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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속사람이냐, 겉사람이냐? ③-①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바울은 사람을 나누어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겉사람이라는 말은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후서 4:16에만 한 번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의 육체가 곧 겉사람이 아닌가? 또한 속사람이라는 말은 로마서 7:22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씀과 에베소서 3:16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는 기도에, 이렇게 두 번 나온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한다고 했다. 후패(朽敗)란 우리말은 “썩어서 쓸모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육신은 날로 약해지고 쇠해지고 병들고, 나중에는 죽어서 땅에 묻히면 썩어서 쓸모없게 된다. 영어로는 NIV는 ‘waste away’라고 했고, KJV 는 ‘perish’라는 단어를 썼다. ‘waste away’란 야위고 쇠약해진다는 뜻이고, perish란 “멸망한다, 썩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된다고 했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일신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말을 얼른 연상하게 된다. 이 말은 중국 탕왕의 반명(磐銘)에 있는 말인데, “날로 새롭게 하며, 나날이 새롭게 하며, 또 날로 새롭게 한다.”라는 뜻으로, “날마다 잘못을 고치어 그 덕을 닦음에 게으르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속사람이 저절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옛 어른들이 “날마다 자기를 살펴 잘못을 고치고 덕을 닦음으로 새로워진다.”고 한 말은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영적으로 새로워지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자기를 살피는 사람이 될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복을 받자.
1. 겉사람과 속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겉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로부터 좀 더 발전해 나가면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마음과 행동 모두를 가리켜 말한다. 로마서 7:23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다.”라고 하였다.
1) 겉사람은 “흙에서 나온 육체”다. 따라서 “땅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또한 “하늘을 쳐다볼 줄 모르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와 반대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기”다(창 2:7). 따라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하늘을 쳐다보면서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다.
2) 겉사람은 “육체로부터 나온 생각”이다. 따라서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생각”이요, “육체를 자랑하는 생각”이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르는 생각”이다.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라고 말씀하시고는 이를 해설하시기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곧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훼방”(마 15:18-20)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속사람은 “하나님의 생기인 성령으로부터 온 생각”이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이요, “자기 속에 있는 영이 육신보다 더 귀중함을 알고 영을 따르는 생각”이며,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살려고 하는 생각”이다. 이것을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비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3) 겉사람이란 “사람으로부터 온 사상과 행동”이다. 갈라디아서 1:1에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로부터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갈 1:1)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람들로부터 난 것”이란 남들이 시켜서 된 것이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을 말한다. 곧 인간의 뜻을 따라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5:19-21에서는 육체의 일이라고 하였다. 곧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하였고,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라고 경고하였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9)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겉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곧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계명(요 6:63)을, 문자적이고 의식적인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형식적으로만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사람은 그와 반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사상과 행동”이다.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그러니까 겉사람은 날로 후패한다는 말은 인간으로부터 나온 모든 생각과 사상과 행동은 결국 썩고 없어지게 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생각과 행동은 날로 더욱 새로워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라고 하셨다(요 6:27). 장차 썩고 없어질 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볼 때에 그 일이 과연 보람 있고 값진 일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앞으로 당신의 남은 날을 어떤 일을 하면서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가?
23. 속사람이냐, 겉사람이냐? ③-②
(고린도후서 4:16-18)
1. 겉사람과 속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2. 속사람을 새롭게 해야 한다.
1) 속사람이란 또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우리의 마음이다. 또 하나는 우리의 영혼이다. 그러니까 겉사람까지 합하여 이를 모두 종합하면 사람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육체요, 둘째는 마음이요, 셋째는 영혼이다. 이 셋이 합하여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이것이 사람의 삼위일체다.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하나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렇게 세 가지의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그러니까 성부는 우리의 마음에 해당되고, 성자는 우리의 육체에 해당되며, 성령은 우리의 영에 해당된다. 이 중에 무엇이 가장 귀중할까? 육신이나 영혼보다도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마음과 영혼은 몸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한다. 성부도 성령도 모두 성자이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이루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 아무런 다툼이 없다. 항상 하나가 되어 역사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22-23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하였다. 나아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다.
2)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새롭게 되어야 한다.
①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삼상 16:7). 예수님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을 만나셨을 때에 첫마디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의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나다나엘은 별로 볼 것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다. 간사함이 없었다. 진실하고 정직하였다. 그래야 주님이 찾아주신다. 그러니까 외모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겉사람이다. 우리는 속사람을 단장할 줄 알아야 한다.
② 그런데 문제가 있다. 예레미야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다. 또한 잠언 4:23에서는 “네가 지켜야 할 모든 것 중에서도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라고 하였다. 그뿐인가? 잠언 16:32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한다.
③ 로마서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된 후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하였다.
④ 예수님의 설교는 항상 우리의 마음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육체는 형식적인 것을 좋아하고 우상숭배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변화 받으면 비로소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보라! 우리 육신이 병들면 아무리 큰돈을 들여서라도 그 병을 고치려고 한다.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병든 것, 영혼이 병든 것을 위해서는 동전 한 푼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마음과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또 보라. 육신의 모양을 내고, 육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일에는 돈도 많이 쓰고, 시간도 많이 쓴다. 그러나 마음을 단장하고 영혼을 단장하는 일에는 관심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디모데전서 2:9-10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나아가 육신의 쾌락을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쓰고 시간을 쓰는가? 그러나 마음의 행복과 영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겉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행복, 마음의 쾌락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언제 우리 마음이 행복하고 평안해지는가? 남을 미워하면 먼저 내 마음이 괴로워진다. 그러나 남을 사랑하면 마음이 행복해진다. 마음에서 죄를 회개하여 버리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러나 남모르는 죄를 짓고 숨기고 있으면 마음이 지옥이 된다.
⑤ 사람마다 육신의 건강을 원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곧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이다.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아야 한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까? 죄를 짓지 않으면 된다. 남에게 원망들을 일을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면 마음에 행복이 넘친다.
3) 나아가 우리의 영도 새로워져야 한다.
① 영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짐승들에게는 영이 없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혼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혼은 짐승에게도 있다. 전도서 3:21에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고 하였다. 혼은 육체에 속한 생각과 생명이다. 그러나 인생의 혼은 성령과 결합되면 천국으로 올라가는 영혼이 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하고 육체와 결합되면 짐승의 혼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짐승에게는 지옥의 심판이 없지만, 사람에게는 그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② 아담이 죄를 지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으나, 그의 육신은 930년이나 더 살았다. 그의 육신보다 먼저 그의 영이 죽었던 것이다. 영이 죽으니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다 그렇게 된다.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가 잘못되는 것을 좋아한다. 목사나 신자들이 어떤 죄를 짓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되면 그것을 기뻐하면서 비난하기를 좋아한다. 그의 영이 죽었기 때문이다.
③ 그러므로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슬피 울면서 기도한다. 나아가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닫고,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
④ 영이 새로워지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즐겨한다. 그래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찬송이 마음에 늘 떠오른다. 그러나 영이 죽으면 기도를 하지 못한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괴롭다.”가 된다.
영이 새로워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 성경을 사모한다. 좋은 설교 듣기를 즐거워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자 애를 쓴다. 로마서 7:22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겉사람은 육신의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는 다녀도 형식적으로만 믿는다. 마음에 깊은 감동과 감격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나가떨어진다.
23. 속사람이냐, 겉사람이냐? ③-③
(고린도후서 4:16-18)
1. 겉사람과 속사람이 어떻게 다른가?
2. 속사람을 새롭게 해야 한다.
3. 어떻게 해야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질까?
1) 본문 그대로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 무너지는 집에다 많은 돈을 들여 장식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영원히 죽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집에 투자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과 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일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회창 씨가 자기 아들의 병역 문제로 인해 대통령 선거에 두 번씩이나 낙선할 줄을 알았더라면, 자기 아들을 군대에 안 보냈을까? 혹시 아들이 안 가려고 하였어도 단단히 책망을 해서라도 군대에 보냈을 것이 아닌가? 또한 실제로 몸무게가 기준에 미달되었다 해도 방위병으로라도 복무할 수 있도록 길을 찾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제 와서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회창 씨의 경우는 대통령만 안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들 자신의 내일을 생각해 보라.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 지금 기도 생활을 게을리한 것이 후에 큰 후회가 되지나 않을까? 지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죄 짓는 생활을 청산하지 못한 것이 후에 큰 저주로 임하게 되지나 않을까? 환난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잠언 29:1에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지금 십일조 떼어먹고 안 바친 것이 후에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가져오지나 않을까? 말라기 3:9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11절에서는 너희가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되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신다. 이 약속을 따라서 산 사람들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복을 받았다. 세계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또한 우리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깨닫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결단해야 한다.
2)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찾아보면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깨끗해진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일신일일신 우일신”(日新日日新 又日新)을 가르쳤다. 날마다 잘못을 고치어 그 덕을 닦음에 게으르지 아니해야 한다. 공자도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고 하여 날마다 세 번씩, 또는 날마다 세 가지를 반성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이들 동양의 성현들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선한 양심이 살아난다. 그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베드로전서 3:21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그래야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게 된다. 동양의 성현들은 우리들 자신이 자기를 살펴서 수양함으로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가르쳤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너희로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너희가 내 앞에 나아와 나의 구원과 도움을 받아라.”라고 하신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은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겠다고 하는 것으로 자력종교(自力宗敎)라고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을 가르치는 타력종교(他力宗敎)다.
3)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두 가지의 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 첫째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성령과 함께하는 생활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내 힘으로는 나의 겉사람을 복종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주님의 은혜가 임한다. 찬송가에 “주 달려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고 하였다.
겉사람을 쳐서 속사람에게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육신이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육신이 영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살피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다.
우리의 겉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나 게으름을 부리고, 죄를 짓는 데로 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지막 만찬 땡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라고 하셨다(눅 22:19).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기억해야 한다. 눈을 높이 들어 그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그때에 우리 마음에서 세상에 속한 헛된 욕심이 다 떨어져 나간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주님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긴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새 은혜가 임한다.
4) 우리의 영이 날마다 새로워지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①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임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 1:1, 이 위대한 책의 첫 마디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었다(요 6:63). 또한 계시록 19:10에서는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시라.”라고 했는데, 곧 성령을 말한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성령이 임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고 새롭게 만드신다.
②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으로 임하신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행 1:8)고 하셨고, 또한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막 9:1)라고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다(왕상 18:46),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하였다(겔 1:3; 3:14,22; 8:1; 37:1; 40:1). 그리하여 그들이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엡 3:16)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가 이 은혜를 충만하게 받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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