신분의 비천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마태 11,29의 형용사인 타페이노스(ταπεινος)는 우리말 번역, 영어나 독어 번역 그리고 일어나 중국어 번역들은 모두 “겸손하다”로 하고 있습니다.
- 필립 2,8의 동사인 타페이노오(ταπεινοω)는 모두(우리말, 영어, 독어, 일어, 중국어) “낮추다”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겸손을 의미한다면, 이 겸손은 순종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종합해 보겠습니다.
루카 1,48의 마리아의 “타페이노시스”는 성모님의 당시의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의 이야기인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루카 1,26-38)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마리아는 처녀로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을 수 있냐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 천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알려주었고, 마리아는 이내 순종하는 말투로 대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는 자신의 주장이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천사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부언하면 자신을 낮추는 자세이니 겸손한 자세이고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는(필리 2,8 참조) 자세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루카 1,48의 “타페이노시스”는 신분의 낮음을 뜻하는 “비천함”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이나 태도를 드러내는 “낮추심”으로, 즉 순종의 자세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90) 야고보 서간
하느님의 지혜를 삶의 근본으로 삼아야
신약 성경 가운데 야고보 서간과 베드로의 첫째·둘째 서간, 요한의 첫째·둘째·셋째 서간, 그리고 유다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곱 서간을 가톨릭 서간이라 부르는 이유는 특정인이나 개별 교회를 위해 쓴 것이 아니라 보편 교회의 모든 신자에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들 서간 첫머리에 수신자가 나옵니다. 야고보 서간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야고 1,1), 베드로 서간은 “폰토스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와 아시아와 비티니아에 흩어져 나그네살이를 하는 선택된 이들”(1베드 1,1), 요한의 둘째 서간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2요한 1절), 요한의 셋째 서간은 “가이오스”(3요한 1절)이라고 수신인이 명시돼 있지만, 바오로 사도 서간의 수신인보다 훨씬 보편적인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 서간을 ‘가톨릭 서간’으로 처음으로 부른 이는 2세기 말 아폴로니우스입니다. 그는 2세기 중엽 소아시아 프리기아 지방에서 종말론에 심취해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니 세상을 멀리하고 회개해 단식과 생식을 하고, 독신 생활을 하며 성생활을 자제하고, 자선과 순교를 권했던 몬타누스 이단에 맞서 정통 신앙을 수호했던 교부입니다.
야고보 서간(이하 야고보서)의 저자는 자신을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1)라고 밝힙니다. 야고보는 히브리어로 ‘야곱’입니다. 이사악의 아들이자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과 같은 이름이죠.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야고보 곧 야곱이라는 이름이 매우 흔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세 명의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마태 10,2; 마르 1,19-20)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르 3,18; 루카 6,15; 사도 1,13)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형제”(사도 12,17; 15,13-21; 21,18-25; 갈라 1,19)이자 “교회의 기둥”(갈라 2,9)이라고 불렀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저술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팔레스티나 사람으로 헬라 문화와 상당히 거리가 멀었기에 헬라어와 헬레니즘 문화와 사상에 능통한 그의 협력자가 야고보의 말을 대필했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 썼다고 봅니다. 그는 62년께 순교했고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 대략 50년께 쓰인 것으로 보아 50년대 말에 야고보서가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Ιακωβου’(야코보),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Iacobi’,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야고보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야고보서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보아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지역을 떠나 세상에 흩어져 사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특히 유다교 회당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아울러 부자들을 혹평하고(5,1-6), 가난한 사람들이 믿음의 부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다(2,5)는 내용, 그리고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보다는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어울리려 했고(2,1-4 참조),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다(2,15-16 참조)고 나무라는 것을 보아 부자는 아니더라도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는 일반적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서간인 듯합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야고보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분열이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떠한지를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시험을 통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려면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순수하고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3,17)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아울러 지혜에서 오는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아, 자기의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3,13)
야고보서는 또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을 차별해선 안 되고 교만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지고한 법을 이행해야 합니다.(2,1-13 참조)
야고보서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들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4,6)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다툼과 분열을 가져다주고 참신앙과 거리가 멉니다.(4,1-12 참조)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무엇보다 형제를 심판하지 말며, 자만하지 말고 허세를 부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재림을 인내하며 기다리고, 고통을 겪는 이들, 아픈 이들, 죄지은 이들, 교회 원로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5장 참조)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40)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아람 장군, 나아만
오늘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이 좋아야 한다. 6·25전쟁 중공군 공세 때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특별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패튼 사령관이 최고로 칭찬한 지휘관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장기적인 국군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장교 인력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재를 털고 주변의 돈을 모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유명한 일화는 6·25전쟁 중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 공군 대위가 북한 순천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었다. 이틀에 걸친 수색이 효과가 없자 불필요한 희생을 걱정해 직접 수색을 중지시킬 정도로 공과 사가 엄격했다. 그는 전쟁 후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리 한국의 발전을 위해 자주 방문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전쟁영웅인 그는 정치권의 부름을 거절하고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러모로 한국을 도왔다. 자신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들의 혼이 묻혀있는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오늘날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있는 까닭이다.
아람 군대의 장수인 나아만은 임금이 소중하게 여기는 큰 인물이었지만 불행하게 나병 환자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병 환자를 사회에서 추방했지만 아람에서는 왕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데려온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 소녀는 주인의 병을 고칠 이스라엘 지역의 유명한 예언자를 소개했다. 몸종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면 주인의 심성이 좋고 잘 대해주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통해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인 땅에도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나아만은 임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아람 임금은 친서를 써주었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과 함께 이스라엘 임금에게 향했다. 편지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다면서 옷을 찢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엘리사는 왕실에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 한다. 나아만은 대규모 군대와 함께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나와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예언자의 말만 전한다. 나아만은 긴 여행 끝에 도착했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엘리사에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부하들이 막아서며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가르침대로 하니 나아만은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교만과 자존심을 버렸고 부하들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넓은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치유 후에도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더더욱 어떤 분야든지 겸손하고 인성이 좋아야 한다. 교만과 이기심은 자신과 주변까지 추락시킨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1) 햇곡식을 바치며 올리는 기도(레위 23,9-14; 신명 8,7-10; 26,1-11)
하느님의 큰 계획 헤아리며 감사 기도 바치길
더운 여름이 지나고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던 우리 민족은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함께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조상께 감사드리는 추석을 지내왔습니다. 성경 안에도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레위 23,9-14) 레위기는 책 전반에서 제물과 제사와 축제를 자세히 규정하는데, 그 안에서 기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물의 봉헌은 피를 뿌리거나 제물을 태우거나 흔들면서 침묵 중에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됩니다.
하지만 모든 수확의 맏물을 담은 광주리를 갖다 바치며 하는 기도를 소개하는 신명기 26장은 예외를 보여줍니다. 맏물을 바치는 이들은 우선 사제에게 “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가 들어왔음을, 오늘 주 당신의 하느님께 아룁니다”(신명 26,3)라고 말합니다. 이어 광주리를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놓으면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26,5-9) 끝으로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26,10) 이어 그것을 하느님 앞에 놓고 그분을 경배하며, 레위인과 이방인과 더불어, 즉 하늘과 땅의 모든 이와 더불어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의 성취를 고백합니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 너희는 배불리 먹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신명 8,7-10)라고 예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확의 맏물을 봉헌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 기도에서 인간 노력의 결실이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약속과 성취라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괄되면서 영원한 가치를 얻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과 연결될 때 그것은 헛되이 지나갈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서 있을 것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생각해 볼까요?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매우 간단한 기도이지만, 자기가 차리든 남이 차리든, 비싼 돈을 내고 먹든 얻어먹든, 배고픔을 달래고 힘을 얻는 매 식사가 이 기도를 통해 영적인 차원을 얻고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감사 기도를 통해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해 건강한 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새빠지게 일해 모은 것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자신 안에 고립된 생각은 우리를 타인으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감사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상기시키고 타인에 대한 의무를 일깨우며 우리를 우리가 가진 것의 소유주가 아니라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루는 관리자로 만듭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26,5-9)은 선택된 백성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신앙고백을 작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의 이끄심을 고백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면, 어떤 처지든 현재를 수용하고 미래를 그분에 대한 신뢰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때에 선사하셨습니다. 땅에서는 영원에서든 모든 것은 그분의 선하심으로 살아갑니다.”(안톤 베젤리, 오스트리아 신부)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예루살렘의 시온산에는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경당이 있습니다. 2,000년 전 오순절에 성령께서 불꽃 모양의 혀처럼 내려와, 바벨탑 사건 이후 다른 언어로 갈라진 이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게 된 과정을, 그래서 모두가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된 신비를 보여주는 성지입니다. 베드로는 성령강림 때,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설교를 합니다(사도 2,1-36).
베드로가 언급한 예언은 요엘서 3장입니다. 과거에는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던 성령이 이제는 ‘백성 전체’에게 내려 남녀노소, 자유인과 종을 막론하고 모든 이가 예언자처럼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갈라 3,27-28). 옛 예언자들에게 주님의 영이 내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음은 이사 61,1과 에제 11,5 등에서 알려줍니다. 그런데 요엘 3장은 특별히 민수 11,1-12,8을 염두에 둔 예언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을 지휘하던 모세가 소명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모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로들에게도 나누어주셨다는 대목입니다(민수 11,16-17.25). 그리고 주님의 영을 아무나 받을 수 없었던 그 시절,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주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자 주변인들이 당황하게 됩니다(11,26-28). 하지만 모세는 다른 이들과 달리, 온 백성이 예언자처럼 되기를, 주님께서 모두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11,29). 바로 이 바람이 이루어지리라는 예고가 요엘서에 전달된 셈입니다. 그리고 요엘서의 예언은 사도 시대에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성령이 백성 모두에게 내려 예언자처럼 되리라.’는 예고는 예레 31,33-34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어 그들이 더 이상 주님 말씀에 대해 서로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더구나 요엘 3장은 나뉘어진 사회 계층의 경계를 허무는 급진성도 보입니다. 노인과 젊은이, 아들과 딸, 자유인과 종이 ‘똑같이’ 성령을 받으리라고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세상 만민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받들어 섬기게 할 기폭제 같은 구실을 이스라엘이 하게 되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런 예언이 사도 시대에 실현되었음을 고려하면,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만민 가운데 맏아들로 뽑으신(탈출 4,22) 존재의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성령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닌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사람(요엘 3,5)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코린 3,16 등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이가 성령을 모신 성전이라는 뜻이지요. 요엘 3,1-2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인용되었고(사도 1,8), 그 말씀대로 우리는 ‘성령께서 내리신 결과 모두 힘을 받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르코와 함께 떠나는 복음 여행]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파스카와 무교절 축제가 시작되기 이틀 전,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유다 이스카리옷이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그들을 찾아가 협상을 벌입니다. 그들은 유다의 이런 행동에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고, 그 후 유다는 예수님을 넘기기 위해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고 마르코는 전해줍니다.
시간이 흘러 무교절 첫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두 명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먹을 장소를 마련합니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곳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나누십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만이 그 식사가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때보다도 중요한 말씀, 달리 표현하자면 당신의 ‘유언’을 제자들에게 남기십니다.
사실 파스카 만찬은 일반적인 식사와는 다르게 예식적인 특성, 곧 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탈출 12장 참조) 모세를 통해 자신들의 조상인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업적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적 성격의 식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누룩 없는 빵을 들고 하느님께 강복을 청하며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는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린 후, 그것을 제자들이 나누어 마시게 한 다음,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합니다. 단순한 은유로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라 여기며 그 중요함을 놓쳤던 것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반응보다 그 말씀을 통해 제자들뿐만 아니라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 당신을 따르게 될 수많은 이들에게 전하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이루실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구원 업적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분명, 제자들은 그 옛날, 자기 조상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양 또는 염소를 죽여 그 피를 그들이 사는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라고 명하신 하느님의 말씀과 파스카 규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닌, 당신의 살과 피로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시고자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자신을 봉헌하십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는, 모세를 통해 준비하신 옛 계약을 완성하는 새로운 계약의 제물이며,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이 새로운 계약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만찬 식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의 몸과 피를 온 인류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인 성체성사의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야, 부활의 빛으로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 곧 성체와 성혈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