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호 元昊(1397 ∼ 1463)】「세조의 조정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세조를 부정하다.」
원호(元昊, 1397년 ∼ 1463년)는 조선 단종 때의 문신·학자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조의 찬위와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觀瀾)·무항(霧巷)·관란재(觀瀾齋),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원주(原州)다.
1397년에 태어났으며 원호의 본관은 원주 원씨로 아버지는 별장을 지낸 원헌(元憲)이고 어머니 역시 원주 원씨로 국자감 진사를 원천상(元天常)의 딸이자 원천석(元天錫)의 조카딸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고,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었을 때는 조려,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1457년 단종이 죽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생전에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출사하였으나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필로 인해 살해당하자, 자신이 쓴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는 원주 출신으로 자는 자허, 호는 관란, 무항이다. 1423년(세종 5)에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내고,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257년(세조 3)에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원호는 영월 서쪽에 관란재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강가로 나가 시를 읊기도 하고, 집에서 글을 짓는 등의 생활을 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영월 쪽 단종이 유배 중인 곳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사모의 세월을 보냈다. 또한 편지와 직접 농사지은 채소와 곡식을 표주박에 담아 청령포로 흐르는 주천강에 띄워 보내 단종을 봉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로 돌아와 문밖을 나가지 않는 은둔 생활을 하였다. 관란재에서 단종이 잠들어 있는 장릉의 방향이 동쪽이어서 앉을 때도 동쪽을 향하고, 잠잘 때도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문밖을 나오지 않는 생활을 하다 보니 다른 사람은 원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조카인 판서 원효연이 찾아가 보기를 청했으나 끝까지 문밖을 나오지 않았으며,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손자인 원숙강이 출사하여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필로 인해 살해 당하는 일이 있었다. 원호는 자신의 저술과 소장을 모두 불태우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후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살아온 생을 전하는 것이 없다.
숙종 25년(1699년)에 원호의 절개를 찬양하여 판부사 최석정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를 세웠다. 1703년 원천석의 사당에 배향되었고, 1782년(정조 6)에 김시습과 남효온, 성담수와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경남 함안군 국북면의 함안 서산서원과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호저면 신현리의 칠봉서원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원호는 단종폐위 직후 조선 전기의 충신 어계 조려, 도촌 이수형과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치악산 정상에 올라 바위에 이름 석 자씩 새기고 내려왔다. 이때부터 이 바위를 삼공제명암(三公題名巖)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공이 만나 회합을 하던 요선정이 있다.
단종을 그리며 서강 강가에 단을 세우고 아침 · 저녁으로 눈물을 흘리며 영월을 향해 절을 올린 원호의 충의를 기리고자 그의 후손과 유학자들이 뜻을 모이 1845년(헌종 11)에 유허비와 정자 관란정(觀瀾亭)을 충청북도 제천과 강원도 영월의 접경지대인 평창강 절벽 위에 세웠다.
원호의 유허비는 단종의 억울함에 분노한 원호는 '세상이 모두 의리를 잊고 실리를 따른다 해도 나는 백이숙제처럼 살겠다'고 다짐하는 탄세사(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를 읊었다. 칠언 절구로, 기구에서는 관란정에서의 감회를, 승구에서는 원호의 자취를 노래하였다. 전구와 결구에서는 시상을 전환하여 관란정을 세운 의미인 ‘붉은 충심[丹忠]’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탄세사는 당시 집현전에 근무하던 원호는 앞날에 대한 불안과 당시의 상황을 드러냈다. 그는 백이(伯夷)·숙제(叔弟)의 정의를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며, “세상 사람 모두 다 의를 저버리고 녹을 따르나(世皆忘洵祿兮), 나는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노닐겠다(我獨潔身而).”라고 하여 혼자서라도 절의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 시의 원문과 번역문이 관란정 앞 오른쪽에 세운 ‘관란 원호 선생 유고비’(2014년 건립)에 적혀 있다.
비문의 내용은 탄세사의 내용을 영·정조 때 대학자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유허비를 세웠다. 비문은 붉은색 글씨로 새겨져 있으며 자연석에 비좌를 마련하여 비석을 세우고, 비두는 가첨석을 올렸다. “환란을 만나더라도 평소 모습대로 행동하며 반듯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받아들일 줄 안다. 죽어야 할 때 죽는다면 마음은 편안하고 덕도 온전해지는 법, 세상에서 태산보다 무거운 것이 있다고 한다. 형세 상 반드시 죽어야 하지만 땅의 형편상 꼭 죽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고, 살려고 애쓴다고 해서 나의 인간 됨됨이를 훼손하지 않지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경우도 있다. 삶과 죽음이 비록 길이 달라도 끝내 가는 길이 같다. 요컨대 의리가 있는 곳을 살펴서 올바르게 살거나 죽어야 한다.” 비문은 죽지 않고 살아서 끝까지 의리를 지킨 원호에 대해 기록하였다.
관란정 왼편에는 한국문인협회 여강시가회에서 세운(2017년 건립) 시비가 있다. 거기에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간밤에 우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나가다./ 이제 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 물아 거슬러 흐르고 저 나도 울어 보내도다./ 사모진 원한의 장강 토목 베노나/ 갈대꽃과 단풍은 차가워서 우수수 분명 날리라./ 이곳은 귀양 온 곳 달밤에 혼백은 어디에서 노는고. ”라는 시조가 씌어 있다.
첫댓글 원호는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은 그냥 산이 아니었다.
원호는 지악산 깊은 곳에 초막을 짓고 세상과 완전히 단절했다. 직접 채소밭을 일구고 직접 물을 긷고 직점 나무를 해서 불을 피웠다.
집현전에서 붓을 잡던 손으로 삶의 한자락 호미를 잡았다. 세종시대 최고의 학자가 산속 농부가 된 것이다.
"산에 있는 것이 편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이 있는 곳에는 가지 않겠습니다. 원호는 세조의 조정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세조를 부정한것이다. 원호가 산에서 내려온 적이 딱 한번 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월 근처까지 갔었다. 원호는 영월이 보이는 고개에서 하루를 서 있었다. 그냥 서 있었다. 영월방향을 바라보면서 말 한마디도 없이, 그리고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원호가 단종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