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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驪興閔氏 大宗會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민병권[閔丙權]
4대 최고 문형 가문 <대구서씨> 어머니, 위대한 어머니! 우리 어머니.
--------대구서씨 [해] 부인, 고성이씨------------
청풍군수 이고는 명문 출신이다. 그 증조부[이원]가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이다. 조부[이증]가 현감을 지내고 안동으로 이사를 왔다. 조부는 고장 명사 12인과 계를 모아 산수에 소요하며 덕업을 권장했다. 이에 서거정이 [장가]를 지어 칭송했다. 아버지[이명]는 영남산 기슭에 [임청각]을 짓고 강호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임청각은 오는날에도 안동의 명물로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한말에 독립 투사들이 많이 나와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이 배출되어 더더
욱 유명해진 곳이다.
청풍군수 이고는 3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탄식하였다. 어느날 스님이 나타나 백일기도를 하라고 권했다. 부부가 명산을 찾아 백일기도를 마치기 전날 밤에 이고가 잠시 졸던 중 한 사람이 학을 타고 내려와「남해 산신의 초청을 받고 가는 길인데 그대와 동행하고자 한다」하므로 이고가 그 사람을 따라 나섰다. 이윽고 풍악소리가 울리고 한 동자가 나타나 두 사람을 안으로 들어 오게 하니 전면 주련이 열리며 백발노인이 나타나 "그대가 지성껏 백일기도를 마쳤으니 소원성취는 할 것이지만 사내아이 운이 없고 계집아이 운이 있어 여아를 점지하노라. 그 여아는 성한 눈으로 보냈다가는 큰 일이 생기겠기에 눈 먼 봉사로 내 보내노라"고 말하고 안으로 사라졌다. 이고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 달부터 부인이 태기가 있어 십삭만에 아름다운 여아를 낳았다. 이 아이는 무남독녀로 태어나 청풍군 감영에서 자라났다. 다섯 살 되던 해에 부자탕으로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다가 시녀의 잘못으로 약물이 눈에 들어가 끝내 실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부가 정성껏 키우며 가르치니 비록 눈은 멀었을 망정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이해하였으며, 공부가 깊어 사서삼경에까지 통했다. 이고가 고소사건 처리로 난처하여 딸에게 의논하면 그 때마다 딸은 서슴지 않고 공평한 판결을 할 수 있게 아비를 도왔다.
이 규수의 아버지 이고는 퇴계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딸이 혼기에 이르게 되자, 문하에 인재가 많은 퇴계에게 제자 중에서 사위감을 하나 중매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퇴계는 가장 두뇌가 명석하고 도량이 넓은 서해를 지목하였다. 서해는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서거정의 종증손이디.. 일찌기 퇴계가 이르기를 나의 후계자는 서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하였다. 서해가 이고의 딸에게 장가를 들게 되었다. 혼사날에 상객으로 신랑의 삼촌이 갔다. 규수집에 거의 이르게 되자 잠시 주막에서 하인들을 쉬게 하였을 때에 주모가 신랑을 보고 애석하다는 듯이 "신랑 도련님은 참 잘 생기셨는데... "라는 말을 했다.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린 주모 이야기를 상객이 전해 들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주모는 어쩔 수 없이 "규수가 앞을 보지 못합니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일행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상객으로 온 신랑의 삼촌[승사랑공]은 " 우리가 그러한 줄을 모르고 속아서 정혼을 한 것이니 되돌아가자"고 하였다. 신랑 서해는 잠시 생각을 한 끝에 '중부님! 아니 됩니다. 규수가 비록 장님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사주를 보내서 정혼을 하였으니 저와는 백년가약을 맺은 것입니다. 저에게 혼운이 없는가 봅니다. 만약에 이 혼사를 거절한다면 그 처녀의 운명은 어찌 되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적악을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삼촌은 [착하도다. 과연 도덕군자의 말이로다.]고 감탄하였다. 신부댁에 이르러서 혼례식을 거행하니 신부댁은 물론이려니와 인근의 사람들이 신랑의 덕망을 높이 치하하였다. 그 규수가 서해의 부인이 된 후로는 시부모님께 효도가 극진했다. 남편에 대한 수발과 노복 관리에 덕망이 있어 "맹인 새아씨"라고 경솔히 대하지 않았다. 눈 뜬 사람이 못하는 가사를 잘도 처리했다. 제사 때의 제수 장만이라든지 조복 만드는 범절까지 출중하여 그 곳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부인 고성이씨가 아들 성을 낳은 후 겨우 돌을 지났을 때 남편이 22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는 수없이 가산을 정리하여 경상도 안동 땅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지금 서울 중구 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 3가로 넘어가는 고개 약현에 있는 천주교회의 자리에 집을 장만하였다. 선조 때는 궁전이 현 죽림동(竹林洞) 교회 자리에 있었다. 하루는 난데없는 까마귀 떼, 수천 마리가 궁전 앞 고목에 모여 깍깍거렸다. 궁전 안은 물론이요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소란하자 임금이 까마귀 퇴치 명령을 내려 궁사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고성이씨가 수수찰밥을 뭉쳐서 하인들을 시켜 까마귀 떼에 던져 주었다. 까마귀 떼는 한 덩어리 씩 물고 날아가니 소란하던 궁전 앞이 고요해졌다. 임금은 고성이씨의 기지에 감복하여 대상을 내렸다. 생활을 하면서 독특한 음식을 창안하여 하인들을 시켜서 팔았다. 이 특수한 음식은 삽시간에 서울 장안에 명물이 되었으며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대신들이 그 집을 친히 방문하여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많은 음식 중에 술의 감칠 맛이 천하일품이었다. 그 다음날 대신들의 그 이야기가 대궐에 화제가 되었다. 선조가 이 말을 듣고 "경 들은 웬 술 타령인고" 대신이 아뢰기를 "어제 서약봉 집에 갔다가 음식을 들었는데 특히 술맛이 천하 진미이었나이다." 왕이 말하기를 "그 술 맛이 그렇게도 좋다면 짐도 한잔 해 보았으면..."
이 말을 들은 대신들이 도승지를 시켜 약봉 집 그 술을 진상케 하였다. 도승지가 올린 술을 임금이 마시고 나서 찬탄하여 "천하의 진미로다" 하고 약봉가의 특별한 음식이라고 하면서 약자를 붙여서 약주라 하였으며, 그 밖에도 약과, 약밥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들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고성이씨는 저택을 크게 신축하고자 손수 설계하였으니 도목수가 그것을 보고「눈 뜨고 이 직업에 종사하는 우리도 이렇게 훌륭한 설계는 처음 봤다."고 감탄하였다. 상량일이 되어 부인이 친히 나와 기둥을 더듬어 보고 목수를 불러 꾸짖기를 "이 기둥은 왜 거꾸로 세웠느
냐?" 눈 밝은 사람이 세운 기둥을 눈 어둔 부인이 더듬어 보고 그 잘못을 알아 본 것이다. 고성이씨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 소리를 듣고 건물의 크기와 위치를 알았으며 그 잘못을 이처럼 지적했다. 식구에 비하여 너무 집이 크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죽으면 복을 입을 사람들만 하여도 이 정도는 되야 할 것이니 마루가 여남은 칸이나 되는 큰 집을 지어라. 그 집도 좁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집에 일산을 받쳐 든 귀인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니 큰 대문의 턱도 높이거라"고 말하였다. 그 예언대로 자손들이 하나 둘 문과에 급제하고 고위직에 올랐다. 아들 성은 문과하여 형조판서가 되고 맏손자 경우는 우의정에 올랐으며, 적은 손자 경주는 선조의 딸 정신옹주와 결혼하여 달성위에 봉해졌다. 상신을 비롯한 대신들이 그 집을 대거 방문할 때마다 고성이씨의 선견지명을 모두 칭송하였다.
고성이씨는 정경부인의 증직이 내리고, 남편[서해]도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의 증직이 내렸다. 기호학파의 비조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도학의 거장 경당 장흥효의 딸 안동장씨, 조선 제일의 명문을 탄생시킨 약봉 서성의 어머니! 이 세 사람은 조선조가 낳은 최고의 여인상이다. 이 세 여인을 조선조 3대 현모로 꼽을 수 있다. 그 인품은 말할 것도 없고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서 만인의 사표가 되었다. 가정에서 부녀자가 하는 일은 오늘날 최고 전문가의 수준이다. 특히 음식 솜씨가 조선 제일이다. 모두 자식을 잘 기
르고 가문을 일으켜 세워 그 빛이 찬연했다.
특히 세 여인 중에서 [인간 승리]의 금메달은 앞을 보지 못한 서성의 어머니에게 돌아가야 한다. 시력 장애 여인, 서성의 어머니는 정녕 위대했다. 남편을 사별한 극도의 슬픔 속에서 가정 몰락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강인하게 살아 성공했으며, 승리했다. 고성이씨의 인생역정을 오늘날 영상에 담으면 인기 프로[인간 시대]의 최우수작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의 여남은 배 이상의 감동을 줄 특종기사 거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 여인은 수십, 수백만 각종 장애인에 귀감이 될 것이요, 온갖 비극으로 얼룩진 불우한 인간군에 빛이 될 것이다.
이 여인이 어찌 대구서씨 약봉의 어머니로 그치겠는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랴!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의 원형이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 한평생 자식 위해 희생하신, 가엾은 어머니! 우리 모두 감격의 눈물로 외칩니다. "위대하신 우리 어머니! 지금도 <하늘과 땅만큼> 사랑합니다."
[대구서씨 약사],[서씨 사적정해],[기타 사서]에서 종합 각색
4대 최고문형 가문 대구서씨/약밥 장수 아들 "재상"되다
----- 형조판서 충숙공 약봉 서성--------
서성은 1558년에 안동군 일직면 소호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현기,호는 약봉이다. 아버지는 함재 서해이다. 출생 후 막 첫 돌을 지내자마자 아버지를 잃었고 청상이 된 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았다. 자라면서 이율곡과 송구봉 양문에서 공부했다. 문학은 율곡에게, 병술은 구봉에게 배웠다. 그의 출생과 동시 서울에서 중부[휘 구, 승사랑공]가 안동으로 내려와서 안아 주며 "너는 우리 가문의 큰 재목이다."하면서 서성을 정성껏 돌봐 주었다. 서성이 서울로 이사한 후는 중형[휘 엄, 춘헌공]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교육도 받았다.
어느날 스승 구봉[송익필]이 제자들의 재질을 시험해 보려는 뜻으로 "너희들 중에서 누가 방안에 있는 나를 문밖으로 유인하여 내보내겠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서성이 "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나가시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 바로 문밖에 나가 계신다면 제가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 오시도록 하겠습니다" 고 말했다. 선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방안에 있는 나를 문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나 문밖에 있는 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나 어렵기는 한가지다." 생각하면서 그에게 "네가 무슨 재주로 문밖에 있는 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느냐? 어디 한 번 해보려므나." 하면서 문밖으로 나갔다.
이때에 서성은 "선생님! 이제 들어 오십시요" 하면서 "제가 방안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을 문밖으로 모셔냈습니다" 고 말을 하니 선생은 깜짝 놀라면서 그제서야 그의 술책에 속은 것을 알고 껄껄 웃으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서성은 또 " 선생님께서 문밖에 나가셨다가 바로 방으로 들어오셨으니 제가 문밖에 계시는 선생님을 방안으로 들어오시게도 하였습니다" 고 하니 선생과 더불어 제자들이 그의 기지에 놀라면서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는 스승이 아침에 산책하다 보니 "까치가 팔딱팔딱 뛰며 나르더라"고 운을 떼니, 약봉은 서당에 오느라니까 "송아지가 풀을 오삭오삭 씹고 있더라."고 차운하였다. 13세 때 율곡이 춘헌공에게 서성으로 하여금 시 한수 지어보라 하니 그는 " 지구가 넓고 넓어 하늘과 땅이 내 술잔 속에 드는구나. 선녀가 노래 부르고 나를 위로하네, 내 정신 더욱 황홀하구나."라고 작시했다. 두 스승이 무릎을 치며 "천하 문장이로다."고 칭찬하였다.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교, 전적을 거쳐 사헌부 감찰과 예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다. 1592년[선조25] 임진년 왜적들이 쳐들어와서 서울로 진격하니 임금이 의주로 몽진했다. 이때에 임금을 호종하던 호소사 황정욱이 약봉을 종사관으로 하여 두 왕자와 함께 함경도 회령에 이르렀다. 국경인이라고 하는 그 곳 토민이 난을 일으켜서 두 왕자와 더불어 황정욱, 약봉이 모두 적의 포로가 되었다. 약봉은 홀로 계책을 써서 탈출을 하였다. 격서를 붙여 육진의 의병을 일으키고 그 곳 북평사 정문부에게 주고 방략을 가르쳐 국경인과 그들 일당을 물리치고 두 왕자를 무사하게 구해 냈다. 명나라 장수 유정을 접대하고 삼남지역에 암행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폈다. 그 뒤 경상우도 감사로 내려가 산성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또한 평양감사로 나가 아전들을 잘 다스려 선정을 폈다.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에 한음 이덕형과 백사 이항복의 억울함을 해명하고, 우계 성혼과 송강 정철을 헐뜯고 무고하는 정인홍 일파를 처벌하라고 주장하다 임금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어 한성부 판윤, 개성부 유수를 비롯해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등 6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 형조, 병조, 호조의 4조 판서를 지냈다.
선조는 약봉 서성, 상촌 신흠,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응인, 판서 허성, 금계군 판서 박동량, 판서 한준겸 등 7명의 신하를 머리맡에 오라 하여 영창을 잘 받들라 부탁하고 운명하였다. 그뒤 광해주가 등극하여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을 강화로 유배하는 등 연산군 이상의 학정을 저질렀다. 연안부원군 김제남을 죽이고 그 가족을 관비로 만드는 등 일가 몰살을 강행하였다. 이때 유교 7신들이 일어나 무도한 임금이라고 규탄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유교 7신을 암살 또는 유배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계축옥사이다.
약봉이 57세에 충북 단양으로 귀양갔다. 귀양길을 떠나면서 자손들에게 "물이화환 태어위선" 하라는 유훈을 줬다. 환란이 왔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하는데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후손들은 그 유훈을 줄여서 물태위선이라 하고 액자에 넣어서 벽 위에 걸어놓고 자손들을 훈계하고 있다.
대북파의 영수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인목대비의 세력을 없애기 위한 방안으로 인목대비의 친정 부친 연흥부원군을 역적으로 몰아 멸족을 획책했을 때 일이다. 달성위의 딸과 연흥부원군의 아들 김규가 결혼을 했다. 그 아들[김홍석]이 두 살 되던 해에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이때에 도위공의 딸이 김홍석의 어머니에게 유모를 급히 불러서 아기를 등에 업혀 바로 이웃에 있는 아기의 외가로 황급히 데려다 주도록 했다. 이에 유모는 아기를 업고 한 걸음에 외가댁으로 달려가서 아기를 내당에 들여보내고 "부원군댁 도련님이 옵니다 잘 피신을 시켜 주십시요" 라고 당부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곧 바로 의금부 포교가 아기의 뒤를 따라 왔다. 아기의 외조모며 선조의 맏딸이 되는 정신옹주가 아기를 받아 치마 속에 은신을 시켜서 가까스로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이 아기를 외가 달성위 궁에서 양육하였으며 연안김씨 연흥부원군의 뒤를 잇게 하였다. 그의 후손으로 상신이 3명 나고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계축옥사 당시에 연흥부원군이 광해주에게 사약을 받아 별세를 하였다. 장례에 역적의 시신이라고 하여 아무도 손을 대는 사람이 없었다. 이 위험을 무릅쓰고 약봉과 달성위가 주선하여 양주 땅 서산에 안장을 하였다. 이 일로 해서 대구서씨의 약봉 후손과 연안김씨 연흥부원군 후손의 세의가 각별하다.
그 뒤 영해[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입안면]로, 원주로 적소를 옮겨 11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풀려나 형조판서와 대사헌을 제수 받았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왕을 호종하여 강화도로 갔다.
1629년에 병조판서 이귀, 연능부원군 이호민, 파평군 윤동로 등 12인이 뜻을 같이 하여 연지기로회를 조직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학문을 연구했다.
약봉은 1631년에 졸하여 포천 설운리에 잠들었다. 향년이 74세다. 역학에도 밝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이항복이 "당대에 으뜸 가는 인물"로 꼽았다. 세상 사람들도 "청렴한 관리"로 칭송했다. 약봉은 녹을 받아서 굶주리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는 결식을 하는 때가 많았다. 선조가 약봉 집을 가끔 내려다 보았다. 연 3일간 연기가 나지 않아 양식이 없어 굶을 것으로 생각하고 쌀 몇 말을 보내며 "끼니나 끓여 먹으라 했다"는 [궁중진휼기록]이 아직 남아 있다. 약봉은 증직으로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를 받았다. 시호는 충숙이다. 약봉이 서거하자 부음에 접한 인조가 "기어이 떠났구나! 떠났구나! "라 하며」눈물을 흘리고 신하를 보내 조문하며 산소 규격을 능과 같이 하라는 명을 내렸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여산송씨이다. 여산송씨의 친정 아버지 광주공[송영]은 후사가 없어 외손 봉사를 하고 있다. 광주공의 조부 숙정공[송질]은 여원 부원군에 영의정을 지냈다. 이 여원 부원군의 손녀가 약봉의 중형 춘헌공의 배위이다.
충숙공 약봉의 신도비는 이조판서 겸 대제학 김상헌이 지었으며 형조판서 겸 도총관 오준이 쓰고 이조참판 겸 세자좌빈객 김광현이 전자를 썼으며 묘비는 예조참판 조희일이 지었다. 불천위이며 대구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조 중, 후기 4대 최고 문형가문, 대구서씨/약봉가"세 가지 뛰어나고, 네 가지 없어"
약봉 서성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다섯 아들은 경우, 경수, 경빈, 경주, 경습(조졸)이다.
맏집[서경우] 상신 2명
첫째집 경우 집안에서는 2명의 상신을 배출했다.
서경우는 약봉의 맏아들로 1573년에 태어났다. 자는 시백, 호는 만사이다. 612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혼정으로 벼슬을 10여년이나 은거했다.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왕을 호종하고 1627년 정묘호란을 당하여 어가가 강화도로 갈 때에 간관으로 시종을 하였다. 그 후 대사간, 경기감사, 대사헌, 도승지에 이어 1643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4년 약봉가에 첫 상신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향년이 73세로 1645년에 별세하였다.
서문중은 경우의 장손이다. 대구서씨의 족보를 처음 창간했다. 정리의 둘째 아들로 종가의 당숙 원리에게 입양하였다. 1657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1680년 문과에 장원하고 다음 해에 광주부윤에 발탁된 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서 어영대장이 되었다. 1687년에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690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694년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등용되었다. 1696년에 훈련대장을 지내고 형조판서와 병조판서에 이어서 우의정에 이르렀다.
1698년에 사은사로 또 다시 청나라에 다녀 온 후 1699년에 좌의정에 오르고 1700년에 약봉 가문에서는 최초로 영의정이 되었다. 노년에 판중추부사로 옮겼으며 기로소에 들었다. 1709년에 별세하니 향년이 76세다.
둘째 집,서종제[영조국구] 서광범[갑신정변 소장파 인물] 서재필[독립신문 창간]
둘째 집 경수 집안에는 상신 1명을 비롯해 많은 고위 관리를 배출하였다. 정성왕후의 친정 집안이기도 하다. 7대 문과 급제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서종제는 경수의 증손으로 정성왕후의 친정 아버지[영조 국구]이다.달성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이 되었다. 그 현손[용보]이 영의정에 올랐다. 또 서용보의 증손이 광범이다. 자는 서구, 호는 위산이다. 1859년 생이며 병조참의를 지내고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를 했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서 머물렀다. 10년 뒤인 1894년 갑오경장으로 인한 제2차 김홍집 내각의 법무대신, 제4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서재필은 광범의 열셋촌 조카이다. 1864년 생이다. 호는 송재이다. 1882년 문과하여 1884년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했다. 그 때 병조참판에 임몀되었으며 갑신정변 후에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을 가서 1888년 의학공부를 하여 의학박사가 되었다. 갑오경장이 있었던 이듬 해인 1895년에 귀국을 하였다. 이 때에 국민 계몽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서종신 집 7대 문과
서종제의 적은 집 [서종신 집]도 7대 문과 급제를 냈다. 서종신의 아들 명구[문과,대사헌]를 시작으로 서효수, 유린,준보, 기순, 상조, 병찬에 이르는 직계 7명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다.
셋째 집 첨추공 집안은 자손이 번창치 못하여 미미하였다.
------약봉가의 제1명문 서경주 집-------
넷째 집 경주 집안은 상신이 6명이요, 대제학이 5명을 배출하여 대구서씨를 명문거벌로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3대 석학을 낳아 더욱 빛을 발하였다.
서경주는 정리[남원공] 정리[파주공] 진리 3형제를 두었다. 서정리[남원공]가 문상, [문중<몽어상공>,큰 집으로 출계], 문하, 문징, 문유, 문복, 문일, 문행 등 9형제를 낳았다. 9형제 중 서문상 집안이 3대 상신과 3대 대제학을 배출했다.
3대 상신
서종태는 3대 상신의 첫 번 째이다. 1675년 생원시에 장원한 후 1680년 문과하여 검열이 되었다. 1694년 승지로 발탁되고 대사간,대제학,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703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 와 한성판윤과 의금부사를 거쳐 170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706년에 좌의정, 1711년 영의정이 되었다. 3정승 6판서를 두루 다 역임하였다.
두번째는 서명균이다. 생졸년;1680-1745. 자는 평보,호는 소고 혹은 보졸재이다. 그는 아버지,아들과 함께 3대가 상신이며 부인도 아버지 3대[김구 우의정, 김재로 영의정, 김치인 영의정]가 상신이다. 1710년 문과하여 이조참의로 있을 때 희빈 장씨를 탄핵한 윤지술을 구하려다가 김일경 등의 공격을 받고 안악군수로 좌천되었다. 1727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1728년 동지사로 청니라에 다녀와 호조판서가 되었다. 부제학으로 실록청도청당상을 겸하여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6년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첨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세번째는 서지수이다. 생졸년;1714-1768. 자는 일지.호는 송옹 혹은 졸옹이다. 1740년 문과하여 양관 제학,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1766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대사헌으로 김상로,홍계희 등이 장헌세자의 비행을 조작, 허위 보고한 것을 탄핵하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크게 공헌하여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했다.
3대 대제학
3대 대제학의 첫번째는 서유신이다. 생졸년;1735-1800년.자는 순오이다. 1772년 문과하여 양주심찰어사가 되어 군기를 점검하고 승지,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776년 세도가 홍국영의 중상으로 벼슬에서 쫓겨나 10여년동안 죄인 생활을 했다. 1794년 대제학, 이듬해 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내고 봉조하가 되었다. 인품이 고결하고 청렴하였으며 학문을 사랑했다. 경사에 능통했다.
두번째는 서영보이다. 생졸년;1759년-1816년. 자는 경세, 호는 죽석이다. 1789년 문과에 장원하여 규장각 직각, 승지,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 등을 거쳐 1805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08년 호조판서 겸 비국유사당상으로 심상규와 함께 [만기요람]을 편찬했다. 그뒤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세번째는 서기순이다. 생졸년;1791년-1854년. 자는 중구, 호는 매원이다. 1827년 문과하여 이조참판,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한성부 판윤,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집이 비바람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순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3대 석학
또한 정간공 집안의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 세 명이 3대 석학으로 명성을 날려 약봉 가문의 위광을 더 높였다.
첫번재 석학은 서명응이다. 생졸년;1716년-1787년. 1754년에 문과하여 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대제학을 거쳐 상신에 이르렀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으로 초치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정조가 등극하자 규장각을 세워 첫번째 규장각 제학이 되어 규장각의 기틀을 튼튼하게 잡아 놓았다. 농업에 대한 깊은 연구 정신은 아들 호수, 손자 유구로 이어져 이용후생의 학문을 가학으로 뿌리 내리므로써 북학파의 비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아들과 손자에 의해 정리된 그의 저술 [보만재 총서]는 정조로부터 "해동에서 일찍 이런 거편이 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두번째는 서호수이다. 생졸년;1738년-1799년. 자는 양직이다. 명응의 아들로 명익에게 입양되었다. 1764년 칠석제에 장원하고 이듬해 문과에 또 장원했다. 교리,도승지,대사성,대사헌 등을 지냈다. 당대 문화 사업을 총괄하는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어 여러 가지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여러 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상신의 물망에 올랐으나 오로지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가학을 계승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북학파의 학자로 이용후생에 관한 학문을 토대로 한 각종 편찬 사업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세번째는 서유구이다. 생졸년;1764년-1845년. 자는 준평, 호는 풍석이다. 아버지는 호수, 사촌 철수에게 출계했다. 1790년 문과하여 군수, 관찰사, 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냈다. 할아버지의 [고사신서] 중 농포문, 아버지의 [해동농서]를 비롯하여 [북학의], [색경], [농가집성] 등 국내외 농서 800여 종을 참조하여 [임원경제지] 113권을 저술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학을 이어 받아 농학을 집대성시킨 북학파의 거봉이다.
--------맺는 말, " 세 가지 뛰어나고, 네 가지가 없어.----------
약봉가의 세 가지 뛰어 남
첫째 3대 정승
둘째 3대 대제학
세째 3대 석학
앞에서 사계 김장생 가문의 부자 문묘 배향을 일컬어 "유림의 노망"이라 한 바 있다. 여기의 약봉 서성 가문의 3대 상신과 3대 대제학에 3대 문장을 일컬어 "하늘의 실수"라 할만 하다. 하늘은 공평한 법이다. 결코 사가 없다.
가문을 연구해 보면 그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가문도 하늘은 특히 이뻐하거나 특히 미워하는 일이 없다. 복이 쏟아진 집도 하늘이 편애한 탓이 아니며, 불행이 겹친 집도 하늘이 증오한 것은 더욱 아니다. 하늘은 소인 모양 편애하거나 증오하는 일이 없다. 천하 만물을 움직이는 대경대법에 [마이크로 마이크로그램 혹은 미리미터]의 실수도 없다. 영겁의 세월에 억조 주기로 가로 지르고 찰라마다 세로 질러 나타나는 현상에 터럭만한 오차도 없다.
도대체 어떻게 약봉가에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이것은 해도 너무 한 일이다. 하늘은 분명 이 대경대법의 천하 운영에 잠깐 실수가 있었던 듯하다. 하늘의 변고가 아니고는 어떻게 길한 일과 복된 일이 이 집
에 이렇게 쏟아질 수 있단 말인가?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 주며 권력 잡아 멋대로 상신하고 대제학에 오르며 석학으로 떴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라면 무소불위의 문중 8강이 이 복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런게 아니다. 하늘이 실수가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못된 머리로 그런 복을 지을 수 없다. 이것은 적선지여경이다. 하늘을 감동시킨 약봉가의 정성과 노력 덕이다. 하늘은 있는 집 복은 뺏아가고 없는 집 복은 만들어 준다. 약봉가에 복이 쏟아진 것은 없는 게 너무 많은 덕분이다. 약봉 집에 없는 것 중 가장 두드러진 것 네 가지만 손꼽으련다.
약봉가에 없는 것 네 가지
첫째는 세도가가 없다.
둘째는 역적이 없다.
세째는 흉간이 없다.
네째는 매국노가 없다.
위의 네 가지는 약봉 가문의 특성이다. 이 특성은 약봉 가문의 큰 자랑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특성이 어떻게 생겼을까?
이 집의 가성[집가, 성품성]이 원만, 무욕, 청렴하기 때문이다. 가성의 원만함은 욕심이 없는 데서 싻튼다. 무욕하면 생활이 검소해지고 청빈해 진다. 가성이 원만하고 욕심이 없는 데다가 청렴하면 세도가나 역적, 흉간, 매국노가 생길 수 없다. 원만, 무욕, 청렴은 끊임 없는 인격 수양과 학문 연구, 덕행을 쌓는 데서 이루어 진다. 이것들이야이야 말로 약봉가의 긍지이며 우리의 자랑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가나 가문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급 인사는 거의 이 세 가지가 부족하다. 약봉 가문은 그런 우려를 충분히 씻어 주고 남는다. 굶주리는 백성과 아픔을 같이 하느라 끼니를 건널까 염려하여 임금이 쌀말을 보낸 약봉 집의 청렴한 기풍이 500년을 두고 쇠하지 않았다.
이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 3대 영의정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의 인품과 덕망, 3대 대제학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의 인품과 학문, 3대 석학 서명응, 서호수, 서유구의 학문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영화의 정점에 올라 갖은 부귀공명을 누릴 수 있는 영의정이지만 오직 청렴으로 일관한 서종태와 서지수 두 상신, 화려한 삶을 버리고 청렴한 학자로 보람된 삶을 선택한 서유신, 비가 오면 집이 셀까 걱정해야 하는 청백리 서기순의 원만, 무욕, 청렴함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