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콜럼버스였다.
중세 사람들은 지구는 평평하고, 끝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인 토스카넬리는 지구 구형설을 주장하며,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는 좁은 바다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굳게 믿은 콜럼버스는
1492년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라의 원조를 받아
3척의 배로 팔로스 항을 떠나
70일이나 항해한 끝에 서인도 제도의 산살바도르 섬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는 그 섬을 인도 근처의 섬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에도 그는 세 차례나 대서양을 건너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탐험하였지만, 죽을 때까지 그 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곳 사람들을 인디언(인디아 인이라는 뜻)이라 부르게 되고, 서인도(서쪽 인디아)라는 땅 이름이 생겼다.
그 후 같은 이탈리아 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의해 이 대륙 서쪽에는 넓은 바다가 있으며, 따라서 아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대륙이란 것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이 신대륙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 라고 불렀다. 최초의 발견자인 콜럼버스의 이름은 남아메리카에 있는 ‘콜롬비아’ 라는 나라 이름으로 남아 있다.
복원된 산타 마리아 호
산타 마리아 호는 콜롬버스의 제1차 항해 때의 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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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cT_T3dN4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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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남북 전쟁이었고
안티벨럼의 시대(Antebellum Era, 1781–1860)라는 전쟁 시대에는
남북 전쟁의 원인이 된 많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1840년대에서 1850년대의 미국은 산업화와 새로운 교통수단의 등장으로 북부와 중서부의 경제가 변화하고 전반적으로 경제와 문화의 변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민도 북부에 치우쳐서 계속 증가하면서 큰 문화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1849년에 캘리포니아주에서 골드러시가 일어난 났고, 윌못 조항에서 제기된 노예 문제가 논의의 전면에 내세워졌다. 캘리포니아주를 미국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은 1850년 타협으로 결말이 났다. 이 타협안은 미국 멕시코 전쟁의 결과 획득한 영토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 정치적으로 인민 주권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도망노예법〉에 관한 논의가 계속되면서 당파 싸움이 일상화되었다.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에서 새로운 주가 노예제도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미주리 타협을 무효화했다. 캔자스에서 노예제도 지지자와 반대파가 이주하면서 대립을 했고, 결과적으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측이 승리를 거둔 것은 공화당의 탄생으로 징후가 보였던 갈등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1861년 캔자스 주가 미국의 주에 가입하면서 의회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해 후반기부터 1861년 전반기에 걸쳐 남부 11개주에서 미합중국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2월 9일에는 남부 동맹 정부를 수립했다. 남군의 피에르 보우리가드 장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북군 기지 섬터 요새의 부대를 포격하면서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4년간 미국은 노예제도와 국가의 권위 사이에 길고 심각한 문제로 분열되었고, 미합중국의 역사 상 가장 어두운 시대가 되었다. 도시가 성장하고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북부 주(북군)는 주로 농촌 농업 지대인 남부 주(남군)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양측 모두 60만 명에서 70만 명이 사망하고 남부 토지의 대부분은 황폐화되었다.
1860년 인구 조사에 근거하면 이 전쟁에서 13세에서 43세 사이의 백인 남성 8%가 죽었고, 그 비율은 북부에서는 6%였지만, 남부에서는 18%에 달했다. 결국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미국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https://youtu.be/cegmveMcmJY
https://youtu.be/8qNPVudYR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