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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단군왕검 (기원전 2,333 년 ~ 기원전 238 년) 2,096 년간 존속
첫 단군조선은 북경지역 탁록, 탁군지의 교통요지에서 단군 왕검에 올라 개국(기원전2,333~기원전2,240년)하여, 초대 왕검으로부터 47세 고열가단군(기원전295년~기원전238년)존속 2,096년간 까지이며, 나라를 셋인 삼한, 삼조선 체제로 진한, 번한, 마한, 후에 진조선, 번조선, 말조선, 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 삼한관경체제란 배달국으로부터 전승된 소도와 배달화백제라는 독특한 제도입니다.
삼한은 왕검조선의 단제인 진한과 비왕인 마한, 번한을 합쳐서 부른 명칭이며, 삼한은 기원전194년 이후에 난하 혹은 황하 한수 남쪽에 자리하며, 그 중 번한은 기원전2,333년부터 기원전323년까지 왕검조선의 서․남쪽을 다스린 비왕의 명칭으로 원래는 새 임금이라는 뜻으로 번한으로 적다가 나중에 글자가 바뀌었고, 새 임금이라는칭호는 고구려 때는 오간으로 바뀌었으며, 한제족국의 사서에는 번한 지역이 조이, 오환, 연, 등 주로 새와 관련된 이름으로 적혀 있습니다.
일설 기록에 기원전 2,830년에 배달국의 왕비족이었던 웅녀 여왕의 후손 '려'가 단목국 왕검으로 임명되었으며, 환웅국은 치우 환웅 때에 이르러 수도를 산동반도 태산 동쪽 용산으로 옮겨가고, 권력의 공백이 일어난 동북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남아 있었는데, 460년후 기원전 2,370년에 소국중의 하나인 단목국 왕검 단웅이 웅씨왕녀에게서 아들 단군을 얻으니, 단군은 14세에 웅씨왕의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웅씨 왕국 왕검에 올랐으며,
그해, 2,333년 지금의 조병산시 단목국에 들어가 구환족을 통일하고, 대표 왕검인 신한으로 등극하였는데, 신인 왕검이 800명과 함께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지허로 와서 국인들의 추대로 천제가 되었으며, 14세에 비왕이 되어 24년간 섭정하다가 부왕을 계승하여서 철령시 단목국의 왕이 되고, 마침내 천산 신시의 신시씨를 밀어내고, 만주를 재편하며, 달리호변의 서요하가 흐르는 케스케덴 부근 비서갑을 쳐서 하백녀를 부인으로 얻고, 서남쪽의 치우 후손 치두남과는 타협하여 번한으로 삼아서 만주를 통일하고, 구환 통일의 과업을 이룬 것이된다. 하였으며,
구환을 통일하고 환인의 신시 아사달로 가서 제천제를 치르고, 즉위하여 조선을 개국한 단군 왕검은 단목국 고향으로 돌아와 진한조선의 첫 수도를 다시 만들었다. 하였는데, 기록에는 조선의 평양에서 개국하였고, 다시 백악산아사달로 옮겨 1,500년을 지냈다고 전하며, 이를 궁홀산 금미달이라고도 하였고, 여기서 평양성은 단목국 수도로서 지금의 법고시 이며, 이 궁홀산 금미달의 서쪽에 창무시 흥륭산에 평안보에서 소위 고대산문화 유적지가 나타나는데, 고대산 문화는 처음에는 신민시 고대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문화로 인하여 이름붙여졌는데, 적봉시 하가점에서 유명한 신석기시대 홍산문화의 채도 문화를 뒤엎는 무문토기 홍도, 갈도, 등 미송리형 단지가 나타나는 청동기시대 문화입니다.
즉, 적봉 중심의 환웅 배달 홍산문화를 창무의 단군왕검의 고대산문화가 대체하는 것으로, 문화적으로는 직복 형식의 세발 솥을 만들어서 적봉 등지의 홍산문화와 조양시의 위영자문화 속으로 퍼뜨렸는데, 이 지역은 홍산문화로부터 채도문 문화를 받기만 하다가 거꾸로 간결한 무문토기 등의 문화를 홍산 쪽으로 퍼뜨린 중심이 된 것이며, 고대산문화는 신민시 고대산보다도 창무시 평안보유지에서 더 특징적인데 삼족기와 골제무기, 석제 무기, 철치형 동도와 구리 귀걸이 등이 발굴되었고, 구리 귀걸이가 나온 유적지 시기는 평안보 3기로서 기원전1,700년 정도로 분석되었고, 삼족기가 출현한 시기는 평안보 2기로서 기원전2,355년 경이어서, 이곳이 바로 단군 왕검이 돌아가신 봉정의 유궐 부근인 것이며, 단군왕검의 새수도 궁홀산 금미달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또 기록에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하였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므로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환의 삼한관경을 원만히 통합하였다. 하여, 신시의 옛 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은 존재로 보았으며, 이때부터 숭보의 예의가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셋이면서 하나인 나라를 삼한관경제라 하여, 군이나 나라의 편제를 셋으로 나누어 각 수장을 두지만, 그 수장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별도의 신교적 종교와 독자적인 군의편제도 있는 잠정조직이 있었는데, 주로 왕비나 수장의 비들이 운영하는 제도가 있었다 추정하며, 평소에는 지휘부의 소통과 제사등의 행사가 이루어지나, 필요시는 소도로 모여거나 편제된 군까지 동원되는 제도인데, 이를 크게보면 이군일민체제라 하여 한사람의 왕과 신권만 있는 또다른 왕 두 수장이 하나의 백성을 다스리는 체제를 말합니다.
제족 세번째 왕조 단군조선(기원전2,333~기원전238년)은 47세 2,096년을 존속하여, 서구 로마제국(기원전19년~기원후1,453년) 보다 많으며, 고대 이집트 왕조(기원3,150~기원전30년)는 31개 왕조 존속 3,100여년이 되어 인류역사에서 두번째 왕조에 속할 정도로 기나긴 역사를 가지며, 참고로 제족의 환국이 첫번째 왕조로 7세에 3,301년 혹은 63,182년이 되고, 두번째 왕조는 배달국 18세 1,565년 입니다.
진한 초대 1왕조는 송화강 아사달로 도읍하고, 21세 소태단군(기원전1,377~기원전1,286년)색불루의 쿠데타로 하야 하였으며, 2왕조 22세 색불루단군(기원전1,286~기원전1,237년)은 정권을 탈취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해, 그동안의 삼한체제를 삼조선 체제로 바꾸고, 8조 금법을 만들었으며, 43세 물리단군(기원전471~기원426년)시 우화충의 반란으로 단군을 패위하여 삼한관경제가 붕괴되고, 3왕조 44세 구물단군(기원전426~기원전396년)시 국호를 대부여로 바꿉니다.
마지막 왕검 47세 고열가단군(기원전295~기원전238년)때에 왕검이 은거하자 오가가 나라를 6년간 다스리게 되다가, 고리국 사람을 선조로 둔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옛 도읍지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북부여를 일으키고 스스로 단군이라고 칭하고 6세까지 존속하였으나, 기자의 후손과 손을 잡고 나라를 일으켰으므로,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통으로 인정되는 단군조선은 47세 고열가단군으로 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자조선(기원전1,126~기원전194년)도 비록 은상의 후예 기자를 말하지만, 위만조선(기원194~기원108년) 과 같이 기록에서 제외시키며, 기자와 관계되는 지명은 서화와 몽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은, 상, 주, 에서 홍범을 가르친 태사를 지낸 기자는 은의 성탕의 후손으로 기록에 나오지만, 제족 도이가 은나라를 세웠을때 변란에 처한 기자의 선친들이 은으로 망명하여 지내다가 은이 멸망하자 다시 돌아온 것으로, 옛 치도인 홍범구주와 관련된 기록에 나오며, 그 기자의 후예로는 선우 중산국이 있고, 중산국의 유물은 매우 세련되어 제족과는 차이가 나며, 당시 융적제후 백적 선우부가 세운나라로 한족화의 일원이 되고자, 주왕실의 후세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참고로 기록에 기자 12년에 기자가 국조단군전을 평양에 설립하고,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였다. 란 기록이 있는데, 은을 멸망 시키고 일어난 주가 길림에 있었던 후단조을 공격하여 영고탑이 있는 아시아 동북간으로 밀어내게 되며, 이때 일어난 기자조선을 인정 하게되며, 이러한 배경에서 국조단군전이 만들어 지고 단군화상이 봉안 되었다는 것은 이 그림이 다분히 정치적인 배경하에 그려졌다고 볼 수 있는데, 주의 무왕이 인정한 기자조선이 후단조의 정통을 잇는다는 강력한 의지가 그러한 표상물로 건설되었고 봉안되였다란 것인데,
이러한 사례는 유럽 미술사에서도 성상파괴운동이란 것이 있고, 우리 미술사의 폐불사건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사례들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미술의욕에 의해 발생되였던 사태인 것이며, 정치적 이유로 인해 성상이 조성 되거나 파괴되는 변화를 보이게 되는 것이지만, 사실 제족국에서 전통은 환국시절부터 국가최고지도자의 영정은 그리지 않는 것이 원칙으로, 꼭 그린다면 초상이 앉은 빈의자만 그릴정도로 이씨조선 초반까지 철저히 지켜져 내려 왔으며, 위의 기자가 단군을 참칭한 영정이라는 사실 자체는 거짓된 사실일 것이고, 초상을 일일이 그린 한제족국의 관습이며, 예서는 기자의 기사는 정통성이 없어 이 사례만을 올립니다.
또 참고하면 주나라가 건국하면서 홍범구주라는 전통적인 삼한관경제도를 멋대로 뜯어고쳤기 때문에, 은나라 유민들이 주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심지어 백이, 숙제는 수양산에서 굶어 죽기까지 했던 것도,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의 벼슬아치가 아니라, 주나라에 멸망하기 이전의 삼신산을 다스리던 천황과 지황이였으며, 백이(伯夷)는 동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며, 숙제(叔齊)는 제(齊)의 본 금문글자는 받들어 모신 세사람을 그린 것이고, 다시 막내의 뜻을 나타내는 숙(叔)이 붙었으니 막내의 뜻이되어, 은이 멸망하고 주가 들어서던 시기에 색불루에 의해 스스로 무너졌다는 조선의 삼한왕이 바로 이 백이와 숙제의 정체인 것입니다.
가운데 왕이 없는 것은 당연한데, 영토권을 관장하는 마한왕은 색불루의 대권찬탈을 용납하지 못해 싸우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주의 문왕이 했던 짓이 아사달의 해체이기 때문이며, 주역은 문왕이 유리에서 귀양살이 할 때 해석했다고 전해지는데, 주역 서괘전의 정(井)괘를 보면, 우물의 법도는 고치지 않을 수 없는지라 혁(革)괘로 받는다 라는 구절이 있어서, 이것은 기존의 신정제도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었다는 뜻이며, 문왕의 정체가 동이의 정통을 말살하고 제 가족을 중심으로 제도를 개편한 반역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또 순은 기원전2,343년경 출생이여 20세이던 서기전2,323년에 아버지 유호씨를 따라 환부의 직을 수행하면서 요임금을 깨우치러 갔던 단군조선에서 파견된 인물인데, 서기전2,314년 30세에 요임금에게 등용되어, 서기전2,294년에 섭정이 되었고, 서기전2,288년에 요순9년 대홍수가 발발하여 곤을 치수담당으로 봉하였으나 치수에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2,284년에 순은 요임금을 유폐시키고 위협하여 선양받아 천자자리를 찬탈하였고, 유주, 영주, 병주를 함부로 설치하였고, 서기전2,280년에 치수담당 곤을 처형하고 곤의 아들 우를 사공에 봉하고 치수를 맡겼습니다.
우가 22년간 치수를 하였으나 마무리를 못하자 순임금에게 간하여 단군왕검께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니, 이에 순임금도 백성을 위하여 상국 단군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천자임을 인정받게 되었으며, 기원전2,267년 단군왕검의 명을 받들어 태자부루가 도산회의를 주관하고 사공 우에게 치수법을 전수하여, 유주와 영주는 폐지하여 단군조선 삼한의 영역에 편입시키고 병주는 그냥두었는데, 이후 한제족국 천자 순임금은 서기전2,247년경까지 20년간 5년에 한번씩 순회하던 태자 부루에게 치수경과 등 국정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2,247년 이후 순임금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유주와 영주를 다시 설치하였고, 기원전2,240년에 즉위한 2대 부루단군이 유주와 영주를 정벌하여 폐지하고, 이때부터 유호씨는 순을 제거하기 위하여 둘재아들 유상과 치수에 공이 많은 우에게 명하여 협공하도록 하여, 기원전2,224년에 우의 군사가 창오의 들로 도망하던 순임금을 죽여 아버지 곤의 원수를 갚은 꼴이 되었습니다.
기원전2,224년에 창오의 들로 도망하던 순임금을 죽여 아버지 곤의 원수를 갚은 우는 곧 군사를 몰래 모으고 무기를 보수하여 자칭 하왕이라 하면서 독단을 차려 반역하는데, 단군조선의 정치제도를 모방하여 제후를 마음대로 봉하고 조공하도록 강요하니 백성들이 이러한 폭정을 피하여 수만명이 도망하여 나오므로, 우가 국경을 봉쇄하여 버렸으나, 기원전2,198년 우는 모산의 진중에서 죽고, 그 아들 계가 왕이 되어 유호씨와 전쟁을 계속하였지만, 수만의 군사로도 수천의 군사밖에 안되는 유호씨에게 번번히 패하니, 그 무리가 격앙되었으며, 이에 유호씨가 하나라 왕과백성들이 우매하여 가르치기 어렵다하고, 군사를 물려 파미르고원 서쪽, 수메르, 유럽지역 월식주와 파미르고원 쪽, 인도지역 성생주로 가르침을 펴러 떠났고, 되돌아 와서는 그 후손들이 단군조선의 문교부에 해당하는 교부의 직을 세습하였습니다.
1세 단군왕검(기원전2,333~기원전2,240년) 은 14세 되던 갑진년(기원전2,357)에 배달국 웅씨의 왕에 의해 비왕으로 임명되어 24년간 대읍을 다스리다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으로 등극하며, 2세 부루 단군(기원전2,240년)은 초대 단군왕검의 태자로 부소, 부우, 부여라는 형제가 있었으며, 부루태자는 지나의 9년 홍수때 오행치수법을 우임금에게 알려 주었다고 하는데, 이 방문기록은 지나 한제족 사서의 기록에 많이 남아 있으며, 유주와 영주를 복속시켰는데, 유주는 북경시 계현, 영주는 하북성 무녕현 부근입니다.
기록에 부루단군은 국제적이고 지혜로운 인물로 보이며, 단군왕검의 치세에 대한 업적보다 부루단군의 치세가 아마 단군조선의 기틀을 만든것으로 보이며, 이 부루단군의 흔적으로 부루단지, 업주가리 문화로 근세까지 남아있는데, 업주가리는 집안의 재물을 수호하는 신으로 여기며, 업은 구렁이, 두꺼비, 족제비, 돼지, 사람 등 다양한 동물이 그 대상이 되고, 집안에 들어오면 흥하고 나가면 망하는 믿음이 있으며,
업가리는 단지로 집안의 정결한 곳에 놓여 있으며, 항아리 안에 쌀을 넣어 둔 후, 가을 고사 때 햇곡식으로 바꾸어 넣고, 업신앙은 집안의 재물이 쌓이기를 기원하며, 매년 가을에 곡식이 익어 추수를 하면 햅쌀로 다시 채워 넣고, 그 보관하였던 묵은 쌀로 백설병을 쪄서 만들고, 삼신께 공양을 한다. 합니다.
기록에 신축년은 부루왕검의 원년이다. …중략… 수년이 지난 후에 앙숙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선라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루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하여, 여기에 나오는 앙숙이 바로 양악라추이며 읍루의 조상이며, 선라를 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도라와 동무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와 비류와 졸본 등의 뭇 나라들이고, 선라를 앙숙의 땅에 봉하였는데 그 나라이름이 곳 옥저라고 하였다. 땅을 점유한 선후 관계가 뒤바뀌었지만 거란고전의 본문과 같이 읍차는 곧 옥저임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3세 가륵 단군(기원전2,182~기원전2,137년) 재위 6년 갑진년에 단군이 열양욕살 삭정을 약수지방에 유배하여 종신토록 감옥에 가두었다가, 후에 용서하여 그 땅에 봉하니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초기부터 조선의 제후국으로 조선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신지 고글에게 신시 배달의 역사를 기록한 배달유기를 기록하도록 하였는데, 신지 고글의 후손은 바로 글안, 즉 거란족으로 배달국 신시가 거란족 요나라의 발생지인 것은 이런 연유가 있으며, 신시의 신단수 제례 풍습을 시행하고 또 기록하여 남겨두기도 하여, 마한 풍속에서도 대목에 방울을 걸어서 신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며, 수도를 구월산 장당경으로 옮겼는데, 이때 동생 가록을 신시에 봉하여 사달왕이라고도 하여서, 가록산이 아로과이심기 천산진 북쪽에 생겨났으며, 상춘의 구월산 장당경은 뒤에 44세 단군 구물에 의해 대부여조선의 수도가 되었고,
그 뒤에는 고주몽의 수도가 되었고, 고력산이라고도 했는데 고대 역사가 남겨져 있는 곳이여서, 장당경은 고대 역사를 돌에 기록하여 보관하던 곳으로 보이며, 기록에 고주몽의 도읍지 눌현도 상춘 주가성자라고 해서, 눌현과 장당경은 같은 곳이며, 주가성자는 지금의 천두진 초가구 이고, 고두막한의 졸본성과 고주몽의 졸본성(눌현성), 그리고 고국원왕의 동황성이 바로 여기에 있었고, 소수림왕의 초문사도 있었다. 고 하였습니다.
단군조선의 영토는 애초의 환웅청구시대의 영역에서 예, 맥, 실위(후 몽고),의 연방의 영역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이고, 환국시대부터 북방 제국들의 통치 수단이나 군사 등의 체제는 항상 셋으로 중앙과 좌, 우, 로 나누며, 기록에 그 영역이 북으로 대황몽고, 서로는 알유 즉 오르도스 고원, 동으로 창해, 남으로 양자강 유역 해대라고 했습니다.
'서쪽 대륙 삼위산 남쪽 도산 동쪽 요서의 변한 번조선(기원전1,285~기원전 194년)' 은 번한 1세 치두남 간~29세 소정 간 까지이며. 번조선 30세 서우여 간~68세 수한 간, 까지는 추존이어서 실체가 아니며, 67세 기후간~74세 기준 간 까지 54국으로 도읍은 하북성 당산 난하 안덕향에 도읍하다가 하북성 청려원으로 옮깁니다.
'요서 북쪽 바이칼 호수 동쪽 불함산 남쪽 백산은 진한 진조선(기원전2,333~ 기원전238년)' 단군왕검 통치, 12국이며, '북쪽 백산 반도는 마한 막조선(기원전1,285~기원전193)' 마한 1세 웅백다 간~18세 아라사 간. 막조선 19세 여원흥 간~35세 맹남 간 까지이고 12국으로 도읍은 대동강 평양입니다.
이렇게 삼한 삼조선 체제로 다스렸으며, 중앙 진한 진조선 12국 에서 대단군 왕검이 직접 다스렸는데, 기록에는 진한사람들은 편두를 한 것으로 나오며 이 전통이 사로신라 까지 전승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편두의 풍습은 아프리카 이집트,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등 전세계적인 왕조에 걸쳐 있었습니다.
기록에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하여,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땅의 계를 주어 제후로 삼았다. 고 하였으며,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 난하 남국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이라 이름하고, 엄려홀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하고,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지금의 장춘 속진국 또는 숙신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하며,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 지금의 적봉 청구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이라 이름하고 낙랑홀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 고, 주인씨에게는 길림성 매하구 개마를 주었다. 라고, 기록에 나옵니다.
단군 왕검은 40년 뒤 왕자 부여를 북쪽 우수홀로 보내고, 태자 부루를 지금의 장무시 임검성에 살게 하고, 부소는 적봉시 팔리한진 낙랑홀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는 34세 단군 오루문(기원전795~기원전772년)의 수도였으며, 부우에게 장당경을 감독하게 하였고, 웅씨족장 웅백다로 마한에 책봉하고, 치우의 후손 치두남으로 번한 흥성시 홍애자 험독부에 책봉했으며,
여수기는 예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구려와 진번, 부여 등의 여러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하고,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와 졸본 및 비류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하여, 단씨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고 하였습니다.
일설로는 성경에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사고, 거기에 자기 아내를 묻고,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하였으며,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나오는데, 고고학적으로 이 힛타이트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 힛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 비옥한 초생달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으며, 이 힛타이트인들이 짧은 시간동안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게 된 비결로 힛타이트의 전차이고, 동이족 흉노의 밀접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힛타이트 족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어,
이미 대륙의 태호복희 태양신이 11세 거야발 환웅(기원전2,970~기원전2,878년)때 사마르칸드를 거쳐 중동으로 서부 개척해 나아간 경로를 따라 중동 슈메르족의 태양신 신앙인 마르두크, 미트라 신앙으로 변해 나아갔고, 슈메르 우르남무 법전에서 함무라비 법전과 모세 10계 등이 나왔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또한 고대 힛타이트 종족과 그 봉신 사이에 맺어졌던 일종의 종속계약 내지 조약을 흉내낸 것이 바로 모세의 십계 조약문이라는 기독교 고고학자들의 보편적인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고대 왕들의 계약을 가리키는 말 중에 성경 레위기 8장 '힛타이트 종주권 언약'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어, 배달국이나 단군조의 서방개척과 흉노의 영향을 보게된다는 설입니다.
기록에는 은나라의 갑골문에 기원전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하북성 중산묘에서 기원전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고,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으로, 단군조선이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반도/만주)등의 삼한, 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 유적이 출토된 것입니다.
단군조선의 일설로는 기록에 천하에는 명산이 8개가 있는데, 그 중 세개는 만이 안에 있고, 대륙에 있는 다섯개의 명산은 화산, 수산, 태실, 태산, 동래, 등이고, 인간 장수를 누릴수 있는곳은 봉래라는 삼신산인데 그 산은 그들이 만이라고 부르던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삼신산이 멀지 않은 발해안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곳이 조선이다. 하므로
사문도, 장도, 묘도열도, 를 말하는것으로, 최초의 신시로 보는 것입니다.
신시는 원래 각 종족의 대표가 삼신산 아래에 와서 함께 모여 하늘에 제를 지내고 시장을 열어 문물을 교환하는데, 의회와 시장의 기능만을 갖춘 곳으로, 신교를 기반하는 하나의 소도인데, 각 종족이 제사를 지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할 때만 나라로서 의사를 결정하고 시장을 여는 초국가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또 대륙 산동해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다는 당시 악명높던 급류와 안개 등으로 험독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어서, 폭이 7 키로에 불과한 험독은 이곳을 보호하던 해자역활을 톡톡이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묘도군도의 장도 삼신산 일각 기암괴석들의 형상은 부여 금남지, 창경궁 통면전 석지, 교태전 후원 아미산, 경회루, 안압지, 소쇄원, 낙선재 후원, 등의 조경물로 재탄생하여, 삼신산의 이상향을 그려내고 있으며, 사로신라 시절 아랍세계에서 섬으로 묘사된 신라가 이곳이라 추정합니다.
또 홍산문화의 발견은 각종 사서들 중에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등의 사료가 사실로 판단나고, 7만 6천여권에 달하는 사고전서 동이제족의 사료를 따로 분리하자, 동이제족의 문화가 모든 한제족들의 원류로 판별되고, 우이가 곳 고조선이며, 요순과 공자·백이·숙제·강태공·맹자·묵자, 가 동이족이고, 부여의 뿌리가 부유이며, 부유는 산동성 부산이 발원지이고, 고구려가 한나라 때 개국한 나라가 아니라 하, 우나라 시절에도 있었던 나라이며, 당나라 때 까지도 그 영토가 내몽고 적봉이 고구려의 서토라 되어 있습니다.
또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 조각상과 곰 석상이 출토되어,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홍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인 기원전 3,898년과 기원전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후한서에는 마한에는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활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목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조국·일리국·불리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야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총 50여 국이 있다. 고 하였고,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처음에는 6개 나라였다가 나뉘어져서 12개 나라로 되었고, 변진 역시 12개 나라이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락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야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야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야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 있는바,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다. 라 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진한의 땅은 마한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의 늙은이 기로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의 통일전쟁 진역을 피하기 위해서 스며들듯이 한이라는 땅에 왔는데, 마한은 그 동쪽 땅을 떼어주었다. 하고, 이 진한사람의 말은 진나라 사람의 말과 비슷했으나, 연나라와 제나라의 말과는 사물에 대한 명칭만 달랐다. 하여, 이 말의 뜻은 제나라가 자리잡은 지역이 오늘날 산동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밑인 강소성에 스며들듯이 왔다. 는 것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2개의 진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이 왜와 더불어 경계를 접하고 있다. 하고, 양자강의 하구인 숭명도인 목지국 위의 강소성 지역이 바로 진한 지역이고, 변진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섞여서 거주한다.
그런데 성곽이 있었으며, 그 의복과 거처하는 방법이 진한 사람들과 같았다. 하며, 이 목지국 밑의 선하령과 그 안쪽의 절강성이 바로 변진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변진 12개국에서 철이 나는데, 그 철을 취해간 나라 이름들이 삼한 전체를 뜻하는 한과 예, 그리고 왜가 이 철들을 모두 취해간다 하여, 변한이라는 나라 들은 공통적으로 철이 났는데, 반도, 열도 구주를 포함한 삼한사람은 물론이고, 예, 그리고 필리핀 등지의 왜들이 모두 이 철을 구해갔으며, 모든 시장에서는 물건을 살 때 이 철을 썼는데, 이는 한제족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았으며, 국제 화백 특구인 박달 낙랑과 대방인 이군에 까지 이 철을 공급했습니다.
이러한 삼한은 마치 계란 노른자가 두 개인 이를 흔히들 쌍알이라고 말하는데, 이 쌍알이 목지국 상하로 있고, 그 주변에 흰자위로 둘러싸인 것이 마한이라 할수 있으며, 또 진한 번한이나 마한은 각각 간, 칸을 두고, 중심국 진한은 대칸인 왕검이 다스렸으며, 간 밑에는 각각 5가가 있었다고 기록에 나오며, 국가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직할후국에 예, 맥, 부여, 옥저, 구려, 진, 숙신, 읍루, 등과 변방후국의 후국으로 동호, 오환, 선비, 해, 오손, 유연, 산융(흉노), 돌궐(원튀르크), 실위(원몽골) 등을 후국제도로 다스렸습니다.
참고로 일설에는 본래 삼황의 정체는 단군조선이 삼한을 나누어 다스리던 풍백, 우사, 운사, 인데, 풍백은 진한왕인 천황이 되어 제사장과 씨내리를 겸하고, 우사는 마한왕인 지황이 되어 영토권과 씨받이를 관장하고, 운사는 번한왕인 인황이 되어 봉토권과 조공권을 관장하였다. 하고, 한제족은 삼황에 대하여 사전에 중국 고대의 천자로서 복희씨, 신농씨, 황제 또는 수인씨. 또는 포희씨, 여와씨, 인황씨, 또 일설에는 천황씨, 지황씨, 인황씨라 한다"고 되어 있으며,
고조선의 중앙정부는 진한이었고, 진한은 인계로서 단군이 바로 진한왕인 인황인데, 단군은 인황이면서 천황을 겸하고 있었으며, 이 단군을 대신하여 영토권을 행사하던 지황이 마한왕이며, 이 마한왕은 중국의 고대신화에 서왕모로 알려진 태음신이고, 서왕모가 다스린 영토가 지계라고 불리던 우물(井)이며, 우물은 상고시대에 지황의 궁전을 부르는 이름이고, 지황 서왕모의 역할은 여신을 거느리고 천자를 생산하는 것으로, 고대국가의 시조들은 하나같이 아버지가 분명하지 않고 신의 아들이라고 미화되어 있는데, 이는 미화된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한 역사입니다.
즉 그들은 실제로 신의 아들로, 그 신은 인신인 동이족의 우두머리인 단군이었는데, 지황에 의해 여신전에서 교육받은 신녀들은 단군의 씨를 받아 속세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고 태후가 되었으며, 태후가 낳은 임금들, 그들이 바로 천자이다. 또 천황이면서 인황인 단군은 태양신에 해당하고, 지황인 서왕모는 태음신이라고 하며, 본래는 인황이어야 하지만 태양신 일 수 없는 사람들이 천자들이며, 그들은 햇님 태양신과 달님 태음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별님으로 불리워, 결국 제족은 하늘의 신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살던 곳을 하늘나라 라고 불렀던 것이다. 라는 설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삼황의 설명은 한제족국의 역대 왕조와 삼황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으나, 삼황의 위업이 너무나 혁혁하여 한제족국의 역대 제왕들이 자신들을 삼황의 후예로 자처하였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실제로 한제족들이 자랑하는 가장 오래된 정통 사서 서경 상서에는 위의 어느 한 인물도 자신들의 선조로 거론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의 칭호가 중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전한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따라서 사마천이 참고하였을 삼황에 대한 기록은 모두 고기였다고 생각해야 하며, 이때의 고기는 단순히 오래된 서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태고나 삼고의 기록이라는 뜻이인데, 그 이전에는 제족의 신전에만 감추어져 있었던 기록을한대에 이르러서야 찾아내 비로소 자기들의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 사실은 한제국의 건국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한제국이 성립하기 직전에 일어났고, 이때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동이를 정벌했다는 사실은 고기들의 유출경로에 대한 해명이 되는 것이며, 진시황이 불태운 자료들은 동이의 세계지배를 기록한 서적들이며, 역사기록들은 동이족의 중심신전이 동쪽으로 옮겨가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을 세운 뒤에, 지부 신전에 거주하던 동이제족들이 세간에 유포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제족들의 왕조들과 삼황과는 실제로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 삼황은 동이족의 통치자들이었다는 추론이 성립하며, 실제로 태호복희를 비롯한 삼황으로 지칭되는 인물들이 모두 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은 이제 사학계의 정설이 되고 있습니다.
또 1,565 년간 지속된 배달국의 후예들은 아시아 전역, 특히 대륙 서북방과 동남 해안으로 진출하여 소위 동이를 위시한 사이, 구이, 구리 등의 말로 불리우면서, 후에 진나라를 위시한 여러 왕조를 개국하는데, 그 예로 대륙 서안 피라미드 봉분 구조가 예맥족의 봉분구조와 매우 닮아있다는 점과, 둔황 석굴 내부의 그림 중 풍백, 우사, 운사,의 그림이 있는 사례나, 진시황의 계보가 소호금천을 선조로 두고, 병마용 군사모습에 동이제족의 상투한 모습만 보더라도, 배달국 말기에서 단군조선 초기의 번조선이 진출한 사례로 보입니다.
참고로 단군조선 개국 300여년전에 영국 브리티쉬 제도로 이주한 아시안계 비이커족들의 유적인 고인돌과 그들이 쓰던 말이 문장 말미에 동사를 쓰는 제족의 말처럼 같게 웨일즈 지방 등에 고어로 남아있으며, 스톤핸지나 애브버리 둘레돌 등 많은 아일랜드 유적을 만들며,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요르단, 러시아 코카사스 지역의 고인돌의 원형은 반도에 있는 고인돌이 되며, 지금의 고어족도 고아시아계통으로 보고있습니다.
참고로 선비족은 단군조선 말기에 등장하는 연나라에서 비롯된 족으로, 한족과 다른 원시 트르크 몽골계이며, 후에 선비족들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국명을 연이라 부른 사실과, 한족들한테 모반한 자들로 보이는 공손연 (237년), 안록산 (756년), 사사명 (759년) 등이 한족과 차별성을 내세울 때 자신들을 연왕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알 수 있으며, 기원전 311~279년 중 연의 진개는 단군조선 동호를 공격하고, 동북방으로 영역을 대폭 넓혀 오늘날의 난하 유역에 요동과 요서를 포함하는 5개의 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참고로 기원전 천여년은 종족의 이동이 계속된 정황으로 그때 까지의 빗살무늬 토기 정착민들과 바이칼 북부지방에서 남하한 제족들의 민무늬 토기민들의 교체가 발해만, 만주나 반도에서 보여진다는 점에서 퉁구스라 지칭되는 강이름과 지역명에서 비롯한 소욘족들의 남하로 반도의 원주민들로 굳어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단군조선과 고려가 순록, 맥(고구려)이 너구리, 부여가 부이르(숫수달), 몽골이 엘벵키 너구리, 발해가 늑대 또는 이리, 단과 타타르가 수달, 솔롱고스가 무지개가 아닌 족제비과에 속하는 솔롱고(黃鼠狼)와 관계가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또 몽고 오르콘강 유역에 있는 궐특근비에는 터키 돌궐왕조가 고대 튀르크 문자로 글을 짖고 세긴 내용에 단군의 말이 전해지는데, 긴 문장 말미에 '너희는 창공처럼 걸림이 없고 누구에게나 구속당하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라.' 라는 말과 함께 고구려 왕조들까지 말해, 단군조선과 고구려의 서진과 돌궐의 동진으로 서로간 유대를 알 수 있게합니다.
단군조의 일본 진출은 6세기로 3세 가륵단군시절 두지주 예읍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그곳 추장 소시모리를 처형하였는데, 이 소시모리의 후손으로, 36세 매륵단군때의 인물인 협야후 배반명이 일본으로 건너가(기원전667년) 그곳을 정복하고 스스로 천왕이라 하여, 일본 초대 진무천왕이 되었는데, 역사서 궁하문서나 죽내문서의 기록들이 대륙 단군조의 사실이며, 천신신앙이나 신교 선의 문화가 1세기 전후로 일본으로 가서 신도로 자리잡습니다.
일설에 국명에 한 이 붙은 명칭에서 제족을 찾는 사례로는 몽골족의 언어 중 4대 왕국인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 한국, 킵차크 한국, 일한국, 의 이름에 비록 한자표기는 다르지만 한이 포함되어 있고, 마야인들의 '간' 이 신적존재와 관계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북미의 호피 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한야'는 전쟁신을 가리키며, 잉카의 천상세계는 하난파차로, 여기서 하난은 하늘 세계 혹은 높다 라는 뜻이어서, 이러한 북남미 여러 부족들의 말 한, 칸을 어간으로 하는 어휘 대부분이 하늘 혹은 하느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동남아시아 미얀마의 네 부족 중 맨 위쪽에 위치한 친족이 부르는 신의 이름은 팟 히안인데, '팟'은 아버지, 히안은 하늘이란 뜻이며, 인도의 원주민인 산탈족의 창조신화 산탈 신화에 등장하는 새의 이름이 한스와 한신으로, 그 이름에 한이 들어 있으며, 태국사람들도 한과 유사한 개념인 '콰한'을 갖고 있고, 인도네시아의 신화에서 최고신은 커투한인데, 커는 크다는 뜻이고, 투한은 주 하느님이라는 뜻이며, 필리핀의 이고로트 원주민 최고신은 카후니안이다. 라 하여, 연구자 주장은 '한'은 문명의 기원에 있어서 동아시아의 문명을 하나로 묶어주는 띠와 같은 언어라는 것입니다.
또한 원형이 알이란 말에서 비롯된 언어로 수메르의 딩기르, 이집트의 타르쿠, 히타이트의 타르훈, 은나라의 탕군과
투르크의 텡그리, 시베리아의 탕가라, 등의 말인데, 이는 탱그리는 창조와 보호의 신으로 모든존재와 자연현상을 관장하며, 하늘의 천명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최고신으로, 투르크, 몽골, 퉁구스, 등 여러 유목민족에서 영향을 미쳤는데, 이 말의 기원이 동남아시아와 황해가 육지였을 순다랜드에서라 추정해 봅니다.
일설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400여년)은 먼저 기원전 100여년 부터 고조선의 약세와 해체로 인한 동방민족 이동에서 파급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훈제국 아틸라의 사망으로 멸망한 후 신라와 같은 기마 어대를 한 마자르 말갈족이 유입하여 헝가리 왕국을 계승하고, 유연족이 동진하여 캅카스 지방과 다뉴브강, 라인강 우안 일대에 6세기 초에 정착하며, 부여족이 캅카스 지방을 거쳐 발칸 반도에 들어가서 옛 조상들 신의 이름을 댕구르라 부르는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하며,
오손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족과 융합하여 오늘의 카자흐 민족을 형성하였고, 수서에 돌궐의 선조는 평양의 잡호로 성은 '아사나' 씨이다 라 하고, 기원지 위투켄은 고조선 말에서 유래한 돌궐(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이동하는 일련의 이동이 단군조선의 흥망과 관계하고 있다는 주장인데, 사실상 역사를 돌아보면 맞수가 없는 나라는 단군조선, 몽골제국, 미국, 이 될것 같습니다.
참고로 종족 대이동은 아시아 아프리카 인종이동은 구,신석기 시대(70만여년~1만여년), 아리안족의 대이동(기원전 1,700년~기원전1,800년), 게르만족 대이동(400~500년) 문명과 국가의 탄생으로 보기도 하며, 국가 형성은 아키드 제국(기원전2,350~기원전2.150년), 바빌로니아(기원전2,300~기원전514년), 하,상,주,(기원전2,000년~기원전256년) 청동기, 그리이스(기원전2,700~기원전2,000년), 히타이트(기원전1,800년~기원전1,180년), 아시리아(기원전1,180~기원전612), 쿠시왕국(아프리카 수단 기원전1,000년~350년), 악숨왕국(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기원전1,000 ~960년), 입니다.
참고로 이 단군조선 진한이 속한 만주지역은 대륙문명사에서 지배하던 많은 나라들과 여러 종교의 발생지이고, 서쪽 이란 페르시아 지역 또한 여러 나라들이나 종교들이 발생하는 지역으로 상호 겹치고 있는데, 자전과 공전하는 지구의 축의 기울기와 유사한 차이로 위도상 위치하고 있어, 인류의 역사 또한 환경에 깊이있게 얽힌것 같습니다.
단군조선의 국가정치 체제는 만주와 같이 광대한 지역은 인구수는 적은데 영토가 클 때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상 관리상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배달국이나 단군조선, 부여조는 어쩔 수 없이 후국체제나 느슨한 연방제로 나라를 운영하게 되며,
실질적으로 정치·철학·문화 체계를 갖춘 국가였다는 점에서 국가철학의 시원으로 보는데, 2세 부루 단군 때부터 토지의 경계를 우물정자로 그어 구분하여 전결을 정해주는, 정전제라는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치초로 시행하였으며, 도량형을 모두 관의 표준에 맞게 통일하고, 삼베와 모시의 시장가격을 어디서나 똑같게 하며, 백성들에게 머리카락을 땋아서 머리를 덮게 하시고, 푸른 옷을 입게 합니다.
어아지악 이라는 신을 경배하는 제천가가 있었는데, 이 노래는 고구려의 9세 고열천 열제 때 을파소가 지은 경전 참전계경 속으로 수렴되어 신교문화의 삼대 경전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정, 이 되며, 또 노인은 노래부르며 아동은 춤을 추는 영가무도가 있다고 논어나 정자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도 악기를 즐겨 다루어 공후라는 현악기로 연주하며 부른 '공무도하가'는 당시 널리 퍼져 공후와 함께 기원전 106년경 한나라에 전해졌는데, 참고로 이 노래의 배경이 될 수 있는 기록으로는 '소도' 라는 별읍을 말하고, 기록에 삼한에 소도라고 부르는 별다른 읍이 있는데, 북과 방울을 매단 장대를 세워 귀신한테 제사 지낸다. 소도는 신성한 곳이여서 만약 범죄자가 그 곳에 숨어들면 그를 잡을수가 없었다. 하였으며,
소도는 응당 추도에서 기원한것이다. 라고 하며, 이 소도는 물길로 둘러싸인 신성한 곳으로 이곳 물가를 지키던 장수 곽리자고가 소도에서 타락해 쫒겨난 백수광부가 울부짖다 그 물에 빠져 죽자, 이를 본 그의 처가 슬피울며 공후를 켜며 노래하다 물에 빠져죽자, 이를 본 곽리지고가 아내 여옥에게 들려주자, 여옥이 공후를 켜며 노래 부른것이 공무도하가 입니다.
참고로 공무도하가는 가야의 구지가 고구려의 황조가와 함께 한역으로 된 시가이지만, 그 사의가 남아있는 아시아 최초의 시가이며, 이 4행의 시가 형식은 제족 시가의 기본형식이 되며, 특히 구지가는 원시가무가 느껴지며, 제의때
주연 속에서 불리웠다고 보여집니다.
이런 전통적 음악도 조형의 원리와 같이 북방의 수리 삼재사상이나 나중에 나온 음양오행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데, 가령 3분박을 기본으로 중심에서 위 아래로 떠는 농현기법은 주변국의 1박 2등분 2박관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며, 현대에까지 남아있는 풍물굿에 까지 배달국 한웅의 풍물이라하여, 풍물굿패의 삼즉일 구조가 앞선 깃발 기와 앞치배, 뒷치배 잡색과 세세한 치장에서 악기, 박, 진행 등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사회 덕목은 세상에서 참전에게 지켜야 할 계가 있고, 조의에게 율이 있어 숭상하는 법도가 있다 하여, 의관을 갖춘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다니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높은 지위를 얻었다. 하고, 착한 마음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악의 우두머리로 가정하고 활을 쏘았다. 라는 덕목이 만들어집니다.
기원전 4세기경 노자 도덕경이 전해저 내려오는 과정에서 필사로 옮겨졌기 때문에, 애초의 원본과 다른 내용을 후에 경전으로 믿어왔는데, 1973년 중국 호남성 장사에 있는 마왕퇴에서 비단에 쓰인 백서 도덕경이 발견이 되며, 이것은 갑본과 을본 두 가지인데, 그 결자를 보충해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도덕경과는 그 내용이 다른 백서도덕경이 출현하게 된 것인데, 문제는 이 백서 도덕경은 현재의 알려진 도덕경 보다 원래의 도덕경에 더욱 가까운 내용으로, 덕경을 앞세우고 도경은 후에 있다는 점입니다.
즉 고대의 세계체제에서 예와 악으로 이원적으로 설명할 때에 예만 있는 세계를 뜻하는데, 덕경 제 1장에서 노자는 세상을 구분하는 기준이 각박하게 살수 밖에 없는 세상을 얄팍한 세상으로 보고 있고, 그 반대로 자발적인 헌신과 상호신뢰가 충격을 받아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두툼한세상으로 보고 있으며, 이 투툼한 세상이란 것이 환국과 고조선 문명의 순방지치와 동일한 개념이라는 점으로, 순방의 뜻은 순박함이 두텁다 라는 뜻인데, 노자가 덕경 첫머리에 피력한 섬찟할 정도로 현 세상에 대해서 도덕 평가를 하는 것은 결국 순방체제에 대한 선가 특유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이며, 당시 단군조선에는 덕교라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또 노자 79장에 나오는 우철의 의미는 그당시 10/1 세금을 철법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런 징세를 돕는 당시 삼한시대 시장이란 뜻으로, 우철은 왕권에 화폐주조차익을 주는 시장과, 좌계는 천독이라는 일반 백성에게 화폐주조차익을 주는 시장의, 우철과 좌계란 두가지의 시장이 있었다 했는데, 이 글자는 한자의 우와 좌는 사람 인변이 붙으나 떨어지나 똑같다는 것으로, 좌의정, 우의정 모두 의정 활동을 보좌, 보우하는 역할이라는 것인데, 아므튼 단군시절부터 이러한 호혜시장이란 돈이 없으면, 돈을 빌릴 수밖에 없고, 이 돈을 못 갚으면, 노예생활을 강요당하는데, 돈을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시장이 바로 호혜시장인 것입니다.
경전 신지비사는 6세 달문단군(기원전2,083~기원전2,047년) 신하 신지 발리가 지은 서효사로, 옛적에 삼신께 제사 지낼 때 서원하던 글이며, 부루태자의 오행치수법 자부선생의 책력 칠정운천도, 금간옥첩 황제중경(홍범)과 같이 배달국 복희씨의 역의 창시와 더불어 경전을 재정비 하였으며, 소전의 후손 신농씨의 농법과 의약 창시 등의 업적들이 이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참고로 신지비사란 일종의 서원하는 예언서로 이씨조선 서운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의 구변진단지도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 라는 말이 있어, 3천여 년 후를 예언하고 기다려, 한 나라 수립의 정당성과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신기의 비기라하여, 용비어천가를 지었는데, 이 구변진단이란 고조선, 삼조선,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거치고 통일신라, 발해, 고려까지 국명이 9번 변했다는 뜻이며, 진단은 진방 즉 진역의 단군조선을 일컫고 동방으로 목을 상징한다. 하였는데, 이는 최치원이 가락국 통합을 위해 지은 글과 같이, 권근이 조선왕조의 정당 당위성을 위한 기록이라 보여지며, 이 신지비사는 후에 분서되어 없어집니다.
또 권근이 명의 주원장을 배알 할 때 주원장이 시고개벽동이주라는 시제를 주었는데, 이는 상고시대를 개벽한 동이의 왕은 누구냐는 의미를 담고 있고, 시고개벽주인 마고와 한인, 한웅의 역사를 말할 것인지 의도적 시험을 한 것으로, 마고와 삼성 중 한인, 한웅 이성은 피아간 금기시된 역사여서 권근은 기자의 대로 연결 지어, 신생 조선의 이름자는 고조선의 명맥이 아닌 환작된 기자조선의 조선임을 밝히며, 이 위기를 넘기며,
이씨조선 건국전인 1,390년 공양왕 2년에 명나라 사신 진자성를 파견하여, 개성 저잣거리에서 토지문서를 산더미처
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 모든 대륙에 있었던 재산 기록을 없애고, 조천궁 도사 서사호를 시켜 백두대간에 쇠말뚝을 박아 천자의 기운을 끊는 등 사전 정비작업을 하였으며, 이를 기화로 대륙을 기록한 고대사서는 수거되어 사라지고, 구월산 삼성당은 하륜에 의해 서서히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망가트려 졌으며, 1,488년 성종 19년 명나라 사신이 평양에 있는 가짜 기자의 분묘와 사당을 배알한 후, 단군사당에 배례하여, 기자를 황제 헌원의 16세손으로 만들어 끼워 넣음으로써 단군은 하위 계념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900년 후, 복생이 상서대전을 만들어 기자를 위대한 사상가로 탈바꿈시키고, 기자조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환작을 하였는데, 존주양이의 틀에서 이조는 명의 협박이 두려워 구월산 삼성당을 자진하여 혁파하고, 고조선을 난도질하고 단군묘를 평양에 만들어 적당한 선에서 안무하였고, 고구리산은 궐산이라는 이름을 거쳐 구월산으로 창지개명되었고, 기준은 바다 건너 한반도 익산에 터를 닦아 마한을 세웠다고 자랑하고, 도읍하던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고 아부했으니, 태평관으로 돌아오던 명나라 사신들은 알아서 기는 그 진정어린 충정에 얼마나 감동했을까 싶습니다.
4세 오사구 단군(기원전2,137~기원전2,199년) 때인 기원전 2,133년에 원공패전이라고 하는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돈과 후세의 명도전을 주조하여 경제를 유통 시켰으며, 배달국부터 있어온 곡옥은 장식만을 위한 것과 더불어 교환경제의 수단으로도 활용 되였을 것으로 보여지는게, 페르시아의 귀족의 승마한 그림에서 패용된 곡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며, 당시의 돈을 만든 이유가 6세 달문단군 시절부터 시작된 소도와 화백제 군 운용상 교환할 수 있는 돈을 미리 준비한듯 보이며, 5세 단군 구을(기원전2,099~기원전2,083년)은 처음으로 60갑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는데, 단군 구을은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서거하였는데 지금 대동강 평양시 동쪽 대박산에 묻혔습니다.
살수에 조선소를 세우고 또 새로 평양성과 건청궁을 세웠는데, 살수는 사리수수가 있는 심양시 혼하이며, 그곳에는 살수대첩을 직접 지휘한 을지문덕 장군의 직속 상관이었던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묘인 원수림이 남아있습니다.
또 단군조선을 상징하는 고인돌과 장승, 비파형청동검, 청동거울, 등의 제작 제조물 중 다뉴세문경은 현대에서도 재현하기 힘든 수준 높은 제련기술을 보여주며, 일명 방짜유기로 불리우는 놋쇠로 만든 유기도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참고로 기원전 7세기 전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와 반도에서는 3종류의 화폐가 있었는데, 첨수도, 원절식도전, 방절식도전, 이라 했으며, 첨수도는 끝이 뽀족한 것, 원절식은 화폐를 묶기 위해 손잡이에 구멍을 원으로 낸 것, 방절식은 구멍이 사각형이며, 첨수도는 고죽국 이나 기자 관련족의 화폐였고, 원절식도전 즉 명도전은 고조선, 방절식은 연나라화폐라 했는데, 명도폐 연구에서는 명도전(二원절식도전)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도전은 연나라 화폐라고 명확히 밝혔으며, 삼한시대 제조 유통되었던 무문철전, 철정전, 제명도패, 가 있으며, 포전, 일화전, 평양에서 거푸집이 발견된 반량전, 오수전, 명화전,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군대의 문물은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는 하, 은, 주, 가 있었던 황하유역의 문명을 꽃피우게 되는데, 일찍이기원전 3천여년 전부터 농업이 발달하다가 정체된 양자강 유역의 문명과는 달리, 대륙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하게 되며, 티벳지역에서 강거가 기원전2,175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군을 보내 지백특에서 이를 정벌합니다.
6세 달문단군(기원전2,083~기원전2,047년)은 5세 구을단군 양가에 이어 우가로, 이때 신하 신지 발리가 신지비사로 알려진 삼신께 제사지낼 때 서원하는 서효사를 지어 삼한땅 세 곳의 수도를 각각 저울추, 저울판, 저울대로 비유하여, 저울을 이루는 이들 세 요소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물건의 무게를 달 수 없듯이, 삼한관경제가 조화를 이루고 잘 보전되어야 나라가 흥할 것이라 한 것인데, 이것이 배달국으로부터 전승된 소도와 화백제로 운영되는 제도이며, 실제로 삼한관경제가 잘 유지되는 동안 단군조선은 번성했고 반면, 삼한관경제가 와해되면서 나라도 멸망했습니다.
5세 단군 구을(기원전2,099~기원전2,83년)은 마한 땅에 나가서 묻혔는데, 마한 땅에서 일어난 일인데 번한서 이 사건에 개입하여서 군사를 보내어 경호했다고 하여, 아마 6세 단군 달문이 5세 단군 구을을 축출하였다고 보이며, 단군 달문은 35년 후에야 여러 제후들을 구월산에 모아서 정식으로 즉위하고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했는데, 이는 본래
우가의 고장으로 소밀랑이라고 하던 곳이며, 백아강(마한)은 저울그릇, 소밀랑은 저울대, 안덕향(번한)은 저울추라는 신경 예찬의 노래가 지어졌습니다.
우가 달문의 새수도 소밀랑은 소의 물이라는 뜻으로, 이미 신석기 유적지중에서 우하량 유적지가 대릉하 최상류에 있으니 대릉하가 단군 시대에 소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대릉하의 가지중에 망우하가 있는데 이는 숫소물이라는 뜻이고, 내몽고 오한기에서 내려와 요녕성 조양시 동쪽에서 대릉하로 합쳐지는데, 요나라는 여기 망우하 상류에 백천주를 두었고, 그 북쪽 최상류에 북천주까지 두었으며, 북천주는 금나라때의 천주라고도 합니다.
이 북천주 위치인 현재의 오한기 대전자향에서 엄청난 고고학적 발굴 결과가 있었는데, 약 4,000년전부터 3,000년전 사이에 만들어진 대전자에서는 참호를 판 성지 내에 백성들의 거주지와 궁전터가 발굴되었으며, 아울러 800개의 묘장이 발굴되었는데, 그중에는 대륙 최초의 황금 장식 귀걸이가 있었고, 그외 1,600개의 도자기는 생활 도기가 아니라 매우 예술적인 것으로서 제기, 술잔 등이었고 이때 붉은 안료는 옷나무 칠로서 대륙 최초로 칠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 칠기 기술과 채도의 문양은 용산문화와 은나라에 계승되었습니다.
그외 다양한 옥기와 청동기가 있었는데, 청동기는 모두 57건이며 그중 41건은 귀걸이였으며, 이들은 순동이 아니라 시라무렌에서 나온 주석을 함유한 청동이었고, 구리칼도 있었는데 이는 주조를 한 후에 단조하여 만들었으며, 겉에는 주석이 함유된 철광석 안료를 사용했고, 그외 보석 마노를 이용한 잔도 있었으며, 생물 부장품으로는 개머리와 돼지머리 등도 있었는데, 이중 개의 유전자는 현재 일본 오키나와의 류규견과 유전자가 완전 일치하여 단군시대의 일본교류를 증명해줍니다.
이곳은 어느 문화지와 비교할 수 없는 대량 청동기 발굴 문화지로서 그 예술 수준은 왕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한제족국에서도 감탄하여 세계적인 고편이라고 명명하여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단군시대 천년수도 백악산 아사달이며 풍요의 도시이고 예술의 도시이고, 백악산아사달의 북쪽 평원은 우고토라고 하는데 우가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백악산 서북쪽에 역시 청동기 시대 산성터가 발굴되었는데 오한기 살리파향 하라구촌에 위치한 성자산이 있고, 이곳에서는 동북 최대의 제사 유적지가 발굴되었는데, 산정부에 석축을 둘러 쌓은 것으로, 동쪽으로는 요나라 강성주 성이 있는데, 요나라 태조비가 신인에게 납치되어서 애를 가졌고, 그애가 자라서 요나라 태종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산성의 총 둘레는 1,310m이고 9개의 문이 있으며, 그 안에 돼지머리를 조각한 거대석이 있습니다.
9세 아술 단군(기원전1,985~1,950년)때 기원전1,984년에 청해욕살 우착이 군대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아술단군이 상춘으로 피하였고, 구월산의 남쪽에 신궁을 지었으며, 우지와 우율에게 명하여 토벌케하여 죽였으며, 3년 뒤인 기원전1,981년에 아사달로 환궁하였으며, 13대 흘달 단군(기원전1,782~기원전1,721년)은 우가로 이 때 천문기록(기원전1,733년) 오행성의 결집 현상기록이나, 제29세 마휴단군(기원전943~909년) 9년 때 남해의 바다물이 3척이나 뒤로 물러났다고 하였는데, 현재에 와서 천문기록이나 조석력 차이가 컴퓨터 계산으로 증명됩니다.
기원전1,583년 16세 위나 단군(기원전1,610~기원전1,552년) 때에 구환이 영고탑에 모여 제사지냈는데, 경을 읽으며 마당을 밟는 창경답정을 5일간 하였고, 이때 등불을 들고 애한가를 부르면서 불함산의 붉은 꽃을 노래한다 하였는데, 여기서 불함산은 곧 태백산, 도태산, 현재 대광정자산이며, 기원전1,345년 20세 고홀 단군(기원전1,380~기원전1,337년) 때에 영고탑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으며, 이후 기원전1,112년, 25세 솔나 단군(기원전1,150~기원전1,062년)은 영고탑으로 천도하였습니다.
1981년 옹고트 동남쪽 오동화진 해방영자 오포산에서 2건의 대형 청동솥과 한건의 청동시루가 발견되었는데, 옹고트는 신성하다는 뜻이며, 부여의 천신 제사인 영고와 발음이 통하고, 이중 청동시루에는 두 개의 원시 한자가 새겨졌는데, 하나는 고대 금문에서 녕의 약자인 녕宁이라는 글자였고, 또 하나는 아亞 모양인데 성곽의 곽자의 상형자가 가로, 세로로 한번더 포개진 글자로, 연구에 의하면 좌측의 것이 곽의 고자이며 이것이 포개져도 역시 곽郭의 옛 글자여서, 영고탑의 고古 발음과 같은 고固이거나, 그 뜻은 성城 또는 나라 국國과 같은 뜻일 수도 있어서, 여기 청동시루에 새겨진 영寧자는 바로 영고탑寧古塔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지역의 옛 지명에도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33세 단군 감물(기원전819~기원전795년)은 영고탑 서문밖 감물산에 삼성사를 세워 단군묘라고도 했으며, 옹고트 북쪽 삼성타라에서 대형 옥룡이 발굴되어 대륙 옹우특기현의 상징이 되었는데, 길이 26cm이고, 삼성사가 옹구트기 북쪽이고 영고탑은 옹우특기 동남쪽으로, 월명구와 조양구 사이가 단군 솔나시대 영고탑성이 있던 곳으로 고려되는데, 1971년 조격온도소목 서쪽 삼성타라에서 40cm에 이르는 대형 옥룡이 출토되면서 이후로 옹고트를 중화제일룡이 나타난 옥룡의 고향이라고 하는데, 이 삼성타라가 삼성사였을 것이며, 최근에 삼성타라 부근에서도 암각화가 발견되었다고 전합니다.
조격온도소목 북쪽에 포리돈이라고 하는 호수가 있으며, 밝은달, 발달을 몽고어로 보리돈이라고 적는데, 경치가 빼어난데다가 호수가 용 모양이라고 하고 호수 북쪽 언덕에는 몽고족이 매년 제사지내는 제단이 남아있으며, 조격온도소목의 여러 전설은 후단군의 영고탑 천도 이전의 전단군시대 16세 위나 단군 때에 창경답정하던 영고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합니다.
옹고트 동남쪽 오한기 고로판호 북쪽 마을인 주가지 묘지는 노합하 중류의 홍산 저수지 끝지점 동안인데, 이곳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에 해당하는 54좌 묘장이 있고, 토갱수혈묘이며 목곽장이며, 부장품은 남산근과 같은 피혁도초와 청동도 3건인데 동물문 병도와 철치병도 등이 있고, 철치병도는 검자루 부분에 톱니 모양이 있는 것으로서 나무 자루에 매다는 것이고, 그외 구리송곳, 귀걸이, 연주형식, 동포, 원포, 쌍련포, 방구, 쌍미동식, 조형식, 고동목걸이, 녹송석, 마포, 등이 보이며, 이것이 영고탑 시대의 묘장입니다.
주가지로부터 노합하 반대쪽인 서북쪽의 옹고트 대포자 유지에서는 공병식 청동단검 2개가 부장된 묘가 발굴되었고 특히 흑룡강 조원시 백금보 유지 형식의 도기가 나왔는데, 백금보유지는 기하문으로 유명하고, 또 옹고트 서남쪽 적봉시 하가점의 상층문화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들이 영고탑 시대의 유물이며, 이곳에서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 청동검 중군 형식이라고 하는데, 주로 창에 끼우는 것으로, 구멍에 끼우는 형이라 하여 공병식이라 하고, 주로 노합하 영성 남산근에서 나오고 극시극등기, 파림좌기, 옹우특기, 우하량 북쪽까지 나오는 영고탑 시대 유물로 보면 됩니다.
본래 영고탑은 발해 안원부 부주인 영주였는데, 해모수 북부여시대에 영주가 북막 추장에게 약탈당한 적이 있고, 마지막 단제 고열가는 영품리왕으로 격하되었다고 하며, 영품리왕의 시비가 낳은 딸이 동명왕이라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있고, 졸본부여의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열가의 후손이라는 설이 한단고기에 있으며, 후한서 부여전에서는 색리왕의 시비가 낳은 아들이 동명왕인데 도망쳐서 부여에 가서 왕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34세 오루문 단군(기원전795~기원전772년)은 낙랑홀로 천도하며, 수도 낙랑의 위치는 우북평군의 치소인 평강현이고, 평강현 고성은 흑성자에 있는데, 그 북쪽에 남산근 유적지가 있고 이를 포함한 낙랑성이 있었으며, 37세 단군 마물(기원전646~기원전590년) 때에 성 북쪽에 샘이 솟아서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하며, 낙랑홀의 물로 추정되는 요락수가 있었고, 왕망 때에 낙랑은 토지가 좋고 인민이 요락하다고 기록하였으니 낙랑은 요락수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요락수는 영주 유성 관할인데 지금의 노합하이고, 상류에 많은 청동기 고대 묘장이 있습니다.
적봉시 영성현 팔리한 고성의 남산근 유적지는 노합하 지류 곤도하 연안으로서 대형 석곽묘 2기 등 분묘 9좌가 발굴되고, 무려 500여건의 청동기물이 나왔는데, 기물의 연대는 대략 상, 은나라 후반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로, 남산근에 발굴된 청동기물을 내용적으로 보면 청동도가 9건, 청동부가 8건, 청동검이 7건, 칼집이 4건, 투구 1건, 원형 방패 1건, 청동과 3건, 청동모 3건, 등 무기와 말과 마차 기물 6건에, 짐승형 패식 14건이 있으며, 그외 각문골판을 보면 쌍기수레 두 대가 새겨져 있고, 이는 음산 암각화에 나오는 수레와 같은 것이고, 같은 도법입니다.
이것은 투구 쓴 단군이 청동검 들고 말만 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풍당당하게 대초원에서 수레를 타고 다녔던 것이며, 이 무렵에 나오는 청동검은 북방식청동검 2식이라고 하여, 주로 영성 남산근과 난하에서 나오고, 청동검 끝에 동물무늬 장식을 한 것으로서 남산근과 하북, 융화 등 난하 유역에서 나오는데 수병식이라 하며, 색불루가 녹산에서 즉위하기 3년전에 조부 우현왕 고등이 귀방 오르도스을 멸망시켰다고 했으며, 부여 군대가 은나라 서북방에 살던 귀방을 멸망시키고 부여인으로 나라를 세웠던 곳이, 은나라 역사인 은기 중의 녹방이고, 춘추시대에는 악방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오르도스 고원입니다.
섬서성의 녹주는 지금 부현이 되었고 기원전7세기에 백적인들이 살던 곳인데, 백적은 흰옷을 입어서 생긴 별명이며 섬서성 연안에 있다가 하북성 중산국으로 동천하였고, 녹주는 연안의 남쪽 마을이었고, 이 백적인들이 기원전637년에 주나라와 통혼까지 하였으며, 주나라를 위해 정나라와 싸웠고 춘추말 기원전476년 이전에는 하북성에 중산국을 세웁니다. 통혼의 결과는 단군 마물의 배필이 된 주나라 공주와 주나라 황비가 된 적후였는데, 적녀는 귀씨였다고도 전하니, 색불루 부여군에게 복종하게 된 귀방인들입니다.
오르도스문화의 중심에는 나린탑 주개구문화가 있고, 나린탑은 오르도스 고원의 동부로서 황하와 가까우며 고대에는 하남이라고도 하였으며, 탑은 오르도스 고원에서 마을을 의미하며, 스키타이 양식이라고 여겨졌던 그리스 금속 동물 공예품도 오르도스에 전파되어 오기 전에 이미 오르도스식 청동예술이 적봉시 극시극등기나 적봉시 영성에 존재하고 있어서, 스키타이 예술의 씨가 나온 곳은 서요하이며 토기와 함께 오르도스 고원에 전래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고, 또한 반도의 스키타이양식 금속공예도 그리스에서 시베리아를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서요하에서 발원한 것이 직수입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스키타이 양식의 전래가 내몽고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내몽고 자체에서 발생하여 스키타이로 흘러간 것으로, 그리스 동쪽에 살았던 스키타이인이 내몽고에서부터 그리스 연안으로 진입해 들어갔을 것으로 고려되기도 하며, 주개구문화지는 기원전18세기에 구리 팔찌, 귀걸이, 구리환 등이 보이며 청동기가 시작되고 기원전 15세기에 사문격(빗살무늬 종류)과 단검, 동도가 나타나고, 이미 이때부터 묘를 쓸 때에 양을 희생하여 매장하였으므로 목축민족이라 보이며, 기원전 13세기에는 양, 말, 사슴, 뱀, 용을 장식한 청동도가 출현하기 시작하지만, 기원전11세기에는 용이 사라지고 대신 새머리가 장식되고, 춘추시기에는 쌍오회수 와각식 단검이 출현하며, 그외 아주 다양한 장식과 문양, 야수문 패식이 절정을 이루어가는 것이 춘추시기입니다.
부여족이 활약했던 내몽고 음산 산맥의 남쪽은 하투라고도 하는데, 황하의 최북단으로서 산서성과 섬서성의 북단이 교차하며, 음산문화는 암각화 문화이고, 음산에는 수없이 많은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암각화도 그 파생품으로 보이며, 암각 인물화의 특징은 부엉이형 조두 얼굴이 있고, 호두구 문화 옥기에 다량의 부엉이 옥장식이 있었는데, 이 부엉이가 부여족과도 관련 있고, 부엉이형 얼굴을 태양신의 얼굴로도 해석하며, 천명현조 항이생상라는 상나라의 전설과도 이어지며, 상나라의 청동기물 중에 부엉이잔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상인을 조이로 보아서, 특히 상인의 시조신은 요순시대 순이고 순은 동이인이라고 주장하는데, 굴원의 천문을 사료로 들어 태양신 숭배의 전통이 일치한다고 하며, 음산암각화의 태양도와 강소성 연운항의 태양제단 태양석의 암화가 일치하며, 이것이 동경의 태양문, 기하문 동경으로 발전하고 옹고트의 卍자 부호로 이어집니다.
단군 조선 개국후 1,000년이 지나서 바햐흐로 철기시대가 시작되고 전쟁은 더욱 활발해는데, 이집트 투탕카멘의 고분에서 기원전 14세기에 철검이 발굴되었고, 히타이트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는 철검이 보편화되었으며, 대륙에서는 기원전 1,400년에 하북 고성과 북경 평곡에서 철날을 박아서 만든 구리 도끼가 각각 발굴되었으며, 이 철은 단조된 것이었으나 재료는 운석에서 얻어진 철로 분석되었고, 고성 유적지에서는 철광석을 야철하던 유적지와 철찌꺼끼가 발굴되어, 운석과 관련되지 않은 철광석에 의한 야철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색불루 단군 때에 남이의 남국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이동하여 은나라와 가까운 엄독홀에 있었는데, 지금의 석가장시로 추정되며, 석가장 동남 난성이 바로 남국 위치가 되며, 그 북쪽 고성의 묘자리에서 철인동월이 나온 것이고, 남이국은 본래 북경시 동북 난하의 난평에 있다가 남쪽 석가장 난성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며, 석가장 서북 영수현의 고성에는 훗날 주나라 때에 마물 단군과 왕실끼리 결혼하면서 적족의 중산국이 세워집니다.
여기서 철인동월과 함께 나온 유물을 살펴보면 색불루 시대의 문화 양상을 알 수 있는데, 의료기로서 외과수술용 돌칼이 나와 수술 뿐 아니라 침구 치료가 이미 발달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세계 최초 비단이 나왔고, 마직품이 나왔으며, 그리고 술을 빚기 위한 양조용 효모가 대량으로 나와서, 고성이 은나라와 가까우니 은나라 문화일 수도있겠으나, 단군 문화이기에 세계 최초의 선진 문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1세 단군 소태(기원전1,337~1,285년) 기원전 1,289년에 부여 지역에 있던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은나라와 싸우면서 은나라 서북 귀방, 지금의 오르도스 고원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우현왕 두막루라고 불렀으며, 우현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 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우현왕을 세습하였는데, 이때 상장 서우여가 탕지산의 번한소정을 암살하고, 소태 단군은 살수 땅을 주면서 서우여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며,
기록에 임진 49년(기원전1,289년) 개사원 욕살 고등이 병력을 이끌고 해상을 통해 잠사, 귀방을 습격하여 멸하였다. 하여, 당시 중미지역에 전염병이 도는것을 목격한 고등이 돌아와 벅수해군을 이끌고 대해를 건너 아즈테카지역을 평정하고, 이곳으로 가는 길목 베링해협 좌측에 있는 아나디르강 주변의 두막루를 점거해서 두 대륙를 차단 시키는데, 이 시기에 일군국과 양운국 두 나라가 조공을 옵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동단은 신대륙이 되고, 서단은 지금의 이집트 홍해 북단 일군국이 됩니다.
기원전1,285년 우현왕 색불루가 부여신궁에서 스스로 단군으로 즉위하고 쳐들어 오자, 서우여가 맞서 싸우다가 패퇴하고, 마한 아라사도 참전하여 전사하고, 단군 소태는 물러나고, 색불루는 구월산 개원시 창도현 천두진 졸본성 장당경에서 22세 단군 색불루(기원전1,285~기원전1,237년)로 즉위하였고, 다시 녹산에 수도를 정하고 역시 아사달이라고 불렀으며, 녹산은 흥안령산맥의 최고봉인 황강량(2,029m) 북쪽 고원 지역인 아시하도는 과거에 목엽산이라 불러 백악산이나 같으며,
황강량이 부여의 주산으로서 녹산이라 했는데 녹산의 녹鹿은 우리말로 노루산, 누루산을 거쳐 누루 황자를 써서 황산으로 변할 수 있어, 황강량 북쪽 목엽산 아시하도가 단군 색불루의 녹산 아사달로 추정되어, 지금 천합원 이라는 곳인데 해발 1,600m 고지대이며 서쪽 전자구가 궁성터로 추정되고,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 이름을 삼조선인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바꾸고 8조 금법을 만들지만, 그동안 안정된 삼한관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진한이 갖고 있던 병권은 여전히 진조선이 갖고 있는 시기이며, 기원전1,250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색불루단군은 백성들과 함께 영고탑으로 피하였고, 이때부터 영고탑이 북방 대성이 되었으며, 기원전1,237년 가을 7월에 태자 아흘이 녹산 아사달에 돌아와 신독을 주살하고 반란을 토벌하였고, 백악산 아사달의 신궁으로 환궁하였으며, 23세 아흘단군(기원전1,237~기원전1,161년)은 은나라를 쳐서 산동 지방에 제후들을 임명하였는데, 이때 은나라가 망하여 기원전1,120년에 은나라 기자가 요서로 들어왔습니다.
22세 때에 기록된 것처럼 삼한과 삼조선은 차이가 있는데, 삼한은 행정편의상 조정을 나눈다는 것인 반면, 삼조선은 단순히 조정을 넘어 통치권력을 셋으로 나누어, 이때 까지의 소도와 화백제 군운용에 따른 신교의 권위를 무너뜨리며, 신권을 함께한 단군의 천군, 천자의 권위를 신권이 없는 일개 지도자로 폄하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그 결과로 43세 물리단군(기원전461~기원전425년) 말기에 사냥꾼 우화충이 역모를 꾀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호칭하며 도성을 공격하자, 물리단군은 피신하는 도중 사망하고, 지금의 팔면성인 백민성의 지방장관인 구물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진압하고, 난을 평정하고 스스로 권좌에 오른 44세 구물단군(기원전425~기원전396년)은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며, 해성에 이궁을 지어 역시 평양이라고 하였으며, 46세 보을단군, 47세 고열가 단군의 수도가 되었는데, 4세 단군 오사구 때 평양성을 쌓은 기록에 이어, 단군시대 평양이 두 개라는 것으로, 하나는 해성이며 이는 지금의 조병산시가 됩니다.
하지만 이때 번조선과 막조선 또한 병권을 갖게 되면서 중앙의 진조선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통치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시기에 음양오행설이 나오는데, 지은 사람은 그 시원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에게서 비롯되나 그 이론을 구축한 사람은 전국 시대 말기의 제나라 추연(기원전305-기원전 240년경)으로 음양오행설을 체계적인 우주론으로 발전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이설을 통해 역사의 변천과 왕조의 교체를 설명하고, 오행 상승설과 대운오설을 주장하고, 전파한 사람은 한나라 무제때 동중서와 전한 말기 유향과 유흠 부자에 의해 완성되며, 유가와 합쳐칩니다.
참고로 이 시기는 한제족국은 춘추전국시대에 속하는데, 당시 겸애사상을 표방하는 묵자는 벅수군 화백사상을 주장하며, 활동하던 사람으로, 실제로 벅수군 이였으며, 여러 나라들이 격렬한 전쟁으로 넘어가는 그런 사회였는데, 묵자는 모든기술자들에게 종족과 국가를 위해서 서로 살인하는데 우리의 기술을 동원시키지 말자 하는 겸애운동을 일으킨 것으로, 그 당시 여러 나라에서 다시금 벅수군을 활성화시키자는 거창한 운동이 되었고, 이러한 묵자의 활동을 통해서, 다시금 벅수군과 화백제가 여기 저기서 형성되고 번져나갔습니다.
참고로 이러한 묵자의 대륙에서 호혜시장 운영은 손이양의 묵자한고 란 책에 나오며, 이시대의 장사꾼은 두 종류로돈으로 교환하는 '고인'과, 교환하는 화폐를 놓고 이를 담보잡아서 움직이는 화폐들인 도전, 포전, 벽옥, 곡옥, 명전, 등을 놓고서는 아래층과 윗층을 회계처리해 주는 건물을 고대에는 '상'이라고 했으며, 이 상이란 건물을 들락거리면서 거래하는 사람이 '상인'이라 하였으며, 상인은 고인이 될 수 있지만, 고인은 상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또 신시의 화폐의 특징은 호혜시장체제인데, 첫째 교환하지 않는다. 는 대원칙이 있으며, 도전, 포전등이 뚜렸이 2가지 용도로 쓴다는 것으로, 명도전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의견개진 용도인 회합용과 각개로 쓰는 결합용이어서, 파는 화폐와 사는 화폐로 나누어서 이상하게 돈의 만남과 돈 아이가 생산되고, 상쇄, 흥정이라는 전혀 다른 사용 용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포전 회합용은 이 포전을 걸어둔 쪽에서 비로서 징세 할 수 있고, 각개 결합용으로써 서로 호혜계통을 형성하며, 화폐발행차익을 천독들이 취하려고 했으나, 부득이한 사례로 펑크가 났을때 세금으로 먹고사는 기술 전수자가 와서 그 빈틈에 각개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려는 사람에게 기술전수여행을 해서 이 화폐발행차익을 얻는 호혜계통을 메꾸도록 하는 것으로, 포전을 획득해서 거는 것 자체가 결국 화폐발행차익을 지속적으로 유지할수 있는 보험이 되는 것입니다.
또 참고하면, 서방으로 가는길이 환국말기의 오환국로가 배달국이 개척하였다면, 비단길은 단군조선과 부여가 개척 운용한 통로 였으며, 단군조선 당시 호혜경제 체제와 똑닮은 곳이 페르시아 지역이였고, 경제적으로 보면 서 고조선이라 할만큼 상인인 고인은 없었고, 상인만 활동하던 곳이였으며, 이러한 호혜시장을 모르는 유일한 문명이 바로 그리스 로마 문명이여서 지금은 호혜시장의 거래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게 되어, 유추 할 뿐입니다.
삼조선 체제인 45세 여루단군(기원전396~341년) 때 연나라가 단군조선의 국경지대인 운장을 공격해 이를 차지하자, 이내 삼조선은 힘을 합쳐 빼앗긴 이곳을 되찾는데, 운장 지역은 지금 중국 하북성 북부의 난하 서쪽으로, 단군조선의 강역이 대륙 깊숙이 뻗어 있었다는 사실은 고고학 발굴로도 뒷받침하는데, 내몽골 적봉시의 하가점 유적지가 그곳입니다. 한마디로 단군조선은 반도에서부터 요서지역 그리고 섬서성 일대까지, 동북아 광역을 아우르던 대제국이었습니다.
이렇게 삼한관경제가 깨어지면서 단군조선은 급속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처럼 단군조선이 흔들리면서 옛 삼한의 유민들은 대륙의 남쪽이나 반도 남쪽으로 내려오며,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기원전295~기원전238년) 계해 58년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북개마대령 웅심산에서 내려와 반란하여 도읍지를 점령하자, 기원전 238년에 단군조선을 떠나 산에 들어가 수도합니다, 이후 6년간은 오가들만이 함께 나라를 다스립니다.
단군조선의 삼한들은 각기 5가 마가, 우가, 저거, 구가, 양가, 각각의 역활이 있었으며, 기원전 1,200년 경 수레나 우마차를 쓰게되며, 육상 하천 해양의 교통망이 생기게 되며, 당시의 배들은 대부분 노를저어 쓰였지만 원거리 바다는 계절별로 달리하는 바람이나 해류를 이용하는 돛을 단 배가 발굴되기도 하여, 대륙과 반도, 섬을 흑조라는 난류와 한류를 이용하여 뗏목배나 노배, 돛단배를 사용하였는데, 멀리는 인도 까지 해상무역이 있었다고 기록에 나옵니다.
참고로 환국에는 오훈은 성실하고 믿음으로 거짓이 없어야 한다, 공경 근면함으로서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부모에게 효로써 순종하며 어김이 없어야 한다, 염치와 의리가 있어 음란치 말아야 한다, 겸손하고 화목하여 싸우지 말아야 한다, 이며, 신시시대의 오사란 오훈과 달라서 벼슬아치의 소관업무를 말하는 것으로, 우가는 농사를 주관하고,마가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고, 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 또는 계가는 선악을 주관하였습니다.
이렇게 엣부터 전해진 문물들은 세분하여 발전된 것 중 하나는 청동기와 철기 등의 병용으로 당시 무사 귀족층들은 청동을, 농민들의 농기구나 축성물 제작인들의 도구들은 철을 사용하였는데, 연철과 후기에 주철까지 사용하여 일찍부터 뛰어난 제련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에 진한에서는 교통질서법과 양로풍습이 있었음이 기록에 보입니다.
배달국으로부터 전승된 양잠과 비단 생산 면직물, 삼베, 모시, 모직물 중 비단은 단군조선 시절을 거치며, 특히 비단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으로 전승 대중화와 함께 주요 교역물이 됩니다.
참고로 당시는 여성의 지위가 모계사회의 유습이 많이 남아있던 때로, 여성으로의 인물은 단군왕검의 부인인 비서갑의 하백녀와 웅심국왕의 딸 웅녀, 유망의 딸인 뉘조, 와 후에 유화와 항아가 있었는데, 웅녀는 후세에 칠성신앙을 퍼뜨리고, 뉘조는 양잠을 후손들에게 가르쳤는데, 이를 잊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할머니들은 수천년 동안 대대로 뉘조 할머니에게 제사를 올렸으며, 서울에 선잠단이 그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계유습은 환국시절부터 이어졌으며, 기록이나 벽화에 나오듯, 신성한 장소 웅상목아래 씨름하여 인재를 뽑아 장가 들게하여 그 자식을 교육시켜 나라들의 지도자 8대를 만들었다 하였는데, 이때 그 자식들은 모두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고 하고, 사실상 생부는 누군지도 모르고, 대를 잇는 조상을 아버지로 하여 왔으며, 이들이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나라들의 시조가 됩니다.
또한 왕가나 소수귀족들 이외의 백성들은 아애 성이 없고 이름만 있었고, 고려 때부터 성씨가 생겨나고, 고려 초기까지도 성은 두가지 이상 가질 수 있었고, 외가집 성을 잇기도 했는데, 한국성의 계승 원리는 어머니의 아들과 손자, 어머니의 딸과 아들로 이어져서 결국 외가성을 따랐으나, 조선왕조 중엽에 와서 부계 씨족집단의 부호로 정착 되었다고하는 설도 있습니다.
문자는 배달국의 녹도문을 개량하여 진서로 쓰고, 3세 가륵 단군 2년 때 상형표의 의 진서 곧 한자가 있었다 하고,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울 때도 국호를 한자로 조선(朝鮮)이라 하였다고 하며, 신하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 가림다를 만들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되며, 이 한자와 가림다는 후대로 전승되는데, 가림다 이두문은 일본으로 건너가 신대문자 '아히루'가 되는데, 주로 대마도나 규슈지방에서 발견됩니다.
이때 가림다는 국인들에게 물교환이나 의사전달 수단 등으로 광범위하게 쓰였는데, 특히 매해 소도에서 제천행사의 일환으로 기억력 좋은 국인들이 모여, 제족들의 살아온 사유를 '세년가'라는 노랫말을 불러 널리 알렸다 하였는데, 해마다 제족의 업적을 보태어 세세토록 전해지는 유습으로 남게 된 이유가 되므로, 유난히 긴 역사가 이 구전승된 사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 세년가를 기록한 자료는 대륙이나 일본에서 발견 되기도 합니다.
당시 소도의례는 삼한과 삼국시대까지 매년 음력 10월 상달 무천, 영고, 동맹, 같은 큰 축제에 신지라는 제관이 건국 이래 역사와 조상들의 공적 교훈을 노래로 불렀고, 기록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어 솟대 소도목이라고 하는 나무를 세우고 제사 지냈다, 고 나오고, 요, 금, 지나, 등 각지에 널리 분포된 사실도 기록돼 있으며, 광대들이 긴 가극을 판소리로 전해 내리는 것을 보면, 문자가 있기 전 일본 역사를 전문적으로 외우는 인간사서 가타리베(어부)가 있었던 것을 보면, 단군 이래 세년가(歲年歌)라는 노래를 불러 문자와는 별도로 역사를 전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설로 이 가림토문에 있는 여러 개의 자모의 모양이 알파벳과 비슷하며, 한자, 일본의 신대문자, 인도의 구자르트 문자, 몽골의 파스파 문자, 페니키아, 티파나그라 에디오피아 문자, 키프로스 문자등이 우리의 상고문자 가림다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 일종의 공용문자 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가림다의 글자 수 38 가지인데 이를 크게 3가지로 세분해보면 13수의 숫자의 2 종과 12수의 숫자 1종으로, 특이한 것은 보통 진법은 10진법과 사물 구분 12수가 기본인데 특이하게도 13수의 구분인데, 땅 크기나 수치 계산에는 10진법이나 20진법 혹은 30진법이나 60진법은 흔히 있는 일이며, 12수의 글자는 대부분의 모든 문명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원주를 계산할 때에 주로 상용하여, 하루의 시간이나 천구나 원의 구분에서 모든 문명의 수학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3수의 가림다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금척의 수에서 매우 중요한 숫자로, 오늘날 영어의 알파벳은 26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는 13×2의 수와 같은데 이른바 황금비수열 의 상징이기도 하며, 이것은 대체로 무리수인 원을 가름할 때에는 3:4:5의 황금분할로 하여 총 12의 수로 세분하는데, 이 순서의 수열에서 13의 수는 제 7열의 수열인 피보나치수열이라 하여 자연을 아주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입니다.
참고로 13이라는 수와 자연을 가장 근접하게 표현할 수 있는 피보나치수열은 제족들이 실제로 쓰인 사례는, 환국으로부터 배달국, 단군조선 이후에까지, 제단이나 서안, 집안의 피라미드, 각종 기반시설 건축물, 공예품, 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고 보이며, 이것이 제족의 우수한 조형감각이 예서 비롯된다고 생각들며, 이러한 비의는 한제족에게나 서방세계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수가 신과의 비의가 깃들었다하기도 하지만, 제족의 근본에 대한 일종의 터부가 작용되었다고 보이는건,
제족이 한자를 처음 만들면서 금문에 이르기까지 동그라미가 사용되다가, 한제족이 한자를 만들기 시작 하면서부터는 이 동그라미인 '체'가 사라지고 네모 모양이나 아에 동그라미가 생략되는 절차를 거치며, 단군조선의 신하 창힐이 한자를 일괄 정리하면서 그 모양이 굳어지게 되는 사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13이란 수 또한 동일한 원리에 입각하여, 서방족들은 하나같이 13이란 수를 터부시하고 쓰지않게 되었는데, 근세에 들어서 건축가 가우디가 이를 살려 건축한 사례가 있어, 고대 제족들의 지혜나 혜안은 현대에 와서야 빛을 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3, 4, 5와 5, 12, 13의 수열은 매우 중요한 3자의 자연수 수열인데, 고대의 이후에는 서양에서는 이 13의 수를 좋지 않게 여기지만, 제족들은 이 13의 숫자야말로 황금비의 수로서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는데, 예를들어 서양의 경우에는 12살에 예수가 세상에 등장하는데 비하여 박혁거세는 13살에 등장하고, 달력을 정하는 데서도 1년을 12달로 구분하기보다는 13달로 정하는 것이 정확한 계산법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여, 사물을 13의 수로 세분하는 것이 자연현상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 황금분할의 정확한 계산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 가림다의 글자는 발해에서도 주로 사용된 흔적이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있으며, 이태백 전서의 옥진총담에는 그가 가림다의 문자를 잘 알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가림다 글로 된 시를 거문고의 악기에 적어놓은 것을 고려의 광종 때 장유가 잘 알아보았다 하여 그 총명함을 암시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가림다는 한글의 원형이 되는데, 고대로 부터 제족 삼의 의식은 삼극, 삼수분화, 등 여러 말로 불리우나 그 기본은 삼극(천, 지, 인)이고 도형으로는 원, 방, 각,(○.□.△.)으로, 원은 하늘, 우주이고. 방은 땅, 물질이며. 각은 사람, 사내, 솟는모습이며, 또한 이것은 천부인이자 문자의 숨은 의미의 원천이고, 거주하는 공간이자 저세상으로 가서 쉬는 묘지이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의 문자는 모두 이 원방각에서 파생되어 나왔으며, 나중에 훈민정음의 모태가 되는데, 원(○, 천)에서 ㅇ, ㅎ 이 파생되어 나오고, 방(□, 지)에서 ㄱ, ㄴ, ㄷ, ㅌ, ㄹ, ㅂ, ㅍ, 이 나왔고, 각(△, 사람)에서 ㅅ, ㅈ, ㅊ, 이 파생되어 나왔는데, 이 기본이 되는 형은 오늘날 까지 변함없이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말 모음에 해당하는 삼재는 ○ 하늘, ㅣ사람, ㅡ 땅,이 기본형 인데 이는 역경의 계사편의 것을 원리로 훈민정음 제자해를 만들어진 것이나, 원 우리의 말에서는 이 세 요소를 혼용해 사용 해오던 것이므로 그 의미가 무시된다 할 것입니다.
또한 삼과 관련된 색체로 제족의 색의식 심층 저변에는 대자연 인본주의적인 공간감각적 요소와 시간감각적 요소가 자연스레 녹아나 있음을 알수 있으며, 대략 기원전10,000~7,000 년경 신정시대의 환토템족(흰색, 붉은색). 곰토템족(검정색, 푸른색). 범토템족(노랑색). 의 태초의 삼색 의식이 자리 잡게 되는데, 이 시기의 유물이 붉은빛, 흰빛, 푸른빛, 누른빛의 제구나 곡옥, 패기류를 보면 충분히 예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분석 기호화된 색상 샘플은 무수히 많지만, 전통적으로 자연화된 우리 색채의식 속에는 무의식적으로 잠재
되어 있는 자연의 삼원색에서 분화되는 수만가지 색의식의 가지수에 비한다면 구조적으로 합리성이 떨어진다고 볼수 있는데, 구미에서 미리 발전한 색의식이란 산업사회의 수요에 맞추어 효율적으로 세분화한 또 다른 표본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어 문화권에서의 단일 색명으로는 빨강, 진홍, 분홍, 주황, 노랑, 갈색, 초록, 파랑, 까망, 하양, 등 11색이지만 순수 한글로 표기한 다섯 가지 빛깔을 빼고 나면 모두가 혼합간색임을 쉽게 알 수 있으며, 그밖에 필리핀의 경우는 빨강, 노랑, 까망, 하양이 있고, 나이지리아는 빨강, 까망, 하양이 있으며, 파푸아뉴기니는 아예 까망과 하양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일 원색의 순수 한글 색이름으로 빨강, 노랑, 파랑,의 유채 3원색명이 있고, 까망, 하양의 무채색명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색의 인식은 크게보아 기본 삼극사상에서 유래한 하양, 빨강, 초록, 파랑, 인 빛의 삼원색이고, 검정,빨강,노랑,파랑,인 색의 삼원색에 기인한다 할수 있으며, 그 외 감산혼합된 색명은 수도 없이 분화될 수 있으므로, 하늘색·배추색·수박색·쥐색, 혹은 쪽빛·남빛·우유빛, 처럼 분화되고, 여기에 새, 시, 샛의 접두사를 붙이거나 접미어를 붙여 색의 미세한 감각 표현까지 할수 있는 자연에 근접한 색감정을 갖고있다 할 것이며, 또 사물의 이름 끝에 색, 빛, 이란 말을 붙여 쓰고 있는것을 보더라도 우리 고유의 색사상이 삼원색에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색의식의 확대는 안색·기색·혈색, 혹은 불빛·햇빛·낯빛·눈빛, 처럼 가산 혼합된 광선은 물론 건강이나 심기 등의 비가시적인 내면까지도 적용하여 시각의식 우선 문화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철학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보며, 우리의 색채문화는 분석적이기보다 오히려 종합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주의 색채논리로 보려는 즉물적 대상으로서의 색상이 아니라, 자연과의 동화를 이상으로 삼으면서 선험적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물 이상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색채관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공간과 시간 속에 살면서 삶에서 이 시공을 동시에 내포된 종합적인 색채인식을 지녀와서, 과거의 기능적이거나 효율적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으므로, 과거 우리의 색채의식이 백색 남색 위주인 탈피하는 채색과 금지하는 채색으로 보는 점은, 중국 남송대의 복고사상에서 기인된 것이므로 우리 원류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그보다 더 일찍 유습된 기복적 도교적인 오방, 오행적 색채의식 또한 우리의 원류로 보기에는 불합리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조선조 후대의 환경이 백색의 선호, 쪽을 대량사용 하는것이나, 오방색의 유포를 의미론적으로 확대 적용시켜 마치 우리 색문화 전체인양 적용 시킨다면 곤란할 것입니다. 다만 한제족국들에서도 사라지고 없는 오행의 유습이 우리나라에서 체계적으로 발전시켜 오정색의 의미를 완성 시켰다는 점은 인정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 에서도 우리의 색채 문화를 미시적이고 분석적인 서구의 색문화나 기복신앙적 요소가 담긴 음양오행설에 기인한 것들을 참고 하면서, 본래부터 전래 되어온 우리의 고유의 색문화를 재정립 한다면, 인류문화 발전에도 커다란 기여가 될 것입니다.
우선 색이란 글자의 본 뜻을 살펴보면 원, 방, 각,(△)에서 나온 ㅅ 의 모습은, 내부에서 솟아 우러나오는 모양세,로 볼 수 있고, 기록상 설문해자에서 안기라고 풀이했음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얼굴의 기색은 단순히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안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내까지 드러내는 얼굴의 기색을 말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빛과 색의 의미는 다릅니다. 빛은 광선에서 오는 가산혼합의 대상을 말하고, 색은 물체의 흡수와 반사에 의한 가산혼합의 대상으로 유채색이나 무채색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비가시적인 내면의 상황을 표현하는 신채와 안채처럼, 사람의 인품이나 건강, 감정, 등을 말하는 얼굴 빛이 있고 생물이나 물건의 신선도를 말하는 때깔 등이 있어, 흔히 색을 색깔이라고도 말하는데 외부의 드러난 색을 통해 내부의 질료까지 파악해 보려는 때깔의 의미가 잠재된 것입니다.
또 깔 을 비가시적인 추상적 감정인 숨결·손결·눈결· 물결, 과 같은 결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국인의 색채의식은 굳이 오행에 연유하지 않더라도 표면색과 이면색을 동시에 파악해보려는 종합적 색채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표리부동을 최악의 부도덕으로 삼는 윤리관 속에서 겉과 속을 동시에 이해하고 진솔하게 표현하려는 욕구는 자연스
럽게 우리의 모든 예술 속이나 일상 언어 속에 잘 드러나 있으며, 색 이름 하나에도 공간과 시간개념이 동시에 파악되어 선험적 기성관념으로 종합되는 것이어서, 우리의 회화에서는 표피적인 색상에 연연하기보다 내용적인 색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이 꾸준히 이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예술품들은 형상이나 빛깔에서 허장성세를 벗어나고 욕심을 버려, 내 안에 느낌으로 존재하는 절제의 빛깔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며, 종종 우리의 예술이 구미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 사이 에서도 다른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되고 하는데, 그러한 다른 무엇이야 말로 자연스러움을 바탕한 종합적인 미의식 이기 때문입니다.
21 세기는 정치나 경제논리가 문화의식을 앞지르고 있는 세상이고, 기초학문이나 순수예술이 설 자리를 잃고 사회전반에 걸쳐 자본화된 물질만능이 지배하는 세상이며, 한편으로는 생산의 시대에서 소비의 시대로의 삶이 문화를 매개로 소비 사이클을 가속 시키는 세상이 도래된 것이며, 이때 예술은 자본의 논리 속에 함몰 될 것이며,
이러한 미래에 대해 현대의 어떠한 학문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우리의 종합적 색채의식이 세계 유일하게 이에 대응할수있는 인간중심의 창조적 문화의식으로 거듭 나게 될 것으로, 그것은 지금 우리의 한류문화가 그러한 것이며, 우리의 고대로 부터 이어 내려 온 범 인류사적 문화의 원형을 우리 문화 속에 아우르고 있는 사실로도 그렇다 할 것입니다.
덧붙여 재료와 기법과 인격과 사상은 먹이사슬처럼 하나의 조형사슬로 서로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채료는 칠한다
는 의미의 안료와, 물들인다는 의미의 염료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전통적으로 채도가 낮은 천연의 유, 무기질 안료와 염료를 사용함으로써 드러나지 않고 자연에 동화되려는공기색에 가까운 미색을 생활 주변에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광물이나 식물에서 광범위하게 추출한 채료를 자료로 색의식의 자연미를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 배달, 단군시대는 간석기와 청동기 문화가 혼재된 시대여서 종족이 늘어남에 따라 아시아 중동지역, 대륙, 한반도 남부, 아메리카로 종족이 번성하게 되고, 석기와 함께 청동기 문화가 유라시아 접경지역까지 미치게 되는데, 대략 기원전10,000~400년 사이의 일이며, 중동 스키타이 문화의 생성 시기가 기원전800~300년으로 볼 때에도 비파형 동검, 빗살무늬토기, 의 분포지와 일치합니다.
한편 신라 유물에서 삼태극의 삼원색이 누금감옥기법으로 만든 금장보검이 누런 금색, 붉은색, 푸른색의 옥으로 나타 나며, 고구려의 묘제에 나타난 벽화에서 사신도는 당시 상황이 오행설이 일대 유행 하였던 시기이므로, 당시 까지의 우리의 경천, 빛 숭배사상에 오방위 개념이 기복적으로 습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기본 묘제는 원, 방, 각. 삼족오, 등 삼극을 이룬다 할 것이고, 그림에 사용한 채색은 오색 개념이 가미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녹도문은 대나무 조각의 끝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쪼개어 붓과 같이 하여 옻나무 액을 발라서 글자를 썼는데, 이 죽필이 처음 닿는 데는 둥글고 크나 끝은 가늘고 작아서 올챙이와 같았다고 하여 처음에는 녹도문을 일명 과두문자라고 했으며, 이 녹도문이 한자의 시초인 금문의 원래문자인 과두문자에 대하여는 기록에서 배제되어 있는데, 이것은 공자가 참고했고, 한족 고문헌으로 알고있는 '이아' 가 과도문자인 녹서로 쓰여 있다는 점에서 글자의 시초가 제족의 것이라 이 내용을 배제한것 같습니다.
자부선인은 치우천황시대의 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일찍이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수리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라는 칠성력을 만들었고, 윗대로부터 전해온 삼신사상을 연구하여 삼황내문경을 녹도문으로 지어 치우천황에게 바쳤으며, 한자의 시조로 떠받드는 창힐씨도 자부선인으로부터 녹도문을 배운 동이족 출신의 학자로, 신지 혁덕씨의 녹도문과 태호 복희씨의 팔괘 등 고문자를 집대성하여 기원전 2,667년에 한자를 정리함으로써 문자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당시까지도 나라 내에는 여러 종족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으며, 이들의 의사소통은 당사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사용하던 말이나 글이 따라 서로 다르고, 나라내 공식적인 말이나 글이 모두달라 가림다 창제의 당위성이 있었을 것이며,
일설에 당시 가림다는 쌍방소통의 방편으로 현재 발음부호 같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본의 신대문자로 있었고, 인도 구자라트 지역에 이러한 가람다를 쓰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영어 알파벳과 유사한 6 자가 있어, 환, 한, 간, 칸, 으로 유럽어로 정착하였다란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기록에는 고조선의 진한과 부여와 왜국은 혹 횡서하고 혹 노끈을 맺고(결승), 혹은 나무에 문자를 새겼는데(결목), 오직 고구려는 붓 글씨를 썼다(모사영법) 고 하였으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시 시대에 녹서가 있었고, 자부 선생 때 우서가 있었고, 치우천황 때 화서가 있었다고 했는데, 투전문 등은 바로 그것이 오늘날 남아 있는 흔적이다. 하고, 복희 때 용서가 있었고, 단군 때 신전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자가 백두산, 흑룡강, 청구, 구려, 여러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처음으로 전서가 복잡하다 하여 그 획수를 약간 줄여 새로 부예를 만들어서 사용했으며, 진나라 때 정막이 사신으로 숙신에 왔다가 한수에서 왕문의 예서 필법을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체이다. 하였고, 진晉나라 때 왕차중이 해서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 하여, 이제 그 글자의 내력을 고찰해 보면,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하고,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라 하여 문자 발달에 기여합니다.
그러나 이 가림다와 과두문자라 불리우는 녹서는 수천년 동안 사용하였으나, 진의 승상 이사가 소전, 대전을, 정막이 예서를 만들 때, 진시황이 이전 기록물들이 자신에게 모멸감을 주자, 분서갱유로 모조리 분서하여, 후대에는 전해지는 서책이 없을 지경이 되었으며, 한서나 공자서에도 언급조차 없고, 한제족에게서는 치욕적인 내용인 기록서로 추정됩니다.
이후로도 자신들의 왕조나 국가 등 한제족의 당위성을 위해, 제족의 기록물을 끈질기게 없애는 일을 지속하여, 오늘날 번듯한 제족들의 기록이 전무 하다시피 된 사유가 되며, 그러한 그릇된 생각이 지금도 남아있는한 같은일이 계속 진행중일 것이며,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을것으로 보입니다.
초대 왕검에서 25세 단군때 까지 국가문명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하여 소도, 의술, 삼년상과 제사체제를 갖추고, 40세 달음 단군(기원전509~기원전491년) 에 각 철학사상을 정착, 교류 시키며, 왜를 정벌합니다.
참고로 당시의 영역인 요령성 서안과 만주, 압록강 주변 등에 있는 1만3천여기의 고분군은 발굴이 중단된채 있지만,
추정컨데 단군조선 이전부터 있어온 제족선인들의 묘지로 보고 있으며, 고고학에서 묘장법이 중요한 것은 그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인데, 한족의 경우 은나라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이고, 주대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하며, 홍산문화나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으로, 고조선의 기본 무덤양식은 지석묘이며, 고구려 전기는 적석묘제여서 기본 석묘계 묘장법이 전승됩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지금 길림성 동남부 통화현 개주로 큰규모의 고인돌이 100여기가 있으며, 조선족 집거지이고, 고구려 발원지이자 광계토왕비가 있고, 청동기 시대 묘장인 입병석붕과 서강묘지가 있는데, 석봉산 고인돌 유적지는
단군이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낸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러한 고인돌 모양은 삼재를 상징하는데, 뚜껑은 하늘을 상징하는 1개이고, 받침돌은 땅을 상징하며 2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뚜껑, 받침돌, 피장자는 천, 지, 인, 을 상징하고, 이 고인돌은 무덤이나 제단, 마을의 상징물이기도 하며, 제단 고인돌은 주로 독립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렇틋 고조선의 상례문화는 한제족보다 더 발달한 것은 공자 말에서도 드러나는데, 소연과 대연이라는 상례를 잘 치렀다. 사흘 동안 게으르지 않고, 석 달 동안 해이하지 않으며, 1년 동안 슬퍼하고, 3년 동안 근심하였으니 동이의 자손이다. 고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주변과 서방세계에서도 국가명멸과 인문이 크게 일어나는 시대로, 초대 단군왕검 재위 67년(기원전 2,267년) 에 9년 대홍수가 일어나자 부루태자를 도산으로 보내, 도산회의에서 사공 우에게 대홍수를 다스리는 오행치수법 금간옥첩(홍범구주)을 전하여 이를 극복하게 하였는데, 대홍수는 환국시기(기원전7,500여년 전)나 배달국 시기(기원전6,000여년 전)에 이미 겪은 일로 홍수를 다스리는 법의 전승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참고 일설로 단군은 제사장이란 용어이겠으나, 단 이란 말의 존칭은 아일랜드 신화에서도 가장 평화스러운 신성한 종족으로 알려진 단안이라는 여신이자 여왕의 부하들이 등장하는데, 이 '단안'이 바로 단의 왕비를 의미하는 것이며, 가나안지역에서는 단 이라는 히브리인이 나라를 다스린 곳을 단 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리이스에서도 초기의 왕들은 모두 단 을 이름으로 하였으며, 이 모두 성경이 나오기 이전의 일들로, 그러니까 유럽에서 단, 돈, 은 이 '단' 에서 비롯되었으며, '담'은 단안에 비하여 낮은 여귀족에 대한 존칭으로서, 여성을 뜻하는 우리말의 암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이같은 어휘는 고인돌을 비롯한 거석문화권에서는 모두 비슷한 존칭이 남아있으며, 우리는 단(땅) 이 지상을 다스리는 지엄한 존재를 부르는 말이었고, 하늘을 다스리는 신은 환(하늘)이었는데, 나중에는 같은 음의 한(간)으로 바뀌어 군왕의 종족 또는 군왕이 다스리는 나라 이름으로 되었으며, 유럽에서는 가나안 지역과 그리이스를 빼놓고는 모두 신과 같은 존재를 단 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마디로 상고시대에는 단군들이 유라시아 전역을 통치하였는데, 동쪽의 아시아에는 남자인 '단'이, 그리고 서쪽의 유럽에는 여자인 '단안'이 통치하게끔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거석문화는 막을 내리고 거석문화를 바탕으로 동양에서는 진, 서양에서는 그리이스, 로마에서 새로운 시대가 등장한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세계사적으로 보면, 인류 최초 토템이자 성으로 뱀을 상징하는 풍족이 있었으며, 이후에 나타나는 단군조의 단족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인데, 이들은 색족으로 불리우고 다른말로 훈족이 되는데, 흉노족 이전의 족으로 앵글로색슨족이나 슬라브족, 기타 여러 유럽지역의 지도자의 혈통이 이러한 단씨 혈통으로 보이고, 단적인 예가 서방 색정지역이나 색부루 단군의 '색' 이란 용어가 서방끝을 가르키고, 이 훈족 단씨를 지칭하며, 이외에도 제족의 지도자 지칭 용어가 여러지역이나 인종을 내포하는 말들이고 보면, 고려 이전까지 범유라시아 전역과 전인종을 아우른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기원전1,792년)과 하, 은, 상,나라의 멸망 (기원1,046년)이 13세 흘달 단군(기원전1,782년) 에서 25세 솔나 단군(기원전1,150년) 때 일이고, 33세 감물 단군(기원전819년)에 로마의 건국(기원전753년)과 트로이 전쟁, 44세 구물 단군(기원전425년) 때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창립이 있었으며, 47세 고열가 단군(기원전295년) 때에 주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서이, 흉노 혹은 언어로 보아 여진 후예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하게 되고, 후에 예맥족들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가 있습니다.
또 단군조선 초기 실위, 흉노, 몽골,이 고조선에서 분파되고, 몽골고원에서 발생한 기마족 스키타이가 기원전 8세기경이서 2세기까지 나타나고, 기마유목민족들은 스키타이 이래로 만주·몽골·대륙북부·남시베리아·중앙아시아·아나톨리아지역·동유럽 등지의 스텝지역에서 수많은 강국을 건설하는데, 서로 진출한 나라들이 흉노, 훈, 돌궐, 위구르, 토번, 서하, 셀주크튀르크, 오스만튀르크, 로 이어지고, 동에서는 선비, 5호16국, 수, 당,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 티무르, 무굴, 후금(청), 등이 건국되었습니다.
이 춘추전국 시대에는 수많은 사상가 제자백가들이 나와 철학인문 사상들을 꽃 피었는데, 도가의 노자 (기원전6세기), 자본론 관중, 관이오(기원전 725년~기원전645년), 유학의 공자 (기원전 551~기원479년), 맹자 (기원전372~기원전 289년), 겸애사상 고죽국 묵자 (기원전470~기원전 391년) 등 많은 사상가를 배출합니다.
그 중 유학 유교의 '유' 자는 본래 경조사에서 전문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를 유사라 했고, 그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공자도 젊었을 때 유사를 한 적이 있고, 경조사 과정과 인정세태에서 인문사상을 내어 윤리이념으로 발전시킨 좋은 점도 있었지만, 유학을 창시한 공자로 말미암아 각 나라들은 천자 단군의 법도를 외면하고, 자국 우위 중심 필법인 이른바 춘추필법을 시작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확해야만 할 사기와 같은 역사서까지 승자독식 자국우위의 방식으로 기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천 하늘이라는 관념적 존재를 없애 천자의 위상을 추락 시키면서 장엄한 제례로 대치하며, 사람들을 현실에만 안주시키는 인성으로 만들었고, 인간들의 천심이라는 종교심을 탄압하게 만들고, 개개인들의 정신적 자유의지를 꺽는 패단으로, 현재에 까지 그 악습이 남아있게 하였는데, 이는 민생들의 개적 정신적 자유가 보장되는 신앙심을 꺽어야 왕조나 귀족들의 치세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단군조선 이후 전한때 사가 사마천(기원전 145~기원전 86년)이 공자의 기록을 표본 삼아, 춘추필법이란 회괴한 방식으로 단군조선과 9 이 리 려 제족들의 역사와 종족을 한족의 역사나 종족으로 편집한 희대의 사기라는 사서를 쓰게 되었는데, 이 역시 홀 짝의 수리사상과 함께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사로 당연시 되고 있지만, 인공지능 시대인 현재, 이렇게 왜곡과 변조된 기록물들의 진위는 머지않아 가려질 것으로 보입니다.
고대의 문명을 인문 문예분야 흐름을 볼 때는 일방적인 흐름이라기 보다는 양방향으로 서로 영향을 받아오며, 배달국과 단군조선조 까지는 동에서 서로 흘러가 메소포타미아의 문명화가 서방의 문명을 일으키게 되는데 기반이 되게하며, 로마를 통하여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의 서구 인문사상은 세상의 진리 탐구에 있어 순수성을 구하기 위하여 모든 물이나 현상, 개인과 집단 등을 분리 분석하려는 성향으로 발전하여 후대에 까지 사상의 근간을 이루며, 아시아에서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 중심이라는 차이를 보이게 되며, 이중 제족국들과 한제족국들은 제족들의 신정과 한족들의 인정으로 나눕니다.
자생적 종교 신교는 환인, 환웅, 단군, 삼신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으로 일반적으로는 단군조선 때로 단군왕검을 기원으로 잡지만 군웅신이나 병굿에서 오방신은 치우천왕으로 잡으며, 배달 청구국 멸망으로 근거지 탁록은 군웅거리와 조상거리의 발생지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신의 존재를 실재 하늘의 별자리와 결부시켜 천신이라 불렀는데, 북극 중앙의 오성, 동북간방의 대웅성, 자미원 밖 북방 마고의 다른이름인 매화부인 직녀성, 마고 궁희 소희의 마고삼고, 자미원 밖 사방 사신별자리 이며, 북극성과 북두칠성 첫째별을 천제라 하고, 북극오성에 속한 별을 황후라 불러 단군왕검의 부인 웅녀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별자리는 환국이전 시절부터 고인돌에 별자리를 새기어 왔는데, 단군조부터는 제왕조가 아니면 하늘의 별자리인 천문을 기록하거나 학을 제약하게 되어, 제왕학으로 자리하는데, 이러한 것은 원가의 기록에 당시 부여와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기던 한나라가 스스로 제를 칭하고, 단군조의 별자리를 가져가 석각화상이나 전각화를 만들어, 구미호와 백토, 두꺼비, 삼족오의 무리들이 서왕모가 앉아 있는 곁에 나란히 있는데 이는 상서러움을 나타낸다. 고 밝히고, 사방신수도 한나라가 고조선의 천문역사를 탈취, 풍수지리 별자리 오행 용어마져 기묘하게 바꾸고 단군조선의 천문 문명을 지워 버렸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또 6세 달문 단군(기원전2,083~2,047년) 기원전2,086년 혼천기를 만들었다. 고 기록에 나오는데, 이를 한나라가 혼천의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3,519년 지난 1,433년 세종 15년 박연 등 3인이 이를 만들어 혼천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답습하고, 6세기 수나라 단원자 왕희명이 별자리를 3원 28수로 나누고, 이를 암기하기 쉽도록 칠언시의 형태로 서술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일종의 점술서로 보이지만 이씨조선은 이를 그대로 가져와 천문초류로 이순지가 만드는데,
이것은 제후국의 군왕들이 독자적으로 천문을 읽는 것은 엄격히 규제되는데 따른것으로, 1,397년 태조6년 명 태조 주원장은 어제시를 통해 하늘 끝 땅 끝까지 중화의 경계라 하여 조선 또한 명나라의 영역임을 천명하여, 국가의 존망과 직결된 천문을 비밀히 한 이유와 고려 복권을 위한 끊임없는 민중 저항은 신생 조선을 통치하는데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며, 이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고려왕씨들의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어 고조선의 하늘을 반도의 하늘로 둔갑시켜야 했음입니다.
단군조선 11세 도해단군(기원전1,891년) 때 대륙과 반도 12명산에 소도를 세우고, 소도마다 국선을 두고 운영했는데, 소도의 소는 물고기와 곡식을 올려 제사지내는 사람이란 뜻이며, 도는 소도의 형상과 운영을 문자화한 뜻인데,
당시 선교시대에는 소도에서 조의선인이 천신에게 제를 올렸으며, 격식을 차려 천신의 강림을 청원하였으며, 이때 조의선인의 복장은 백색 장삼으로 된 칠성복을 입고 머리엔 삼신고깔을 썼으며, 베로 만든 마복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먼저 길일을 택하여 제단에 제물을 진설하고 강신을 비는데, 천신의 강신을 비는 제물인 만큼 천신이 흠향 할 수 있도록 향기 나는 제물을 차렸으며, 향기 나는 술인 울창주와 향기 나는 삼색 과일을 쓰고, 향을 태워 향기를 올리며 엎드려 절을 올리고, 하늘을 향하여 지위가 높은 별들로부터 지위가 낮은 별들까지 천신에 속한 별들을 모두 오시라고 청원 하였습니다.
단군이라는 말에는 천자 천군 천신이라는 뜻과 하늘과 소통하는 제사장이란 말이 숨겨져 있듯이, 단군조선 시기에는 제천의식이 성황을 이루어, 아시아 전역으로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특히 2세 부루단군 사후 그 공적을 기린 백성들이 질그릇 속에 쌀을 담아 재물과 복록을 비는 부루단지 업주가리 문화로 대대로 전승됩니다.
특히 부루단군이 단군에 오르기전 태자시절에는 현재 무가 12 거리 중 창부거리가 별도로 있는데, 이는 아버지 단군이 내린 관직명칭이 창수사자인데 부루태자의 창자와 부자를 합성한 말이, 당시 대륙에 이른 대홍수 대처법을 적은 금간옥첩이란 기록물을 우에게 전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 문창후 최치원의 기록에 단군나라 말기는 대국이 아홉 소국이 12국이나 되었다 하므로, 당시는 적어도 25여국 이상 옥첩 또한 나라 수만큼 전해졌으라라 봅니다.
환웅천왕이 내려온 신단수 부근은 신역 또는 제단으로서 이 주의를 신시라고 하였으며, 단군은 이 천왕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을 제사하고 모시던 단군조선의 제주이며 군장이었으며, 단군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인 제정일치 시대의 모든 군장이 제주를 겸하였으며, 백성들은 제주인 무당을 통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는데, 신라는 왕호를 차차웅 즉 무당이라는 호칭을 가졌으며 고구려는 사무, 마한의 천군은 모두 제정이 하나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호칭이었습니다.
가야국의 계락,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소도 등은 단군신교의 유풍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며 유, 불, 선, 이 들어옴으로써 고유한 무속이 변형되어, 유교의 길흉의 예의와 불교의 분수의 법, 도교의 초제의 의식 등과 혼합된 무속으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굿이나 제사의 주제를 무(巫)라 하였는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신을 내리게 하고, 기도로써 재앙을 피하며 축복을 내리게 하였으며, 여무를 무당 또는 만신이라 하고 남무를 박수 또는 복사라 하였는데, 아직도 제족의 샤먼과 일정 정도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살만문화 살만교가 있었는데, 특히 만주의 장백산지역 이북을 중심으로 하는 백산과 흑수지역의 전설적인 고사와 신화는, 원시 종교 형태의 유산을 보여주는 원형적 가치가 있습니다.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했다는 부여신과 그 아들인 고등신을 모신 신묘가 있고, 신수라는 큰 구멍에 왕이 직접 제사했는데, 고구려 초기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하는데 이 때부터 제정이 분리 되었습니다.
기록 25사에는 평소 오월달에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무리 지어 노래부르고 춤추고 술 마시기를 밤 낯을 쉬지 않는다. 그 춤은 수십인 이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구르고 몸을 업드렸다 일어났다 하며 손발로 장단을 맞추는데, 장단은 중국의 탁무와 유사한데가 있다. 시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역시 이같이 귀신을 믿는데, 나라의 읍마다 각기 한사람씩 세워 천신을 주제케 하며 그 이름을 천군이라 한다. 또 모든 나라에 각각 특별한 마을이 있는데 이름을 소도라 하며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기는데 어떤 도망자건 그안에 들어가면 대개 싸움을 할망정 돌려주지는 않는다. 그 소도를 세운뜻은 부도와 비슷하나 옳고 그름 행하는 바는 다름이 있다.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고대 한인들은 우리의 음악을 매, 리, 주리라 하였고, 춤은 지모무라 불렀는데, 음악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음악 이름의 글자로 보아 춤은 창을 들고 추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농경 사회 이전 수렵 사회에서 추었던 춤으로 이해 할 수 있으며, 또 구이의 음악과 춤을 하나라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군조선 삼한 다음 오국과 삼국까지 왕성한 제천의식이 있었으나, 오국시절 도교나 불교의 유입으로 병존과 혼습된 의례의 변화를 맞이하는데, 이씨 조선에 이르러서는 국교인 유교관으로 말미암아 신교가 박해를 받았지만, 오늘날까지 무속신앙으로 그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히지만 배달국 이후 여러 나라들이 생기면서 각 나라들은 제천의식 나라굿인 대동굿 국가 최대의 의례로 치뤄지는데, 은나라의 제, 조상제, 부여의 정월 영고. 고구려 시월 천신 수신 화백 동맹. 예의 호랑이 무천. 마한 오월 계절굿. 각 소도 천신굿. 등의 나라굿은 조선조 까지 전례되며, 이때는 노래나 춤이 동반되어 무리진 무동의 대열지은 작대무, 디딤춤, 손발맞음춤, 강강술래, 사방치기, 연풍대, 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대인들은 집단 도시를 제외하면 소단지 마을로 흩어져 살고 있어서 개인이나 가족들의 길흉사나 질병 등 일상에서의 어려움은 부도의 지도자나 대다수 당골, 당골레라 부르는 무속인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지역이나 마을 사랑방 역활까지 하게되는 광범위한 사회성을 띄고 있었으며 그 위상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또한 마지막 단군이 산에 은거해 신선이 되었다란 기록의 선도는, 제족은 환인으로부터 선사를 말하고 있고, 한족은 황제나 노자로부터인데, 단군선도가 아사달산 문박에게 전하고, 보덕·을밀·영랑·안류·단옥·벽옥·대란·소란·구상·무골·묵거·재사, 로 전해졌다고 하고, 한족 선도는 황노교의 이름으로 의식과 주술 단약 복용으로 장생불사를 추구하였다면, 제족의 선도는 오로지 수련에만 전념하는 전통이라 합니다.
하지만 한제족의 선사는 장자 이후 전국시대부터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이므로, 그 윗대의 기술은 신빙성이 떨어지며, 선도에 대한 기본인 선사는 제족의 것이라 보이는데, 이것은 웅녀의 마늘 쑥으로 동굴기거와 단군의 산신설, 고구려의 선인도와 조의선인, 옥저의 두 왕녀 단옥과 벽옥, 사선녀설, 발해의 천신교, 신라의 만파식적, 신라 4선 영랑, 술랑, 남랑, 안상, 의 화랑도와 풍류도, 백결과 우륵의 선가, 물계자 계통의 원효선사, 명랑법사, 선가 이름의 자혜인 의상, 당서 백일승천한 우화등선 16선 중 하나인 김가기, 최승우, 물계자 대세 구염으로 이어온 최치원은 선도사의 도맥의 비조로 불리웁니다.
이렇게 단군조선은 유입된 유목 부계전통 세력과 정착하던 유목 모계전통 세력들 간에 평화롭게 통합한 유일한 사례이며, 북방계와 남방계의 결합으로, 공식적인 한민족의 태동국일 뿐만 아니라 환국과 배달국의 전통과 유습을 그대로 물러 받은 나라이고, 전승되었던 천부경 홍익인간 제세이화 사상에서 홍범사상 등으로 더욱 심화 발전하였으며,
참고로 단군이라는 용어는 한문이 생기고 나서 생겼으며, 이 용어는 위서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는데, 일연이 그것을 삼국유사에 다시 인용했으며, 실제 삼국시대 때 한문이 들어와서 비로소 박달'단'자 임금'군'로 번역되어 그것이 위서에 인용되었기 때문인데, 현재 남아있는 여러 위서인 위목의 위서, 삼국지 위서, 위략, 등에는 단군이라는 말이 나오진 않아, 이들 사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오독하게 만들지만, 이 한제족 사서들은 동이, 구려, 한, 제, 등의 말로 제족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본래 동이란 말이 배달국 시절부터 한제족이 시작된 말인 것처럼, 구리, 구려, 라는 말도 한제족이 이족을 지칭하던 말이였는데, 이 구리 구려족인 제족 당사자들은 자기 스스로를 우리 라 하였던 것처럼, 일찍부터 개적인 나라는 요소 보다는 집단적 우리 라는 용어가 제족들에게서는 일반적인 말의 쓰임 현상이며, 이 연장선상에서 배달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홍익인간 사상은 사회나 단체 집단들의 전체가 공존할 수 있는 윤리적 명제이자 공동체의 책임에서 출발하므로, 이념의 중심은 개인의 자유라기 보다는 전체의 조화가 되는 공생의 원리가 되며, 이 정신은 훗날 불교의 자비, 유교의 인, 실학의 공리, 등의 사상에도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자연과 함께하는 생명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홍익사상은 배달국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거쳐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 발해로 이어져, 왕도정치의 맥을 동방에서 유지한 유일한 문화적 계보가 됨과 더불어 현재에까지 한국의 자주적 공동체를 유지하는 도덕적 구조로서의 철학사상이며, 선인사상은 사방으로 전파되어 여러 갈래의 사상으로 전개되는바, 그 중 하나가 도교라고 봅니다.
또 부도지나 삼신사상, 홍익정신은 하늘 천신,과 이를 대행하거나 매개하는 제사장인 천왕, 천군,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위계는 권위에 맹종하는 단순한 수직관계가 아니라, 도덕이나 율법의 책무를 우선으로 하는 수평적 관계로 이어져 오며, 이를 습득한 제종족들이 세상 각지로 진출 하여서도 이를 지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 실례로는, 기록에 나오는대로 긴 장마나 한발 등 기후 위기상황 조차 지도자에게 책임이라 물어 탄핵하는 사례나, 남미 원주민 중 어떤 부족들은 자기부족들의 식량위기 등 존립에 위기가 닥치면 추장을 탄핵하여 그 책무에 대해 심판하는 여러 사례들이 조사되었으며, 이러한 관계성향은 17세기 서구의 사회계약론과는 극명하게 차이가 있으며, 어떤 입장에서는 이상적인 정치행위에 가깝다 할 수 있습니다.
또 삼한은 수운과 해운의 왕국으로 대륙의 강 가운 끼고있는 좋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기록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었는데, 그 백성의 땅은 식물들이 종자를 심었을 때, 뿌리 붙이기 좋은 저땅이었다. 그래서 뽕나무 심어 누에를키우고, 베와 비단을 기를줄 알았다. 마한 사람들이 있는 각국에는 우두머리가 있었는데, 큰 나라의 명칭을 신지라 했고, 그보다 못한 나라의 명칭은 읍차라고 했는데, 이런 나라들은 산에서 바다사이에 띠엄 띠엄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각 나라들의 수도는 성곽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라 하였으며, 반도는 마한만 있었다 하였으며, 단군왕조의 영역의 서단이 지금의 홍해 북단 수에즈 까지이며, 동단은 신대륙에 이르는 대륙과 해양을 아울러 광대하였으며, 문명은 각각의 문화로 세분하고, 정치와 종교, 기술과 예술, 인문과 사회의 분화가 이루어 집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