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이린
오기 전에 가버린 계절이 있다 외
살구와 체리와 복숭아가 있던 자리 찬 바람이 파고든다
바람에 목울대를 긁어내며 붉은 나무 끝에 매달린 아쟁소리
그때는 왜 네가 온다고만 생각했을까
떠난 네가 가을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으니
오기 전에 가기만 하는 계절을 왜 가을이라 부르는지 이제는 알겠다
부재의 가슴을 빠르게 훑고 지나가는 한 겹 겉껍질
구름이 자꾸 옷에 묻어서 털어냈더니 시간이 한움큼 뜯겨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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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만찬
이번엔 살바도르 달리*입니다. 때로 유쾌한 별을 위하여 만찬을 준비하기도 하죠. 나뭇가지에 널브러진 시간을 걸쳐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계절이, 오던 길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차려놓은 음식들이 식어가네요! 나는 번번이 오지 않는 시간을, 오지 않는 사람을 왜 기다릴까요? 사막에는 코끼리가 다녀간 흔적,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액자 속에는 기억이 구름처럼 떠다닙니다. 현재는 마냥 꿈같은 것,
꿈은 영원하지 않으니 그냥 기억 속에 남겨두기로 하죠
그가 식탁 위에 놓고 간 것 사막이 아니라 바다였네요
우리들의 만찬에는 건너편 서쪽 하늘과 긴 의자를 준비하겠습니다
노을에 언어가 잘 익어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낯선 시간 속으로 모르는 당신을 초대합니다
*살바도르 달리 :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영화제작자, 대표작: The Persistence of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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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본명:이선미)| 1998년 《시와사상》 신인상 등단. 시집 『구름을 뒤적거려 토마토를 따곤했지』 『데칼코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