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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부활절 특강
그가 살아나셨다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오늘은 부활절 예배로 드립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고 시신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살아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어떤 분이 되십니까? 우리는 부활의 믿음을 어떻게 가지게 됩니까? 또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즉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가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힌 지 사흘째 되던 날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비통함을 감출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으로 섬겨주셨던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려고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시신을 씻고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로 싸는 과정이 정식 장례 절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 안식일 때문에 급하게 장례를 치른 후였기에 여인들은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다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방부 처리 기술이 없었기에 시신은 빠르게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몰약, 향유, 알로에 같은 향품을 발라 부패 냄새를 줄이고 일정 부분 부패를 늦추는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또 향품은 매우 값비싼 것이어서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것은 ‘이 사람이 귀한 존재였다’라는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향품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사, 정결,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신에 향을 바르는 것은 죽음이 단순한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과정으로 보는 신앙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여인들은 새벽을 뚫고 무덤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놀라운 일이 생깁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났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덤을 막아놓았던 바위 같은 큰 돌을 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천사가 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예수님의 무덤은 어떠했을까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해 훔쳐 가놓고 부활했다는 헛소문을 낼까 봐 훔쳐 가지 못하도록 경비병들을 통해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판결했던 총독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경비병을 동원해 힘대로 굳게 지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의 수는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삼엄한 경비 속에서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여기서 큰 지진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사탄을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 돌로 막아두었을 때 그 돌은 요지부동처럼 보였습니다. 감히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 돌을 굴려내고 그 바위를 깔고 앉았습니다. 이 천사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3)” 구약에서 번개나 흰옷 역시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큰 돌은 무덤문을 막는 역할을 했기에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돌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요소를 가진 천사가 앉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시고 짓누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여인들은 처음 겪는 일이라 무섭기도 하고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여러 번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실제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을 박차고 살아서 나오셨습니다. 무덤과 큰 돌과 경비병이라는 한계적 상황들이 더 이상 예수님을 죽음의 테두리로 가둬두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보다도, 그 어떤 강한 세력보다도 훨씬 강합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이 같은 부활 소식은 우리 모든 인생에게 주시는 가장 기쁜 소식이요 가장 큰 희망의 소식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하고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입니다.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돌아갑니다. 죽음은 모든 의욕과 소망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조금만 아프고 힘든 문제를 만나면 죽음을 생각하고 혹시 죽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취업이나 물질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내면이 한계적이고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실패와 좌절, 절망과 두려움에 확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는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한계인 죽음의 세력을 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무리 강한 인간도 죽음의 한계만큼은 이기지 못합니다. 강해서 다른 문제들은 다 극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음은 이기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한계 짓고 절망과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두렵게 하고 우리를 휘어잡고 있는 그 죽음의 세력을 우리 예수님이 이기셨습니다.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무덤의 큰 돌을 굴려내고 그 돌을 짓밟고 앉으셨습니다. 지금은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역사하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임재하셔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언제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했습니까?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때는 주님 다시 오실 때를 의미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도 우리와 함께해주시고 다시 오셔서는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따른 우리 성도들을 영광스러운 부활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시고 영생을 누리며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삶을 우리는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했으니, 우리도 부활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으니 우리도 부활로서 죽음을 이깁니다. 우리는 이미 강력한 어둠의 요소인 죽음과의 싸움에서 이미 승리가 보장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어떤 인생의 한계도 뛰어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인생의 한계와 어둠을 이겼는데 그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들겠습니까? 그 무엇이 우리를 한계 짓고 눈물 흘리게 만들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죽어봤자, 부활입니다. 죽어도 신령한 형체로 다시 삽니다. 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죽어야 부활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 부활에 이르려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 날마다 죽는 삶을 산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봤자 부활입니다. 날마다 죽어도 다시 삽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에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한계인 죽음보다 더 하수인 절망, 좌절, 낙심, 염려, 걱정, 두려움 등으로 생명력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면에 모셔 들여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 나도 부활하리라! 나도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하리라. 죽음의 한계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내게 임할 때 나도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온갖 염려거리들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패기와 영적 생명력으로 충만하여 도전하는 진취적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 삶을 한계 짓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실패, 좌절, 절망, 건강염려, 장래 염려, 불안감, 낙심 등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한계 속에서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이 이런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임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으로 주님의 부활 생명을 덧입게 될 때 우리는 죽음의 하수들은 물론이고 죽음의 세력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있는가입니다. 우리에게 부활 생명이 있지만 그 부활의 생명이 우리 삶을 역동적으로 지배하고 있진 못할 때가 많아 보입니다. 이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우리 심령에 모셔 들이므로 주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삶을 지배해서 부활의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과 10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여인들에게 사명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천사가 준 명령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십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갈릴리에서 보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로 처음 부르셨던 곳에서 다시금 그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과 고초를 받으실 때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부인했고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철저히 실패한 제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했다고 나무라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영접해 주시고 다시금 새롭게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회복과 격려를 해주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갈릴리를 부활 이후, 만남의 장소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부르심은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에 이르러 예수님을 뵙고 경배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러운 분으로서 제자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9,20).” 본문의 헬라어 원어 구조는 ‘제자로 삼아’가 본동사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분사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처음 부르시고 훈련하신 목적, 곧 천하 만민의 구원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은 먼저 세상 만민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앉아서만 구원 역사를 섬길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복음 역사는 이렇게 말씀에 순종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 죄를 회개시키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돕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제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도록 도와야 합니다. 여기까지 이를 때 진정으로 제자 삼는 것이 되고,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백성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 그 어떤 일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이 무엇일까요? 상황은 그대로일지라도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절망에서 소망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런 변화는 논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만날 때 일어나는 변화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어둠과 두려움, 죽음의 권세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력을 믿고 신뢰하므로 삶이 역동적인 생명,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삶의 실제가 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면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은 당연히 사명을 낳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부활 신앙은 단순히 ‘나 한 사람 구원받았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가진 신앙은 반드시 사명을 낳게 됩니다.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람 낚는 어부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키워내는 삶,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그간의 추억을 얘기하시거나 회포를 풀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제자들을 다그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한 가지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고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간곡한 부탁이자 명령입니다. 모든 복음서는 이 예수님의 명령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부활 신앙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계신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여전히 어둠 속에 두려움과 절망과 실패 가운데 머물 것인가? 아니면 부활 생명이 우리를 지배하므로 담대함과 기쁨이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 생명을 충만히 덧입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해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사명을 세상 끝 날까지 신실하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