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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장 오리무중 (五里霧中) 뎅...... 뎅...... 은은한 종소리가 자은사의 경내를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른 새벽, 희뿌연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는 절간에 고적하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안개 위로 속구쳐 있는 대안탑의 풍경과 종소리는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옛사람들도 이것을 알랐는지 ‘안탑신종(雁搭晨鐘)’, 즉 대안탑에서 울려 퍼지는 새벽종소리를 관중팔경(關中八景)의 하나로 꼽았다. 자은사의 주지인 백운은 오늘따라 팔다리가 뻐근함을 느꼈다. 아마도 짗\ㅌ은 안개 때문에 습기가 차서 오래 전부터 앓아온 관절염이 도지는 모양이었다. "어허...... 노납도 이제 관 속으로 들어갈 때가 가까워 오는 것 같구나. 이른 새벽부터 온 몸이 쑤시다니...... " 백운은 침상에서 일어나며 한숨 섞인 넋두리를 토해냈다. 사미승이라도 부를까 했으나, 시가닝 너무 일러 포기하고 스스로 자신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그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리고 한 줄기 그윽한 사향 냄새 같은 것이 풍겨 왔다. 고개를 돌린 백운의 눈에 면사를 쓴 세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선실(禪室)이 온통 그녀들로 인해 환해지는 것 같았다. 비록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늘씬한 ㅣ와 굴곡이 완연한 몸매만 보아도 그녀들이 하나같이 뛰어난 미녀들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젊은 남자였다면 이른 새벽에 느닷없이 자신의 방으로 미녀가 찾아온 것을 보고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하나 백운은 온화한 미소르르 지은 채 중앙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어서 앉으시오." 세 명의 면사녀 중 오른쪽에 있는 다소 키가 작은 여인이 불쑤구 물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그녀의 음성이 마치 독구슬이 서로 부딪치듯 짤랑짤랑해서 든는 사람의 마음을 절로 상쾌하게 만들었다. 백운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노납을 찾아온 손님들 아니오? 이렇게 이른 아침에 냄새 나는 노납의 방까지 온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인데, 차라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세 명의 여인은 백운의 태도가 뜻밖인 듯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 중앙의 늘씬한 미녀가 먼저 탁자로 가서 앉자 다른 두 명의 여인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백운은 밤사이에 우려 두었던 차를 그녀들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맛이 좀 진하긴 하지만, 새벽의 빈속을 채우는 데는 제법 효과가 있을 거요." 중앙의 여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호구로군요. 모처럼 마셔 보네요." "허허...... 여시주의 차 공력(功力)도 대단하구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들고 온 것인데, 노납 혼자 마시기에는 아까워서 같이 마실 사람을 찾고 있던 참이었소. 백운은 자신도 앉아서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그런 다음 세 여인을 차분한 눈길로 쳐다보다가 이애 중앙의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단순히 불심(佛心)이 깊어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하로 노납을 찾아온 것 같지는 않구려." 중앙의 여인이 조용히 웃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먼저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대사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점을 사과드리겠습니다." "허허...... 노납은 워낙 새벽잠이 없어 심기가 어지럽고 말고 할 것도 없소." 중앙의 여인은 천천히 면사를 벗었다. 그러자 백옥같이 흰피부에 유난히 영롱한 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백운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천봉궁(天鳳宮)의 금교교(琴巧巧)라고 합니다." 눈앞의 여인이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이라도 만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는 천봉팔선자(天鳳八仙子) 중의 한사람임을 알고도 백운은별로 놀라지도 않고 여전히 자상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보니 일대기녀(一大奇女)로 소문난 금 시주였구려. 다른 두 분도 같은 선자(仙子)들이시오?" 금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쪽이 제 다섯째 동생인 유화화(劉華華)라 하고, 오른쪽이 막내인 누산산(婁珊珊)입니다." 그녀가 소개하자 두 여인도 면사를 벗기 시작했다. 두 여인 모두 금교교 못지 않은 미녀들이었다. 좌측의 여인은 유난히 새하얀 피부에 눈빛이 날카로운 여인이었다. 얼굴이 전형적인 게란형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성격이 다소 급해 보이는 인상이엇다. 반면에 우측의 여인은 이제 갓 소녀 티를 벗은 나이에 흑백(黑白)이 분명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활달하고 건강해 보였다. 비봉(飛鳳) 유화화는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신법이 뛰어나기로 이름 높은 여인이었다. 심지어는 천하무림의 십대신법대가(十大身法大家)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였다. 막내인 옥봉 누산산 또한 몇 년 전부터 강호무림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고 있었다. 그녀는 톡톡 튀는 성격만큼이나 크고 작은 사건을 달 일으켜서, 팔선자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자은사에 천봉팔선자 중의 세사람이나 나타났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장안이 온통 소란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백운도 그녀들의 갑작스런 출현에 호기심이 이는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이내 평소의 성격을 나타내듯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 분 여시주의 이름은 구석진 이곳에 쳐박혀 있는 노납도 익히 들었소. 지제 노납을 찾아온 이유를 듣고 싶구려." 금교교의 음성은 계류(溪流)처럼 부드럽고 맑았다. "저희들이 실례를 무릅쓰고 이른 아침에 대사님을 찾아온 것은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랍니다." "그게 무엇이오?" 금교교는 보석처럼 영롱한 눈으로 백운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엇다. "소문에 듣기로는 얼마 전에 취미사에 커다란 혈겁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때 참변을 당한 시신들을 이곳 자은사에 보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소." "저희들은 그 시신들 중 취미사의 주지이신 굉지선사의 유해(遺骸)를 잠시 보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백운의 흰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시주들은 굉지선사와 친한 사이시오?"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이름도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소림사의 부탁을 받은 거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상하구려. 그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서 왜 굳이 그의 시신을 보려고 하는 거요?" 금교교는 잠시 눈을 빛내더니 이내 다소곳하게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이유는 유해를 확인하고 나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백운의 얼굴에 난처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 느닷없이 불쑥 찾아와서 다짜고짜 시신을 보여달라고 하면서 그 이유는 말해 줄 수 없다니 노납은 몹시 당혹스럽구려." "평상시라면 저도 이런 무리한 부탁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게도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니 대사님께서 조금만 양보해 주셨으면 좋겠군요. 백운의 시선이 금교교의 유난히 밝게 빛나는 두 눈을 향했다. "금 시주가 노납이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하겠소?" "저라면 부탁을 한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상황을 보아서 결정하겟습니다." '예를 들면?" 금교교의 대답은 막힘이 없엇다. "부탁한 자가 강호에 이름난 악적(惡賊)이거나 좋지 못한 의도를 품고 억지를 부리는 자라면 목에 ㅏㄹ이 들어와도 승낙치 않을 것이지만, 만약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진정(眞情)을 가지고 부탁해 온다면 승낙할 것입니다." 백운은 너털웃음을 짓고 말았다. "허허...... 왜 다들 금 시주의 입이 그 어떤 칼날보다 무섭다고 하는지 알겠구려. 더 거절했다가는 금 시주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렵소." 금교교의 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럼 승낙해 주시는 겁니까?" 백운의 주름진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 시주의 부탁은 그리어려운 일도 아니었소. 하지만 나중에라도 소림사에서 그의시신을 외인(外人)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노납을 단단히 책망할 거요." "그런 일이 있을 경우에는 저희들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습니다." 백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침상 옆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곧 문밖에서 어린사미승의 음성이 들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주지스님?" "안으로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며 사미승 현오의 모습이 나타낫다. 현오는 주지스님의 방안에 워ㅔㄴ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가 세 명씩이나 앉아 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백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무얼 보고 있는 게냐?" 여인들의 미색(微色)을 넋 놓고 보고 있던 현오는 화들짝 놀라서 황급히 백운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이분 세 여시주를 불심당(佛心堂)으로 모셔다 드려라." "예? 불심당이라면 굉지대사님의 영구를 모신...... " "그렇다. 몇 번씩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백운의 호통에 현오는 움찔하더니 이내 금교교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소승을 따라로시지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금교교 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오를 따라 방을 벗어났다. 백운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천봉궁에서 아무 이유 없이 저러지는 않을 텐데...... 설마 취미사의 일이 천봉궁에게까지 여파가 미쳤단 말인가?" 불심당은 자은사에서 가장 구석지 ㄴ곳에 위치해 잇었다. 원래 불심당은 자은사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승려들의 시신을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임시로 보관하더 곳으로, 이번에 취미사의 혈겁 때 변을 당한 승려들의 시신도 모두 이곳에 보내 보관하고 있었다. 현오는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갓다. 처음에 멋모르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눈빛이 유난히 초롱한 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무안해서 얼굴이 시뻘개졌던 것이다. 그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런 미소가 현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넓은 자은사의 경내를 가로질러 한참을 가니 비로소 불심다으이 모습이 나타났다. 현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불심당을 가리켰다. "저곳입니다. 소승은 여기에 잇을 테니 세 분께선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조금 전에 그와 시선이 마주쳤던 예의 그 미녀가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앗다. "이왕 안내해 주려면 안까지 같이 가 주는 게 예의아닌가요?" 현오는 어쩔 줄을 몰라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금교교가 그녀에게 책망 어린 눈빛을 보냈다. "산 매(珊妹),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잊었느냐?" 그녀는 찔끔하여 장난스런 표정을 거두었다. 금교교는 현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이내 두 명의 여인들을 데리고 불심당으로 들어갔다. 현오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무림의 여시주들은 모두 저렇게 예쁜가?" 눈만 감으면 자신을 향해 미소짓던 미녀의 장난기 어린 표정이 선하게 떠오를 것만 같아서 현오는 열심히 아미타불을 외우고 잇었다. 그때 불심당 안으로 들어갓던 여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넀다. "어? 벌써 다 보셨습니까?" 금교교의 얼굴에는 기이한 표정이 더올라 있었다. 그녀는 현오를 힐끔 응시하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없어요." "예? 뭐라고요?" "이 안에는 시신이 한 구도 없어요." 현오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여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럴리가...... " 하나 금교교의 별빛처럼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을 보자 그녀가 결코 허언(虛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불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심당은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어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사방의 벽에 줄지어 세워 놓은 관들을 볼 수 있었다. 정면으로 불단이 있고, 그 불단 앞에는 특별히 제작된 오동나무관도 있었다. 모든 관은 관뚜꺼잉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현오는 몇 차례나 두 눈을 끔벅거리며 관 속을 들여다 보고서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며칠 전만 해도 분명히 관 속에 있었던 스물두 구의 시신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 * * 악종기가 종남파의 일을 알게 된 것은 막 아침식사가 끝난 후였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맛있는 식사를 했는데, 양전의 보고를 듣고 나서는 속이 거북해서 하마터면 먹은 것을 모두 토해낼 뻔 했다. 악종기는 양전의 핼쑥한 얼굴과 잘려져 나간 왼팔을 쳐다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이제는 내 운(運)도 다된 것 같군. 양전, 미안하네." 양전은 고개를 떨구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총관께선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아닐세. 상대의 실력을 경시하고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저질렀으니 나를 믿고 따라준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네." 양전은 악종기가 불같이 화를 앨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죄를 추궁받아 자결을 명령할지도 모르며, 그럴 경우 기꺼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악종기가 자신을 책(責)하며 사과를 하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악종기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잇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생각해 봐야겠네. 자네는 돌아가서 푹 쉬도록 하게." "예." 양전은 머리를 조아리고는 물러났다. 양전의 모습이 사라지자 악종기는 몸을 돌려 거울을 쳐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악종기가 돌연 나직한음성으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군. 삼보회동을 코앞에 두고 이런 꼴을 당하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악종기는 귀밑에 난 하얀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왕루와 이번의 일로 본보의 타격이 제접 컸어.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강북을 석권하기는커녕 화산파와의 일전(一戰)도 장담할 수 없겠는걸. 안 그런가?" 그는 대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악종기는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치 낯선 사람을 쳐다보듯 뚫어지게 보더니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피부가 거칠어졌어. 쓸데없는 신겨을 너무 많이 쓴 탓이야. 이러다가는 육십을 넘기도 전에 주름살투성이가 되겠군. 그런데 종남파의 장문인이란 친구는 시기를 아주 잘 선택한 것 같아. 본보가 삼보회동으로 정신 없을 때를 노려 본산을 되찾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야......" 그의 음성은 너무 나직해서 얼핏 듣기에는 혼자 속으로 웅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우리가 반격할 정신이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름대로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과연 그럴까?" 그는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보며 다시 물었다. "정말 우리에게 반격할 여유가 없나? 말해 봐?" 거울 속의 얼굴이 뭇고 잇는 것 같앗다. "뭐라고? 좀더 크게 말해 봐. 반격할 필요가 없다고?" 거울 속의 얼굴이 좀더 분명하게 웃엇다. "반격하지 않아도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단 말이지? 어떤 방법으로?" 활짝 미소진 얼굴 속에 괴이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 마음에 드는군. 그런데 그 방법을 하려면 희생자가 필요한데 누구로 하지?" 거울 속의 얼굴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역시 그렇지? 양전이 좋겠어, 허허...... " 악종기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 * * 금교교가다시 백운의 방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백운 외에도 두 명의 청년이 더 있음을 발견했다. 눈빛이 날카로운 흑의청년과 그보다 몇 살 어려 보이는 남삼청년이었다. 금교교의 시선은 흑의청년에게 잠깐 머물다가 다시 백운에게로 향했다. "잘 보았소?" 백운의 말에 그녀는 잠시 백운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젊은 여인이 나이 먹은노승(老僧)을 이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은 무척 무례하고 불경(不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운의 주름진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랏다. "무슨 일이 있소? 금 시주의 표정이 영 좋지 않구려." 금교교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노승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천하에 보기 드문 간악(奸惡)한 자일 것이다.’ 그녀는 이내 백운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뜻밖의 일을 당해서 제가 정신이 없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오." 백운은 두 청년의 앞자리를 권햇다. 금교교는 사양하지 않고 두 명의 여인들과 함께 자리에 앉앗다. 잠시 두 남자와 세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되엇다. 백운은 그들을 서로에게 소개시켰다. "이들은 노납의 오랜 친우의 고제(高弟)들이오. 평아야, 이분들은 노납이 조금 전에 말했던 천봉궁의 선자들이시다." 흑의청년이 먼저 짤막하게 인사를 했다. "나느 조일평이라 하고, 이쪽은 내 사제인 풍시헌이오." 조일평이란 말에 세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고정되었다. 확실히 사람은 이름이 나고 볼 일이었다. 하나 그녀들이 그를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금교교는 조일평의 길쭉하면서도 강인한 얼굴을 응시하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물엇다. "조 대협이시라면 취미사의 혈겁을 제일 먼저 발견하신 분이군요." 조일평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정말 잘 됐군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조 대협을 찾아가려던 참이었어요." "취미사의 일 때문에 말이오?" "그래요." 조일평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랏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좋은 줄릉 몰랐군. 소저는 그 일로 나를 찾아온 세 번째 인물이오." 금교교의 옆에 앉아 있던 누산산의 얼굴에 노기가 떠오르며 무언가 날카로운 음성이 나오려 했다. 하나 금교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을 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소림과 화산파 인물들이겠군요? 우리는 당신을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당신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 뿐이에요." "그들도 그런 말을 했소." 금교교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잠시 후면 알게 될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들과 전혀 틀리다는 것을." 그녀의 시선이 다시 백운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굉지선사의 유해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백운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소?" "불심당에 시신이 없었습니다." 이너 그녀는 자신들이 불심당에서본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백운은그녀의 말을 듣고 있더니 새하얀 눈썹을 찡그렸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로군. 매일 저녁마다 향(香)을 피우고 염을 읊은 시신들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염을 할 때마다 관 속의 시신들을 확인해 보셨습니까?" 금교교의 질문에 백운은 씁쓸하게 웃엇다. "아무리 우리가 불문(佛門)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해도 시신을 보는 걸 좋아할 리 있겠소? 며칠 전에 시신을 관 속에 안치할 때 이후로는 관을 열어 본 적이 없소." "그렇다면 시신들이 언제 없어졌는지도 확인할 수 없겠군요." "그럴 거요. 그나저나 한두 개도 아니고 그 많은 시신들을 대체 누가 옮겨갔단 말인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로다." 금교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잇더니 다시 물었다. "불심당에 취미사에서 변(變)을 당한 시신들이 안치되어 잇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알고 있습니까?" "그렇소. 굳이 숨길 일도 아니기에 본사(本寺)에 잇는 목\든 사람들에게 말했소." "불심당을 지키는 일은 누가 맡았습니까?" 백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도 없소. 이미 변을 당한 시신을 무엇 때문에 사람을 시켜 지킨단 말이오?" "그렇다면 결국 누구라도 남의 눈에 들키지 않고 시신들을 옮길 수 있겠군요." "허허...... 그렇긴 하겠소만, 누가 그런 무의미한 짓을 했는지 당최 모르겠구려." 금교교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 "무의미한 짓이 아닐 수도 있지요. 틀림업싱 이유가 있을 겁니다." 백운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저희들이 왜 굉지선사의 유해를 보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드려야겠군요." 백운의 얼굴에 흥미로운 빛이 떠올랐다. 금교교는 잠시 한차례 숨을 고른 다음 특유의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본궁(本宮)에서 얼마 전에 한 가지 물건이 외부로 유출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영롱비(玲瓏匕)라는 것입니다." "영롱비? 비(匕)자가 붙은 걸 보니 비수의 일종인 모양이구려." "영롱비는 천하에서 가장 예리한 물건입니다. 어떠한 호신강기라도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고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자르는 신물(神物)이지요." "오! 그런 물건이 다 있구려." "본궁의 궁주께서 아끼시전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게 외부로 유출되었단 말이오?" 웬일인지 금교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는 표정이 떠올랏다. "누군가가 훔쳐갔습니다." 백운은 탄성을 토해냈다. '허! 천봉궁의 궁주에게서 물건을 훔치다니 실로 담이 큰 도둑이로군. 세상에 그토록 뛰어난 도둑이 있단 말이오?" "정상적인 상태라면 누구도 그런 짓을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약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건 본궁의 내부의 일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양해해 주십시오." '노납이 괜한 걸 물어본 모양이오. 그런데 그 영롱비가 없어진 것이 굉지선사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이오?" "영롱비는 천하에서 가장 예리한 물건이지만, 또한 가장 극음(極陰0의 신병(神兵)이기도 합니다." 백운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극음이라면...... " "영롱비에 당하면 그 상흔(傷痕)이 얼어붙은 채 좀처럼 녹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백운은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변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일평과 풍시헌의 얼굴에도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금교교는 조용한 시선으로 백운을 응시했다. '이제 왜 저희들이 굉지선사의 유해를 보고자 했는지 아시겠지요." 백운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주들은 굉지선사를 살해한 흉기가 영롱비가 아닌가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구려." "그렇습니다. 취미사에서 음기를 띤 병기에 의해 저질러진 혈겁니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바로 그 흉기가 영롱비라고 생각했습니다. 영롱비가 없어지고 채 한달도 되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백운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런데 노납이 듣기로는 흉기가 분실되었던 검보의 빙백검일지도 모른다고 하던데....... " "그 소문은 저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가지 점에서 빙백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운의 얼굴에 흥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어떤 점에서 그렇소?" "흉수가 빙백검을 소지하고 있다면 필시 사릭 대협의 눈에 띄었을 겁니다. 사 대협의 안목으로 검보의 빙백검을 못 알아 보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죠. 검보의 인물이 아닌 자가 빙백검을 들고 있다면 당연히 사대협의 의심을 받았겠지요. 그런 상태라면 누구라도 사대협의 목을 일초만에 벨 수가 없습니다." "그렇구려." "또한 저는 굉지선사의 선방(禪房)을 살펴보고 흉수가 사용한 흉기가 결코 길다란 장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ㅡㄱ건 또 왜 그렇소?" 금교교의 표정은 차분하게가라앉아 그녀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흉수는 선사의 선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다가 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흉수가 장검을 사용했다면 탁자에 앉은 상태에서 검을 꺼내 사 대협의 목을 찌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휴익는 틀림없이 소맷자락이나 품속에 숨길 만한 크기의 단검이나 비수일 것입니다." "음...... "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그만한 ㅡ기의 병기 중 극음의 성질을 띈 것은 천하에서 오직 영롱비밖에는 없습니다. 백운은 한동안 그녀의 말을 되새겨 보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 시주의 말이 일리가 잇구려. 그렇다면 빙백검이 실종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란 말이오?" "저는 흉수가 자신이 영롱비를 사용한 것을 숨기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빙백검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드르이 관심을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혈겁이 벌어진 시기에 때맞춰 빙백검이 실종되었기 때문에 모두들 당연히 빙백검이 흉기로 사용되었을 거러고 생각하게 된 거지요.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흉수가 노리는 점입니다. 그는 세인들의 이못을 빙백검으로 돌려 자신이 실제로 어떤 병기로 살인을 했는지를 숨기고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흉수가 쓴 흉기가 꼭 영롱비라는 증거는 없지 않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굉지선사의 유해를 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제서야 백운은 굉지선사의 시신이 없어지니 것이 절대로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굉지선사의 시신을 가지고 간 자는 바로 흉수이겠구려." "그럴 겁니다. 만에 하나누군가가 시신의 상흔을 확인해서 영롱비의 흔적을 알아볼까 봐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운은 새삼 이번 취미사에서 벌어진 일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 생각함년 생각할수록 머리 속이 너무 어지러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당최 짐작조차 할 수 앖었다. 누군가가 검보의 병기인 것처럼 속여서 천봉궁의 물건으로 소림사와 화산파의 고수들을 살해하고, 그 사건을 추적 중인개방의 고수를 초가보의 영내에서 제거했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사건을 정리하는 데만도 골머리를 썩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조일평의 조용하면서도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내게 확인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오?" 금교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조 대협은 굉지선사와 사익 대협의 시신을 가까이에서 본 최초의 인물이에요/" 조일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교교는 굳게 다물어진 그의 얄팍한 입술과 날카롭게 솟은 콧날을 응시하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 대협께서 그들의 몸에 난 검흔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으면 해요." "그것으로 흉기가 영롱비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오?" "그래요. 시신마저 없어진 지금, 그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단서예요." 조일평은 잠시 당시의 일을 떠올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의 일이라 내 기억이 완벽하게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말해 보겠소. 상흔은 정확히 인후혈에 아있었소. 길이는 두 치쯤 되었는데, 한 일자(一字)로 그어져 잇었소." "...... " "죽은 지는 대략 서너 시진쯤 되어 보였는데, 그때까지도 상흔 주위가 얼어 있어 피가 흘러 나오지않았소." "그게 전부인가요?" 조일평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다시 말했다. "한 가지가 더 잇소." "그게 무언가요?" "상처 주위가 얼어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상흔 자체는 벌어져 있지 않고 오므라져있었소." 금교교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상흔이 오므라져 있었다구요?" "그렇소. 대체로 검에 베어진 상처는 벌어지기 마련이오. 음한지기를 띤 장검이라면 물론잠시 후에 닫혀지지만, 그것은 당한 사람이 아직 살아있을 때 이야기요. 다시 말해서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 상처가 벌어져 있다면 그 상태로 굳어지게 되는 거요. 그런데 세 사람의 상흔은 모두 닫혀 잇었소. 그래서 얼핏 보기에는 목에 빨간 줄을 그어놓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소." 조일평의 상세한 설며잉 끝나자 금교교는 그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자세한 답변에 감사드려요. 크느 도움이 되었어요." "흉수가사용한 병기기 어떤 것인지 알겠소?" 금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롱비가 확실해료." "왜 그렇게 단정하는 거요?" 영롱비는 극음의 물건일 뿐 아니라, 자체 내에 특이한 흡력(吸力)이 있어서 그것에 베이게 되면 상처가 절대로 벌어지지 않아요. 천하에서 극음의 성질에 흡력을 가진 것은 흡정한모(吸精寒母)로 만든 영롱비뿐이에요." "그렇다면 취미사의 혈겁을 저자른 흉수는 영롱비를 훔쳐간 범인이겠구려." "그래요." 조일평은 잠시 생각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자는 귀궁(貴宮)의 인물이오?" 뜩밖의 질문에 금교교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천봉구우이 위치는 강호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소. 그런데 천봉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궁주의 거처에 있는 물건을 외부인이 훔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천봉궁 내부의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 거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본궁의 내부에서 도와 준 사람이 있었어요. 하지만법인은 외부인이에요." "범인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요? 그를 추궁해 보면 법인을 알 수 있지 않겠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요." "왜 그렇소?" 금교교의 얼굴에 다시 망설이는 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느다라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스스로 자진(自盡)했기 때문이죠." 이번에는 조일평이 입을 다물었다. 금교교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항상 잘 웃고 사람을 잘 따라서 모두들 좋아했죠. 본궁에서 그녀를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 " "하지만 그녀는 어느 날 박에 나갔다가 누군가를 알게 되았어요. 본궁의 사람들이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 주어도 그녀의 마음속을 차지한 건 그 사람이엇어요." 유화화와 누산산의 얼굴에도 슬푼 표정이 역력했다. "그녀는 그에게 너무나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하자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그 일이 본궁을 배반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결국 그녀는 궁주의 처소에 들어가서 몰래 영롱비를 가지고 나온 거예요." 금교교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그녀를 추궁했을 때,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그때 그녀의 뱃속에는...... 그 남자의 아이가 들어 잇었어요." "그녀는 누구요?" "소봉(笑鳳) 매향향(梅香香), 나의바로 아랫동생이죠." 조일평은 다시 물었다. '그 남자는?"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몰라요. 그녀는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죽엇어요." 갑자기 누산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소리쳤다. "남자들은 모두 똑같아! 그놈은 넷째 언니를 실컷 이용만 해먹고 버린 거야. 반드시 찹아내서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도록 하고야 말겠어요! 이번에는 금교교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누산산의 두 눈에는 분노와 살기가 법벅이 되어 있었다. "그놈이 취미사의 혈겁을 저지른 것을 안 이상, 장안을 이 잡듯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금굑교가 그녀를 달래려는 듯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자를 찾을 단서가 너무나 부족하다." "반드시 찾을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늘이 무심치 않다면 반드시 무언가 있을 거예요." 금교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여전히 어둡기 그지 없었다.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지혜가 많기로 이름난 그녀였지만 지금으로써는 흉수를 찾을 어떠한 방법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 조일평을 쳐다보았다. 조일평은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더니 돌연 허공을 올려보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이제는 당신이 나설 차례요. 숨어 있지만 말고 이만 나와서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방안의 대들보 위에서 한 사람이 뛰어 내렸다. "허허...... 정말 조 소협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군. 좀 편하게 지내려 했더니 이런 어려운 일에 나를 끌어들이다니 말이오." 너털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선 사람은 초라하나 행색의 중년인이었다. 누산산이 빨개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앗다. "웬 놈이냐?" 중년인은 히죽 웃었다. "예쁜 아가씨가 입이 거칠군. 나는 남호라는 사람이오." "뭐라고? 네놈이 감히 나를 뭘로 보고...... " 그녀가 계속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 돌연 남호가 정색을 했다. "요정의(寥情依)는 참으로 단정하고 예의바른 여자인데, 조카는 어째서 이렇게 입이 험한 걸까?" 이 말을 듣자 누산산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말투까지 바뀌었다. "당신은 어떻게 요 이모를 알아요?" "요정의뿐인가? 하태진(夏太眞)과 누굉표(婁宏杓)도 모두 나를 보면 형님이라고 하는데...... " 누산산은 아예 멍한 표정이 되엇다. 하태진은 그녀의 이모부였고, 누굉표는 그녀의 하나뿐인 삼촌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가 질려서 찍소리도못하고 제자리에 앉고 말았다. 남호는 중인들을 훑어보더니 이내 백운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대사님, 안녕하셨습니까?" 백운은 그를 보더니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했다. "푸하하...... 네놈은 언제부터 장안에 있었느냐?" "보름쯤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노납을 찾아오지 않았더란 말이야?" 남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정식으로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네놈의 그 빌어먹을 형은 어디 있느냐?" "형임이야 발길 닿는 대로 천하(天下)가 내 것인 양 다니시는 신룡(神龍) 같은 분인지라 저같은 무지렁이가 알 리가 없지요." "신룡은 무슨...... 네놈들 두 형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밥벌레에 심성 고약한 놈들이다." 남호의 얼굴이 우거지상이 되었다. "대사님, 여기 이쁜 여자들도 많은네 그런 말씀은 좀...... 나중에 제가 천하에서 둘도 없는 귀한 차(茶)를 구해 드리겠습니다." 백운은 차를 구해 준다는 말에 안색이 풀어지더니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말재주 하나는 여전하구나. 그런데 평아(平兒)와는 언제부터 어울려 다닌 거냐?" 남호는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어제 만났습니다. 오늘 조 소협이 대사님을 뵈러 온다기에 따라왔가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미처 입구로 들오오지 못하고...... " "쥐새끼처럼 들보에 숨어서 귀동냥을 했단 말이지?" "헤헤...... " 남호가 실없이 웃자 백운도 더 이상은 그에게 무어라고 하지 않았다." 남호가 나타날 때부터 유심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잇던 금교교가 갑자기 불쑥 나섰다. "당신의 성은 혹시 이(李)씨가 아닌가요?" 남호는 허를 찔리니 듯한 표정이었다. "억, 소저가 그걸 어떻게....... " 말을 해놓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다. 금교교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렇군요. 남호(南湖)라...... 정말가명(假名)치고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걸 골랐군요." 누산산이 옆에서 재빨리 물었다. '언니, 저자의 본명이 뭐예요?" 금교교가 막 입을 열려 할 때, 남호가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금 소저, 영롱비를 훔쳐간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소?" 금교교는 물론이고 중인들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 "당신이 범인을 알고 있단 말인가요?" 남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누가 알고 잇다고 했소? 알고 싶지 않느냐고 했지." 금교교는 좀처럼 평정을 잃지 않는 여인이었으나, 지금은 약이 올라서 눈썹이 하늘로 곤두섰다.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요?" "그럴 리 있소? 내가 아무리 간이 부었기로써니 천봉팔선자를 상대로 농(弄)을 하고 싶지는 않소. 단지 나는 영롱비를 훔쳐간 자를 찾아낼 몇 가지 단서가 생각났을 뿐이오." 그녀는 내심 남호가 얄미운 생각이 들엇으나 그래도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엇다. "그게뭔가요?" 남호는 갑자기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아이구,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목이 마르군." 금교교는 약이 바짝 오른 표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남호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세상에 천봉팔선자에게 차 대접을 받는 영광을 누린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요." 누산산이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흥, 만약 허튼 수작을 했다간 아예 껍질을 홀랑...... " "차복승(車福承)." 남호가 대수롭지 않은 듯 단어 하나를 내뱉자 누산산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차복승은 그녀가 가장 따르는 천봉궁의 총관(總官)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호가 대체 어떻게 자신과 친밀한 사람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잇는지 의아하고 꺼림직해서 감히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남호는 차 한 잔을 맛잇게 비운 다음에야 빙그레 웃으며 금교교를 쳐자보았다. "그자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소?" 금교교는 그의 넉살에 화를 낼 기운도 없어 짤막하게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내가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겠소. 우선 첫째로...... "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입을 향했다.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의 입을 향했다. 남호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남자요." 모두들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앗다. "큭...... " 풍시헌이 참지 못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금교교는 한 번만 더 참자고 생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그는 남자란 말이오. 그것도 여자들에게 매력이 넘치는 남자." "......!" "그러니 천봉궁에만 처박혀 남자라고는 늙은 총관과 노궁주(老宮主)밖에 보지 못한 매향향 같은 소저가 그에게 홀딱 빠지게 된 거지." 유화화와 누산산은 경이로운 눈으로 남호를 쳐다보았다. 대체 이자는 강호에서도 신비지처(神秘之處)로 알려진 천봉궁의 내부를 어찌 이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하나 금교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의 말은 그가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젊은 남자라는 뜻이군요." "그렇소. 몹시 잘생기고,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예의가 깍뜻하나 인물일 것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소저 같으면 처음 보는 남자가 아무리 잘생겼다고 예의가 엉망인데도 그를 좋아하겠소?" 금교교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매향향같이 남자 경험이 전무(全無)한 여자일수록 그런 예의바른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지. 두 번째로...... " 증인들은 그의 입에서 무슨말이 나올지 호기심 어린 표정이 되었다. 남호의 다음 말 또한 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햇다. "그는 왼손잡이요." 금교교는 조금 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재빨리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자는 굉지선사와 사 대협과 태연히 차를 마시다 그들을 살해했소. 나는 혈겁이 일어난 선실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찻잔의 위치로 보아 모두들 오른손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소." "......!" "오른손으로 찻잔을 든 상태에서 영롱비로 사람을 살해했다면 결국 왼손을 썼다는 말이오. 그러니 흉수는 왼손잡이가 틀림없소." 금교교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를 마시다말고 손을 쓸 때 들고 잇던 찻잔을 내려놓고 살수를 전개한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한 모습이었다. 찻잔을 든 반대쪽 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생각하면 단순한 사실인데, 이런 걸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남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셋째로 그자는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러한 세력의 일원이라는 것이오." 이번에는 아무도 그의 말에 토를 달거나 의문을 표시하지 않았다. 남호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자는 자신이 영롱비를 사용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검보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잇는 빙백검을 훔쳤을 뿐 아니라 태청강기를 익힌 사익의 약점이 목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냈소. 뿐만 아니라 상흔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스물두 구의 시체도 감쪽같이 빼돌렸소. 이것은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것들이오. 틀림없이 그는 치밀한 정보망을 가진 세력의 도움이나 지시를 받았을 거요." 모두들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운한으로 인한 살인으로만 생각했던 취미사의 혈겁이 의외로 아주 복잡하고 거대한 내막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모두의 마음속에는 흉수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남호의 말은 그러한 에감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준 것뿐이었다. "네 번째로는 그자는 천봉궁의 내부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오." 그 말에 금교교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남호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흉수가 천봉궁의 인물이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선뜻 수긍하기 어렵군요." 남호는 그녀의 의중을 짐작하고 있는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자는 천봉궁에 영롱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소봉 매 소저가 언제 박으로 나올지도 미리 파악해 놓고 잇었소. 강호에서 천봉궁의 자세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천봉궁 내에 영롱비라는 희대의 기물(奇物)이 잇다는 걸 아는 사람은 또 그중 얼마겟소? 이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오." 금교교는 그의 의견에 반박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남호의 말마따나 그런 사실은 그리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다만 자신이 아끼던 의자매가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그녀의 총지(聰智)가 잠깐 흐려져서 그러한 점을 미처 깨닫지 못햇을 뿐이었다. 네 번째 말을 끝으로 남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누산산이 도저히 못참겠는지 재빠르게 물었다. "왜 더 말이 없는 거예요?" 남호는싱거운 웃음을 날렸다. "내가 그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모두 말했소. 설마 나보고 그자의 신체 수치라도 밝혀내란 말이오?" 누산산은 이마를 찡그리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그에 대해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큰소리를 쳤어요?" "그 정도라니? 그자가 미끈한 남자에 왼손잡이이고,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잇으며. 천봉궁을 잘 아는 인물이라는 사실만 잘 참조해도 용의자가 십중구(十中九)는 줄어들 거요. 나머지는 당신들도 머리를 좀 굴려서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뭐라고요?" 남호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진짜 중요한 건 흉수가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오.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하는 것이오." 그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흉수가 누구든 나중에 찾아내어 죽여 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이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일 때문에 벌어진 혼란이 수습되여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허비될지 아무도 모르오. 자칫 이대로 가다가는 강북무림은 온통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소?" 남호의 두 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기이한 신광이번뜩이고 잇었다. "흉수는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그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일까? 그점을 알기만 하면 그가 누구인지느 ㄴ저절로 밝혀지게 될 거요."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들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느라 상념에 잠긴 모습들이었다. 그 상념을 깬 것은 이번에도 역시 남호였다. "자, 너무 고민들 하지 말고 배도 출출한데 아침식사나 하는 게 어떻겠소? 아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자은사의 아침상은 깔끔하면서도 맛깔스럽기로 유명하다오." 그 말을 듣자 중인들은 그제서야 아무도 아침을 먹지 못한 것을 생각해 냈다. 백운이 껄껄 웃으며 남호의 어깨를 쳤다. '허허...... 좋아, 오늘은 노납이 식사를 제공하지, 하지만 다음에는...... " 남호는 우거지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좋은 차를 대접해 올리지요." |
첫댓글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밨어요
갑사합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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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밨어요
이놈이 거기까지
즐감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