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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1)
고전13:4~7
2015년 11월 1일 장안중앙교회 주일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설교:
옛날 유명한 가수 나훈아씨가 사랑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한다고 노래 했나요?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다고 노래한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럼 눈물의 씨앗은 뭡니까? 그게 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뭐라고 정의 할 수 있나요?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정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정의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 눈물이 무엇입니까? “눈물”이란 “물과 염분의 결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으나 그것은 눈물의 참된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무조건적인 사랑”인 아가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은 “사랑의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가 봉독한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특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빛으로 나누어 볼 수 있듯이 사랑도 성경을 통해 여러가지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시간 관계상 4절 한 절에 나타난 특성만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것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받은 사랑은 어떤 것이고 행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사랑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나요?
1.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단어는 ‘명사’일까요? ‘형용사’일까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명사도 아니고 형용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특성이 있기에 ‘동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부터 묘사된 사랑의 특성을 면밀히 살펴보세요.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이며 의지적인 모습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動詞(동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절 초반에 “사랑은 오래참고” 이렇게 시작됩니다. 왜 사랑의 특성을 말하는데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 부터 시작했을까요? 이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 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손해를 잘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질병의 고통이나 환경의 열악함을 오래 참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인 <크리소스톰>은 ‘인내’를 설명하기를 “사람들에게 그릇된 대우를 받고 잘못된 취급을 당해 상처를 받았을 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고린도가 위치한 당시 헬라문화에서는 적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반격하여 승리하는 것이 강자의 미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격을 받아 피해를 입었는데도 참는 것은 비겁한 약자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당시에 풍조를 뒤집는 새로운 교훈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상대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았어도 오래 참아야 할까요? 그래야 주님을 닮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하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딤전1:16절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내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멘?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아멘을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자식 길러 봐서 아시죠? 정말 성질나고 학 두들겨 패주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죠? 그래도 참아요? 왜죠? 사랑하기 때문에....
벧후3:9절도 보세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오래 참으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구원받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도 모르고 교회 형제끼리 서로 분을 내며 고소하고 싸웠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재판장 앞에서 주님을 부끄럽게 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사람들이 주님을 보고 뭐라 했습니까? 귀신들린자를 고쳐주었더니 바일세불, 귀신의 왕이라 했습니다. 또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향해 일체의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요? 성경에는 “오래 참으라” 했는데 그 “오래” 언제까지입니까? 잘 보세요. 참 감사한 것은“사랑은 영원히 참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오래 참는다 했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언젠가는 마지막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는 목적은 언젠가는 끝나기 때문에 참는 것입니다. 좀 참으면 해결된다는 희망이 있기에 그래서 참는 것입니다. 아멘?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성공회 목사님인데 어느 날 아내인 수산나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여보, 당신은 도대체 저 돌대가리 같은 아들에게 어떻게 20번이나 똑같은 말로 타이를 수 있는 거요?” 그러자 아내 수산나가 대답했답니다. “여보 만일 내가 19번만 이야기 하고 말았다면 내말은 헛수고가 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그 가정에서 영국을 영적으로 변화시킨 위대한 인물들이 자라난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19명의 형제 중 15번째고 찰스 웨슬레는 18번째랍니다. 대단하지요? 그런데 그들의 어머니 수산나는의 철저히 성경중심의 교육을 했답니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랑을 실천했던 어머니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19명 자녀를 길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그녀의 그 강력한 사랑은 바로 “오래 참는 것” 이었습니다. 부모의 “오래 참음”은 위대한 자녀를 만든 비법인 것입니다.
저는 주례할 때 신혼부부에게 이 본문을 갖고 여러번 주례 설교를 했습니다. 오래 참은데 얼마를 참아야 하느냐? “10분만 참으라” 했습니다. 그러면 어지간한 것은 다 해결된다. “그 10분도 못 참겠으면 3분만 참으라” 설교 했습니다. 그러면 부부사이 문제는 어지간한 것은 다 해결됩니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명심하세요. 우리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참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오래 참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온유하다” 할 때 “온유”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나라 말 “溫柔(온유)”는 “따듯하고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온유’와 좀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 뜻은 “남에게 도움이 되도록 선을 행함”이란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내게 준 상처를 잘 견디는 것”을 말한다면 이 “온유”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오히려 선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온유는 오래 참음보다 더 차원이 높고 적극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온유의 사람들을 여러 사람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먼저 보여줍니다. 마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 대해 온유하다 말씀하셔서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그것이 사실이기에 주님은 스스로를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제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직접 예수님을 본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온유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벧전2:23~24절을 보세요.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것이 온유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또 모세도 ‘온유’가 뛰어난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민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수백만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온유는 사랑의 위대한 특성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 온유해야 합니까? 여러분 남편에게, 여러분 자식에게, 그리고 여러분 부모에게 이 온유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도 그리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온유의 반대말은 “복수” 또는 “원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내 대적에게 복수하거나 결정적 피해를 입혀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향해 저주하거나 화를 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에게 “선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울 때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유명한 대통령입니다. 그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나 또한 정적들도 많았습니다.
특별히 ‘스탠톤’이라는 정치인은 링컨을 조롱하고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링컨을 “교활한 어릿광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리지날 고릴라”라고 조롱했습니다. “여러분 고릴라를 보시려면 아프리카까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저 일리노이에 스프링필드에 가면 멋진 고릴라를 볼 수 있습니다”공식 연설석상에서 그렇게 조롱을 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내각의 장관들을 임명하는데 국방부 장관에 그 스탠톤을 지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난리가 났습니다. 그러자 링컨은 말하기를 “그는 나를 싫어했으나 국방부 장관에는 그 사람이 적임자입니다” 라고 했답니다. 그 후 링컨에 총에 맞아 죽었을 때 그 스텐톤은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았던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잠들었노라”
여러분! 사랑은 온유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음으로 세상이 고통을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 주신다 했습니다.
마5:5절을 보세요“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 땅은 우리가 밟고 다니는 LAND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기. 투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시기”의 원어는 “젤로이”라는 단어인데 “타인의 성공이나 부요함, 명예, 행복을 보고 마음의 분노가 끓어 오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언에서는 이 시기, 투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투기 문제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전1:11~13절을 보세요.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서로 시기 질투하여 파당이 생겼고 그 파당끼리 서로 싸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바울이 누굽니까? 고린도 교회에 초대 목사입니다. 아볼로는 그 후임 목사입니다. 게바는 베드로인데 아마도 그린도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한 부흥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리스도파다…….
모두 시기 질투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실 “妬忌(투기)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 된 것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투기하여 타락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역사 속에는 사탄이 교묘하게 인간 속에 투기를 집어넣어 끊임 없이 싸우게 한 역사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투기,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판 요셉 형들의 행위도 투기,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 했던 사울, 높은 자리에서도 유대인을 시기해서 죽이려 했다가 망한 하만, 집나간 동생을 기쁨으로 맞이하지 못한 집안의 탕자 맏아들……. 모두 시기와 투기입니다. 그래서 이 투기에 사로잡히면 누구든 망하는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최대 약점은 투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투기가 얼마나 악마 성을 갖고 있는지를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마귀의 졸개들이 수도원으로 들어가 성자가 되려는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서로 내기를 했습니다. 그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귀가 승리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마귀들이 그 수도사를 유혹하고 시험했습니다. 돈으로도 유혹해 보았고 여자로도 유혹해 보았고 명예로도 유혹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끄떡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한 마귀가 “내가 해보겠다”하고 그 수도사에게 찾아가 귀에 몇 마디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얼굴이 찡그리면서 화가 나서 되돌아갔습니다. 다른 마귀들이 성공한 마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한 것이냐?
그러자 그 마귀가 말하기를 “그야 간단하지... 네 동생이 방금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임명되었단다” 속삭였답니다. 그러자 “뭐야? 그 놈이?”하고 일어나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투기심은 인간을 망하게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3장에 보면 시기와 다툼은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형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가요? 기쁜가요?
여러분은 우리 교회 모집사가 승진하면 기쁜가요? 배가 아픈가요? 솔직히 말하세요. 여러분은 여기 최 목사가 유명한 목사가 되고 세계적인 목사가 되면 배가 아픈가요? 기쁜가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말하기를 “사람은 마음보를 잘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보”가 뭡니까? 시기질투를 하지 말고 진정으로 가족처럼 생각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잘되고 승리했을 때 배가 아픈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성공과 승리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그래서 투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경쟁자라 생각하지 말고 내 가족이고 내 자식이다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공동체가 되면 배가 아픈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4절 하반부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여기 ‘자랑’은 초점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투기’는 초점이 ‘상대방’입니다. 그래서 투기는 상대의 업적이나 공로를 無(무)로 돌리는 것이고 “자랑”은 자기의 업적을 극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들어내고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서로 시기질투하다 보니 서로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세력을 학장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안타까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왜일까요?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모르고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자랑함이 최고인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그분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스스로를 높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고 천한 곳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병자도 고치고 숨으셨습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병 나은 병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그것이 그분의 겸손입니다.
高手(고수)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항상 下手(하수)들이 껍쩍대고 자랑합니다. 그러기에 겸손해지려면 자기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낮아집니다. 바울을 보세요. 그토록 핍박하고 교회를 대적하며 난리치던 사울이 주님 만나고 낮아졌습니다. 원래 사울이라는 이름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 만나고 나서는 ‘바울’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낮은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만나보니 자기 꼬락서니가 미물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낮아지는 것입니다.
자랑과 교만은 친구입니다. 자랑이 지나치면 교만하게 됩니다. 반대로 교만한자가 자랑합니다. 교만이라는 말은 자만심이 진행되는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 자랑과 교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인물들이 이 교만 때문에 망했습니다. 모세 앞에 교만했던 고라자손도 망했습니다. 사울왕도 교만해서 망했습니다. 그래서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자랑과 교만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요?
그 처방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모든 추악한 죄를 짊어지고 몸부림치며 피 흘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나를 죄에서 해방해 주신 분이 그 주님이십니다.
내게 자녀의 신분을 주어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하신 분도 주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나를 대신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대신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자랑할 것이 뭐며 교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 위대한 사랑 때문에 존재하고 계시는 것을 믿습니까?
어머님의 사랑에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앞에서는 얼마나 감격해 보셨나요?
왜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인가요?
왜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요?
이 사랑이 없었기에 그런 것 아닌가요?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