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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박┃스┓ 스크랩 정보 남이섬에는 남이장군이 없다
화니김 추천 0 조회 128 08.03.19 09:14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충무공 남이장군(南怡將軍) 묘 둘러보기 [2008· 3· 18 (화요일 맑음) · 한국의산천]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칼국수에는 칼이 들어있지 않다고...

그렇습니다. 강원도 춘성군 북한강가 남이섬에는 남이장군이 계시지 않습니다. 남이장군의 묘는 경기 화성에 있습니다. 

남이섬에 있는 묘는 가묘라고 남이섬의 관계자도 말합니다.  

 

남이장군(南怡將軍 : 1441~1468) 돌아가신지 540년이 흘렀습니다.

남이장군은 1441년(세종 23)에 나서 1468(예종 원년)에 돌아가신 세조 때의 명장으로 1457년(세조 3) 1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1등공신이 되어 26세 때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유자광 일파에 의해 역모 죄의 누명을 쓰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1818년(순조 18) 때 그의 후손 우의공 남공청의 상소로 관직을 되찾고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게 되었다.

 

▲ 안산 한양대 역에서 본오아파트 지하차도를 지나서 69번 지방도를 타고 남이장군 묘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강원도 가평 북한강에는 '남이섬'이 있다. 남이섬 내에는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하여왔고 그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사이에는 입으로 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남이장군의 묘는 경기 화성군 비봉면 남전2리에 자리잡고 있다. 부인과 나란히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는데, 1971년에 비를 다시 세우고 묘역 정화작업이 있었다.  

 

▲ 남이장군 묘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예종시대 최대의 옥사사건 "남이의 역모사건"

재위기간 14개월밖에 안된 예종시대에도 대대적인 숙정작업이 있었다. 한명회, 신숙주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남이,강순의 역모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 남이장군 묘 가는 길 도로가의 표지를 보고 농로길로 들어가서 우회전하여 약 2km를 간다. ⓒ 2008 한국의산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관에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로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으며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 남이장군 묘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 남이장군 묘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벌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대신들이 그를 비판하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버렸다.     

 

▲ 남이장군 묘 가는 길 ⓒ 2008 한국의산천

현재 남이장군과 관련된 설화들이 많은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결혼,입공(立功),죽음 등의 네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를 살려냈다는 등 그이 신통력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대문에 민간과 무속신앙에서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되어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 남이장군 묘 입구 이곳에서 약 50m ⓒ 2008 한국의산천  

▲ 남이장군 묘 입구의 주차장 (승용차 15대정도 주차 공간)ⓒ 2008 한국의산천

▲ 남이장군 묘.1971년 충북 음성에 있던 부인의 묘를 이장해 현재는 묘역에 함께 모셔져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다. 2단으로 쌓인 석축대 위에 있다. 사성(莎城)에 둘러싸인 봉분을 중심으로 바로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왼쪽에 묘비가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이 있는 간소한 묘이다. 1971년 충북 음성에 있던 부인의 묘를 이장해 현재는 묘역에 함께 모셔져 있다.

 

▲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2리에 있는 남이장군묘와 부인의 묘 ⓒ 2008 한국의산천

남이(南怡:1441∼1468)는 본관은 의령이다. 태종(太宗)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 권람(權擥)의 사위이다. 1457년(세조 3) 17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이 일어나자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여진(女眞)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고 훈(勳) 1등이 되어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한 후인 1468년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역모를 도모한다는 죄명을 쓰고 능지처참형을 당하였다.

400여 년이 지난 후인 1818년(순조 18)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주청으로 관작이 복귀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후에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특별시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그는 외가인 남양홍씨가 살던 마을 인근인 이곳에 묻혔다. 지난 71년 충북 음성에 있던 부인의 묘를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 장군의 묘는 1971년 당시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 부인묘와 함께 있는 남이장군 묘ⓒ 2008 한국의산천

남혼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의 넷째 딸과 결혼한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깊은 물을 말을 먹여 다 없애니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남아 20에 나라 평정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 벌판을 굽어보며 읊은 이 시에는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 병조판서충무공 남이장군지묘(南怡將軍之墓) ⓒ 2008 한국의산천   

조선 세조 때의 무신 남이의 묘.
시대  조선시대 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13호 
소재지  경기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145 
 

▲ 병조판서충무공 남이장군지묘(南怡將軍之墓) 비석 (1971년 세움) ⓒ 2008 한국의산천

▲ 묘 앞에 있는 문인석 ⓒ 2008 한국의산천

블로거 도현님께서 주신 글 : 무덤에 세우는 문인석과 무인석은 원래 그 제도가 왕릉 장법에서 내려온 것입니다. 문관과 무관이 혼령이 된 왕을 저승에서도 모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문인석은 상관없지만 무인석의 경우는 병권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과 왕비의 무덤 이외에는 세우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도현님-

 

반정과 반역으로 점철된 조선왕조 쿠데타의 역사 [일요시사 박종진기자 글 참고]
흔히 성공한 쿠데타는 '반정(反正)'이라 하였고, 실패한 쿠데타는 '반역(反逆)'이 되었다.
조선 왕조사에 있어 왕이 완벽한 정통성을 누리기 위해서는 적장자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경우는 의외로 적어 27명의 국왕 중 7명에 불과했다. 또 이들을 포함해 하자없이 왕위를 계승한 왕은 10명이었다. 나머지 17명은 어떠한 형태건 왕위 계승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처럼 정통성 뿐만아니라 신하들간의 권력투쟁도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다. 사실 조선의 쿠데타는 대게 신하들간의 권력투쟁에서 비롯됐다. 왕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는 오히려 권력투쟁의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쿠데타는 당파의 이해관계와 직결돼 일어났다.
조선왕조에 있어 쿠데타적 성격을 띤 사건은 여럿 있었지만 '반정'의 타이틀로 성공한 쿠데타는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뿐이다. 이밖에 실패한 쿠데타로 이시애·이괄·정여립의 등의 '반란'이 있다.

조선왕조에 있어 왕족이 일으킨 쿠데타적 사건으로 태종(이방원)이 일으킨의 ‘왕자의 난'과 세조(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이 꼽힌다.
왕자의 난은 두차례에 걸쳐 있어났는데 제1차 왕자의 난(1398)은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가 세자로 정한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과 방번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는 태조의 왕위가 계비 소생에게 선위되는 것을 반대한 정비 신의왕후 한씨 소생 아들(특히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로 볼 수 있다.
제2차 왕자의 난(1400년)은 태조의 넷째아들 방간이 조정의 권력이 동생 방원에게 기우는 것을 경계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킨 것. 결국 이 난은 방원에게 제압돼 방원이 조선의 제3대왕 태종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계유정난(1453년)은 수양대군(세조)이 당시 조정의 실권자인 김종서, 황보 인 등을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 장악, 왕위 등극의 발판을 마련한 사건이다. 그후 수양은 허수아비 왕인 단종을 강압해 왕에 오른다. 

 

▲ 남이장군 묘 앞에 있는 문인 석인상 ⓒ 2008 한국의산천

실패한 쿠데타

조선왕조에서 실패한 쿠데타로 이시애의 난, 정여립의 난, 이괄의 난, 이인좌의 난 등이 꼽힌다. 이시애의 난은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받던 변경지역인(함북지방)의 반란이라 할 수 있다.
이시애 난은 중앙집권을 추진한 세조가 지방관을 파견하면서 함경도 호족출신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킨 것. 정부는 3만여명의 관군을 동원해 4개월이 지나서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했다.  

▲ 사성(莎城)끝자락에 세워진 남이장군 경기도 기념물 지정석 ⓒ 2008 한국의산천

 

▲ 남이장군 묘 앞에 있는 안내문 ⓒ 2008 한국의산천  

▲ 부인묘와 함께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는 상석과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에는 망두석이 세워져 있다. ⓒ 2008 한국의산천

찾아가는 길 : 안산 한양대학교 - 본오아파트를 끼고 우회전 - 수인선이 다니던 옛길 69번 도로 -  비봉면 남전리(도로가에 이정표 있음)  

▲ 남이장군 묘를 내려오며 반사경에 비친 자화상 ⓒ 2008 한국의산천

큰 카메라 무거워 차에두고, 오늘은 휴대하기에 '짱'인 똑딱이 카메라로 촬영하였습니다.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도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카메라는 두손으로 잡아야 마땅하나 가게에서 음료수를 사서 한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똑딱이 카메라는 접사에서 망원까지 올커버합니다. 카메라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하면 똑딱이 카메라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줍니다.  

 

▲ 자동카메라 (일명 똑딱이 카메라를 잘 다루려면 메뉴얼을 잘 읽고 다양한 기능을 숙지하여야 한다) ⓒ 2008 한국의산천

사진 촬영을 할때 똑딱이 카메라이던 DSLR 카메라이던 일일이 노출보정을 하시는 분이 과연 몇분이 계실까요?

기본적으로 노출보정과 장시간 노출(15초까지 조리개가 열어짐)을 연습하면, 모든 피사체에 대해서 적정노출을할 수있다.   

▲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옆 비봉 수로에는 봄을 맞아 강태공들의 낚시모습이 한가로워 보였습니다 ⓒ 2008 한국의산천

윗글 일부는 [박영규지음 들력발행 조선왕조실록]예종실록편에서 참고하였습니다. -한국의산천-

답사문의 : 경기도 화성시청 문화관광과 (031-369-2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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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3.19 09:17

    첫댓글 시산제를 올렸던 축령산에도 있었던 지명,,,남이바위...가까운곳에 찐짜묘소가 있답니다.

  • 08.03.19 18:45

    네 남전리에 있다네요... 작고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08.03.19 20:47

    ㅠㅠㅠ 후손이 없다니 관리가 소홀했겠지요!!!ㅠㅠㅠ

  • 08.03.19 21:49

    언제나 여유로우신 화니님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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