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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묵상글 들 ( 연중 제6주간 수요일. - 뚫린 눈으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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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뚫린 눈으로
"그때에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의 치유 얘기는 지난주
귀와 입에 장애가 있는 사람의 치유 얘기와 거의 같습니다.
두 얘기에서 주님의 치유는 공적이 아니라 사적으로 이루어지고,
손을 환자에게 직접 대고 침을 바르는 행위 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일까 이 얘기는 다른 복음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오늘 저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라는 관점에서 묵상코자 합니다.
첫 번째로 이 사람은 주님이 아닌 다른 사람은 치유할 수 없는,
다시 말해서 불치의 장애랄까 병을 가진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그러나 육체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믿음과 희망의 장애는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시 불치의 장애자는 이 사람 말고도 수없이 많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장애와 더불어 믿음과 희망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 그들은 치유를 포기하고 살았는데
이 사람은 주님 때문에 희망과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고,
그래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로 이 사람을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이 사람이 주님을 찾아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눈을 사람으로부터 주님께로 돌렸을 뿐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장애로 인해 주변 사람들과 벽을 쌓고 살지 않고,
마음을 열고 살고 겸손하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 사람은 주님을 만났고 치유를 받아 볼 수 있게 되는데
틀림없이 육신의 눈만 치유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치유받았을 겁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의 믿음과 희망은 그의 열망,
곧 보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된 믿음과 희망이라면
주님을 만나고 치유를 받고 난 뒤의 믿음과 희망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믿음과 희망이고
그래서 그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것만 보지 않고
하늘과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만 잘하는 사람을 비야냥거릴 때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한다고 하는데
우리 중에 많은 사람은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욕망과 악으로 오염이 되어 그 뚫린 눈으로 이 세상 것들과 사람만 보는데
이 장애인은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눈이 정화되어 하늘과 하느님을 보는 겁니다.
이 얘기를 들은 우리는 오늘 눈먼 장애인처럼
눈의 정화와 눈의 치유도 받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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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인가?
그냥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기보다 보기는 보되 눈이 가려져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그는 마치, 장미꽃을 그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뿐, 그 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자신을 뜨겁게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 알뿐, 주변을 환히 밝혀준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정녕,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대체 무엇이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입니다. 이 ‘영의 눈’은 신앙이 깊어가면서 밝아지는 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성령의 도유를 말합니다. 곧 영으로 도유되어 치유된 눈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모든 것을 똑똑하게 뚜렷이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고, 나아가서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의 능력을 보며, 그분의 말씀에서 하느님 나라와 사랑을 보는 눈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는 눈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하여,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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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무엇이 보이느냐?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치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까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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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듣기는 빨리, 말하기는 더디, 보기는 똑똑히 하기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을 얻게 됩니다. 이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의 세속적 죄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공손히 받아들이되, 받아들인 말씀에 따라 실행하는 데 힘 써야 합니다. 그리하면 실행하는 자기 자신도 행복해지지만 그 실행의 혜택을 받는 이들도 행복해집니다. 이 신심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면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해집니다.
이상이 사도 야고보의 권고인데, 이는 이미 부활한 삶의 행동양식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자신이 쓴 복음서의 핵심을 8,29에 있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두고 그 앞뒤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을 배치했는데, 이 신앙 고백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손으로 눈을 뜨게 된 벳사이다의 소경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 뒤에는 예리코의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를 배치하였습니다(마르 10,46-52). 그런데 이 두 소경이 아주 대조적으로 소개됩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은 이름도 없이 나오는데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이 소개되는 한편 자기 발로 걸어와서 스스로 치유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그것도 두 단계로 나뉘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두 번째로 손을 댄 다음에야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사람들이 구박을 하며 도와주지 않는데도 두 번에 걸쳐 적극적으로 청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실 필요도 없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하는 말씀 한 마디로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 결과, 벳사이다의 소경은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졌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제자로 받아들여져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눈먼 사람이 눈을 뜬 이야기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로 다짐하느냐 하지 않느냐, 또 달리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가 혹은 그저 형식적인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이치를 일깨워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사도적 권고는 벳사이다 소경의 수준에서라면 그저 좋은 말씀이려니 생각하고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냄직한 내용이지만, 예리코 소경의 수준에서라면 가슴에 새겨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이 바로 복음선포가 되게 할 만한 내용입니다.
신앙 고백이나 부활 신앙이 벳사이다 수준과 예리코 수준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모두 우리네 삶과 일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마다 하는 신앙 고백을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습관적으로 해치우려 합니다. 의미를 헤아려볼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또, 부활이란 부활절 하루만 듣는 말씀이요, 죽어서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 이루어질 막연하기 짝이 없는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그것도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쯤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일 처음에 하는 기도이므로 그때마다 의미를 꼼꼼하게 헤아려 가슴에 새깁니다. 인류가 알아낸 것 중에 가장 귀한 진리가 그 기도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에서는 그 신앙 고백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 벅차게 외치듯이 기도합니다. 그 숱한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당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되뇌었던 소중한 언어, 그것이 신앙 고백입니다. 또, 부활이란 예리코 수준에서는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생기를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이익이나 편리함보다는 좀 더 이타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위하여 살고자 하며, 다스림보다는 섬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삶이 부활입니다.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내 지갑에 있는 돈이 내 재산이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돈이 내 재산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값지게 쓴 돈이야말로 진정한 내 재산이라고 심판 때에는 물론 항상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돈에 대해 주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이나, 그 시간을 들여서 얻은 지식이나 명예 등도 다 나를 위한 것이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시간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나를 위해서는 별로 가치가 없고 그것들이 누군가를 위해 바쳐지는 사랑의 도구일 때에 진정한 내 것이 된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랑을 기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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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80년대 초, 우리 집에 ‘APPLE II’라는 컴퓨터가 생겼습니다. 당시에 본체만 25만 원 했을 정도로 고가였는데, 제 바로 위 형님의 요청으로 부모님께서 사주신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컴퓨터였기에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락실에 굳이 가지 않고,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고가의 게임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프린터 가격이 너무 비쌌기에 종이에 인쇄물을 출력할 수도 없었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고가의 게임기가 컴퓨터일까요? 아닙니다. 현대는 컴퓨터 없이 과연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스마트폰은 손안에 컴퓨터를 들고 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4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나게 바뀐 세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봤던 공상 과학 만화책에 등장하는 미래의 모습이 대부분 실현되었고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이지만, 세상의 변화는 인간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바뀔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인간도 바뀝니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그 안에서 제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힘들어도 바뀌어야만 합니다.
결국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변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변화 안에서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고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좀 보이느냐고 물으시지요. 병자를 고치는데 환부에 침을 바르는 것은 침이 치유 효과를 내는 약효를 가지는 것은 아니고 단지 당시의 민간요법 절차를 시행한 것뿐이었습니다. 이 행위는 소경이 마귀에 걸렸거나, 믿음이 없어서 소경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고, 마귀의 영향으로 단정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의 변화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귀찮은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단 한 번의 방법으로 치유하지도 않으십니다.
3단계로 희미하게,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게, 마지막으로 똑똑히 환하게 보게 됩니다. 하느님이니까 쉽고 간단하게 한 방으로 치유해 줄 것 같지만, 점진적인 치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 역시 우리의 생각을 깨뜨려 버리는 것이지요.
다양하게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왜 자신의 틀에 주님을 가두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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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르게 화를 내는 것은 화를 참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라네(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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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월 28일에 사제서품을 받은 새 사제들이 본당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직은 만남이 자유롭지 않지만, 새 사제들의 복음 선포가 교우들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새 사제들의 순수함과 열정으로 팬데믹의 강을 힘차게 건너면 좋겠습니다. 서품식에서 가장 중요한 전례는 어디일까 생각해 봅니다. 성인호칭기도, 제의를 입는 예절. 선배 사제들과 주교님의 안수, 새 사제들의 안수가 있습니다. 성인호칭기도를 바칠 대, 서품자들은 바닥에 길게 엎드려 가장 낮은 자세로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주교님과 사제단 그리고 신자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서품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는 성인호칭기도가 서품식에서 경건하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전례를 전공하신 신부님께서 서품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품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후 서품 예정자가 대답하는 때라고 합니다. 교구 서품식에서는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 서품 대상자를 한 명씩 호명해서 주교님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자리에 앉아있던 부제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앞으로 나가면서 큰 소리로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전례에서 일어서는 동작은 내가 묶인 자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것을 상징합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부제가 일어서면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답하기로 서약하는 이 순간과 앞으로의 삶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 사제가 되기로 선택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했다면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기 마련입니다.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금메달 획득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훈련합니다. 더 멀리, 더 빠르게 뛰고, 골대에 골을 넣고, 표적 중앙에 화살을 꽂습니다. 과녁이 정확해야 10점을 맞힐 가능성이 생깁니다. 과녁이 없는 사람은 화살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 사제들이 가져야 할 목표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목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런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앞이 보이지 않는 불쌍한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이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주님께서 모시고 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이 세상의 것들에 물들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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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물찾기, 보물줍기 인생
- 개안開眼의 여정 -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피정 3일차-
어제 하루의 감동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참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하루 100%를 넘어 물경 200% 삶을 산 느낌의 날이었습니다. 여기 민족의 성지聖地, 보물섬 제주도에 올 때의 예감이 그대로 적중된 날이었습니다. “제주도 성지 순례 여정 피정”이 되리란 예감이었습니다.
참으로 보물섬 제주도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운 살아 있는 자연 보물을, 사람 보물을 많이도 주어 삶의 바구니에 가득 넘치도록 담았던 날이었습니다. 특히 새섬에서는 일몰日沒시 얼마나 많은 바다 사진을 찍었는지 모릅니다. 서복전시관도 정방폭포도 천지연폭포도 좋았고 일년 열두달 날마다 폭포수의 배경을 이루는 제주도 중심 높이에 자리잡고 있는 백설 덮힌 크고 높고 깊은 한라산도 좋아 마음에 담아갑니다.
얼마나 많은 보물 사진들을 담았는지 카톡 갤러리는 마침내 보물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녁에 제주도 도반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 이름들도 참 아름답고 밝고 깊었습니다.
“그래서, 꽃이 핀다”
‘그래도, 꽃이 핀다’해도 좋을 듯 싶었습니다.
“봄날이 365일 지속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풍경”
책이름도 놀랍도록 아름답고 깊지만 사단법인 “누구나” 이름의 기발함에는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
라는 책명도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감동이었습니다.
오늘 여기 강정마을에서 처음 미사를 집전하는 저는 서울 근교 불암산 기슭에서 산같은 정주의 삶을 살다가 제주도가, 바다가 그리워 찾은 성 베네딕도 요셉 수도원 소속의 이수철 프란치스코 수도사제입니다. 흡사 산이 바다를 찾은 사랑의 기적이 실현된 느낌입니다. 그동안 강정마을 소식과 거리미사를 들을 때 마다 늘 빚진 마음이었습니다만 오늘 비로소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 느낌입니다.
또 이렇게 사랑하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공동휴가 하기는 40년 수도생활중 처음이라 참 감동스럽습니다. 어제 하루 가이드를 넘어 영적 가이드로서 빛나는 역할을 해준 제주도의 숨겨진 의인義人, 순수와 열정의 강홍립 사도 요한 형제가 들려준 일화도 잊지 못합니다. 하루 9시 서복공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오후 5시 샘섬 방문까지 코스중 10개 순례 영적 피정 주제와 그에 따른 설명들은 얼마나 풍요로웠던지요! 제주도를 찾는 분들이 강 사도 형제의 도움을 받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1.정직- 2.감사- 3.용서- 4.친구- 5.가족-
6,밖에서 보는 나, 7.사랑- 8.시간- 9.돌아감-10.기억(행복)
9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5시 순례 여정 피정시 다뤘던 주제들이였습니다. 바로 여기 사랑 부분에서 들었던 예화입니다. “여기 오는 분들중 부부가 손잡고 다니는 분들은 하나도 본 적이 없다”라는 말과, “남자 형제들이 오는 경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즉시 이에 응답하여 우리 함께 한 수도형제들 넷은 일제히 손잡고 걸으며 사랑을 과시함으로 불문율을 깬 신기록이라 하며 활짝 웃었고 사진에도 담았습니다.
참으로 만났던 모든 분들이 살아 있는 보석같이 귀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신비로운 분들이었습니다. 영적 가이드 역할까지 해줬던 강홍립 사도 요한 형제들 비롯해,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한 감동을 선사하는 화가 이중섭, 오한숙희 엘리사벳 자매 “누구나” 사단법인 이사장, 어제 만났던 김근수 요셉 신학자, 그리고 40년 서귀포 성당의 충실한 종지기이자 50년 동안 서귀포 집 문밖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는 80연세에도 순수와 열정의 청년같았던 구도자이자 화가 고영우 세바스티안 형제, 그리고 한량없이 선량한 목사님, 모두가 보물섬 제주도 곳곳을 밝히는 숨겨진 보석같은 분들입니다.
아니 제주도에 거하는 모든 분들 한분한분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빛을 발하는 숨겨진 보물일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사막이 빛나는 것은 어딘가 우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란 어린왕자의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제주도가 빛나는 보물섬인 것은 이처럼 곳곳에 숨겨진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보석같은 분들 때문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강론이 “제주도 예찬”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삶은 여정입니다. 목표와 방향이 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하느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가이드 강홍립 사도 요한 형제의 휴대폰 배경 화면의 “꿈”이란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꿈구며 꿈꾸는 사람만이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궁극의 꿈이자 희망은, 비전은 하느님임을 또 새로이 깨닫습니다. 서귀포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건물 외벽에 붙어있던 “이달의 좋은 글귀;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궁극의 꿈인 하느님을 그리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간다는 놀라운 복음이 함축된 말마디입니다.
어제 강론 제목은 ‘깨달음의 여정’이고 오늘 강론 제목은 날로 마음의 눈이 열려져 가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날로 어둬져 가는 육안肉眼의 시력과 달리 영안靈眼의 시력은 날로 높아져 가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제주도를 3차례 방문했지만 이번처럼 열린 눈으로 깊이 만나기는 처음입니다. 아마도 끝없는 깊이의 보물섬 제주도이기에 탐구의 깊이도, 앎의 깊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제주도만 그런게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삶의 깊이와 신비도 그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린 벳사이다의 눈먼 이는 바로 무지에 눈먼 우리 모두를 상징합니다. 참으로 주님 사랑을 만날 때 열리는 심안心眼이요 영안靈眼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복음인지요! 그대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마음의 눈이 열리는 개안의 은총을,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한 두 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개안이 아니라 평생 열려가야 하는, 날로 심안의 시력이 높아져가는 개안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개안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그리고 궁극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개안의 여정이 아닙니다. 말씀 공부와 함께 하는 여정입니다. 말씀의 경청과 말씀의 수용, 말씀의 실행과 함께 가는 개안의 여정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죽비같은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이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바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말고 세상을 성화聖化하며 살아가는 말씀의 사람이,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말씀의 은총입니다. 생명이요 빛이요 영인 말씀입니다. 평생 주님의 학인이 되어 말씀공부와 말씀실행에 전념할 때 더불어 순조로운 개인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충실한 삶, 당신의 보석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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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의 어느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점이 좀 특이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뚜렷하게
보지 못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셨고,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눈먼 이의 치유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예수님께서도 애를 좀 먹으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보다는 그의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제자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곁에서
쭉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그분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꾸짖으셨지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가 예수님의 첫 번째 시도로
어렴풋이 보게 된 이야기에 빗대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눈먼 이가 뚜렷이 볼 수 있도록 다시 눈에 손을 얹으셨듯이,
제자들의 몰이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올바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고는 있지만,
아직 어렴풋이 보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당신 손을 우리의 두 눈에 얹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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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 좀 특이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7,33b=8,23b)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 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 있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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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 25)
지금껏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겸손히
주님 앞에서
인정하며
고백한다.
다시
볼 수 있도록
간절히
주님께
기도드린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나의
시력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람이
다시 보이고
마음이
있는 곳에
함께 있는
사람이 있다.
정체불명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회복되어야 할
마음의 따뜻한
시선이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회복될 수 없는
우리들 마음이다.
사랑으로
견디어내고
사랑으로
다시 보이는
삶의 기쁨이다.
가면을
벗겨주시고
다시
보게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변화이다.
새롭게
바라보지
않고서는
새롭게
만날 수 없다.
서로 바라보는
거기에 주님께서
계신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시
보게하여
주신다.
주님을
회복하는 것이
영혼의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
모든 것이
뚜렷이
회복된다.
마음이
있는 곳에
마음의 시력도
회복된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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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여기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그 마을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 생활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뒤에서 끌어당기는 힘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9).”
‘익숙한 삶’을 버리고 ‘낯선 삶’을 선택해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중요한 것과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뒤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의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은 날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날마다 새로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살아 있는 신앙생활’이고, ‘늘 깨어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지 않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죽은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런 생활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한 번 빛을 받아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들이,
또 하느님의 선한 말씀과 앞으로 올 세상의 힘을 맛본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면,
그들을 다시 새롭게 회개하도록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자주 내리는
비를 빨아들여, 농사짓는 이들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주는 땅은 하느님에게서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게 되면 쓸모가 없어서
오래지 않아 저주를 받고, 마침내는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히브 6,4-8).”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하고 냉담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돌려 세우는 일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 실제 현실입니다.)
‘눈먼 이를 고치신 이야기’에서 “무엇이 보이느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의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 과정을 생생하기 묘사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눈먼 상태’를 고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해 주시지만,
‘보는 일’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시력이 회복되었더라도 스스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것은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헛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은총’은 받은 사람 쪽에서 제대로 응답해야 완성됩니다.
듣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듣게 되었다면(마르 7,35)
제대로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말을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말하게 되었다면 제대로 말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걷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걸을 수 있게 되었다면(사도 3,6-8)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을 수 있게 해 주셨는데도 그냥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버리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11).”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바오로 사도는 아이처럼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른이 되었는데,
저절로 어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아이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그만두고, 성숙하고 완전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려고 노력한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이야기를 설명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일’과 ‘우리의 노력’이 합해져야 합니다.
치유를 포함해서 신앙생활은 원래 언제나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탈렌트의 비유’가 바로 그 가르침입니다.
그 비유를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세 번째 종을 주인이 이렇게 꾸짖습니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5,29-30).”
‘가진 것이 없는 자’ 라는 말과 ‘쓸모없는 종’이라는 말은,
신앙인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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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눈을 뜨고 빛과 사랑으로 찾아가는 귀향길 ♣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마르 8,25)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요르단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하구 동편에 있는 벳사이다로 갑니다. '어부의 집’이란 뜻을 지닌 이곳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지요(요한 1,44). 어부의 집에서 어부들이 온 세상이 파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불행을 선언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1,20-24).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는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끊어진 채, 영혼의 어둠과 타락 상태에 갇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그는 주님과 떨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어디에서 주님을 찾아야 할지 모른 채, 자신을 어둠의 동굴 속에 둘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그 안에 자리잡게 된 죄악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더불어 행복하기를 갈망하던 애정 넘친 이웃들이, 그 소경을 예수님께 데려와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차례에 걸쳐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마침내 소경은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마르 8,2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변화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그분께서는 고쳐달라는 청에 대해, 단 한마디도 토를 달거나 묻지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눈을 뜨게 해주시려고 움직이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렇게 철저히 타자중심으로 움직이며, ‘곧바로’ 응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영혼의 어둔밤 속에서 헤매는 그 눈먼 이의 어둠을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도 않으시며, 사랑으로 함께하며 해방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왜 그런 잘못을 했느냐고 묻거나 훈계하려고 하지 않고,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사랑의 태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의 고향인 그곳에서 눈먼 이를 고쳐주셨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예수님과 계속 함께 지내면서, 가장 가까이에서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목격했던 제자들의 고향에, 눈이 먼 상태, 곧 영혼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도 눈먼 상태에 있을 때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벳사이다의 유다 백성들에게, 눈을 뜨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보여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시어, 그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려가서 고쳐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그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하십니다(8,26).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인간을 옭죄는 전통과 편견, 차별과 불의의 뿌리가 있는 ‘어둠의 집’이 아니라 ‘믿음의 집’, ‘사랑의 집’, 자유와 해방의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의 가치를 하느님보다 더 중요시하며, 육(肉)의 질서를 따르는 소경이 되지 않도록 빛이신 주님께 내 손을 맡겨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사랑과 진리에 눈을 떠, 자신과 이 사회의 어둠과 불의를 식별할 수 있도록 회개하여, 주님 사랑의 집으로 되돌아가야겠습니다.
주님, 깨끗한 마음의 눈으로 제 영혼의 어둠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해주시며, 당신 사랑의 눈으로 세상의 어둠을 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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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암에 걸린 후 새로운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그 점에 대해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1928~1996)의 용서와 화해, 치유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가 시카고 대교구 교구장으로 봉사하던 1993년 신앙 특강 차 뉴욕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동료인 오코너 추기경을 만납니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오코너 추기경은 당시 떠돌던 소문 하나를 그에게 전합니다. 조만간 미국 내 한 추기경이 성추문으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소문이었습니다.
다음날 조간신문을 집어 든 그의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일면에 대서특필된 보도 내용은, 그 용의자가 바로 추기경 자신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었던 그였지만, 그런 추문에 자신이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TV며 신문들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연일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에 대한 공격과 성토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 안에서 갑작스레 자신에게 다가온 십자가를 묵묵히 받아들였고, 그 꿋꿋이 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은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스티븐이라는 고소인조차도 돌봄이 필요한 길잃은 한 마리 양으로 여기고, 맞고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인내심과 통제력을 잃지 않고 기도 안에서 인내롭게 무고함을 풀어나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스티븐 역시 추기경 음해를 위해 이용당한 희생자였음이 밝혀졌고, 스티븐은 자진해서 고소를 취하했습니다.
모든 상황이 종결되고 나서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은 스티븐을 찾아갔습니다. 진심으로 그를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당시 에이즈로 인한 절망 속에 살아가던 스티븐은 교회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추기경님이 온몸으로 보여준 화해의 몸짓에 깊이 감동을 받게 됩니다.
스티븐은 추기경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던 순간 자신의 영혼 안에 진정한 치유가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은 헨리 나웬과의 만남 때 당시 상황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지금 나와 스티븐은 심각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스티븐은 에이즈에, 나는 췌장암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 둘 다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스티븐은 한달에 한번 꼴로 전화를 해서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의 전화 한 통은 제가 너무나 큰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서로를 지원하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스티븐의 병세가 깊어지자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은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1995년 9월 22일, 추기경님의 서거 1년 전 스티븐은 추기경님으로 인해 교회와 화해할 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어지는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의 말씀은 더욱 감동적입니다. “지금은 제게 대단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저는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갈 때 옆문으로 곧바로 진료실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암에 걸려 죽음을 겁내는 환자들을 찾아보고 싶고, 그들 곁에서 위로를 주는 형제이자 벗이 되고 싶습니다. 암에 걸린 후 새로운 사목을 시작한 셈입니다. 그 점에 대해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병세가 깊어지자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은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로욜라 중앙병원에 입원합니다. 그는 자신이 환자이기 이전에 사제라는 마음으로,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병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동료 암환자들의 영혼을 돌봤습니다.
1996년 11월 1일에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 마지막 3년간의 회고록 ‘평화의 선물’ 집필을 끝냈고, 11월 14일 69세의 일기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참석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친필 카드를 작성했고,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발송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가 직접 쓴 카드는 선종 직후 우체국으로 옮겨져 전 세계로 발송되었는데, 그 가운데 수신자 김수환 추기경님의 이름도 끼어있었습니다.
천국에서 온 성탄 편지
사랑하는 벗이여,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 성탄은 제게 특별한 성탄입니다. 왜냐하면, 아마도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성탄일 테니까요. 이런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도 있습니다. 다가올 세상, 곧 천국에서 주님과 보다 깊이 친밀하게 하나 되는 희망을 미리 맛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이제 하늘 고향을 향하여 저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게 될 때, 제 마음은 사랑하는 벗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간 제게 베풀어 주신 우정과 친절, 협조와 기도에 깊이 드립니다.
요셉 버나딘 추기경님의 용서와 화해, 그로 인한 치유와 관련된 영웅적인 모습은 이 시대 사목자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진정 예수님을 꼭 빼닮은 사목자요 치유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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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안이 열리면 사람이 왜 나무로 보이는가!>
오늘 복음은 벳사이다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데리고 와서 눈에 손을 대 치유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왠지 그가 눈이 먼 것이 마을 탓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안수를 하여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이 치유를 ‘점진적 치유’라고 말합니다. 왠지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는 것은 불완전하게 치유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데 마치 능력이 부족한 인간 의사처럼 점진적으로 치유하실까요? 그분은 말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점진적 치유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이번에는 그들이 원하시는 대로 두 눈에 손을 대셔서 그가 똑똑히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이 치유와 벳사이다라고 하는 마을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육체적인 눈의 치유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영적인 눈이 어떻게 치유되는지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앞의 내용이 4천 명을 먹이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육체의 배를 채우는 빵의 부족함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눈멀고 귀먹은 이유가 세상을 상징하는 벳사이다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적인 눈을 멀게하는 벳사이다는 무엇의 상징일까요? 벳사이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멀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행복’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세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향해 갔더니 사람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나를 보는 대로 나도 사람을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돈을 좋아하고 욕망이 많고 힘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나의 돈을 빼앗고 나를 이용하고 나를 무시하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더 돈 많고 더 이용하고 더 센 척을 해야합니다. 그렇게 눈이 멀고 영혼도 몸도 망가집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그냥 나무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무가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자신도 정글 일부가 되어 남을 죽이든지 남에게 죽든지 하는 긴장 속에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어떨까요? 자신이 나무로 여김을 받기에 타인들도 나무로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무에서 필요한 부분을 다른 나무에게 붙여주기도 합니다. 나무는 무서워하고, 이용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마치 자녀처럼 가꿔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 자녀들도 다른 나무들을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티모시 그린의 이상한 삶’(2012) 영화 내용입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불임 부부가 아이를 갖기를 꿈꾸며 자신들의 소망을 담아 마당에 심은 상자에서 ‘티모시’가 생기는 그런 영화입니다. 부부는 아이가 생기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원하는 아이의 특징을 적은 메모지를 나무 상자에 넣어 정원에 묻고 난 얼마 후 놀랍게도 상자를 묻었던 땅에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린 부부는 티모시를 하늘이 보내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티모시는 바로 그린 부부를 엄마 아빠라 부릅니다. 그런데 티모시는 다리에 나뭇잎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나뭇잎은 무엇으로도 자를 수 없습니다. 부부는 그 아이가 ‘다르다’는 점에서 왕따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합니다. 실제로 티모시는 운동도 못 하고 체력도 달리고 키도 작습니다. 다리에 난 초록 나뭇잎은 커다란 핸디캡입니다.
생일파티에서 수영장에 빠지게 된 티모시는 자신의 다리에서 자라는 나뭇잎을 한 여자아이에게 들킵니다. 자신의 비밀을 들킨 티모시는 여자아이를 피하지만, 여자아이도 “너만 비밀이 있는 게 아냐”라고 하며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됩니다. 그때 나뭇잎 하나가 말라서 떨어집니다.
시간이 지나며 티모시의 다리에서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집니다. 티모시가 사랑 또는 우정을 느꼈을 때, 삼촌이 돌아가실 때, 못 하던 축구를 열심히 해서 승리에 이바지했을 때 등 세상에 유용한 사람이 될 때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티모시는 알게 됩니다. 자신의 다리에 난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은 사라진다는 것을. 그런데 이 모든 소망은 그린 부부가 미래의 자녀를 위해 쓴 메모의 내용이 이루어질 때마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린 가족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연필 회사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티모시는 나뭇잎으로 연필을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사장은 그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자기 아들이 낸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이때 티모시가 앞으로 나아가 이것은 자기 다리에 붙은 나뭇잎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그렇게 나뭇잎을 붙이고 태어난 사람임을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집니다. 자신의 나뭇잎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 주고 떠납니다.
이는 한 아이를 사랑할 줄 알아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무처럼 키울 줄 알아야 불임 부부에서 한 아이를 키울 줄 아는 자격을 갖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린 부부에게 자녀를 입양할 자격이 주어지며 끝나는 이 영화는 한 아이를 키울 때 그 아이를 나무로 바라봐줘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나는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고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나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여 나무를 잘 가꿔주고 싶은 마음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도 나무입니다. 남을 도우려면 나에게서 떼어서 나누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것. 이것이 사람을 나무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황폐해진 땅을 보살피기 위해 나무 한 그루를 심기 시작하는 것처럼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에 침을 발라주시고 안수를 해 주시는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는 무서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가꿔야 할 존재입니다. 나무를 보살펴주는 나무가 됨으로써 자신 또한 하느님께 보살핌을 받는 나무가 됩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눈을 뜬 이들의 삶입니다. 다시 벳사이다라는 세상에 빠져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히 시력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보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성령을 받아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이제 나무가 무엇을 하는지만 보고 배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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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6 주간 수요일-묵상과 기도
야고보 사도는 듣기는 빨리하라. 말하기는 더디하라. 특히 분노를 더디하라. 분노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듣고 말함에 있어서 우선 말씀을 받아들이라. 그 말씀에는 영혼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분은 먼저,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시고.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보이느냐? 묻고 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시어 똑똑하게 보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차 침을 바르고, 2차의 안수를 통해 그의 눈을 똑똑히 보게 해 주셨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 1,19-2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 8,22-26
실천
경청(傾聽), 귀를 기울여 들음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더디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상대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귀담은 말, 경청은 말을 이해하고 식별하게 합니다. 경청하지 않으면 말을 바르게 이해하기 힘들고, 이해 뿐 아니라 바르게 전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말이나 상대의 말이나 귀담아 듣지 않고 깊이 이해하지 못했으며, 더구나 식별하지 않은 채 대화하지 않습니다. 말의 식별은 그 말의 선함과 참됨, 곧 좋은 말임을 깨달은 상태를 말합니다. 식별된 말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선함으로 유익하다고 여겨진 순간입니다. 그 식별에서 말에 해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 말을 잘 알아들을 때 비로소 말을 합니다. 이것이 경청의 말, 덕스런 말입니다.
경청의 심화는 그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머물 때입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머물고 자리를 잡고 있으면 듣고 말함이 참되고 신실합니다. 경청의 덕은 그 말씀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삽니다. 그 말씀의 밭에서 좋은 대화가 오고가고 서로의 말씀에서 복을 얻습니다. 그 말씀의 나눔으로 행복합니다.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은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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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최근에 시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누구나 어려서는 시력이 특별한 이상이 없는 이상 좋은 시력을 유지하곤 합니다. 시력이 좋을 땐 눈의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7년쯤부터 안경을 쓸 때도 안경이 약간 시력을 보정해 주니 그럭저럭 크게 불편함을 모르고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2년 전에는 안경을 쓰는 것이 번거로워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느새 안경을 써도 시야가 맑지 못해서 안경점에서 다시 시력 검사를 하는데 노안이 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노안이라는 말을 듣고 상당히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말을 듣기 전에 교구청에 있는 자매님이 언젠가 노안이 와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속으로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노안의 개념을 단순히 글자가 상징하는 의미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눈이 늙었다. 즉 노인의 눈’ 이런 개념으로 생각을 한 것 때문에 두 경우의 말에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력은 다른 기관보다 자연적인 노화가 더 빨리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더라면 좀 더 잘 그런 말이 의미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이야 기술이 발달돼 안경의 도움으로 세상을 정상적인 시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눈이 먼 사람이 시력이 회복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안경도 없었을 텐데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손이 안경 역할을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안경은 계속해서 착용해야만 자신의 시력을 보정받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손 안경은 두 번 잠시 착용하는 것으로 그것도 완전히 시력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손이라고 했지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같은 개념이지만 손을 단순히 신체의 손이라는 개념보다는 ‘손길’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며 묵상을 해봤습니다. 좀 더 묵상이 풍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는 단순히 두 번으로 예수님의 손길을 거쳐서 회복됐다고는 나오지만 이 의미를 좀 더 지협적으로 범위를 축소시켜서 생각해본다면 전능하신 분의 손길도 한 번만으로도 얼마든지 회복이 될 수 있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두 번째에 회복이 되는 걸 보니 이런 묵상을 해봅니다. 우리도 사실 좀 더 시야를 확대하면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손길이 없다면 과연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손길을 자신이 다만 느끼지 못했을 뿐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 말씀에도 신심이라는 것이 나오지만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믿음과 신심이 좋아서라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다 예수님의 손길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실제는 이렇게 생각을 해야 정상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런 상황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만 그걸 외부에는 쉽사리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지 내심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그런 사실을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을 하면서는 잘 하기 힘들지만 남과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서 자신을 치켜세우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그건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도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다 주님의 손길이라는 도움이 없다면 힘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크게 불편합니다. 아무리 안경의 도움으로 잘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이런 눈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건 단순한 불편함만 가져다주지만 우리는 영적인 눈이 막히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다가옵니다. 영안이 열려 있지 않게 되면 영원의 세상을 동경하는 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뭔가를 봐야만 그걸 욕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안이 항상 열려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방법은 수도 없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으로 한정해서 생각해본다면 말씀을 계속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눈의 노화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영안에는 노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또 하나의 비장의 히든카드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오늘 독서 마지막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긴 하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은 영안이 맑을 때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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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1,19-2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19~21)
야고보서 1장 2~18절에서는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였다.
이어지는 1장 19절~2장 26절은 야고보 서간의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는 믿음, 곧 '행위와 믿음'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가운데 첫 단락이 1장 19절~27절인데,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로지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신심(경건)에 대해 설파한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19)
구약 성경은 물론 유다교 문헌에서 이런 의미의 격언은 너무나 풍부하다 (잠언10,9; 13,3; 15,1; 29,20; 코헬7,9; 집회4,29; 1꿈란문헌5,25 등등). 일찍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흔히 어떤 한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 졌고, 이 모임에서는 말씀이 선포되며 성경의 진리에 관한 토론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거나 토론하는 자세에 대해 바른 지침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기울여 경청한 다음, 충분히 생각한 후에 서서히 자기 의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잠언18,2). 그리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분노'라고 번역된 '오르겐'(orgen)의 원형 '오르게'(orge)는 ① 타고난 '성질', 기질', '성격'이란 뜻 ② 마음의 움직임 또는 동요에 대한 '충동', '욕구'라는 뜻 ③ 온갖 격렬한 감정을 의미하는 '분노', '화', 진노'란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세번째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화를 안낼 수는 없겠지만(에페4,26),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수만 있다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 (잠언16,32)
이 외에도 잠언 19장 11절, 12장 16절, 15장 1절, 25장 11절.15절 등에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식견이요, 대화시 합당한 말과 유순한 대답과 부드러운 혀를 통해 상대방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고 말한다.
19,11 ; "사람을 관대하는 만드는 것은 사람의 식견이고,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12,16 ; "미련한 자는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만 영리한 자는 모욕을 덮어 둔다."
15, 1 ;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괘한 말은 화를 돋운다"
25,11 ;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 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
25,15 ; "끈기는 판관을 설득하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
야고보서는 이같은 믿음에 대한 실천적 권면을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의 잠언'이라 불리워진다.
그 다음, 야고보는 사람이 분노하는 것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대조시키면서 왜 사람이 화내기를 더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분노의 감정 표출을 더디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로움'(디카이오시넨 테우; dikaiosinen theu)이 무엇인가?
① 하느님의 속성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기본 원리인 공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시편 89,15)
②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③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 하느님의 기준인 이웃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분노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한다. 분노하면, 마음의 판단력이 흔들리고 평정심이 무너져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마음의 황폐함이 사탄이 일하는 터를 만들어 줄 뿐 아니라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분노는 옛 사람의 그릇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로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야고보의 이같은 명령의 직접적인 배경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고 저주하는 것을 금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마태5,22).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로 변역된 접속사 '디오'(dio)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의 분노하는 것과본절에 나오는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더러움'으로 번역된 '파산 뤼파리안'(phasan rypharian)에서 '뤼파리안'의 원형 '뤼파리아'(rypharia)는 '불결', '더러움'이란 뜻으로서 때로는 상처의 불결함이나 몸이 땀으로 얼룩지고 오물로 더러워진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문에서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은유적으로 도덕적 더러움을 의미하면서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입으로 나가는 악한 말을 가리키고 있다(에페4,31).
또한 '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 pheriseian kakias)은 마음속에 있는 악이 솟구쳐 올라 밖으로 표출되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안에서 악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기만 하고 새로운 것으로 덧입지 않는다면, 그에게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마음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다'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손함'(온유함)에 해당하는 '프라우테티'(phrauteti)의 어근은 본래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 고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가 약으로 인해 진정된 상태, 갈증이 냉수로 인해 해갈된 상태 등을 말한다(마태5,5).
그런데 공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즉 '마음에 심어진 말씀' 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로곤'은 '로고스'(logos; 말씀; word)의 목적격이며, '마음에 심어진'으로 번역된 '엠퓌톤'(emphiton)의 원형 '엠퓌토스'(emphitos)는 '가르침을 통해 심기워진'이란 뜻으로서 이미 사도들을 통하여 수신자들에게 심기워진 가르침(18절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심겨진 말씀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복음은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로마1,16)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복음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원리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 속의 윤리적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2~25)
야고보는 19~21절에서 말씀을 신중히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서 들은 바를 실행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아마도 야고보는 마태오 복음 7장 15~27절의 산상설교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원리는 로마서 2장 13절의 바오로에게도 나타난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행함으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더러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속이는 자(사람)'으로 번역된 '파랄로기조메노이'(pharalogizomenoi)의 원형 '파랄로기조마이' (pharalogizomai)는 '위반','정도(正道)이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파라'(phara)와 '계산하다'란 뜻의 '로기조마이'(logizomai)가 결합된 동사로 '잘못 세다','잘못된 추론에 의해 기만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들 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듣고도 행하지 않음으로서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데도, 본인은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결국 영혼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야고2,14~26).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분명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주의 깊게 보기는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금방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 버린다. 더군다나 당시 거울은 동(bronze)으로 만들어져서 거기에 비추어지는 물체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깊게 보지만 정확한 모습을 보기 힘들고, 또 보고서 돌아서면 거울로 본 기억마저 희미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발견했지만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이 무효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은 18절의 '진리의 말씀'과 21절의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새겨진 말씀)과 일치한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곧 진리의 말씀인 복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의 거울은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다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27절과 2장 1~13절의 진술로 보아서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의'(자유하게 하는)로 번역된 '엘류테리아'(eluthdria)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통해 주실 자유(갈라5,1),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 임하는 자유(2코린3,17)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원죄 아래 있는 사람을 명백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유를 구가하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26~27)
여기서 '신심이 깊은', '신심'에 해당하는 형용사 '트레스코스'(threskos)와 명사 '트레스케이아'(threskeia)는 '떨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트레오'(treo)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떠는', '신들에 대한 경외', '종교적인'이라는 의미이다(사도26,5; 콜로2,18).
그러나 여기서 앞서 나오는 '트레스코스'는 '종교적인', '신앙심 깊은', '경건한'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뒤에 나오는 '트레스케이아'는 1세기 당시 기도나 금식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종교적 행위들을 가지고 자신이 신심이 깊고 경건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신심깊고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종교적 행위는 헛된 것일수 밖에 없다.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에서 '카타라 카이 아미안토스'(kathara kai amiantos;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는 본래 구약의 제의적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에제22,26),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제물 또는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사제가 지녀야 할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경건)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경건이며, 이 경건의 모습은 먼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것으로 증거된다.
당시 종교, 사회적 배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부양해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해 줄 자를 갖지 못한 가장 비참한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사랑의 실천 대상이 고아와 과부의 두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 등 훨씬 포괄적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세상'(세속)에 해당하는 '코스무'(kosmu)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악된 옛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속 사상, 가치관, 비도덕적 삶, 불경건한 심령 등을 두루 지칭한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거룩'이며 '경건'이다.
또한 '물들지 않도록'으로 번역된 '아스필론'의 원형 '아스필로스'(asphilos)는 부정 불변사 '아'(a)와 '점'(2베드2,13), '티'(에페5,27)로 번역된 '스필로스'(sphilos)의 합성어로서 원래 '흠없는','점없는','비난할 점이 없는' 이란 뜻으로 제의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1베드1,19).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의 뜻, 구원의 약속이 보이십니까?.
(마르 8,22-26)
22ㄱ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 벳사이다- 주님께서 불행하다 말씀하신 지역입니다. 아람어 뱃새이(사냥꾼, 어부)에서 온 말이랍니다.
(마태11,21)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 회개를 못해 불행한 곳입니다. 잘못(죄) 때문이 아닌 회개를 못해 불행한 그곳에 회개. 그 복을 주시려 들어가십니다.
22ㄴ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 주님의 기적, 그 일하심을 죄의 용서로 깨닫지 못한(보지 못한) 눈먼 이입니다.
그리고 그 눈먼 이를 위해 기적의 손으로, 기적의 치유를 청하는 그들 또한 회개해야할 눈먼 이들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가 불행한 곳입니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 귀먹고 말 못하는 이들처럼(7,31) 먼저 분리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보지 못하는 눈에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침, 곧 말씀을 주시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하신 후 하시는 물으심 입니다.“무엇이 보이느냐?‘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말씀은 늘~ 앞에 희망(용서)을 보게 하십니다. 지난 절망(죄)을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히브10,16참조)
그래서 복음(기쁜소식)입니다. 그 희망의 눈으로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제라-씨. 후손) 여자(테무트-그릇)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었을 때 그릇이 씨를 받아 드렸을 때 -사람입니다. 다시, 피조물인 땅- 여자가 하늘의 씨를 받아 드렸을 때~ 사람입니다. 씨, 후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눈먼 이가 아직 그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해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무는 하느님의 구원의 계명, 계약을 뜻합니다.(탈출15,25) 계약(스타오로스)- 기둥(나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십자나무)으로 존재한다는 그 깨달음의 눈을 아직 갖지 못한 눈먼이입니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 기적의 손, 그 창조의 손을 얹으시니, 곧 보지 못하는 그 잘못을 덮으시니 똑똑히 볼 수 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약(나무)을 그 어렴풋이 아닌 구원의 약속, 계약(스타오로스-십자나무)을 진리로 똑똑히 보는 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 주님의 말씀을 인간의 뜻, 그 길로 말하는 마을(공동체) 그 불행한 곳, 악한 곳으로 들어 가지 마라 하십니다. 그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시편1,1-2)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되새기는, 기억하는 것 착한일, 정결한 올바른 기도입니다.(레위11,3참조)
(마태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찾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오늘 벳사이다의 말씀은 어부(벳새이)인 제자들에게 회개해야할 눈먼 이임을 깨달으라고, 보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뜻을 위해 말하고 듣고 기도하는 공동체-불행입니다.
주님, 당신의 침(말씀)을 원합니다. 오늘 땅인 여자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지소서~~!
그러면 우주 만물과 내 삶 속에서 또한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보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로마1,20참조)
그러면 내 삶이 희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 아멘 -*^ㅇ^*-
2022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지금 살아있음은 내일의 생명(구원)을 위한 소중한 기회(機會).
독서(야고1,19-27)
19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20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은 빨리 듣고, 사람의 말과 분노는 더디 하라.’는 말씀인데.... 곧 하느님의 뜻, 지혜, 계명을 사람의 뜻, 지혜, 계명으로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티토1,14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의 의(義), 거룩, 자유, 희망, 평화, 생명, 안식을 주는 선(善)이지만, 인간의 의(義)를 위한 도덕과 윤리의 인간의 말은 속박과 판단, 두려움으로 분노(忿怒)하게하는 악(惡)이기 때문이다.
(로마3,19)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제사, 윤리)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코린2,5)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 공손(恭遜)히(플라테우스)-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단어. 하느님의 말씀으로 죄인(짐승)인 자신을 구원의 길로 길들이라는 것이다.
사도(使徒) 바오로의 옥중(獄中) 서간(書柬)을 보자~
(2티모1,8)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福音), 곧 하늘의 선(善), 그 복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로마1,16)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1,18)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 실행? 행위 이전에 말씀 안에 하느님의 선(善), 지혜(智慧), 힘을 믿는 그 실천(實踐)을 먼저 해야 한다. 그 깨달음 없는 실행(實行)은 하느님의 뜻을 잊은, 곧 구원과 상관없는 자기 의로움의 실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6,33) 33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하느님의 의로움은 세상의 모든 죄(罪)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하늘의 의로움을 죄인(罪人)인 우리가 전가(傳家)받아 거저 의롭게 된다. 그 시쁜 소식, 새 계약의 복음을 깨달아 믿는다면 핍박(逼迫)을 각오하고 반드시 이웃에게 전(傳)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시간, 돈, 마음)을 내놓아야 합니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 당시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으로 확실히 볼 수 없었기에 돌아서면 곧 잊어버린다. 그것은 말씀을 비유(比喩)한 것이다. 곧 말씀에 비추어보면 자신의 짐승(죄인)됨을 깨닫고 잊지 않아 용서(容恕)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그 실행(實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회개(悔改)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말씀은 심판(審判)의 법이 아닌 완전(完全)한 자유(自由)를 주는 법(法)이다. 그러니 그 기쁜 소식, 복음(福音)을 어찌 자신만 간직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먼저, 자신이 그 복음 안에 머무는 실행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복음으로 자유, 기쁨을 체감(體感)해야 하느님의 자유, 기쁨을 주는 그 올바른 복음을 선포(宣布), 실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과 함께 하느님의 자유로 서로 행복(幸福)해 진다. 곧 큰 계명의 실천인 ‘이웃 사랑’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26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 제 혀, 자신의 말을 하지 말아야 ,곧 인간의 뜻을 위한 인간의 지혜인 도덕과 윤리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지혜(智慧)인 하늘의 대속(代贖), 그 구원의 말씀을 진리(眞理)로 말할 수 있고, 그 진리를 전(傳)하는 것이 올바른 신심(信心)이다. 그 진리의 말씀과 하나 되지 못한 것이 고아(孤兒), 과부(寡婦)인 것이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 이웃 사랑이다. 사도는 하느님을 주는 이웃사랑을 강조(强調)하고 있다. 세상의 재물(財物), 명예(名譽), 말(법)과 짝하여 하느님의 뜻(말씀)과 짝하지 못한, 그래서 구원의 하느님을 아버지(남편)로 짝하지 못한 그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들에게 하느님을 짝으로 알려주어 살리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自身)이 세상(世上)과 짝하지 말라는 것이다. 곧 자신의 뜻(소원)을 위해 기도(祈禱)하지 말라는 것이다.
(1베드4,2) 2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 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1요한2,17)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생명(生命)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 실천(實踐)....
(1데살5,16-18)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 온갖 시련(試鍊), 풍랑(風浪)인 이 세상 삶에서 어떻게, 언제나 기뻐하며 감사(感謝)할 수 있을까? -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하늘을 희망(希望)하는 이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땅)에는 영생(永生)을 주는 희망(希望)이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記憶)하는 기도(祈禱)로 그 말씀이 주시는 희망(希望)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히브6,16-19)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지성소, 하늘)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아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지금(땅)의 삶이 내일(하늘)의 삶을 살기 위한 귀하고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나이다. 땅에 숨겨진 하늘을 깨달아 자유, 기쁨의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살 수 있도록 말씀 안에 머물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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