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끝난 후 중국 언론을 둘러보다가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월드컵 결승전은 이민자 가정 vs 난민
출신들의 맞대결’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중국 동포의 주요 매체인 <연변일보>의 이 기사가 눈에 띈 것은 내가
생각하는 중국 동포들의 처지와 유사한 대목이 있어서다.
기사의 요점은 이번 2018 월드컵 결승전이 난민생활을 했거나, 이민자 가정 출신 선수들이 만드는 무대라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프랑스 선수단은 23명 엔트리 가운데 21명이 이민자 가정의 후손이고,
15명은 아프리카 출신이다.
- 킬리안 음바페의 아버지는 카메룬 국적, 어머니는 알제리 사람이다. 수비수 사뮈엘 움티티는 카메룬에서 태어나
두 살 때 프랑스로 건너왔다. 팀의 리더 앙투안 그리즈만은 아버지가 독일, 어머니가 포르투갈 사람이다.
폴 포그바는 기니에서, 캉테는 말리에서 프랑스로 각각 이주해왔다.
이런 전통은 처음이 아니다. 지단-앙리-비에라로 상징되는 1998년 우승팀 ‘뢰블뢰’에는 12명의 선수가 이민자
가정 출신이었다. “이번 팀은 선배 이민자 출신 선수들이 만들어놓은 예술의 토대에 스피드를 더했다.
초원을 달리는 맹수를 연상시키는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스피드에 상대팀은 허물어졌다”고 썼다.
- 반면에 크로아티아대표팀은 난민의 성격을 갖고 있다. 선수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유럽의 화약고였던 유고에서
내전의 소용돌이를 경험했다.
팀의 리더인 루카 모드리치는 6살 때 세르비아 민병대들에 쫓겨 정들었던 고향을 떠나야 했던 기억이 있고,
그를 아꼈던 할아버지는 당시 민병대에 의해 살해됐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며 한때 힘든 생활도 겪어 좌절할 수도 있었지만 모드리치는 오직 축구만이 힘든 현실을 바꿔줄 것을 믿었다.
기사는 “프랑스의 다양성과 반대되는 동질성을 바탕으로 뭉쳤고, 비록 몸은 만신창이지만 이들은 몸을 지배하는
정신의 힘을 믿는다”고 적었다.
이 글을 보면서 필자가 곧바로 떠올린 것은 중국 동포들도 이 두 가지를 같이 갖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중국 동포들 역시 거대한 중국에서 축구로 자존감을 세웠던 만큼 월드컵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닌 변방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이주한 땅에 정착한 이들에게 다가온 조국의 전쟁은 정체를 둘 곳을 찾기
힘들게 했다.
항일운동을 한 노력이 인정되어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만들어졌지만, 소수민족에 대한 공격이 만연했던
문화대혁명 시기(1966~1976)에는 자치주를 실질적 주역인 주덕해(1911~1972)마저 홍위병에 공격당해
피신한 후 쓸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당시에는 북한과의 교류가 활발했지만,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한국을 보면서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그들의 터전이던 동북3성을 떠나 한국이나 중국 대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후코우제도가 있는 만큼
타지역에서 아이 교육은 어려워, 부모가 떠나고 나면 조부모가 아이를 돌봤다. 조손가정으로 불리는 특이한
구조지만 사회적 성장의 토대는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중국 동포 사회는 건실한 성장을 하고 있다.
이들에게도 한 때 축구가 큰 희망이었다. 자치주 축구팀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체육대회 축구 경기에서 항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었다. 축구가 그들의 자부심이었고, 희망이 되기도 했다. 프로리그에도 동포들이 주축이 된
지린 아오동팀이 창설됐다. 하지만 돈이 지배하던 프로축구에서 성적은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97년이 팀이 최은택(1941~2007) 감독을 만났다. 만년 하위팀이던 지린 아오동(吉林敖東)을 맡은
최감독은 연봉도 받지 않고, 술과 담배에 찌든 팀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4등으로 그 리그를 마쳐 중국
축구계를 경악시켰다. 2015년에는 박태하 감독도 2부리그에서 만년 꼴등이던 ‘연변장백산’팀을 우승시켰다.
그런 축구의 추억이 있던 중국 동포들에게 ‘다양성과 동질성’이 섞인 이번 월드컵은 남다른 감회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만 명 정도인 중국 동포들은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그다지 큰 존재일 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정치,
군사, 교육,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 개로 나누어진 조국은 어디에도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다른 언어로 영어나 일본어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국제적인 기질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큰 무대에서 뛰기에는 민족 구성원의 숫자나 경제력 등도 빈약할 수밖에 없었지만 축구에서 최은택이나
박태하 감독 등 한국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가능성은 그들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또 다른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대림동 등을 기반으로 새로운 터전을 닦았고,
베이징 등 대도시에도 그들의 기반을 닦았다. 한국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본의 운용과 국제화 마인드를 습득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의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도 유태인 노마드인 디아스포라의 기질을 갖고 있다. 아이들과 떨어져 한국의 식당이나 공사장에서 저축한
돈으로 지하철역 근처에 음식점 등을 주로 하고 있지만 무역, 미용 등에서도 기질을 발휘해 장사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중국 동포들에게 다양한 민족의 힘이 결합되어 아름다운 경기를 벌이는 월드컵은 더 눈에 들
어올 수밖에 없다. 우승을 이끈 프랑스팀이든,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고 자란 크로아티아 팀이든 남다른
감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최은택 감독 등으로 상징되는 좋은 인연과 ‘조선족’이라는 거리감 있는
표현으로 그들을 대하는 나쁜 기억도 자리할 것이다.
다음 주에 필자는 부평 지역 청소년들을 데리고, 중국 동포들이 사는 터전을 여행할 계획이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도 만나고, 자치주의 다양한 면도 보고, 중국 동포 학생들과 만나서 친분을 쌓는 프로그램도 있다.
무엇을 배운다 안 배운다가 아니다. 그냥 우리 마음에 같이 존재하는 웅혼한 기상을 그 현장에서 느끼게 하고 싶다.
조창완·유니월드한국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