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 성 여 행
‘방구 퉁퉁 구례장 구린내 나서 못보고/ 아이고 데고 곡성장 시끄러서 못보고/ 뺑뺑 돌아라 돌실[石谷]장 어지럼병 나서 못 본다’
지난날 전라도 저잣거리에서 유행했었던 장돌림들의 노래입니다. '곡성'(谷城)이라는 이름을 엉엉 우는 소리인 곡성(哭聲)처럼 풀이하여 노래한 각설이들의 장타령은 듣는 사람의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하지만 전체 면적 74%가 산지로 둘러싸인 곳에서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곡성 고을은 말 그대로 곡소리를 내면서 들어가는 땅이었습니다.
이 노래 말고도 이 지방에는 '소리'와 관계가 있는 갖가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곡성군의 주봉인 동악산(動樂山)이 움직이며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으며, 옛날 삼리면에서 곡성읍으로 넘어가는 굇재라는 고개에 정갑산이라는 산적이 있어 많은 사람들을 해쳤는지라 그 일대에 곡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산이 많은 고장이라 군(郡) 이름에도 ‘골짜기 谷’이 붙여졌고 산지가 가장 많은 죽곡면, 오곡면, 석곡면 등 세 군데의 면(面) 이름에도 '곡'(谷)자가 붙여졌을 만큼 깊은 골짜기가 많고 사람살이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산고개마다 산적들의 출몰이 빈번했겠지요.
백제 때 욕내군(欲乃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가 신라 35대 경덕왕 시절에 지금의 이름 '곡성'을 얻었고, 고려 초에 승평군(昇平郡)에 딸리었다가 조선 고종 때(1895)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곡성에서도 교통이 가장 좋은 옥과는 본래 백제의 과지현으로 경덕왕 때 옥과로 고쳐 추성군(담양)의 땅이 되었습니다. 1914년 옥과가 곡성에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악산(動樂산) 도림사(道林寺)
곡성읍에서 서남쪽으로 4km쯤 떨어진 동악산(750m) 기슭에 자리 잡은 도림사는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화엄사로부터 이주하여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원효대사가 절을 세우려고 터를 닦자 온 산이 움직이며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하여 산 이름을 '動樂山'이라 지었으며, 이 절에 도인들이 숲처럼 모여들었다고 해서 절 이름을 '道林寺'라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도림사가 터를 잡고 있는 청류동 계곡은 '수석의 경이 삼남에서 으뜸'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암반계류가 연중 흘러내리면서 노송, 폭포와 어우러져 절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풍류객들의 발길이 잦아 인근 9개 반석에 이름 모를 선현들의 문구가 음각돼 있습니다.(지방기념물 101호)
흔히 '도림사 골짝'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의 반석은 폭이 20-30m쯤이고 길이가 100m에 이르는 널찍한 한 개의 바위로 맑은 물줄기가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퍼져 흐르면서 그 바닥을 반질반질하게 다듬어 놓았습니다. 계곡 정상 부근에는 신선이 쉬어간다고 하는 높이 4m, 넓이 30평에 달하는 신선바위가 있습니다.
섬진강 기차마을
1933년 개통된 전라선(익산-여수간 199.5km)을 1998년 복선화할 때 섬진강과 나란히 달리던 곡성-압록역 구간의 구불구불한 기찻길을 직선화하였습니다. 그때 13.2km의 옛 철길은 버려졌고, 700m쯤 떨어진 곳에 새 곡성역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옛 곡성역은 근대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3년 개장했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영화ㆍ드라마 제작자들이 구 곡성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된 데다 열차를 운행하지 않아 기차역 장면을 촬영할 장소로 제격이었던 것입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드라마 ‘토지’ ‘사랑과 야망’ ‘야인시대’ 등의 촬영지로 쓰이면서 구 곡성역은 제법 유명해졌습니다.
기차를 주제로 삼은 국내 유일의 테마파크, 섬진강 기차마을은 이제 곡성이 자랑하는 대표적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옛 곡성역 구내와 승강장도 그대로 활용하면서 전라선 열차가 달리던 섬진강변 철로에 증기기관차를 운행하고, 전국에서 내다 버린 옛 기관차와 객차를 끌어 모았습니다. 무엇보다 구 곡성역은 예쁘고 아기자기합니다. 곳곳에 화원을 조성해 봄부터 가을까지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냅니다. 연못도 만들었고, 풍차도 세웠고, 바람개비 언덕도 쌓았습니다. 동물농장도 있고, 음악분수도 있습니다. 2만㎡에 달하는 초대형 장미원을 개장했습니다. 장미 1004종과 연꽃 200여 종을 심은 국내 최대의 장미원입니다.
증기 기관차는 섬진강 기차마을이 내세우는 으뜸 이용 시설입니다. 이곳 섬진강 길은, <택리지>의 이중환이 천하의 절경이라 예찬한 유서 깊은 명승지이기도 합니다. 기차는 구 곡성역에서 침곡역을 거쳐 가정역까지 10㎞를 시속 30∼40㎞로 달립니다. 엔진은 디젤을 쓰지만 기관차는 옛 증기 기관차의 모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굴뚝에서 흰 연기도 내뿜습니다. 관광용이긴 하지만 증기 기관차가 달리는 전국 유일의 구간입니다. 운행 시간은 약 30분. 그러나 섬진강의 절경을 감상하기엔 충분한 시간입니다.
압록유원지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곡성군의 북쪽 지방인 고달면으로 흐르는 순자강(鶉子江)은 '대평리 들'을 적셔 주면서 동쪽 지방인 오곡면 압록리에 다다릅니다. 또 보성강은 승주군 주암면을 거쳐서 곡성군의 남쪽 지방인 목사동면으로 들어와 솟구치듯 거슬러 흐르며 죽곡면을 거쳐 압록리에 이르러 순자강의 물줄기와 보태져서 구례지방으로 흘러들어갑니다.
압록마을은 약 900년 전,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합록(合綠)으로 부르다가 400여 년 전, 마을이 형성되면서 오리과의 철새들이 많이 날아드는 것을 보고 合을 鴨으로 바꿔 압록(鴨綠)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두 물줄기의 합수점인 압록마을은 3만 평에 달하는 넓은 백사장을 끼고 있고, 푸른 강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와 강 건너 마을과 이어주는 옛적 그대로의 나룻배들이 서정적인 풍경을 더욱 고조시켜 섬진강이 만들어 놓은 가장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그러나 산과 강으로 막혀 농사지을 만한 땅이 없어 예전에는 벌목으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고 섬진강의 모래를 팔아 끼니 걱정을 덜기도 했던 가난한 마을이었습니다. 이제는 옛날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은어를 비롯하여 참게매운탕 ․ 황어 ․ 쏘가리 ․ 눈치 등의 민물고기 요리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유원지가 되었습니다.
왕복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섬진강과 마주하고 있는 이곳 압록역은 곡성역과 구례구역 사이에 있는 간이역으로, 2008년 11월 30일 이후 여객취급중지역이 되었습니다. 전북 익산에서 갈라져 순천까지 전라선을 따라, 굵고 빠른 섬진강의 물줄기와 때론 같은 방향으로 때론 엇갈리게 달려온 기차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숨을 고르는 곳이기도 합니다.
북녘 땅 압록강 가에 있는 압록강역과 이름이 같은데, 둘 다 물색이 오리 목처럼 푸르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역사(驛舍) 옆에 맑고 푸른 강을 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차역 중에서 일출하면 정동진역을 떠올리지만 경치하면 섬진강과 가장 가까이 있는 압록역을 단연 으뜸으로 칩니다.
정동진역과 압록역은 둘 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적이 있습니다. 압록역은 '모래시계'에서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가 빨치산이었던 남편의 뼛가루를 지리산자락에 뿌린 뒤 기차역을 혼자 지키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를 응시하다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입니다.
배경으로 등장한 역 구내의 소나무를 출연한 배우의 이름을 따 '김영애 소나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호사가들은 이 소나무를 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강릉시 정동진역의 '고현정 소나무'와 빗대기를 즐겼지만 지금은 말라죽어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변역이라 하여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길도 이제는 뜸해졌습니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고향 태안사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1년(742)에 세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문성왕 9년(847) 적인선사 혜철(寂忍禪師 慧徹 · 785-861)이 주석하면서부터 선종 사찰로 명성을 얻게 되어 선문구산(禪門九山)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중심도량이 되었습니다.
동리산문에 소속된 절은 곡성을 중심으로 구례 ․ 광양 ․ 운암 등지에 널리 퍼져 있었는데, 태안사는 고려시대에 절집 규모가 132칸에 달했고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습니다.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 송광사가 수선결사(修禪結社)로 크게 사세를 떨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는 이 절을 두고 큰 전투가 벌어져 대웅전을 비롯한 15채의 건물이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1969년 곡성군의 보조로 재건이 시작되었는데, 앉아서 잠을 자고 하루에 한 끼만의 식사를 했던 당대의 선승 청화(淸華)스님이 조실로 머물러 있는 동안 진리를 얻으려는 뭇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유서 깊은 고찰의 모습을 차츰 되찾게 되었습니다.
절 입구인 금포에서 태안사 일주문까지에 이르는 1.8Km의 비포장도로는 잡목과 측백나무가 울창한 사이로 명상적 분위기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호젓한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자유교, 정심교, 반야교, 해탈교 등 여러 개의 다리를 지나 능파각(凌波閣)에 이르는데, 능파각은 태안사의 금강문으로 누각을 겸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계곡의 물과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의미하는 ‘능파(凌波)’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부처님의 세계로 진입함을 상징합니다. 신라 문성왕 때(850년)에 혜철선사가 처음 지었고, 고려 태조 때(941년) 광자대사가 수리하였으며, 그 뒤 파손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때(1767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계곡 양쪽의 자연 암반에 석축을 낮게 쌓고 그 위에 두 개의 큰 통나무를 걸쳐놓고 세운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겹처마집입니다. 양쪽 각 통나무 위에 각이 진 침목을 얹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는데, 이 침목은 의자 역할을 하므로 여기에 앉아 주변의 아름다운 계곡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능파각에서 200m 거리에 화려한 다포집인 일주문이 서 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 · 864-945)의 부도(보물 제274호)와 부도비(보물 제275호)를 비롯해 석종형 부도 3기, 팔각원당형 부도 2기가 있는 부도밭이 보입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가는 도중의 보제루(普濟樓) 밑에 새로 만든 연못이 있습니다. 그 연못 중앙에 인공으로 작은 섬을 이룬 위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삼층석탑까지는 돌다리로 건너게 되어 있습니다. 석탑이 세워져 있는 작은 섬이 원형으로 되어 있어 탑돌이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적인선사 부도(보물 제273호)와 부도비는 대웅전 건물 뒤쪽의 높은 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도를 보기 위해서는 배알문(拜謁門)을 통과해야 하는데, 굽은 통나무를 아치형으로 배치하여 운치 있게 만든 이 배알문은 부도를 향해 자연스레 머리를 조아리고 들어오도록 낮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비록 비신은 없어졌지만 역시 광자대사 탑비인 이수와 귀부에
새겨진 가릉빈가(迦陵頻伽)는 금방이라도 날아 갈듯 날개를 펼치고
퍼득거리고 있는데 그 생동감이 사실처럼 넘쳐난다.
신숭겸 신도비
태안사 들머리인 금포에 고려왕조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 ? - 927)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술이 뛰어나 왕건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927년 왕건을 위협하는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싸움에서 대접전을 벌일 때 위기에 처한 왕건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건의 갑옷과 투구를 쓰고 싸우다 전사하였습니다.
그가 전사하자 그의 용마가 주인의 머리를 물고 태안사의 뒷산에 와서 사흘간을 울다가 죽었기에 그곳에 장군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태안사가 큰 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선가의 일문(동리산문)을 이룬 자체의 힘도 컸지만, 불교를 숭상한 고려 왕조가 개국공신의 제사를 올리는 절을 크게 키우지 않을 수 없었던 정책적 배려에 힘입은 바도 크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