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11월 20일
=항일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든 윤동주 (尹東柱.1917∼1945)님의 詩=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잠못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 동주님의 편지의 한 구절=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들판 너머 비암산의 일송정>
욕심과 꿈
분명한 차이가 있지요.
꿈이 노력하면서 바라는 것이라면
욕심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이지요.
일하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공부하지 않으면서 좋은 대학에 가고싶다.
그래요 이런 욕심들이 문제인거죠.
이런 욕심들
누가 그러시드라고요.
욕심은 아침 바람에 날리기 참 좋다구요.
그간 이런저런 욕심때문에 무거웠던 마음
아옹다옹 했던일
아침에 부는 바람 한점에
가볍게 날리는 9월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深谷]
<용정 시가지를 흐르는 해란강>
중국 길림성(吉林省)용정시(龙井市)를 찾아서...
=항일독립운동의 요람=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을 수 있다.
이 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민족 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용정은 1백년 전에 개척되기 시작했는데, 18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 아름다리 나무가 울창했고 갈대와 가시덤불이
그득했며 온갖 맹수가 살았다고 한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었다.
용정의 민속관에는 한국 교포들의 풍속, 항일의사들의 사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용정중학교는 일본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다.
<용정 시내도>
[용정에서 비암산(일송정) 가는 길 안내도]
<용정 시내에 들어서니 한글 간판이 즐비하다>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교문]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吉林省 龙井市 民声街 789号>
연길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한 용정시에 간다면 꼭 들려야 하는 곳이 용정중학교,
일송정, 해란강 등이다. 즉 우리 민족의 역사와 관련이 깊은 곳들이
관광지 아닌 관광지로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자리 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용정지역은 과거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이 활발히 펼쳐진 곳이라고 한다.
용정중학교는 과거 대성중학교였으며, 민족 시인인 윤동주 시인이 공부한
중학교로 유명하다. 현재도 연변의 한인을 위한 중학교로 운영이 되고 있으며,
대성중학교 시절때의 작은 건물은 보수하여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었다.
전시관에는 용정중학교의 역사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 등의
전시관이 있으며 윤동주 시인의 교실이 복원이 되어 있다. 전시관에는
안내원(해설가)가 상주하여 단체 방문 시 전시관과 용정중학교,
윤동주 시인외 용정시와 관련된 독립운동가 들의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 이나 용정중학교 옛터 관광 후 기부금의 명목으로 방문객이
원하는 만큼 기부를 하고 방명록을 남기고 그 돈은 학교의 어려운
학생들에 장학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구 대성중학교(용정중학교)을 찾아 온 관광버스들]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연혁]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구 대성중학교(용정중학교) 전경]
[윤동주가 공부한 교실]
[칠판에는 윤동주의 서시 가곡 악보]
[윤동주의 책상 재현]
[윤동주의 사진들]
[구 대성중학교(용정중학교) 앞의 윤동주 시비 - 序詩]
[구 대성중학교(용정중학교) 2층 박물관의 윤동주 코너]
[연전 졸업반시절 윤동주와 정병욱]
[윤동주의 습작노트와 성적표 - 평균점수 70점 약간 넘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화장실]
이상설 선생이 세웠다는 서전서숙(瑞甸書塾) 자리를 잠시 둘러보았다. 서전서숙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갔던 이상설이 1906년 이동녕 등과 같이 간도
에 있는 한국인 자제에게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 취할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기관이라 한다. 현재는 그 터를 알리는 비석만 남아
있고 앞에 용정실험소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전서숙이 있던 자리]
[시인 심달수의 시비 : 지평선]
[용정실험소학교]
[용정실험소학교 전경]
龍井이라는 마을의 기원이 되었다는 우물 용정(용두레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을
둘러보았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물은 간데없고 쓰레기만 빠져 있다.
[용두레 우물이 있는 거룡우호공원]
[지명 기원 표지석]
[용두레 우물]
[공원에서 화투를 치는 할머니들]
[해란강의 다리 용문교]
[용정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
버스로 대로를 따라 10여분 가니 산꼭대기에 보이던 그 정자는 그리 가까이
와있지 않았다. 저곳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며 시내로 내려오다가
대로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가면 그 정자에 갈 수 있다. 도로 끝에 음산한
경기장을 옆으로 돌아서니 정자가 한층 가까이에 보인다.
정자가 서 있는 비암산 자락까지 흙길이 곧게 나있다.
[바로 이 대로(龍和路) 건너편에서 갈라지는 길을 따라 일송정으로 감]
[산 정상 왼쪽 끝에 보이는 비암산 일송정]
[해란강 경기장]
[비암산 표지석]
[폐허가 된 一松亭 휴게실]
큰 바위에 새겨진 비암산 표지석을 지나고 폐허가 된 휴게실을 지나니
가파른 등산로로 접어든다. 아마 이 휴게실은 일송정을 찾는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세운 모양인데 찾는 이가 없어 폐허가 된 모양이다.
건물 모양도 멋지고 꽤 큰 규모의 건물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나무가 정자를 닮았는가?]
가파른 등산로를 10여분 남짓 올라 드디어 일송정에 올라섰다. 숨이 차오른다.
이러니 어떤 관광객이 아래의 휴게실에서 여기까지 올라오려고 할까?
이곳에서 처음으로 일송정의 의미를 알았다. 일송정은 정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송정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를 뜻했다. 당초의 소나무는 일제에 의해
1938년에 죽었으며 1991년 용정시 인민정부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어떤 기록을 보면 이 소나무도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더 죽어서 그 때마다 다시 심었다고 한다.
[일송정 복원기]
[일송정 건너편 봉우리의 기념비]
[일송정 기념비 쪽에서 본 일송정]
[비암산 후면의 해란강]
[일송정에서 바라본 용정 시 전경]
일송정 후면으로부터 비암산을 돌아 용정시내로 흘러드는 해란강을
보니 선구자가 절로 나온다.
선구자의 가사 중에 나온 해란강, 용두레, 용문교, 비암산은 오늘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용주사는 있을 법 한데 보이지 않는다.
[시내 번화가와 시장/우리글과 말을 사용하여 한국의 어느 도시에 온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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