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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 이야기
작성자- 바람처럼
철학에 대한 접근이나 연구 자세에 대하여
인도철학 특히 우파니샤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베단타 철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 전제를 설정하고 있다.
첫째로 학습자 또는 수행자는
“진리가 나의 생명의 실상” “satyam eva jayate.”
(Mundaka Upanisad, III.1.6.)
이라는 맹세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에 따르는
서원(誓願, pranidhāna)을 할 필요가 있다.
서원 이후 갖추어야 태도로는
진리의 가르침을 들어야(śravana)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두 번째로 경전의 가르침을 검토하며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사색(manana)하여야 한다.
내가 곧 브라흐만 “Aham Brahmāsmi.”이라는
'생명의 실상'
(Brhadaranyaka Upanisad, 1.4.10.)
을 체득하고 자각할 수 있다.
아함 브라흐마 아스미! 이 언설은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을 지닌 인간,
그리고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대승불교적 구호와도
상응하는 것이다.
좀 더 진행된 수행의 관점에서
참선(dhyāna)이나 요가(yoga)의 원리에 따라
세 번째 요소인 명상(nididhyāsana)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힌두전통은 물론
불교의 문사수(聞思修) 전통과도 이어진다.
인도 최고의 철학자인 샹까라가
『천개의 가르침』에서 제시하는 문사수의 행법은
다음의 문장으로 정형화된다.
“들어야만 한다, 숙고해야만 한다, 깊이 명상해야만
한다.(Śrotavyo mantvyo nididhyāsitavyo)”
이 문사수śravana-manana-nididhyāsana의
전통적 방법은 제식 행위의 동기가 되는
그릇된 관념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베단타 최고의 천재인 샹카라(Śankara)의
인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8살에 강물에서 목욕하다가
악어에 물리고 나서야 출가를 허락받았단다.
출가 이후 샹카라의 단명의 운명을 안타까워 한
성자들이 그의 수명을 8년 연장시켜 주었다.
샹카라는 나르마다(Narmadā) 강가에서
스승을 만나 가르침을 배운다.
어느 날 홍수로 인하여
나르마다의 강물은 범람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잘라카르사나 (jalākarsana)의 만트라
(mantra)를 읊조림으로 홍수를 막아 내는
신통을 부리기도 하였다.
그 공덕으로 그의 수명은 다시금 연장된다.
이후 비슈누의 화신 비야사가 노인으로 변신하여
상카라 앞에 나타나 논쟁을 하게 된다.
즉 비슈누 신과의 논쟁을 하였으며,
그 논쟁에서 승리하였기에
그는 수명이 16년 연장되는 축복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
그는 전 인도 지역 순례하며 진리에 대하여 설파한
다.
수 많은 토론을 승리로 장식하며
‘영적인 정복(dig-Vijaya)’을 성취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수명이 연장되었으나
30초반의 나이에 생을 다하였다.
즉 요절하였으므로 진정한 천재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샹까라의 천재성은 브라흐만에 대한 정의를 sat-cit-
ānanda로 정형화하여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브라흐만은
유일무이(ekameva-advitīya)한 실재(tattva)이다.
따이띠리야 우파니샤드(Taittiriya-upanisad 2.1)
에 의하면 브라흐만은
순수존재, 순수지식, 무한(satya jñāna ananta)이
다.
기존의 브라흐만에 대한 이해를 전복시킨
샹카라가 제시하는 수련법인 빠리샹키야나
(parisamkhyāna)는
거룩한 경전(聖典)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과의 질의와 응답을 거쳐 도달한 결론에서
그 요점만을 뽑아 궁리하는 일종의 명상이다.
이 점이 간화선에 있어서
그 핵심적 요점만을 제시하는
공안과 화두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둔 문사수의 전통은
인도의 수행전통에서부터
불교의 선종에서 강조하는 좌선의 실참에 이르기까
지 일관되게 흐르는 정신적 자세라는 점이 입증된
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수련들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시선은 회의적이며,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본다.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듯,
일반 시중에서는 요가와 명상이
건강과 미용과 관련되어 상업적으로 유행하고 있을
뿐이다.
종교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숭고하게 준수해야 하는
덕목들은 퇴색한 이미지로 남겨져서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appybaba&logNo=221174579249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샹카라는 태어날
때 시바신처럼 이마에 작은 달의 흔적과 목엔
코브라의 흔적을 지녔다고 한다. 양쪽 팔에도
시바신의 상징인 삼지창과 다마루(damaru,
작은 북)의 징표를 지녔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
과 부모는 모두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아
이는 자라면서부터 다른 여타의 애들과는 달리
총명하고 산스크리트어도 능통했다고 한다. 그
러나 아버지 시바구루가 샹카라가 다섯 살 때
세상을 떠나자 어린 샹카라는 ‘죽음'이 무엇인
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홀어머니는 샹카라의 학업을 위해 근처의 유명
한 구루쿨에 다니게 했고, 샹카라는 어린 나이
에도 불구하고 베다를 비롯한 여러 경전과 철
학, 문학, 요가에 달통하여 이름이 자자했다. 학
업을 마친 샹카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 집에
서 직접 구루쿨을 운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
고, 밤이면 어머니께 마하바라타며, 우파니샤
드 등의 경전을 읽어주곤 했다.
그러나 이미 경전들의 심오한 의미를 체득한 샹
카라는 언제나 세속을 떠나 수도승이 되고 싶
어 했지만, 어머니는 샹카라가 결혼하여 보통
의 평범한 생활을 하기를 바랐다. 샹카라가 몇
번 수도승이 되고 싶다는 뜻을 비쳤지만 어머니
는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샹카라 역시
도 홀어머니를 두고 수도승이 되러 떠나려는 것
이 맘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샹카라와 어머니는 근처 강에
목욕을 하러 가게 되었다. 샹카라가 강 깊은 곳
에서 목욕을 하던 중 어디선가 악어가 나타나
샹카라의 다리를 물었다. 이때 샹카라는 강둑
의 어머니를 향해 “어머니 악어가 다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제 마지막 소원이 세상을
떠난 출가수행승(Sannyasin 산야신)으로 죽
는 것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며 간절하게
부탁했다. 샹카라의 어머니는 죽음에 직면한
아들을 보고 “그래 이제 허락하마. 온 힘을 다
해 빠져 나오너라!”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샹카라는 악어에 끌려 다시 물속으로 사
라졌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샹카라가 잠시 후
다시 물 위로 올라와 악어와 싸우고 있을 때, 마
침 근처의 마을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 악어와
싸우던 샹카라를 도왔다. 물 밖으로 나온 샹카
라는 어머니께 감사의 절을 올리며 “어머니, 그
누구도 신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진리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
는 마지막 장례식은 샹카라가 손수 치러 주기
를 부탁하며 샹카라의 출가를 동의했다고 한
다. 이날 이후 샹카라는 세속을 떠나 진리의 길
로 나아간다.
길을 나선 샹카라는
진리의 스승을 찾아 맨발로 탁발하며 여행했으
며, 드디어 당대의 유명한 성자 고빈다를 나르
마다 강변의 동굴 아쉬람에서 만난다. 고빈다
는 샹카라를 만나자 아주 기뻐하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얻고 축복했고, 스리 샹카라차리야라
고 법명을 지어주었다. 샹카라는 고빈다로부
터 베다, 우파니샤드, 아트마비드야, 요가를 배
웠고 특히 절대의 진리인 아드와이타
(Advitism)의 가르침을 배웠다.
이후 삶의 신비와 신성한 아름다움, 진리의 가
르침을 체득한 샹카라는 전 인도를 주유하며 그
의 가르침을 펼치게 된다. 그는 성자이자 동시
에 뛰어난 명상가였고, 철학자이자 논쟁가였으
며, 시인이자 요가에 정통한 요기(Yogi)였다.
또한 당대의 혼란스럽던 종교 풍토를 개혁한 종
교 개혁가였다. 그는 다른 종교나 사상의 학파
들과 자유롭게 대론하며 그의 가르침을 펼쳤는
데 그중에 만다나 미스라(Mandana Misra)와
의 대론은 유명하다.
어느 날 샹카라는 그의 가르침을 펼치는 여행
중, 판디트 미스라가 사는 마히쉬마띠에 이르
게 된다. 미스라는 당대의 유명한 카르마 미맘
사학파의 거장으로 수많은 학생들을 거느리고있었다. 샹카라는 근처의 시바신을 모신 사원에 거소를 정하고 미스라를 만나 논쟁하기에 이
른다.
미스라와 샹카라의 대론은 미스라의 아내 바라
띠(Ubhaya Bharati)가 판정을 보았는데 미스
라가 논쟁에서 지자 이번에는 부인이 도전해 왔
다고 한다. 부인은 상카라가 금욕 수행자인 것
을 알고 남녀 간의 은밀한 육체적인 사랑을 다
룬 까마 샤스트라에 대해 물어왔다. 이에 샹카
라는 1개월의 시간을 요청하고는 카시(바라나
시)로 간다. 카시에서 샹카라는 최근에 아마루
카왕(Raja Amaruka)이 죽었음을 알고 그의
몸을 이용하기로 한다.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
신의 육체를 잘 돌보라고 당부한 이후 육체와
분리되어 아마루카왕의 몸으로 들어간다. 샹카
라는 막 화장하려는 왕의 시신 속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난 왕이 되어 왕비를 비롯한 후궁들
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야의 힘은 아주 강력
했다. 남녀 간의 사랑에 빠진 그는 미스라 부인
과의 논쟁을 잊을 정도였다. 이때 제자들이 스승을 염려하여 그의 주위를 돌며 철학적인 찬가
를 불렀다. 그 노래에 문득 왕의 몸을 빌린 샹카
라는 정신을 차리고, 본래의 육체로 되돌아와
미스라 부인과의 논쟁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로부터 미스라와 미스라의 부인은 샹카라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특히 미스라는 수도승
이 되어 샹카라로부터 슈레쉬와라차리야라는
법명을 받고 그의 수제자가 된다. 이 슈레쉬와
라차리야가 샹카라가 세운 첫 번째 사원인 스린
게리 사라다피땀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이 미
스라와의 일화는 샹카라가 시나 힌두철학뿐 아
니라 요가 수련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샹카라는 인도 전역을 여행하며 수많은 종교의
학파들과 논쟁을 통해 세계의 근본 원인인 신
과 개개인의 진정한 모습인 참나는 다르지 않으
며,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이론(不二論)의 가르
침을 펼쳤으며, 당시의 미신적이던 폐단을 고
쳤다. 그리고 인도라는 넓은 땅에 수많은 사람
들의 열망을 고려하여 중요 지점에 네 개의 사
원을 세우기로 한다......
..하략.....
*책 <인도 아쉬람기행>에서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8837356
구조 분석을 통한 샹카라의 교육법 고찰 - 『천 가지 가르침』(Upadeśa Sāhasrī) 「산문편」 1장을 중심으로 -
초록·키워드
『천 가지 가르침』(Upadeśa Sāhasrī)은 불이론 베단타(Advaita Vedānta) 학파의 문헌으로 기원후 8세기경 인도철학자 샹카라(Śaṅkara)가 지은 저서로 여겨진다. 이 문헌의 「산문편」 1장은 주제가 스승의 교육법이다. 그런데 1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교설의 내용은 실질적 교수법이 아니라 브라흐만지(brahma-vidyā)의 강설(講說)이어서, 교육법이 어떻게 나타는지 파악하는 일이 의외로 쉽지 않다. 본 논문에서는 교설의 구조를 분석하고 스승이 세 단계 과정으로 브라흐만지를 가르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1장의 주제인 스승의 교육법을 브라흐만지의 ‘체계적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교설에 나타나는 교육 과정이 단계적이고, 교육 단계들이 연결되고, 교육 내용이 점진적으로 심화되기 때문이다. 세 교육 단계란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교육 단계(1.6b-1.8)에서 스승은 지고의 아트만의 특징을 가르치고, 두 번째 교육 단계(1.9-1.24)에서 제자에게 ‘너는 누구인가?’를 묻고 너는 계급 및 인생 단계와 관련이 없음을 가르치고, 세 번째 교육 단계(1.25-1.44)에서 너는 지고의 아트만임을 가르친다. 불이론 교사가 제자에게 브라흐만지를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가 하는 문제에 관해, 샹카라는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교수법을 논하기보다, 교육 내용인 브라흐만지를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가르치는 법 자체를 알려 주고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11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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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카라는 『바가바드기타』의 주제를 지혜의 길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와 행위를 결합해야 한다는 지행회통론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행한다.
첫째, 크리쉬나에 의해서 지혜와 행위가 각기 다른 근기의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얼핏 회통적인 이중주제설(二重主題說)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중적으로 설해진 두 가지 주제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지혜가 행위보다도 더 우수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근거로서 3.1에서 아르쥬나는 “만약 당신께서 지성이 행위보다도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신다면”이라고 말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쥬나의 질문을 가지고서 『기타』의 정설(正說)로 삼으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셋째는 5.2에 대한 주석에서 샹카라는 ‘행위의 포기 vs 행위의 요가’라는 쌍에서 ‘행위의 포기’를 다시 ‘자아를 아는 자 vs 자아를 모르는 자’로 세분한다. 이를 통하여 자아를 아는 자는 지복(至福)을 얻는 것이 가능하지만, 자아를 모르는 자는 지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5.2의 입장과는 정면에서 배치되는 논리이다.
결국 샹카라의 지행회통 비판은 『기타』의 본래 입장을 왜곡한 것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