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9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
시 20:1~9
〈 트럼프와 젤렌스키 설전 〉
지난 2월 28일 미국 백악관, 전쟁중인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방문했습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비공개 접견에 앞서 기자들 앞에서 상견례가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벤스 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과 기자들이 에워쌌습니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정장이 아닌 간편복장으로 정상회담에 임했습니다.
기자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복장을 문제삼았습니다.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오면서 왜 정장을 하지 않았느냐? 양복이 있기는 하냐?”
젤렌스키는 전쟁중이라서 자신은 국빈방문 중이라도 이렇게 입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양복을 안 입었지만, 전쟁이 끝나면 입을 것이라고 까칠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에 벤스 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분위가 이상해졌습니다.
트럼프와 젤렌스키 간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습니다.
세계 최강 미국과, 우크라이나 두 대통령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목에 핏대를 세웠습니다.
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절망했습니다.
첫째, 대통령 직위에 있는 사람들의 품격과 인품이 그 정도라는 점이 한심스러웠습니다.
둘째, 양국 간 평화를 도출해내야 하는 자리가 싸움판이 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인격, 품위가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젓함과 고상함 그리고 사려깊은 태도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닥치고, 자국의 이익이 최선입니다. 인격과 품위는 ‘개나 줘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21세기 ‘저질스러운 트랜드’입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구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국가 되었습니다.
소련이 핵 기지를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설치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가 되면서 세계 3위 핵 보유국이었습니다.
이때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설득했습니다. “핵을 러시아로 이전하라!”
그때 우크라이나는 미국을 믿고 핵을 러시아로 이전함으로써 비핵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으니, 우크라이나는 지금 발등을 찍고 있습니다.
오래된 원한이 트럼프-젤렌스키 회담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 전쟁중 젤렌스키가 미국을 국빈방문했는데, 우크라이나 국민은 어떤 심정일까요?
〈 전쟁 출정 시(詩) 〉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전쟁 중, 대통령 젤렌스키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습니다.
전쟁하는 중,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어떤 심정으로 대통령을 미국으로 보냈을까요?
‘제발 가서, 협상 잘 하고 와서, 이 전쟁에서 꼭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바로 이 심정으로 대통령을 미국으로 보냈을 겁니다. 그렇지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우크라이나에 동정적입니다.
먼저 침공한 측이 러시아이고, 러시아는 강대국이고, 핵 보유국입니다.
그 핵은 당초 우크라이나 국내에 있던 것인데, 비핵화를 위해 러시아에 보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참담한 심정이 그려집니다.
그때 핵을 러시아에 주지 않았더라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겠습니까?
핵과 관련한 세계 각국의 정세가 참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시편 20장입니다.
시편 20장은 전쟁과 관련이 깊은 시입니다.
20장의 제목은 “전쟁 출정 시”입니다.
고대 시대, 전쟁이 터지면, 그 나라 왕과 온 국민이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신이시여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게 해 주소서!”입니다.
각 나라마다 전쟁을 돕는 신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전쟁신은 ‘마르스’입니다.
로마에는 ‘마르스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사제가 상주했습니다.
전쟁이 없을 때의 마르스 신전은 파리를 날렸지만, 전쟁이 터지면 갑자기 분주해집니다.
마르스 신전 사제는 전쟁이 터질 것같으면 그때부터 장닭 한 마리를 굶깁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로마 황제가 군신을 이끌고 마르스 신전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신의 뜻을 묻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그 의식 중에는 신전의 장닭 한 마리를 제단에 올리고, 그 앞에 모이를 던져줍니다.
사제는 이때 며칠 굶긴 닭을 올리고, 모이를 쏟아붓습니다.
닭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며칠동안 허기졌으니 미친 듯이 모이를 쪼아댑니다.
그 모습을 로마 황제가 보고 흡족해 합니다.
“장닭이 모이 삼키듯 우리가 적을 삼키리라~”
그렇게 제의를 마치고 전쟁터에 나가 연전연승했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 이스라엘은 전쟁 전에 어떤 의식을 치렀을까요?
〈 2인칭 표기의 문제 〉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전쟁 신은 따로 없습니다.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에서도 승리를 주신다는 믿음이 확고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 선지자, 백성이 모여 치르는 의식이 있습니다.
시편 20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3절에 단서가 있습니다.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네 모든 소제” “네 번제”라고 했는데요, 여기서 ‘너’는 왕입니다.
“왕의 모든 소제” “왕의 번제”입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왕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성전 제단에 소제를 올리고 번제를 드립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물이고, 번제는 제단에 제물을 다 태워서 드리는 제물입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 이스라엘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왕은 제사를 지내고, 백성은 무엇을 했을까요?
백성은 성전 뜰에 모여서 왕이 드리는 제사에서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왕을 위한 기도, 전쟁에서 승리를 간구하는 기도이니, 중보기도입니다.
왕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시편 20장은 먼저 백성의 중보기도가 등장합니다.
1절에서 5절이 백성이 왕을 위해 중보하는 기도문입니다.
1절로 5절에는 ‘너’라는 2인칭 대명사가 모두 열 차례 나옵니다.
여기서 2인칭 ‘너’는 왕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왕을 ‘너’라고 할까요?
한국 같으면, ‘상감마마’ ‘임금님’ ‘전하’ ‘주상’ 등 극존칭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히브리어에는 하나님도 ‘you’ 왕도 ‘you’ 아버지도 어머니도 ‘you’입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유래한 언어는 2인칭 존칭이 없습니다.
영어도 2인칭은 하나님부터 친구는 물론 손아래 동생에게도 ‘you’입니다.
구약은 히브리어로 쓰였는데, 2인칭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냥 ‘너’로 했습니다.
시편 20장 1절로 5절, 중보 기도문을 읽을 때, 2인칭을 ‘왕’으로 바꿔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왕’으로 바꿔서 읽을 때 비로소 한국인에게는 은혜가 넘칩니다.
그렇게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성소에서는 왕이 소제와 번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 성소 밖에 운집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왕의 제사를 열납하시기를 중보합니다.
〈 시편 20장의 구성 _ 백성의 중보기도 〉
“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왕에게(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왕을(너를) 높이 드시며 2. 성소에서 왕을(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왕을(너를) 붙드시며 3. 왕의(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왕의(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 왕의(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왕의(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 우리가 왕의(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왕의(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지금 성전에서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왕, 그 왕을 위한 백성의 간절한 중보 기도!
이 상황을 절절하게 절감하면서 시편 20장 1절로 5절을 읽어야 제맛이 납니다.
여호와 하나님! 지금 전쟁이 터졌습니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나가야 합니다.
왕은 지금 하나님께 소제와 번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왕에게 응답하소서!
왕을 높이시고, 왕을 도우시고, 왕을 붙드시며,
왕이 올리는 소제를 기억하시고, 왕이 드리는 번제를 받아주옵소서!
왕의 소원을 허락하시고, 왕의 계획대로 이루어주옵소서!
왕의 승리로 우리가 승전가를 부르게 하옵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세우겠습니다.
여호와여 왕의 기도를 이루어 주옵소서!
성전의 제단에 왕은 소제와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전에 운집한 백성은 그 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입니다.
왕과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합니다.
다른 잡신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 전쟁을 앞두고 제사하는 왕, 중보기도하는 백성!
왕과 백성, 둘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하나가 되어 전쟁터에 나갑니다.
☞ 고대시대 다른 족속들의 전쟁신 푸닥거리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할렐루야~
〈 시편 20장의 구성 _ 제사장(선지자)의 선포 〉
전쟁을 앞두고 왕과 백성을 이렇게 이끄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인도합니다.
“왕께서는 제단에 소제와 번제를 올리십시오!”
“백성 여러분은 성전에 모두 모여 중보기도를 하십시오!”
왕의 제사와 백성의 중보기도가 끝났습니다.
인도자는 왕과 백성을 한 곳에 마주보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선포합니다. 그 선포의 말씀이 6절입니다.
(6절)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왕은 제단에 소제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백성은 성전에 모여 간절히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구약시대 기름부음받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렇게 셋입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신약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믿고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기름부음 받았습니다.
시편이 쓰일 때는 구약시대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왕, 제사장, 선지자 뿐입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전쟁 출정예배를 인도합니다.
왕에게 소제 번제를 올리게 하고, 백성에게는 중보기도를 시켰습니다.
그후 왕과 백성을 마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선포한 말씀이 6절입니다.
왕은 제사를 올리고 백성은 중보기도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니, 우리의 왕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오른손, 구원하는 힘으로, 거룩한 하늘에서 왕에게 응답하십니다!
출정 예배를 담당하는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 다음 순서가 있습니다.
시편 20장 7절 8절 9절을 다 함께 합창합니다.
제사를 올린 왕, 제사하는 동안 중보기도했던, 백성, 순서를 이끄는 지도자가 합창합니다.
☞ 그 합창이 7절, 8절, 9절입니다.
〈 여호와의 이름만으로 〉
(7~9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8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 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의 족속들, 그들은 우상에게 절하고 전쟁에 나갑니다.
그들은 병거, 그리고 말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들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합니다.
이렇게 출정 순서를 다 마치고 전장에 나아가니 하나님이 구원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전쟁 무기로 하지 않습니다. 병력의 많고 적음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섭리와 경륜으로써 전쟁을 관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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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쟁 중인 나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금도 날마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고 응전 중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미국을 갔습니다.
백악관에서 보기 흉한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강대국 미국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미국이 가진 병거와 말을 지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다스리실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3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시편 20절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보여주는 시입니다.
전쟁을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1절의 “환난 날”은 9절 “우리가 부를 때”
1절의 “응답하시고”는 9절 “응답하소서”로 수미쌍관하고 있습니다.
문학적으로도 빼어난 기법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시편 20편, 형식으로도 내용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충분히 드러내주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