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5년 12월 14일 - 운문댐 착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년 6월 1일 - 운문댐 건설 지원 전담 기구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9월 29일 - 운문댐 보상 심의 위원회 개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7년 11월 - 운문댐 수몰 지역 1차 보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9월 29일 - 운문교 건설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8월 - 운문댐 수몰 지역 지표 조사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운문 초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문명 중학교, 문명 고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3월 1일 - 지촌 초등학교 폐교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4월 13일 - 운문댐 완공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11월 15일 - 망향정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3월 3일 - 운문댐 수몰 가구 명단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11월 2일 - 운문교비 건립
관련 지명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관련 지명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방지리
관련 지명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방지리
관련 지명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개설]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실시된 운문댐 건설로 인하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운문댐 착공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사라진 고향에 대한 실향민들의 추억과 향수가 망향정 등을 통해 역사로 남아 있다.
[그리움의 흔적, 망향정]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청도로 이어지는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 산을 넘으면 눈앞에 운문댐이 넓게 펼쳐진다. 운문댐을 눈에 담고 도로를 계속 따라 산을 내려오면 운문댐과 국도 20호선과 만나는 갈림길이 나온다. 거기에서 오른쪽 내리막길로 조금만 가면 2층 높이의 ‘망향정’이라는 정자가 보인다. 망향정은 시멘트로 조성된 건물이다. 정자 안에 들어서면 운문댐이 건설로 수몰되기 전 마을의 전경 사진이 걸려 있다. 정자의 건립 배경을 알리는 초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유서 깊은 운문골 물속에 두고 이웃 간의 인정은 가슴에 담아 정든 내 고장 운문을 떠나지만 정다운 고향산천 그리워 다시 찾아오는 이웃 동기 쉬어 갈 망향정을 여기 세우다.”
망향정은 1985년 운문댐 건설과 함께 수몰된 운문면의 일곱 개 마을, 2,833명의 이주민들을 위하여 1998년 청도군에서 세운 정자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에서 운문댐 수몰로 인하여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운문면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곳 주민들은 캄캄한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이고, 사막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미물이 되고 말았다는 데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근본을 잃어버린 공허함을 사막에 떨어진 씨앗으로 비유한 글귀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망향정 주변에도 실향민의 공허함과 슬픔을 달래기 위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망향정 좌측에는 높이 약 70㎝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전면에 수몰된 행정 지명과 가구수가 적혀 있다. 망향정 우측에는 높이 약 2m의 운문교비가 세워져 있다. 운문교비 전면에는 1932년 개교한 운문 초등학교가 수몰되어 폐교되기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몰된 학교 교정을 그리워하며 운문 초등학교 제7회 동기생들이 세운 것이다. 망향정에서 가까운 삼거리에는 문명 학교 옛터 유적비가 있다. 높이 약 150㎝의 유적비는 과거 문명 학교가 있던 곳을 바라다보도록 세워져 있다.
운문 초등학교 유적비를 보고 망향정에 올라가서 운문호를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망향정에 걸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푸르도록 시린 호수 아래 그런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잠시 멍하게 바라보는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 보았다. 할아버지 한 사람이 손자와 며느리를 데리고 망향정에 올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산 아래가 원래 할아버지 집이었단다. 너희 아빠도 그곳에서 태어났지.” 그러자 손자가 “그런데 왜 물 속에 있어요?”라는 질문하였다. 잠시 말이 없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아이의 어머니가 “여기 댐이 만들어지면서 집이 물속에 잠긴 거야.”라고 설명하였다. 가족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췄다. 할아버지의 눈은 여전히 운문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운문댐 공사가 시작되다]
운문댐의 건설에 앞서 1981년 12월 22일 정부에서는 금호강 수계 광역 상수도 사업[운문댐 건설] 타당성 조사 및 실시 설계를 착수하였다. 이에 1985년 7월 건설부[지금의 국토 교통부]는 태백권 광산 지역과 대구광역시 주변 도시의 급수난을 완화하기 위해 1985년 9월 중으로 태백권 광역 상수도 사업의 광동댐과 금호강 계통 광역 상수도 사업의 운문댐 건설 공사를 착수하기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운문댐 건설에 앞서 다목적댐 건설에서 용수 위주 중형댐 건설로 계획을 바꾸고 1985년 12월 14일 착공을 시작하였다.
운문댐 건설로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마을과 농지 등 총 8.62㎢가 수몰됨에 따라 1986년 경상북도 지사와 부산 지방 국토 관리청장은 용지 보상 업무 위탁 협약을 체결하고 수몰 마을 주민들에 대한 보상을 시작하였다. 1986년 6월 1일에는 운문댐 건설 지원 전담 기구에 보상·이주 대책계가 설치되면서 1986년 7월 19일에는 보상 업무가 부산 지방 국토 관리청에서 청도군으로 인수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보상을 위하여 1989년 9월 29일 운문댐 보상 위원회가 설립되면서 보상과 함께 문화재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1991년 11월 30일 코퍼 댐(cofferdam)[하천 공사에서 물이 유입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완공되었고 1991년 12월 1일 본격적인 댐 공사가 착공되었다. 운문댐은 1993년 완공을 목표로 하였지만 보상과 공사 지연 등으로 인하여 1996년 4월 13일 완공되었다. 저수량 1억 3500만 톤의 중규모에 해당하는 운문댐의 완공으로 인하여 대구광역시·영천·경산·금호·하양·진간·압량·용성·남산 등 아홉 개 지역에 1일 36만 톤의 생활용수가 공급되었다. 대구광역시 및 주변 도시는 87%인 상수도 보급률이 96%로 늘고 1인당 급수량도 230ℓ에서 390ℓ로 늘었다. 운문댐은 길이 407m, 높이 55m, 가로 6m, 세로 6m의 수문 두 개를 갖춘 중앙 차수벽형 사력댐이다. 운문댐으로 인해 만수 면적 7.8㎢, 유역 면적은 301.3㎢, 총저수량은 1억 3500만 톤의 운문호가 형성되었다.
운문댐이 건설되면서 청도군 운문면 일대의 일곱 개 행정 구역이 수몰되었다. 운문면 소재지였던 대천리 221호, 순지리 113호, 방음리 63호, 오진리 35호, 서지리 85호, 공암리 74호, 지촌리 66호 총 657가구가 수몰되었다. 수몰 면적은 농경지 3.66㎢를 비롯하여 하천 2.41㎢, 대지 0.3㎢, 기타 지역 2.25㎢의 총 8.62㎢이다. 이때 운문면사무소를 비롯한 농협, 우체국, 보건소, 예비군 중대 등 6개의 관공서가 수몰되었다. 운문 초등학교와 지촌 초등학교, 문명 중학교, 문명 고등학교도 폐교와 함께 수몰되었고,
운곡 정사를 비롯한 전통 건축물 13개소, 지석묘 44기, 노거수 45본, 선사 시대 주거지 2개소, 도요지 1개소, 고분 72기도 함께 수몰되었다.
[1991년 매주 송별회를 열다]
1991년 12월 18일 방영된 SBS 특집 다큐멘터리 「푸른 일기 마지막 수업」에는 매주 이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운문댐으로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인근의 대구나 청도읍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로 인해 매주 교실에서는 송별회가 개최되었다. 남겨진 아이들 역시 떠날 준비로 바빴다. 1992년 2월 마지막 수업과 함께 치른 졸업식에는 마을 주민들도 모두 참여하였다.
운문면 대천리 808번지에 위치한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의 졸업식은 좀 더 의미가 깊었다. 1966년 설립 인가를 받은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의 역사는 실제로 1906년 문명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근대 학교의 필요성에 신원리의 김해 김씨, 월성 손씨, 오진리의 남양 홍씨 가문 등이 중심이 되어 오리와 방음리 등 5개 마을에서 동유 전답을 기부하면서 문명 학교는 1908년 학생 30여 명을 모아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문명 학교는 1966년 2월 1일에 학교 법인 문명 교육 재단 인가를 통해 문명 중학교 6학급, 문명 고등학교 3학급을 인가받아 개교하였다. 1969년 100명의 중학교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해마다 중학교 약 100명, 고등학교 30∼4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운문댐 건설과 함께 폐교가 확정되면서 1991년 문명 중학교가 84명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먼저 폐교되었고, 이후 1993년 고등학생 51명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문명 고등학교가 교정을 떠났다. 이후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는 경상북도 경산시 백천동으로 교정을 이전하였다. 홍영기 이사장은 고향인 운문면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경산시로 교정을 옮겨 2011년까지 운영하였다. 홍영기 이사장은 『내 고향 운문을 용궁에 바치고』라는 책에 문명 중학교와 문명 고등학교에 대한 애정과 고향 운문에 대한 애잔함을 표현하였다.
학교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폐교에 대한 아픔은 재학생들뿐만 아니라 모교를 잃은 수많은 졸업생들에게도 전해졌다. 운문면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학교가 폐교되자 많은 졸업생들이 가슴 아파하였다. 현재 인터넷상의 다음 카페나 네이버 불로그에는 운문 초등학교 동기회, 지촌 초등학교 동기회, 문명 중학교 총동창회 등 모교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나누는 동문회들이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운문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문화 유적 중에는 운곡 정사처럼 운문댐 주변으로 이건된 유적도 있지만 멀리 다른 지역으로 옮긴 유적도 있다.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 단지의 신라 밀레니엄 파크에는 순지리에서 수몰될 위기에 처했던 숙지헌이 이건되어 있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청도군 운문면의 수몰 마을이 고향인 시조 시인 김술곤은 2011년에 발간한 자신의 첫 시조집 『수몰 저쪽』을 통해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시조로 표현하였다. 다음은 시조집에 실린 「수몰 저쪽」이라는 시조이다.
반시감 붉게 익어 마을 한 폭 놀빛이던/ 그때 그 감나무들 운문댐에 다 잠긴 후/ 더러는 수돗물에서 감잎차 맛이 난다// 종 댕댕 귀에 쟁쟁 초등학교 조무래기/ 물이랑 지우개가 흔적 없이 지워 놓고/ 감감한 물칠판 위에 청둥오리 떠 있다// 서울서 전학해온 얼굴 하얀 소녀 위해/ 오른팔 저리도록 물수제비 떴던 나는/ 여지껏 상류 저쪽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초록빛 감잎바람 풍금소리 실어 올 때/ 몰랐네 난 몰랐네 목이 마른 이유를/ 이제는 덥석 손잡아 줄 옛집 없는 아픔이// 다슬기 눈을 뜨는 모천의 댐 수위를/ 절반은 마음속에 낮춰가며 살아야겠다/ 야무진 조약돌 하나 그냥 품에 안은 채
‘고향을 떠나면 천하다.’라는 속담이 있다. 제 고향이나 제 집을 떠나 낯선 고장에 가면 자연 천대를 받기 쉬우며 고생이 심하고 외롭다는 말이다. 고향이 가지는 안정감 그리고 그것을 상실하였을 때 오는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대변하는 말이다. 수몰 마을 주민들도 이 고향을 잃어버렸다. 이는 단순히 공간적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의 내게 형성된 세계가 상실된 것이며, 나라는 개인이 형성된 이 복합적 심성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고향에 내재된 다양한 의미를 생각한다면 고향은 눈에서 사라진다고 하여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