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역사
고조선 건국 연대인 기원전 2333년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일까? 바로 조선 초기 서거정이 쓴 『동국통감』이다. 중국에서 요임금이 즉위한 해를 기준으로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설명하였는데, 이를 현대에 계산해 보니 기원전 2333년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요임금과 순임금의 시대,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하(夏)나라의 시대는 아직 전설의 시대이다. 하나라가 멸망하고 세워진 상나라(은나라)부터가 실증적으로 입증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원전 2333년을 섣불리 단군의 개국 연도로 잡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또한 기원전 2333년에 한반도와 만주에서 국가를 건설할 만큼의 청동기 문명이 발달했는지도 아직 미지수이다.
고조선의 성장
어쨌든 고조선은 오래 전에 건국되어서 중국이 춘추ㆍ전국 시대일 때도 계속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 중국은 주(周)나라의 왕인 천자(天子)가 중앙을 지배하고, 천자가 지방의 제후들에게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 주고 제후로 삼는 방식으로 통치를 했다. 이를 봉건제라고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며 주나라가 쇠퇴하고 봉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각지의 제후들이 너도나도 왕을 참칭(僭稱)하는 일이 벌어졌다. 주나라의 제후국 중 하나였던 연(燕)나라도 그러하였다. 연나라는 베이징 일대와 요서 지방을 다스리던 제후국으로, 수도는 계(薊)로 오늘날의 베이징 인근이었다. 그래서 베이징(北京)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연경(燕京: 연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지배자는 이웃 나라 연나라의 제후가 스스로 왕을 칭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조선의 왕을 칭했다고 한다.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만큼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는 이웃 나라 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그 당시 관리였던 예(禮)가 말려서 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예(禮)의 직책이 대부(大夫)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고조선에는 이미 관료 조직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후에 전국칠웅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던 연나라를 선공하기로 감행하는 고조선을 보면, 고조선의 국력이 꽤나 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연나라와 고조선은 전쟁을 치렀고,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서쪽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긴다. 이를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만, 여하튼 고조선의 영역이 꽤나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이때 연의 공격으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 지역에서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춘추ㆍ전국 시대가 통일되고 진나라가 들어선 후, 진나라가 금세 혼란에 빠지자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한다. 당시 고조선의 왕은 준(準)이었는데요,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이때 고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기준(箕準)으로 불렸지만, 오늘날 사학자들은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준왕(準王)으로 본다. 준왕은 아버지 부(否)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로써 고조선에서 왕위 세습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이 얼마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지만, 고조선은 꽤나 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ㆍ한 전쟁(기원전 109~108)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세습 받은 준왕은 위만에게 쿠데타를 당하고 남쪽으로 도망친다. 위만은 이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왕위는 그렇게 이어 이어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우거는 역시 왕을 자칭하고 한나라와 대립각을 세웠으며, 한반도 남부에 있던 나라들이 한나라에 조공하러 가는 것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서로 갈등 관계에 빠진다. 이들의 갈등과 전쟁은 중국의 역사서 『사기』 「조선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 한나라의 사신 섭하(涉何)가 우거왕을 회유하였지만 끝내 황제의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섭하가 돌아가면서 국경 부근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임하였는데 마부로 하여금 섭하의 송별을 맡은 조선비왕(朝鮮裨王) 장(長)을 척살하도록 하고, 즉시 패수를 건너서 새내(塞內)로 달려갔다. 마침내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라고 하니, 천자가 그 공적이 훌륭하다고 생각해 힐난하지 않았으며, 섭하에게 벼슬을 내려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로 삼았다. 이에 조선은 섭하를 원망해 군사를 일으켜 그를 기습 공격해 살해하였다. 이에 천자가 죄인을 모집해 조선을 공격하였다.-『사기』 제115권 열전 제55 「조선열전」-
당시 한나라의 황제였던 무제(武帝)는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사신으로 보내 고조선의 이러한 행태를 문제 삼아 경고했다. 그러나 우거왕은 듣지 않았고, 섭하는 귀국 도중 자신을 전송하던 고조선의 비왕(裨王)이었던 장(長)을 국경 부근인 패수(浿水)에서 칼로 찌르고 한나라로 달아난다. 이 소식을 들은 한 무제는 이를 벌하지 않고 오히려 섭하에게 요동 동부도위라는 직위를 내린다. 자기 나라의 신하를 죽인 자에게 오히려 상을 주는 행태에 분노한 고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살해했고, 무제는 고조선이 반란을 일으켰다며 대대적인 정벌을 지시한다.
한나라는 육로와 해로를 동시에 이용해 고조선을 정벌하였다. 누선장군 양복(楊僕)은 산둥반도에서 발해(渤海)를 건너 해로를 통해,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에서 육로를 통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했다. 처음에 전세는 고조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좌장군의 장군이었던 다(多)가 선제공격을 했으나 크게 패하였고, 누선장군 양복은 7,000명을 이끌고 왕검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하여 산중으로 홀로 도망쳤다. 좌장군 순체 역시 국경 인근의 패수(浿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고조선이 의외로 선전을 벌이자 당황한 무제는 사신을 보내 외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고조선 역시 한나라와 같은 대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부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수용했다. 이에 우거왕은 사신에게 사죄하고 태자를 보내 사죄하도록 하며 군량과 군마를 바치게 했다. 이에 태자가 군사 1만 여 명을 이끌고 국경인 패수를 건너고자 했는데, 한나라 측에서는 혹시나 그 군사들이 반역을 할까 걱정하여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태자 또한 무장을 해제하면 자신을 살해할까 의심하여 항복을 거부하고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돌아왔다. 전쟁은 다시 전개되었고, 휴전 기간 동안 전열을 가다듬었는지 이번에는 한나라가 선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쟁이 진행되며 순체는 격렬하게 공격을 진행했고, 양복은 소극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 이는 양복이 산중으로 홀로 도망쳤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고, 양복은 끝내 구금되고 한나라군은 모두 순체의 지휘권 아래 재편되었다. 순체의 군대는 더욱 맹렬히 공격했고, 위기감을 느낀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과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을 빠져나와 항복했다.
조선상 노인(路人), 상 한음(韓陰), 이계상 삼(參), 장군 왕겹(王唊)이 모의에 참석하여 말하길, “처음 누선장군(양복)에게 항복하고자 했지만 누선장군은 지금 잡혀 있고, 좌장군(순체)이 홀로 군사를 아울렀으니 장차 전세가 더욱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맞서 싸우기 어려운데 왕은 다시 항복하려 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한음ㆍ왕겹ㆍ노인은 모두 도망쳐 한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사망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108) 여름, 이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지만,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죽은 우거왕 대신 성기(成巳)가 또한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키고 다시 군리(軍吏)를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주살하도록 하니, 이로써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郡)을 세웠다.-『사기』 제115권 열전 제55 「조선열전」-
주요 지배층의 배신에도 우거왕은 꿋꿋이 항전했고, 이미 항복한 이계상 삼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했지만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고조선의 장군이었던 성기(成己)가 우거왕 대신 백성들을 이끌며 저항했다. 순체는 우거왕의 아들 장항(長降)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성기를 주살하여 마침내 고조선은 멸망한다(기원전 108).
고조선의 멸망과 한사군
결과는 한의 승리였으나 한군 지도부의 후일은 좋지 않았다. 순체는 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을 일으킨 죄로 처형되어 시신이 길거리에 내버려졌고, 양복 역시 사형당할 뻔 했으나 어마어마한 보석금을 내고 겨우 풀려나 간신히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 한군에 투항한 상 한음, 이계상 삼 등의 인물들은 열후(列侯)로 봉해지는 등 초반에는 승승장구했지만, 삼은 기원전 99년에 도망친 조선인 포로를 숨겨준 죄로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옛 영토를 통치하기 위하여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원래 8조밖에 없던 고조선의 법(이른바 8조법)은 60여 조로 늘어났고, 한군현은 한나라의 법률을 적용하고자 하면서 풍속은 각박해졌다. 결국 주민들의 반발로 임둔군, 진번군은 얼마 가지 않아 폐지되고 낙랑군만이 홀로 번성하였다, 본래 낙랑군은 평안도 일대에 있었으나 후에 함경도~강원도 일대에 동부도위를, 황해도 일대에 남부도위를 두는 등 영역이 매우 넓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미천왕 시기인 313년 끝내 축출되면서 낙랑군은 한반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고조선이 멸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한나라의 침공이 아니었다. 바로 지배층의 내분이었다. 한나라의 침공이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고조선의 주요 지배층이었던 이계상 삼, 상 한음 등이 한나라에 항복하고 우거왕과 성기를 암살하며 고조선은 멸망했다. 만약 지배층의 내분이 없었다면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한 한나라가 군사를 물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