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험한 밀실 2. 나는 뒤돌아섰다. 토실토실하게 살찐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쫓아왔다. 강아지는 손을 내저어도 자꾸 꼬리를 흔들며 쫓아왔다. 강아지를 가슴에 안았다. 사람이 꽤 그리운 강아지 같았다. 내 얼굴을 자꾸 핥았다. 짖지 않은 게 고마워서 쓰다듬어 주었다. 꼬리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표창 끝에 걸리는 금속음을 들었다. 그리고 그 소리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비상구 자국이 드러났다. 겉은 잔디가 깔려 있어서 성품을 알 것 같았다. 나는 정원석을 빼내어 조심스럽게 비상구 위를 덮기 시작했다. 웬만한 장사라도 비상구를 열고 나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담을 넘었다. 강아지가 연신 낑낑거렸다. 별로 할 일이 없다면 그 강아지를 옷 속에 넣어 가지고 나왔을 것 같았다. 공중전화가 불빛 아래 애처롭게 서 있었다. "형, 납니다. 애들 두 명만 보내줘요." "왜? 어렵겠냐?" "준비는 다 됐는데 혼자 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어요." "어떤 앨 보내래." "손 빠른 애들이면 더 좋아요. 올 때 철사하고 펜치 좀 갖다 줘요. 열댓 명 묶어 "어디로 보낼가?" "잔솔밭으로요. 들어와서 입구에 서서 큰 소리로 두꺼비 찾으라고 해요. 그게 신호니까요. 내가 들어오라고 하면 전화줄부터 끊어 버리게 해줘요." 춘삼이 형은 대충 상황을 짐작한 것 같았다. "차 필요 없냐?" "야통증 가진 애 있으면 같이 보내요." "20분 내로 보낼게. 조심해라." "문 부술 때 쓸 연장도 좀 보내요." "알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잔솔밭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반겨 맞았다. "난 튄 줄 알았어요." "우리 같이 염복 많은 놈은 그게 탈이라구. 오늘 너 안 만났으면 몸 풀어줘야 할 여자 많았다구. 너 행복한 줄 알아." "피이...... ." 여자는 바람소리를 내고는 나를 끌고 밀실로 들어갔다. "너 이담에 남편 덕은 보겠다." "왜요?" 여자는 몸을 꼬며 물었다. 내 손은 여자의 가슴 속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적어도 두꺼비라는 걸 의심나지 않게 하려면 이 정도의 능청은 떨어둬야 했다. "이게 크면 남편 덕 본대잖아." "아퍼, 살살." 여자는 음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지하실 가서 대접받고 싶지 않니?" 없겠어." "큰 형님한테 얘기해 줄 테니까 한번 내려가서 서비스도 좀 받고 몸도 풀고 해라." "내 팔자에 무슨." 여자는 시큰둥했다. 지하실은 도치의 돈벌이인 남창이었다. 남자 창부 녀석들에게 돈 싸들고 오는 여자들, 욕정을 풀며 황후처럼 대접받고 싶은 여자들을 환대하는 비밀스런 곳이었다. 그곳에 오는 여자들은 남자들이 사우나탕의 밀실이나 창녀촌에서 받는 환대 이상의 쾌락과 즐거움을 맛보고 가는 곳이었다. 하나님. 지금 흥미진진하게 보고 계시죠? 세상 참 공평합니다. 사내들만이 으스대며 즐기는 걸 봐 줄 수 없으니까 저런 공평하신 겁니까. 제가 호를 하나 지어드리죠. 하공평. 어떻습니까? 맘에 드십니까? 하긴 그래요. 사내들은 몇푼의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여자를 살 수 있습니다. 대낮에 점심 먹고 나가서 목욕 한탕하고 현금을 지불한 만큼의 쾌락을 산 뒤에 의젖하게 들어올 수도 있고 저녁에 술 한잔 걸치고는 술김이란 핑계로 장화신고 오입 한번 해도 사내다우면 사내다웠지 바보취급은 받지 않잖아요. 여자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요. 꼭같은 사람 아녜요. 하나님이 애초 만들 때부터 남자편만 들었다는 것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자라고 배알이 없는 줄 아세요. 여자도 사람이다 이겁니다. 여자도 욕망과 말입니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여자를 너무 깔보지 마세요.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남녀평등 몰라요? 내가 뛰어들어가 그 용감하고 존경할 만한 여자들 상판대기 좀 똑똑히 보여드릴 테니 웃지나 마십쇼. 하나님답게 침묵을 지켜달라 이 말입니다.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사내가 들어섰다. 가방을 멘 사내는 키가 컸고 골프백을 든 사내는 키가 작았다. 나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춘삼이 형이 약속한 시간이었다. "두꺼비 형님 계십니까." 키 큰 사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다. 들어와라." 나도 큰소리로 말했다. 두 사내가 손을 들었다. 나는 여자를 잡아 일으켰다. "조용히 해. 떠들면 죽어. 비밀문으로 안내해, 어서." "왜 이래요. 큰 형님 알면 어쩌려고." "잔소리 말고." "정신 나갔나 봐. 큰 형님 성깔 알면서." "정신 멀쩡하니까. 어서!" 여자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비틀어 잡았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전화선을 끊은 사내가 다가왔다. 세 명의 종업원이 뒤로 손목이 묶인 채 따라와서 비상벨을 가리켰다. "차례차례 묶어서 밀실에 처 넣어라. 비상벧은 그냥 둬." "손님들은요." "묶으면 안 돼. 한방으로 모아놨다가 문이 부서지면 내보내." 우리 행동이 쉽게 발각되지 않은 것은 밀실 덕분이었다. 모든 구조가 밀실로 만들어져 있어서 우리가 눈치 채지 않게 한방 한방을 다니며 종업원과 손님을 구분해서 갈라 놓을 수 있었다. "형, 다 끝냈어요." 키 작은 사내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공구 가져왔지?" "이거요." 사내는 골프백을 열었다. 연장들이 들어 있었다. 두 사내는 재빨리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넌 여기 지키고 넌 손님들 내보낸 뒤에 나를 따라 붙어." "알았습니다." 녀석들은 제법 손이 빨라 보였다. 춘삼이 형이 챙겨서 보낸 것 같았다. "그 비상벧을 누르고 땅개비 애들이 왔다고 소리쳐!" 나는 화장실 안 쪽에 붙어 있는 문 쪽으로 붙었다. 키 작은 사내가 연장을 꺼내들고 내 맞은편에 붙었다. 키 큰 사내가 비상벧을 눌렀다. 인터폰 소리가 들렸다. "뭐냐?"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걸찍했다. "땅개비 애들이 세 명이나 와서 큰 형님 키 큰 사내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가만 둬, 우리가 올라갈 테니까." 인터폰은 찰칵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 모시고 나가라. 오늘 술값은 안 갚아도 좋다고 해." "원님 덕분에 공짜 술 먹었군요." 키 작은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 손님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나갔다. 철사줄로 묶인 종업원들이 체념한 듯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안에서 문 따는 소리가 들렸다. 키 큰 녀석이 종업원들 옆에 서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사내가 뛰어 나왔다. 키 작은 사내가 발목을 걸어 쓰러뜨렸다. 뒤따라 올라오던 사내가 후다닥 계단뛰기를 "묶어 놓고 따라 붙어라." 내 말이 끝났을 때는 벌써 사내의 손목에 철사줄이 감겨 있었다. 종업원들의 철삿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괜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다. 쫓아나가 불량배들을 불러들인다든지 도치 패거리한테 연락이라도 했다간 일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지하실은 캄캄했다. 전기를 차단시킨 모양이었다. "불 키고 밝은 낯으로 상면 좀 합시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비상구는 잠겼소이다. 캄캄한 곳에서 괜히 코피 나는 일이 없도록 해 봅시다. 여러 여자들도 있고 하니 말입니다. 그래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입구에 잠복하고 있을 경비원들의 표정이 눈에 선했다. 도치는 이를 앙다물고 결사적으로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게 빤했다. "이렇게 비신사적으로 나오면 연기 좀 피울 수밖에 없겠소, 나 혼자니까 우리 피차 얼굴 좀 봅시다." 고요했다. 인기척이 없었다. "그럼 할 수 없이 소방차 올 때까지 불 좀 쪼입시다. 119에 신고할래도 전화선이 끊어져서 못하겠으니 양해하슈. 어이, 여기 석유통 엎어라." 키 작은 사내가 석유통을 들고 내 옆에 섰다. 녀석은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위금을 후하게 보내드리리다." 내 말소리가 지하실 안으로 흘러 콸콸콸 흘러 내려갔다. "석유냄새니까 좀 참으슈. 곧 성냥불도 보내드리겠소." 그때 안에서 불이 켜졌다. 그리고 한 사내가 입구에 얼굴을 내밀었다. "좋소. 내려와서 얘길 좀 합시다." "형씨가 도치 형님이슈?" "그렇소. 형씬 뉘쇼?" "나는 이름없는 나그네올시다." "지나가는 과객치곤 호기가 대단하시군." 사내의 목소리는 걸찍했다. 기름통을 엎어 놨는데도 자세가 의연해 보였다. 온갖 풍상을 겪은 사내다웠다. "내려가곤 싶은데 옆의 애들이 신경 쓰입니다." "얘들아, 비켜서라." "어지간하면 맘 놓고 내려가게 해주쇼." "소문 들어 알고 있었소. 진작 그렇다고 하실 일이지. 얘들아 비켜라." 도치가 이렇게 말했다. 사내들이 모두 도치 옆에 나란히 섰다. 모두 열 두 명이었다. 생김새나 풍채로 보아서 솜씨깨나 있어 보이는 사내는 도치까지 다섯 명이었고 나머지 애들은 모두 남창노릇을 하는 사내 같았다. "그럼 내려가리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도치는 약속대로 대여섯 발짝쯤 떨어져 주었다. 큰 홀에는 아무 장식없는 소파가 놓여 있었다. 위층처럼 밀실로 된 방과 머리 손질을 할 수 있는 미용도구들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도치 형,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해주쇼." "그럽시다. 들어가 얌전하게 있어라. 귀한 손님 오셨다." 도치의 말은 제법 손님대접을 하는 말투 같았지만 실상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라는 명령이었다. 귀한 손님이란 실력이 만만찮으니 몸조심하라는 암호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우리 할배 형 소문이야 익히 들었던 터요. 동주 형님이 퍽 아끼셨던 모양입니다." "동주 형님한테 귀염 좀 받았지요. 도치 형 소문도 그 형님 편에 많이 들었지요." 나는 그를 깍듯하게 대했다. 어떻게 따지든 내겐 대선배였다. 전 같으면 감히 이런 식의 상면조차 할 수 없었다. "본론으로 갑시다." "보슬비라고 있지요. 노래하는 애들 말입니다. 언니되는 수향이가 증발했는데 내가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도치 형이 도와줬으면 해서 왔습니다." 도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잘못 오셨소. 난 이 짓이나 해서 먹고 사는 놈이라 그런 거 신경 쓸 새가 없소. 그 문제라면 가는 게 좋을 거요." 도치는 여유만만한 태도였다. "이거 왜 이러슈. 알 만하니까 온 거 아뇨. 나도 오늘은 성질 차고 왔어요. 좋게 좋게 끝냅시다." "여봐 형씨. 위 아래 높고 깊은 건 알고 덤벼야잖아. 남의 밥이지만 한 구덩이에서 밥 먹었다는 인연 아셨음 이런 대접 안 했을 거야. 잔소리 말고 곱게 가봐." 일어섰다. 애들이 천천히 걸어와서 나를 둘러쌌다. "도치 형, 손님대접 이렇게 하는 거 아뇨. 성질 차고 왔다잖소. 성주학이 밑 닦아주는 거 알고 온 놈요. 곱게 가게 해주쇼." "이 아이가 저녁 잘못 먹은 모양이다. 소화 좀 시켜줘라." 도치가 의젓하게 한마디 했다. 애들 손에 날이 허옇게 선 칼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손을 저어 보였다. "도치 형, 우리 말로 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양보요." "이 자식이 점점 귀엽게 노는군. 재롱 더 떨게 해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애들이 한꺼번에 덮쳤다. 나는 선 채 공중회전하며 소파로 차례로 걷어찼다. 세 녀석이 고꾸라지자 나머지 녀석들이 뒤로 물러났다. "칼 버려." 그래도 애들은 나를 꼬느고 있었다. 나는 표창 두 개를 던졌다. 애들이 칼을 버리고 주저앉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도치 이리 와. 어서!" 도치 손에는 표창 네 개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동주 형 밑에서 표창 실력을 닦은 사내였다. "표창 내려.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어서! 애들은 장난하면 눈깔 빠져." "너 오늘 비로소 임자 만났구나." 도치는 여유 있게 지껄였다. "동주 형님한테 가서 무초 스님 얘기나 전해라. 장난하다 눈깔 빠지는 거라고." 쉭쉭 쉭쉭! 표창이 소파에 꽂혔다. 나는 벌떡 일어나 표창을 들어보였다. 녀석이 잽싸게 내 쪽으로 굴렀다. 나는 녀석의 턱을 걷어찼다. 도치가 대굴대굴 굴렀다. 실력자한테 나는 한방 이상을 쓰지 않는 성미였다. 도치는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도치 정도의 전문가라면 이렇게 단 한방에 당한 경우가 처음일 것이다. "애들 다 묶어라." 춘삼이 형이 보낸 녀석이 철사줄로 하나씩 묶었다. 도치가 그제서야 겨우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폈다. "도치, 내 말 명심해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치의 턱을 들고 내가 말했다. 아직도 고통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내였다. "네가 실력자란 건 안다. 너 정도 실력자라면 지금쯤 좋은 사업을 할 나이란 걸 선배들을 봐서도 알 거다. 이 따위로 남창이나 차려서 얼마나 벌겠다고 몸 쓰는 거냐. 너답지 않게 말야." 도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네가 원한다면 맞장 붙어주마. 대신 내가 눈 뜨고 있는 한 이것은 용서하지 않겠다. 당장 걷어치워라. 내 말 알겠지?" 도치의 표정이 실룩거렸다. "이거 고슴도치답지 않구나. 왕년에 내가 존경하던 고슴도치가 아니구나." 도치는 겨우 일어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거물 대접을 하기 위해서 도치만은 묶지 않았다. 그것은 내 예의였다. 괴로운 표정으로 도치가 말했다. "끝까지 이 짓을 하겠다는 거냐?" "난 식솔이 많다." "그래서 남창으로 돈 벌어 먹여야 한다 이거냐?" "비록 오늘은 내가 당했지만 무릎 꿇진 않겠다. 난 이걸 계속하겠다. 어느 놈이 뭐라든." 다부진 말투였다. "너, 사람 잘못 봤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이 꼴 못봐 주겠다." "네 맘대로는 안 될 거다." "두고 보마. 후회하는 쪽이 누군가." "널 없애겠다. 내 목숨을 걸고." "넌 역시 두목질에 이골이 난 놈이구나. 난 네 말을 명심할 테니 넌 내 말을 잊지 마라. 난 두방 이상 쓰지 않는다." "어서 나가라." 도치가 풀리지 않은 육체를 꼬아가며 말했다. "내가 시범을 보여주고 나가마. 가서 끌고 와라." "잠깐." 도치가 다급하게 말했다. "넌 말할 자격이 없어. 어서 끌어내." "잠깐, 손님들은 내버려둬라." "난 두 마디 않는 놈이라고 했잖아. 아직도 넌 귀가 덜 뚫렸어." 도치는 앉은 자세에서 재빨리 내 쪽으로 덮쳤다. 그의 손엔 사시미칼이 쥐어져 있었다. "이 자식이 이거, 뒈지려고 진짜 악쓰고 있네." 생각 같아서는 손목의 혈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그런 실력자에게 치명적인 고통을 주기는 싫었다. 몇 대, 급소를 때렸다. 도치가 대자로 뻗어 누웠다. 나머지 녀석들은 그 옆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 "가서 죄다 끌고 와." 그때까지 내 지시만 기다리던 사내가 방문을 열고 여자와 남창노릇 하는 사내들을 끌고 나왔다. "저쪽 방으로 몰아 넣어." 나는 여자들을 대충 훑어보고 복도 끝방을 가리켰다. 여자들은 그때까지도 속옷 차림에 가운만 걸친 채였다. 더러는 속옷마저 입지 않은 채 가운을 걸친 여자도 있었다. 낯익은 여자들이 눈에 띄었다. 여자들의 얼굴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잡지 속에서 가끔 낯간지러운 도덕강의를 하는 여자들이었다. 나는 여자들만 모아 놓은 방으로 갔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고개 들어, 이년들아!" 내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런다고 그들이 얼굴을 내밀고 내가 누구라고 나서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한 여자만은 아까부터 초연한 척 고개를 들고 나를 빳빳하게 노려봤다. 나는 차마 그 여자에게만은 욕지거리를 할 수 없었다. 남창에 온 여자가 저렇게 얼굴을 드러내놓고 당당할 수 있을까? "아줌마는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 계슈?" "난 과부예요. 그렇다고 새로 시집가고 싶진 않아요. 애들도 있어요. 이게 나쁜 짓인 줄은 알지만 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려고 여기 단골 손님이 된 여자예요." "떳떳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죄될 것도 없지요." "하루에 얼마씩 냅니까?" "내가 여기 다닐 때부터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어요." "당신은 가슈." "이 여자들도 같이 가게 해줘요." "먼저 나가요. 내가 잡아먹진 않을 테니까." 그 여자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갔다. "고개 들어라. 어서!"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며 얼굴을 들어 따귀를 갈겼다. 여자들은 더 깊숙하게 얼굴을 수그리기만 했다.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이런 짓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다 해 드릴게요." 용감한 어떤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뭘 해주겠다는 거냐?" "필요하신 거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얼굴을 벽 쪽에 감춘 여자가 또 말을 받았다. 여자들은 용기가 생겼는지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주부도박단으로 걸린 여자들이나 범죄자로 잡힌 여자들이 텔레비전 카메라를 피하듯 벽 쪽에 고개는 처박았지만 말은 그럴 듯하게 했다. 나는 제일 뒤 쪽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더 깊게 머리를 박았다. "네가 그 잘난 여성운동가지? 가만 있자, 그래 네가 이지숙 박사라고 하는 년이지?" 그녀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주 얼굴을 팔아먹고 사는 여자였다. 여자들을 위한 법률상담과 가정상담도 했고 여성들의 권익을 위한다는 무슨 단체의 회장질도 하고 있었다. 재작년인가 그 전 해인가에는 정숙하고 가정이 원만하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여자에게 상을 주는 괜찮은 상도 받은 여자였다. "네 남편이 알면 좋아서 펄쩍펄쩍 뛰겠다. 여성운동하는 마누라가 제 길로 들어섰으니 남녀평등이냐? 에이 더러운...... ." 나는 쫓아가 머리끄덩이를 번쩍 치켜 들었다. "이년들아, 똑바로 봐. 이 여편네가 너희들의 대변자인 이지숙 박사라는 년이다." 그녀는 그래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가운 속으로 늙어서 축 늘어진 육체, 늙으면 누구나 그렇듯 볼썽사나운 알몸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내 바지를 잡았다. "선생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한 번만...... ." "네가 선생이지 내가 선생이냐? 너 몇 살 처먹었지?" "쉰 여섯입니다." "너 젊었을 때 우리나라 여학생들을 왜놈들한테 정신대로 팔아 먹은 년이지?" "여학교 다니면서 위대한 황군을 위해 정신대로 가라고 강연한 거 기억에 없다, 이 말이냐?" "그럴 리가...... ." "그럴 리가 없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옳게 말하지 않으면 확 불어 버린다. 네 남편, 네 자식, 네 제자들이 박수치게 해줄까."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한번만 살려 주세요." "네가 여성지도자라는 게 구역질이 나서 죽겠다. 꽃 같은 여학생을 정신대로 넘기고 황국신민 되자고 연설하고 다닌 년들이 지도잡네 하고 소리치며...... 남녀평등합네 나는 이지숙 박사를 방바닥에 내던졌다. 그녀는 창피한 것을 잊었는지 내 바지를 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꺼져, 빨리." 그녀는 허겁지겁 내게 큰 절을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문을 열고 소리쳤다. "너 한 번만 더 얼굴 내밀고 헛소리 했다간 볼장 다 보는 줄 알아. 집안에 틀어박혀서 꼼짝도 마. 알았어?" "네네네, 네네네." 일본여자처럼 허리를 수그린 채 연신 자발맞은 대답을 했다. "가서 도치 깨어났나 보구 와." 사내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여자들을 한대씩 더 갈겼다. 얼굴에 손자국이 시뻘겋게 났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종교 믿는 년 있으면 손 들어 봐." 역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남편 없는 년들 손 들어." 두 여자가 손을 들었다. "빨리 꺼져." 두 여자가 게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갔다. 나는 나머지 여자들의 따귀를 두 대씩 더 올려붙였다. "너희들 다음에 걸리면 국물도 없어. 너희들 명단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알아서들 기어다녀. 집에 가서 발 닦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큰 절을 한번씩 한다고 맹세하는 년들은 가도 좋다." 내 말이 떨어지자 여자들은 모두 맹세하겠습니다란 말을 반복하며 나갔다. 녀석이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소파 있는 곳으로 나왔다. "방마다 뒤져서 수향이 있나 찾아 봐." "알았습니다." 녀석이 재빨리 복도 쪽으로 갔다. "도치, 너한테 한마디 더 할 게 있다." "해라." 여전히 당당한 대답이었다. "난 두 마디씩 하기 싫은 놈이다. 그건 네가 소문 들어서 더 잘 알 거다. 수향이를 내놔라." "지금 여기 없다." "S주식회사 상속자 성주학은 어디 있지." "지금까지 일은 서로 없었던 걸로 하자." 도치가 나를 진지하게 바라다보았다. "경고한다. 수향이 내놔라. 성주학이도." "두 마디 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나는 사정없이 도치의 어깻죽지 밑을 가격했다. 숨소리가 탁탁 끊어졌다. 지하실을 다 뒤져본 녀석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나는 도치의 오른손의 혈을 잡았다. "할 수 없지. 네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밖에." 도치는 혈을 잡힌다는 게 어떤 형벌인지, 그리고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누구 부탁이냐?" 도치가 응어리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 개인적인 문제다." "성주학에게 손대지 않는다면 내주겠다." "세 대는 때려줘야지 않겠나? 사내가 칼을 빼고 나섰는데." "여기에 또 비밀 지하실이 있는 줄은 몰랐다. 데려와라." "쟤들 풀어줘라." "허튼 짓 하면 다 날려 버린다." "안다." 철삿줄에서 풀린 두 녀석이 소파를 들어내고 지하실로 내려가서 성주학과 수면제에 곯아 떨어진 수향이를 데리고 나왔다. "성주학, 너 이리와." 재벌 2세답게 미끈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겁먹은 얼굴이었지만 당당하게 보이려는 허세가 숨어 있었다. "도치하고 협상을 했다. 수향이를 데려가고 너는 세 대만 때리기로." 성주학은 도치를 쳐다보고 이내 무릎을 "형님! 하란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보내주십쇼. 나도 사냅니다." "오늘은 하란 대로 하겠다는 놈 투성이구나. 넌 세 대를 맞아야 돼. 애비 믿고 돈만 까불려서 안 된다는 걸 배워둬야 해. 네 행위로 봐선 밤새 맞고 새벽에 턱이 부서져야겠지만 도치하고 약속했으니 세 대만 맞아. 무릎 꿇고 맞는 거보다는 서서 맞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다." "형님!" "이 자식아,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이 없어. 어서 일어나." "형님, 제발 이러지 마시고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들어보나마나 빤해. 재벌 새끼답게 돈을 내놓겠다든지 아파트를 한 채 준다든지 "...... ." "이 자식아, 돈 가지고 안 되는 게 어떤 건지 배우라고 했잖아. 느이 애비한테 이런 거 못 배워. 맞는 것도 임마 돈내고 배워둘 필요가 있는 거야." "형님, 전 말입니다. 수향이와 결혼할 생각인데 말입니다. 수향이가...... ." "너 아가리로 재벌 새끼 됐냐?" "그게 아니고 말입니다." "너 잔소리 더 하면 사타구니를 못 쓰게 만든다." 녀석은 그 한마디에 입을 봉했다. 나는 녀석을 세워놓고 주먹질을 했다. 성주학은 세 대째 맞고는 완전히 뻗어 누웠다. 아마 속으로 살이 들어서 몇달 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수향이를 데리고 나왔다. 도치가 엉금엉금 기어나오며 말했다.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그땐 널 끝장 내겠다." "나도 총알이 내 몸에 박히는 건 싫어하는 놈이다. 그러나 네가 그 장살 계속하는 한 너하고 난 재수없게 만나게 될 거다." "두고 보자." "네 손님들 명단이 내 손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뭐라구!" 도치는 호주머니를 만졌다. 도치의 수첩을 내가 들어보였다. 도치가 이를 악물었다. "널 없앨 거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곤 했다."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녀석이 따라나온 도치가 철푸덕 주저앉아서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바람 빠진 차 옆에 자동차 정비소에서 나온 사람들이 차체를 손질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여자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달려라." 자동차는 골목길로 질주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수향이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잠만 자고 있었다. 하나님.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 보고 계셨을 테니까요. 남창이란 걸 알고 계셨죠? 그러면서 그렇게 입 봉하고 가만히 계실 수 있는 겁니까? 창녀촌도 내버려 두는데 웬 소리가 많으냐고 하신다면 할 말 없습니다. 하나님. 이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향이가 문앞에 나와 있다가 나를 얼싸안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의사 부를 생각마. 수면제니까 괜찮아. 깨어나면 안정시키도록 해." "고마워요 오빠. 내 꼭 신세 갚을 거예요." "그런 소리 말고 언니나 잘 보살펴라.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고." "오빠, 정말 고마워요. 꼭 갚을게요." "알았다." 나는 수향이를 데려다 주고 바로 돌아섰다. 그 자리에 오래 있어 봤자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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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2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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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혜
08.04.22 09:42
첫댓글
누가 드라마작가 아는분있으면 이소설 다시드라마로 나오게 할순없나요?!
새처럼
12.08.31 13:18
좋은글 감사 합니다,,^^^
그리운남촌
14.08.26 18:39
잘 읽고갑니다~~
김성갑
18.06.20 12:15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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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 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