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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 따라 사는 인생
240714낮 (왕상17:1-7)
<1)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3)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4)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5)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6)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7)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아멘
요즘 세상은 두 여자 말만 잘 들으면 인생이 편하다고 그럽니다. 하나는 부인 말이고, 하나는 네비 말이라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조금 편할 뿐이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네비 말을 너무 신뢰하다가는 낭패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끊긴 도로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가까운 길을 빙빙 돌게 만들기도 합니다.(대정한사랑가는 길-네비) 부인 말도 너무 믿다간 큰 코 닥칩니다. 요즈음은 남편이 부인 폭행하는 것보다 부인이 남편 폭행하는 일이 더 많구요, 남편이 부인 죽이는 일보다 부인이 남편 죽이는 일일 더 뉴스에 많이 나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요즘은 부인이 외출하면서 냉장고에 이렇게 메모해놓고 나간답니다.
<까. 불. 지. 마. 라!>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까-까스 조심하고
불-불조심하고
지-지퍼 함부로 내리지 말고
마-마누라한테 전화질 하지 말고
라-라면이나 끓여 먹고, 방콕하고 있으라는 뜻!
요즈음 남편들이 부인 말 듣는 것이 편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듣는 것입니다.
학교에 자녀를 안심하고 맡길 수 없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도 잠 못 이룹니다. 세상 어디 하나 안전한 곳도, 믿을 만한 곳도, 믿을 만한 길도, 믿을 만한 안내자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길은 멀고 험하며, 곳곳에 함정과 올무가 놓여 있고, 도처에 우리를 공격하는 사단의 세력들이 숨어 있습니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야곱은 노년에 고백하기를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 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고 고백합니다.
그는 인생을 나그네 길로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길이 험악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디 야곱만 그렇겠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여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나그네길이요, 또한 각자가 느끼는 것은 다르지만, 모두 험악한 세월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험악한 나그네 길에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고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인생의 창조주이시며, 인생길의 안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14:6)
우리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의 생명도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을 가는 길은 많이 있습니다. 방법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이 가야할 길,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를 영생으로,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안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주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네, 천국 가는 길엔 지름길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오직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안내자가 되십니다. 주님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보여야 주님을 따라 가지요? 어떻게 주님을 따라 가실래요?
주님을 따라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습니다.(요1:14)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요1:1) 주님이 곧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는 삶은 곧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말씀은 우리 앞에 있잖습니까? 성경 66권이 누구에 대한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구약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 계시록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 따라 사는 것은 곧 말씀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어도 잘 모를 때가 더 많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주의 종들을 세워서 말씀을 잘 풀어 알게 하셨는데...그것은 설교잖아요.... 그러니 설교 말씀 듣고, 기록된 말씀을 읽고,,,그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말씀대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되새김질하고, 발이 굽이 갈라져 쪽발인 짐승을 정결한 짐승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삼으시고, 먹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소나 염소나 양이 되새김질도 하고 굽이 갈라진 쪽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되새김질도 하고, 굽이 갈라져 쪽발인 짐승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말씀을 늘 되새김질 하는 성도가 되고, 굽이 갈라져 쪽발인 짐승은 미끄러져 실족하지 않습니다. 산양이나 염소들 보세요... 절벽 바위 위에서도 전혀 미끄러지지 않고 실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늘 말씀을 되새김질 하고, 세상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시험에도 말씀 붙들고 살기 때문에 미끄러져 실족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행17:11절에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실체!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되새김질 하지 않고 마귀가 주는 말만 되새김질 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누구 말씀 듣고자 합니까? 사람 말 들으려고 오셨나요? 하나님 말씀 들으려고 오셨잖아요? 마귀가 속삭이는 말 들으려고 오셨나요?
사58:13-14절에 성일을 어떻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나요?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사업을 하지 아니하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고=내 볼일 보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고= 성일에 하나님 말씀 듣고 그 말씀을 되새김질 하라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말이나 하지 말고...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 입을 꾹 닫아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 들었으면 집에 가서 그 말씀 묵상하며 되새김질 하고...일주일 내내 말씀 붙들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교회에 와서 마귀가 뿌린 가라지를 받아먹고 그거 곱씹으면서 되새김질 하며 열 내고, 속상하고, 시험 들고, 미움과 원망하며... 나만 곱씹기 아까우니까 여기저기 전화나 문자로 마귀 말씀을 나눈다 ...
예)호구조사...교회서 못한 것 집에 가서 전화로 또 해...시험 들지... 마귀가 나를 같은 종족으로 보던지 같은 종족 만들려고 하든지.... 영의 맷집이 강해야...
(공적인 것 아니면 말씀 나누는 것 아니면 서로 삼가)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나의 삶에 적용해야지요... 귀 즐겁고 마음에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에 적용하여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되어야 하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어야 하잖아요.... 마귀자녀다운 삶이 되어서는 안 되잖아요.... 한 주간 여러분의 모습을 돌아보라...마음과 말과 행동과 생각들을 .....
어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신앙생활은 오래했지만 남모르는 병이 있었습니다. 근 10여년 앓아 오면서 고통당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기도시간에 뜨거움을 체험하면서 그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이 너무나 감사해서 서원하기를 “하나님, 제병을 고쳐주셨으니 이제는 제가 갚을 차례입니다. 제가 죽을 때 까지 무엇을 하든 당신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데 머리에 딱 떠오른 생각이 있더랍니다. 옛날 대학에 다니면서 꽃꽃이 강습을 받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서원하기를 “제게 이러한 귀한 은사를 주셨으니 제가 죽을 때까지 꽃꽃이로 봉사를 하겠나이다.” 라고 서원했답니다.
그리고는 그날부터 매주일 꽃꽃이를 혼자 맡아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한 것이 몇 년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하는 여집사님이 그만 시험에 들어 은밀히 교회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꽃꽃이를 하다보면 비용이 상당히 듭니다. 그리고 그 집사님이 그렇게 잘 사는 분도 아닙니다. 그저 먹고 살 정도인데 그 가운데 쪼개고 쪼개어 최우선적으로 꽃꽂이 봉사를 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집사들이 이를 보고 “흥, 개뿔도 없는 게 있는 척 하네!” 라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흥, 잘하지도 못하는 게....내가 발로해도 저보다는 낫겠다!” “흥, 목사님에게 잘 보이려고 여우짓 하는 거야" 하며 집사들이 다니면서 시기하고 모함하는데 그 소리를 무려 4년 동안 참으면서 들어 왔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내가 은혜 갚으려고 하는 것이지 잘한다는 소리 들으려고 그랬나?” 하며 들은 척도 안하고 참았는데 그런데 계속 들려오니까 도저히 못 참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아, 나 때문에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나 한사람이 조용히 떠나면 교회가 조용해지겠구나.” 생각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떠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다가 부흥회 때 목사님의 설교 말씀 중에 봉사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본래 은혜 갚으려고 했나 사람에게 칭찬 들으려고 했나?...사람보고 했나 하나님보고 했나?...주님께 은혜 갚기 위해 시작했다면 사람들이 입방아를 찢던지 말든지, 사람들이 알아주던지 말든지 은혜 갚는다는 중심이 변치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는 말씀에 꼭 하나님이 자기를 책망하시는 음성으로 들려서 회개하고 다시 그 일을 시작했노라고 합니다.
교회에 이렇게 꽃꽃이 하는 집사와 같이 봉사하는 사람이 많으면 부흥하지만 다른 집사들 같이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면 교회가 망하고 맙니다.많으면 많을수록 빨리 망하고 맙니다.(광야교회) 만일 여러분 집에도 그런 집사가 와서 교회를 흉보고 성도를 흉보고 교역자를 흉보면 “집사님, 우리 집에 오시는 것은 자유지만 그런 말씀하시려거든 아예 내 집에 발도 들여놓지 마세요.” 라고 호통 치십시오. 그러면 다음부터 아예 그런 소리 안할 것입니다.
왜 내 앞에만 오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일에 그렇게 신이 나겠습니까? 맞장구 쳐주거나 최소한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교회에 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교회를 자랑해도 올까말까 한 세상인데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자기 교회를 흉보는데 그 흉을 듣고 과연 사람들이 오겠습니까? “저 교회 나가면 망한다더라”고 소문났는데 누가 나오겠습니까? 이게 다 누어서 하나님께 침 뱉고, 교회에 침 뱉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침 뱉고, 교회에 침 뱉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본인과 그 후손들이 잘 되겠습니까?
오늘은 선지자 엘리야가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살았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며 오늘 우리가(내가) 들어야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하나님을 그의 인생의 안내자로 모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 사람입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그의 인생의 안내자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간 엘리야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왕상 17:2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그릿 시냇가에 숨으라
왕상 17: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사르밧 과부에게 가라
왕상 18:1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왕상 19: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다메섹으로 가라
왕상 21:17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아합을 만나라
왕하 1:3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시되”-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라
왕하 2:2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왕하 2:4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왕하 2:6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왕하 2:11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인도를 따라 산 결과)
엘리야는 자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자기 판단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할 때마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즐겁게 순종했습니다. 가라하시는 곳으로 갔고, 있으라고 하시는 곳에 있었으며, 하라고 하시는 일을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갈 곳을 선택하지 않았고, 스스로 있을 곳을 정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할 일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그의 인생 안내자이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산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니라”입니다. 엘리야가 불 수레와 불 말을 타고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산 결과였습니다.
그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당시 시대가 북이스라엘 아합왕이 다스리는 시대였습니다. 모두가 다 아합왕의 눈치를 보며 바알을 섬기던 때였습니다. 그런 왕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다가 아합왕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철저히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주신 사명 감당하려고 사력을 다 했습니다.(열심이 특심...)
그러나 엘리야가 단 한 번 하나님의 인도 없이 스스로 갈 곳을 선택하고, 있을 곳을 정한 적이 있습니다. 갈멜산 대결 후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브엘세바로 도망갔을 때입니다. 그 때 엘리야는 하도 급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거나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방도를 찾았는데 그것이 저 멀리 떨어진 브엘세바로 도망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말씀 없이 도망쳤을 때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낙심했고 진심으로 죽고 싶었습니다.
왕상19:3-4절입니다.
<3)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
엘리야에게 있어서 단 한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할 때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낙담과 절망과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길을 찾고, 여러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 길의 끝에는 실패와 좌절과 낙담이 있을 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인생의 안내자로 삼고, 예수님의 인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말씀 붙들고 말씀을 살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해마다 농사가 힘에 부치자 농부는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하나님이 날씨를 조절할 수 있는 힘을 내게도 주셨더라면 이렇게 힘들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될텐데...” 농부의 불평을 들으신 하나님이 농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네 논밭의 날씨를 네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줄테니 마음대로 해 보거라.” 농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자기 밭의 날씨를 자기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몇 년 만 농사지으면 평생 먹고도 남을 만큼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들 보다 일찍 자기 논밭에 봄이 오게 했습니다. 남들이 한 번 농사지을 동안 두 번을 지을 속셈이었습니다. 햇볕이 나면 좋겠다고 말하면 햇볕이 났고, 비가 오면 좋겠다고 말하면 비가 내렸습니다. 일 년 내내 원할 때마다 비가 내렸고 해가 났습니다.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농작물은 더없이 푸르고 크고 풍요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저마나 대체 이 집의 작물은 어째서 이렇게 잘 크느냐고 비결을 물어왔습니다. 그 때마다 이 농부는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해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수확의 때가 되었습니다. 농부는 신이 나서 낫을 들고 곡식을 수확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소출을 얻을 생각을 하니 하늘을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수확을 시작한 농부는 크게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푸르고 풍성한 작물에 속이 들어찬 낱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웃들의 논밭에서는 예년만큼의 수확이 있었지만 그의 농사는 완전히 망해버렸습니다.
망연자실해서 논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농부에게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날씨를 네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올 해의 수확은 어떠냐?”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비를 원하면 풍족한 비가 내렸고, 햇빛을 원하면 하루 종일 햇볕이 내려 쪼였는데 농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너는 작물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고 공기를 정화시키는 바람이나 폭풍우, 눈 같은 것을 부르지 않았다. 너는 작물을 자라게 하는 비와 햇볕만을 원했을 뿐, 작물을 튼튼하게 하고 열매를 알차게 하는 궂은 날씨에는 관심이 없었어. 좋은 날씨와 궂은 날씨가 같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단다.”
네, 맞습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적당한 햇빛, 풍성한 비뿐 아니라 때로는 바람이나 태풍도 가뭄도 궂은 날씨도 필요한 것입니다. 비바람이나 가뭄이 벼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뿌리가 든든히 박히고, 그것으로 마른 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이 생기고, 그것으로 낱알에 열매가 차올라 쭉정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안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고 때로는 고난의 길로도 인도하시는 것 모두가 우리를 알곡 되게 하시 고, 복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폭풍우가 닥치고, 가뭄이 찾아와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유익한 인생길임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인도하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전도서 7:14절의 말씀에 보면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날씨가 형통할 때가 있고, 곤고할 때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냐하면 형통함과 곤고함이 함께 있는 날씨 속에서만 우리가 든든하고 열매 맺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가뭄가운데서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시고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양식을 먹고 살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가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뭄가운데,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음식을 먹고 냇가에 물을 마시며 하루하루 버티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엘리야가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 이상의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그릿 시냇가에 머물렀습니다. 6개월 동안 엘리야는 그렇게 무위도식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6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양식을 먹고, 말라가는 시내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 그릿시냇가에 있었던 엘리야 선지자는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얼마나 자신이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느껴졌을까요?
저는 이 엘리야의 심정을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 개척하고 목회 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지만요...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어도 되는 건지...밥만 축내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지나오면서 깨달아지는 것은 제주와 같이 열악한 목회 환경, 농어촌에서 목회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제일 어려운 것이요, 그냥 하나님이 이 자리를 지키라니까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것, 그게 가장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잘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것도 목회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밤...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끔 후배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목회자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는 것이 가장 힘들다. 그런데 그것도 목회다. 그것을 잘해야 제주도에서 목회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나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한 없이 부족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돈 이나, 인관관계나, 모든 것이 막혀서 손발이 다 묶인 것과 같은 어려움에 처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도 역시 주님의 인도하심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었던 6개월은 엘리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요? 그 기간은 엘리야에게 필요 없는 세월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도 엘리야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지 않을 때인가요?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을 기간일까요?
엘리야는 아무 일도 안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6개월 동안 엘리야는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라 하신 곳에 있는 것이 엘리야의 일이고 사명이었습니다. 일하는 것만이 사명이 아닙니다. 때로는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사명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실 때 가만히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일이요 사명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신앙, 성숙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사십년 동안 인도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피하게 하시며,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와 어둠을 물리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셔서 마실 물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대적들을 이기게 하셨고, 방해물들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머물거나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주위 환경, 날씨, 기후에 따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광야에서 텐트 치고 살다 보면 좀 더 머물고 싶은 곳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떠나고 싶기도 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명을 좇아” 텐트를 쳤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텐트를 걷고 출발했습니다. 좋은 땅, 나쁜 땅 가리지 않았습니다. 좋은 날씨, 궂은 날씨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머물렀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출발했습니다. 그것이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한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해 인도해 주시기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은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있으라 하신 곳에 있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 교회는 연륜이 이제 26년 되었지만, 수십 년, 또는 백년이 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는 30년, 40년, 50년 세월을 한 교회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가정은 대를 이어 그 교회에 장로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분들을 뵐 때 저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왜 시험이 없었겠습니까? 왜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섬기는 제단에 몸담고 주님을 섬기는 것,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귀한 사명 감당자입니까? 여러분들이 우리교회에서 그런 성도들과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안내자입니다. 엘리야를 말씀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말씀으로 인도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말씀 따라 사는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