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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장 검풍혈풍 (劍風血風)
종남파의 십오대(十五代) 장문인이었던 풍운신룡(風雲神龍) 담명(譚明)은 여러 가지 면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강호에서 굉장한 명서을 날리던 고수였고, 종남파 또한 아직은 구대문파로서의 위치에 흔들림이 없던 때였다.
담명은 누구보다도 강호를 주유(周遊)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한 문파의 장문인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문파를 다스려야 할 시기에는 그는 강호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고, 제자를 가르치거나 문파의 세(勢)를 확충시키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종남파는 비록 구대문파 중 하나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나, 수 십 년 전에 일어난 종남오선의 거듭된 실종으로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즉, 문파의 최고절기들을 익힌 종남오선이 실종되면서 문파의 각종 절기들이 적지 않게 유실(流失)되었고, 천하제일을 구가하던 문파의 힘도 덩달아 약해져서 다른 구대문파들과 비슷한 수준으로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문파의 제자들을 더욱 확고히 장악하고 새로운 의욕을 고취시켜야 하는데, 장문인이란 자가 툭하면 강호의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별 상관도 없는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종남파의 고수들로서는 속이 터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담명의 재질 자체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여서, 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종남오선 시대의 영화(榮華)를 다시 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종남의 장로(長老)들이 긴급히 회의를 열어 담명과 담판을 짓게 되엇다. 결국 담명은 선배 고수들과 문하 제자들의 거듭되니 독촉과 압박에 못 이겨 그들의 제안을 승낙하고 말았다.
그것은 담명이 강호에 출도하고자 할 때는 장로들의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며, 이를 어길 시에는 장문인직을 박탈당하고 참회옥(懺悔獄)에서 십년의 수도(修道)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문파의 장문인에게 문파 제자들이 내건 조건으로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이었으나, 그만큼 종남파의 모든 고수들은 어떤 절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그밍 아니면 종남파는 이대로 주저앉고 말아 영원히 재기(再起)를 할 수 없다는 게 모든 종남파 문인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약속 이후 담명의 모습은 더 이상 강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떠돌아다니기 좋아하여 ‘ 신룡(神龍) ’이란 별호까지 붙은 담명으로서는정말 대단한 각오를 한 셈이었다.
발에족쇄가 채워지니 담명은 이후 종남파 고수들의 바람대로 제자 양성과 실전되 ㄴ절기의 복원에 전력을 기울였다. 하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공허험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광활한 강호를 부평초처럼 떠돌며 보다 넓은 가슴으로 많은 것을 보고자 했던 자신의 소박한 꿈이 문파의 기대에 짓눌리는 현실이 그에게 점차 삶의 의욕까지 빼앗아 가고 말았다.
결국 담명은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 이대로 내 인생(人生)을 포기하며 살 수는 없다!
그날부터 그는 저녁마다 신공(神功)을 수련한다는 명목 하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거처에 아무도 출입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경각(藏經閣)에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서적들이 불에 타 버렸다. 그 소식을 급하게 알리려고 장문인의 방문을 열어 젖힌 종남파의 제자들이 발견한 것은 오놈이 흙투성이인 채로 땅굴에서 황급히 뛰쳐나오는 장문인의 모습이었다.
담명은 비밀통로를 만들어서라도 바깥 세계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비밀을 들켜 버린 담명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종남파의 쇠퇴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장경각의 화재는 진압되었으나, 그 소란의 와중에 상당수의 절학비급들이 없어졌다. 일부는 화재로 소실된 것도 있었으나, 적지 않은 비급들이 장문인의 죽음에 실망한 제자들의 손에 의해 외부로 새어 나가 버린 것이다. 심지어는 그 화재 자체도 비급을 훔친 누군가가 그 흔적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저지른 것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종남파 제자들의 수는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버렸다.
그로부터 종남파는 구대문파로서의 위용을 급격히 상실하고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당시 담명이 기거했던 곳의 이름은 풍운각(風雲閣)이라 했다. 종남파의 제자들은 강호무림을 질타하는 거대한 풍운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는 의미로 생각했으나, 담명은 한 줄기 바람과 구름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었던 자신의 소박한 꿈을 나타내고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그후로도 풍운각은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고, 그때마다 이름도 바뀌었다. 하나 삼년 전부터 이곳은 주인도 없고 기거하는 사람도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태평각(太平閣)이라 불렀다.
* * *
태평각은 아늑하고 조용한 장소였다.
후원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잇었고,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전각이어서 일파의 장문인의 거처라고 하기에는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종남파의 장문인들은 이곳에 머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같은 고민을 짊어지던 사람으로서 한 줄기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어했던 담명에 대한 동경(憧憬)과 종남파의 영화 중 마지막 시절에 대한 향수(鄕愁)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평각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이십일 년 전이었다. 당시 장문인이 된 임장홍은 이곳을 거처로 삼으면서 아주 흡족해했었다.
임장홍이 죽고 난 후, 이곳은 진산월의 거처가 되었으나 그가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다.
지금 삼면 만에 다시 태평각을 보게 되자 진산월의 마음속에는 사부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샘물처럼 솟구치고 잇었다.
하나 감상(感傷)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진산월은 태평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가자욱이 쌓인 텅 빈 공간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별로 화려하지도 않고 후원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태평각을 초가보에서는 지키는 사람도 업싱 내버려두어서 얼핏 보기에는 폐가(廢家)를 연상케 햇다.
그남 부서지거나 훼손된 곳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진산월은 태평각의 대청을 지나 우측에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섰다. 사부가 기거했던 방이고, 자신이 머물엇던 방이었다. 그리고 백여 년 전에는 바람을 닮고 싶었던 사나이 담명이 사용하던 방이기도 했다.
진산월은 바으이 한족 구석에 잇는 침상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침상 밑에 두꺼운 석판(石板)이 나타났다. 석판은 몇 개의 커다란 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진산월은 손으로 일일이 그 못들을 제거하고 석판을 움직였다. 매캐해고 텁텁한 냄새와 함께 검은 공동(空洞)이 나타났다.
이 공동이야말로 담명이 자유를 찾아 뚫었던 바로 그 비밀통로였다.
담명은 밤마다 이곳에서 바닥을 파 내려갔으며, 그 기간은 석 달 가까이 되었다. 하나 그가 파 내려간 거리는 불과 사십여 장밖에 되지 않앗고, 그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턱업시 부족했다.
아마도 발각되지 않았다면 담명은 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이 통로를 팠을 것이다. 이 통로를 파는 순간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은 유일한 시간이엇기 때문이다.
진산월은 서습없이 그 공동 속으로 뛰어내렸다. 공동은 그리 넓지 않았으나 한 사람이 어깨를 펴고 걷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시십여 장쯤 가자 공동이 끝나고 거친 흙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흙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종남파 장문인들 사이에서 오랜 비밀이었다.
담명이 자진(自盡)한 후 이 통로를 조사했던 종남파의 고수들은 이 통로가 정확히 산문 쪽으로 나 잇으며, 공교롭게도 종남파의 가장 중앙에 있는 태화각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담명은 장문인답게 떳떳이 산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진산월은 흙벽을 마주보고 우뚝 섰다.
그런 다음 오른손을 내밀어 흙벽을 조심스레 밀었다.
벽이 무너지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태화각의 지하창고였다.
* * *
종리황은 동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빗었다.
하루에 몇 번씩 동경을 쳐다보고 멋을 내는 것은 총관에게서 배운 오래된 습관이엇다. 물론 총관이 보고 있을 때는 결코 동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을 흉내낸다는 것을 알면 누구라도 별로 기분 좋아하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종리황도 일부러 그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이 행동거지에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자꾸 동경을 쳐다보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 동경을 보고 머리를 빗거나 옷을 매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 뿐이었다.
‘오늘로 종남파는 강호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종리황은 동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빙긋 미소지었다.
설사 봉월과 손익을 살해한 절세의 고수가 종남파의 남은 잔당들을 모두 이끌고 이곳에 온 것이라 해도 조금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공격해 들어오든 이내 종적이 발각될 것이며, 그 순간 양전과 쌍염라를 비롯한 수십 명의 고수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만에 하나 운 좋게 그들의 공세를 둟는다 해도 결국은 전괴나 자신의 손에 쓰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 종남파에 잇는 초가보 고수들은 웬만한 강호의 방파(幇派) 하나쯤은 어려빚 않게 없앨 수 있는 규모였다. 게다가 종남파의 본산이라는 천험(天險)의 요새로 보호받고 있으니 승패(勝敗)는 누가 봐도 뻔한 것이었다.
‘이왕이면 그들과 싸우다 피해가 발생하여 양전이 희생되는 것도 괜찮겠군.‘
종리황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양전이 비록 사패 중위 일인이라 하나 무공으로 보나 초가보에서의 위치로 보나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다. 단지 그는 양전을 보면 이상한 경쟁의식이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에게는 두려움의 빛만 보이는 수하들이 양전에게는 은근한 복종과 경모를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양전이 살든 죽든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나, 죽게 된다면 자신은 꼴보기 싫은 얼굴 하나를 안 보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종리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누각 위로 올라왔다.
종리황은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양전이 보낸 인물인가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허리에는 고색 창연한 장검을 찬 껑충한 키의 괴인이 서 있었다. 괴인의 두 눈을 보는 순간, 종리황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고수구나’
이 괴인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가진 자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수하 중에 이런 눈을 가진 자는 없었다. 물론 양전의 수하들 중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종리황은 한차례 숨을 몰아쉬고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종남파의 인물인가?"
괴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층에 몇 사람이 있었을 텐데...... "
"어섯 명."
"그들을 어떻게 했나?"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텐데."
종리황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괴인의 말대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확인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원래 태화각의 일층에는 스물두 명의 고수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세 군데에서 벌어진 소란 때문에 양전이 대부분을 데리고 가고 여섯 명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여섯 명의 고수들을 쓰러뜨린 건 대단한 게 아니다. 종리황리 놀란 건 여섯 명이나 되는 고수들이 쓰러졌는데도 이층에 있는 자신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햇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미처 반격하거나 경보를 알릴 사이도 없이 단숨에 쓰러지고 말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종리황은 다시 물엇다.
'며칠 전에 봉월과 손익 등을 살해한 것도 당신 솜씨인가?"
괴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왔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외부에서 종남파로 들어오는 비밀통로라도 있는 건가?"
"그런 건 없소."
"그럼 어디로 들어왔나?"
"동봉."
종리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잇었을 텐데...... "
"내가 올 때는없엇소. 사냥꾼을 쫓느라 모두 자리를 비웠더군."
종리황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로군. 내가 너무 경솔하게 생각햇어. 단순한 성동격서인 줄 알았더니 이중(二重)으로 계략을 꾸몄군. 당신이 생각한 것인가?"
"내 제자가."
종리황은 뜻밖인지 눈을 살짝 치켜 떴다.
"당신은 벌써 제자를 둘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데...... "
"들어 보았는지 모르겠군, 동중산이라고."
"비천호리!"
"질 아는군."
종리황의 눈빛에 서서히 신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는 괴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군. 당신은 실종되었다던종남파의 장문인이로군. 삼절무적 진산월...... "
"그게 바로 나요."
막상 괴인의 정체를 알고 나자 종리황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떠올랐다.
"총관의 예측은 귀신과도 같군. 이래서 경외(敬猥)하지 않을 수 없다니까. 당신이 이곳까지 잠입한 수단은 칭찬해 마지않지만 돌아온 시기가 너무 나빴네. 왜 하필이면 오늘 돌아온 건가?"
"오늘이라고 특별한 건없지."
"아니, 오늘은 내가 이곳에 있지 않나? 게다가...... "
진산월의 등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노부도 있지."
진산월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천천히 등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삼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에 한 명의 노인이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노인의 등뒤에 비어져 나온 길다란 창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진산월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패왕창 전괴로군."
전괴의 눈이 번쩍 빛났다.
"어떻게 노부를 아는가?"
"예전에 소림사 대집회 때 멀리서 보았지. 한 지역을 대표하여 무림맹(武林盟)의 지단(支壇)을 맡고 있던 자가 초가보의 일개 수하가 되었다니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전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사람마다 생각이 틀린 법이니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게."
"생각은 틀려도 염치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지."
전괴의 얼굴에 엷은 홍조 비슷한 것이 떠올랏다가 사라졌다.
전괴는 무림맹이 창설될 때 하락지단(河落支壇)의 단주로 추대되었던 인물이다. 하락지단은 하남성의 고수들을 통합한 곳이었다.
비록 무림맹이 서장 천룡사와의 대결을 위한 한시적인 조직이었을지라도 한때 천하무림의 모든 정예들이 뜻과 힘을 합쳤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하남성의 모든 고수들을 대표하여 책임을 맡앗던 전괴가 일개 보의 휘하로 들어갔다는 것은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괴는 진산월의 말에 순간적으로 수치심을 느꼈고, 그것은 이내 분노로 변해 버렸다. 전괴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며 음성 또한 싸늘해졌다.
"젊은 친구가 말을 잘하는군. 하지만 말만으로는 어떤 것도 이울 수 없는 법이지."
진산월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래서 그렇게 떠들고 있는 거요?"
전괴는 무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더니 등뒤에 메고 있던 창을 뽑아 들었다.
팔십 근에 달하는 패왕신창을 손에 쥐자 전괴는 더 이상 볼품없고 호리호리한 노인이 아니었다. 한 자루 창으로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주름잡았던 절세고수의 풍모가 나타났다. 그의 전신에서는 칼날처럼 나라로운 예기(銳氣)가 솟구쳐 올라 주위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히고 있었다.
어느새 종리황도 진산월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삼년 만에 다시 나타난 장문인께서 그동안 얼마나 놀라운 무공을 배워 오셨는지 한번 볼까?"
다분히 빈정거리는 말이었으나, 표정만큼은 심각할 정도로 진지했다.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한옥(寒玉)으로 만든 섭선(攝扇)이 쥐어져 있었다. 그 섭선은 모두 스물네 개의 부챗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부챗살마다 신축(伸縮)이 자유로운 은사(銀絲)로 연결되어 있어 수발(收發)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이 섭선은 칠교산(七巧扇)이라는 것으로, 일곱 가지의 놀라운 묘용이 숨어 있었다.
종리황은 철교선을 무척 아껴서 평소에는 남들 앞에서 꺼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부터 철교선을 뽑아 든 것으로 보아 말과는 달리 진산월을 잔뜩 경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을 뽑아 들었다.
이 광경을 보자 전괴와 종리황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날카롭고 에리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검이 무서운 실력을 지닌 검객의 손에 쥐어지는 것을 보고 누군들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겠는가?
진산월은 용영검을 든 채로 조용히 말했다.
"종남파의 무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겠소."
종남파의 무공이라?
예전에 종리황이나 전괴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치거나 허리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아무도 웃는 사람이 없었다.
검을 든 순간, 진산월의 전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리한 신검(神劍)처럼 보였다. 전괴는 수십 년 간 강호를 종횡(縱橫)하면서 많은 검객들을 보아왔지만, 지금 눈앞의 이자처럼 가슴을 떨리게 하는 자는 보지 못했다.
‘검귀(검귀)로구나...... 종남의 무공으로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전괴는 수중에 들고 있는 패왕신창을 힘껏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직은 애송이일 뿐이다. 수백 번이나 생사(生死)기 오가는 격전을 치른 나를 당해낼 수는 없다.’
강호에서의 승부가 항상 무공만으로 판가름나는 것은 아니다. 승부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으며, 무공은 그중 한 일부분일 뿐이었다.
전괴의 시선이 슬쩍 종리황을 향했다.
종리황은 전괴의 눈빛을 보고 이내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저 늙은이가 갈등하는군.’
전괴의 신분으로 한 사람을 협공(挾攻)한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일 대 일로 싸우자니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서 전괴는 종리황에게 의중을 묻고 있는 것이다.
‘바보 같은 늙은이, 이런 상황에서 체면을 차리려 하다니...... ’
종리황은 내심 못마땅했으나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합공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동작이었다.
전괴는 마음을 굳혔는지 패왕신창으로 중단(中段)을 겨눈 채 진산월을 향해 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팟!
특별히 그가 창을 움작인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한 조각 섬광처럼 창날이 진산월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흔히 패왕창이라고 하면 무겁고 패도(覇道)적인 뉘력만을 생각하는데, 실제로 전괴의 패왕창은 무겁기보다는 빠른 것을 생명으로 하는 창법(槍法)이었다. 단지 패왕창 자체의 무게 때문에 무거움이 돋보이는 것뿐이었다.
변화무쌍하지는 않지만 빠르고 강력한 창법!
그것이 바로 전괴가 익힌 패왕십팔창(覇王十八槍)이었다.
지금 전괴가 펼친 것은 패왕일별(覇王一瞥)이라는 초식으로, 지금처럼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손가락 힘과 창의 무게를 이용하여 창날을 상대에게 쏘아보내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이것은 펼치기 전에 아무런 사전 동작이 없기 때문에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방심하다가는 영문도 모른 채 목이 꿰뚫리기 일쑤였다.
진산월은 목을 옆으로 반자쯤 움직였다. 따가 창날을 피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섬광이 사라지며 패왕창은 다시 전괴의 수중으로 되돌아갔다. 전괴의 얼굴은 어욱 냉엄하게 굳어졌고, 종리황 또한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의 등을 쏘아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업싱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전괴는 진산월을 향해 창을 쭉 내뻗었다. 얼핏 보기에는 창을 한 번 내찌른 것 같았는데, 창날이 여덟 개로 변하며 진산월의 앞가슴에 있는 팔 개 대혈(八個大穴)을 모두 노리고 들어왔다. 이것이 바로 패왕십팔창 중의 절초인 패왕팔비(覇王八譬)였다.
진산월은 수중의 용영검을 들어 그 여덟 개의 창날을 모두 막아냈다. 그 순간, 그의 뒤쪽으로 차갑고 예리한 기운이 다가왔다. 소리없이 그의 뒤로 접근하고 있던 종리황이 마침내 출수(出手)를 한 것이다.
종리황이 사용하는 무공은 현천팔선(玄天八扇)이라는 것으로, 팔십 년 전에 일대기인(一大奇人)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천자(玄天子)가 남긴 무공비급에서 익힌 절학이었다.
진산월은 이번에도 몸을 비스듬히 돌리며 용영검으로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종리황의 칠교선을 막아냈다.
한데 막 용영검이 칠교선과 닿는 순간, 칠교선이 갑자기 활짝 펴지며 그 안에서 쇠털 같은 암기가 진산월의 눈을 노리고 쏘아져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칠교선에 내장된 구독봉미침(九毒鳳尾針)으로, 일단 격중되면 해약(解藥)도 없이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가 버리는 무서운 극독(劇毒)이 발라져 있었다.
칠교선을 막았던 용영검의 검날이 갑작디 번쩍거렸다. 그와 함께 금시라도 진산월의 눈을 멀게 할 것 같았던 구독봉미침이 위력을 잃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살짝 비틀어 검날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형의 검기를 발출하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구독봉미침을 물리쳤던 것이다.
종리황은 자신의 기습적인 공격이 무위(無爲)에 그치자 황급히 칠교선을 회수했다가 재차 떨쳐냈다.
파파파팍!
예리한 바람 소리가 거푸 터져 나오며 그의 몸 주위가 온통 선영(扇影)으로 뒤덮여 버렸다. 하나 그때 진산월의 몸은 종리황이 아닌 전괴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전괴는 진산월이 자신과 종리황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고 곧장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된 표정으로 고함을 내잘렀다.
"와라!"
그의 손에 들린 패왕신창이 무섭게 선회하며 가공할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휘이잉!
마치 태풍이라도 다가오는 듯한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빗발치는 듯한 공격이 진산월에게로 퍼부어졌다. 전괴는 마음속의 두려움을 떨쳐내려는 듯 미친 듯이 손을 휘둘러서 장내는 그야말로 번쩍거리는 창날의 그림자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진산월의 검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구름 같은 검광(劍光)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차차차창!
창영과 검광이 마주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번의 격돌을 일으켰다. 그 격돌은 순식간에 끝났으나, 두 사람에게 닥친 결과는 판이했다. 진산월은 여전히 처음의 위치에 그대로 서 있는 반면, 전괴는 앞가슴이 너덜너덜해진 채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연신 뒷걸음을 치고 있었다.
병기의 무게나 길이로 보아 정면으로 격돌하면 전혀 불리할 리가 없었는데, 오히려 전괴가 일방적인 손해를 입고 만 것이다.
그때 다시 종리황의 칠교선이 진산월을 향해 날아들었다. 진산월은 이번에도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검을 휘둘러 칠교선을 가격했다.
촤르르......
마치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음향과 함께 칠교선의 부챗살이 쫘아가 갈러지며 부챗살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제각기 진산월을 향해 날아왔다. 진산월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한차례 회전을 하더니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던 부챗살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가 빠진 칠교선을 든 종리황만이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을 뿐이었다.
전괴가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패왕신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번에 전괴는 패왕십팔창법 중의 절초인 패왕희봉(覇王戱鳳), 패왕선무(覇王煽舞), 패왕휘과(覇王揮戈)의 초식들을 연거푸 펼쳐냈다. 그야말로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용맹무쌍한 모습이었다.
이 모습에 용기를 얻었는지 종리황도 입술을 질끈 깨물며 진산월을 향해 현천팔선 중의 초식들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칠교선의 자랑인 일곱 가지 암기를 사용할 생각을 포기하고 본신(本身)의 실력으로만 상대하려는지 그의 공세는 조금 전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매서웠다. 진산월의 사방은 온통 휘몰아치는 창영(槍影)과 선풍(扇風)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진작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수중의 용영검을 휘둘러 그들에게 맞서 갔다. 그는 유운검법 중의 몇가지 초식을 집중적으로 펼쳤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치열한 공방(攻防)이 계속되었다. 전괴의 패왕신창이 진산월을 향해 무섭게 압박해 들어오는가 싶으면 진산월의 용영검이 어느새 그의 요혈(要穴)을 노리고 있고, 종리황의 칠교선이 진산월을 위협하는 듯하더니 용영검늬 변화무쌍한 초식에 막혀 격퇴되기도 했다.
장내는 삽시간에 그들이 뿜어낸 검풍과 경기로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삼십여 초가 지나갔다.
그러던 한순간, 진산월의 검법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느리다 싶게 전개도히던 검법의 속도가 급격히 변하면서 그와 함께 구름 같은 검광이 삽시간에 주위를 휘감아 갔다.
전괴와 종리황은 안색이 변해 다급히 전력을 기울여 그의 검법을 막으려 했으나,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하게 변하는 검의 움직임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과 똑같은 검법이고 똑같은 초식이었는데, 그 위력은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이...... 이럴 수가!’
전괴는 사색이 되어 패왕신창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그의 머리띠는 어느새 잘려져 나가 백발 성성한 머리카라깅 폭포수처럼 풀어헤쳐졌으나 그는 전혀 의식도 하지 못했다. 종리황의 사정은 더욱 다급했다. 그는 전괴보다 무공도 약간 떨어지는데다 짧은 병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무섭게 찔러 오는 검광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만 해도 이 정도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그들의 놀라움과 경악은 한층 더 큰 것이었다.
"우야야압!"
전괴가 괴이한 고함을 내지르며 패월신창으로 곧장 진산월의 목덜미를 찔러 왔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공격이었으나, 창날에 실린 역도(力道)와 기세는 가히 좀처럼 볼 수 없는 살인적인 것이었다. 이 초식이야말로 패왕십팔창법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는 패왕격정(覇王擊鼎)의 일식이었다.
종리황 또한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에서 현천팔선 중에서 제일 위력이 강한 현천파황(玄天破荒)을 펼치며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었다.
진산월의 용영검이 한차례 꿈틀거리더니 이내 짙은 검광이 운무(雲霧)처럼 주위에 퍼져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무섭게 확대되어 순식간에 폭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사방을 휩쓸어 버렸다.
차차창!
"크아악!"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 속에 몇 가닥의 비명이 묻혀 버렸다.
진산월은 천천히 용영검을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괴는 자신의 상징과도 같았던 패왕신창으로 몸을 지탱한 채 연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가슴과 옆구리, 양쪽 어깨에는 깊은 검상(劍傷)이 파여 있어 허연 뼈가 드러나 보였다.
전괴는 눈을 부릅뜬 채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너...... 조금 전에 우리와 연습을 했던 거로구나......"
진산월은 그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왼쪽 팔을 들어 보였다. 겨드랑이 사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패왕신창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었다.
"당신의 마지막 일식(一式)은 상당히 훌륭했소."
"너...... 정말...... 너무 강해...... "
전괴는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의 쓰러지는 충격에 패왕신창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반으로 부러져 나갔다.
진산월은 싸늘히 식어 가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고수와 싸워 본 건 삼년 만이었거든. 당연히 연습을 안 할 수가 없었지."
진산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질펀한 피바다속에 누워 있는 종리황의 시신이 들어왔다. 종리황은 양팔이 잘려 나가고 미간이 베어진 채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진산월의 신형은 그의 시신을 지나 이내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재밋게 즐독하고 갑니다 낼이 기다려집니다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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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그래 좀 보여주자
애들도 좀 갈키고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