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7. 15;04
늘 같은 시간 당구장에서 나와 검단산행
전철 8호칸 앞에 선다.
전철 안에 빈자리가 많으면 가급적 제일
가장자리에 앉는다.
좌든 우든 한쪽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타는 5호선 전철은 8량 짜리라
맨 뒤쪽인 8호칸을 선호한다.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에서 제일 가까운
부근이고,
유사시 대피하기가 용이하며 비교적 덜
붐비는 칸이기에 주로 이용하는 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적
으로 행한다.
같은 시각, 전철의 같은 칸에 타면 누군지
알지는 못하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아침 8시에 출발 약 20분 정도 걸어서
알바 사무실에 갈 때도 수년째 같은 사람
들과 마주친다.
뒤꿈치를 살짝 들고 걷는 귀여운 아주머니,
휴대폰을 보면서 팔자걸음을 걷는 젊은
여성,
머리를 마는 롤 플라스틱을 달고 다니는
여중생,
아들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미인
아주머니,
오른손에 전자담배를 들고 다니는 남성,
종이박스를 리어커에 가득 싣고 가는
할아버지가 매일 마주치는 보통 사람
들이다.
묘하게도
집에서 미역국을 먹고 나왔으면
점심에 들린 식당에도 미역국이 나오고,
북엇국을 먹고 나온 날이면 어김없이
북엇국이 나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렇듯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도
사람들의 행동 패턴(pattern)이나 식생활
패턴은 비슷비슷하다.
오늘도 늘 같은 시간인 오후 3시 4분
강동역에서 출발하는 5호선 전철 8호칸에
올랐다.
예정시간보다 4분 늦게 도착한 전철에는
승객들이 많아 8-2에 서서 창밖을 바라
보는데 누군가 내 어깨에 둘러멘 크로스
백을 강하게 밀며 지나간다.
현역시절에는 가방이 필요 없었지만
백수가 된 후 스트랩 백이나 크로스 백은
필수가 되었다.
가방 안에는 치약과 칫솔, 안구건조증에
대비한 인공눈물약과 모자, 선글라스,
장갑, 머리빗, 볼펜, 예비용 마스크, 물티슈,
핫팩 1개, 핸드크림, 초콜릿 사탕 2개가
들어 있다.
일본 사람들은 등뒤로 가방을 메면 민폐를
끼칠 수 있다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가슴 쪽으로 가방을 멘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내가 혹시라도 민폐를 끼쳤을까 옆구리로
가방위치를 바꿨는데도 또다시 몸을
건드리며 지나가더니 1~2분 후 또 와서
부딪친다.
세 번씩이나 부딪치며 지나가는 여성에게
짜증이 나서 화를 참지 못하고 한자리에
가만히 서있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여자는 나의 화난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상일역에 내릴 때까지 동일한
행동을 반복한다.
이 시간대 8호칸에 타고 승객이 많던 적든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앞과 뒤를 왔다
갔다 하기에 여러 사람에게 눈총을 받는
'지적 장애인'인데 오늘도 탔다.
그러고 보니 거의 매일 보이던 '틱 장애인'
청년은 보이지 않고, 오늘은 지적장애 여성
혼자 여러사람에게 불편을 끼친다.
내가 조금 참던지 다른 칸으로 이동했으면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여성 장애인의 이상한 행동만 주목을 하며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냈으니 나야말로
전형적인 노인지반(老人之反)이 아닌가.
2년 전에는 다섯 이상을 세지 못할 정도로
지적장애가 심한 21살 아가씨와 사무실
한 공간에서 조심을 하며 1년을 무사하게
지냈다.
원래 고상한 척은 못하는 성격이라도 이
정도 나이가 되었다면 오늘 같은 상황
에서는 참고 또 참았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自愧感)이 든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수선한 세상사에
힘들고 지친 날이 계속되어도 가방 속에 든
핫팩이나 초콜릿 사탕으로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면 기분이 나아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참지 못한 화(火)로 잠시지만
성악설(性惡說)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말이다.
원래 '힘들고,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거'는
남자의 몫이요,
'기다리고, 이해하고, 참기'가 내 삶의 기본이
아니었던가.
소싯적 한 반에 학생들이 60명이 넘어
빽빽했던 콩나물 교실,
물지게를 짊어지고 금호동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던 달동네 자취방,
제때 연탄을 갈지 않으면 불이 꺼져 불
붙이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고,
수년간 반찬 없는 맨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절약과 인내심을 길렀고,
여차장이 온몸으로 승객의 몸을 밀어 넣던
51번 제일여객 만원 버스에서 시달리면서
온몸이 흥건하게 젖어들었던 시절도
있었고,
최전방 군대 생활 3년 동안 배우고 익숙
해졌던 인내심이 선진국 소리를 들어가며
배불리 먹는 세상이 되다 보니 그 인내심은
어느 날 모조리 사라진 모양이다.
온갖 애환을 안고 살아왔던 소소한 삶,
나의 소중했던 일상의 역사가 혼탁한 세상
에서 방황하며 점점 타락해간다.
추위가 없어 냉각량(冷却量)이 부족하다면
이 땅에 꽃이 보이지 않을 거고,
맑은 날만 이어진다면 꽃과 나무가 사라져
사막과 같은 삭막한 세상이 되는 게 대자연의
섭리이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고상한 척 하는 게
아니라 영혼이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야 마음에 여유가 생겨 어둠 속에서
별을 볼 수가 있고 소나기가 그친 후
아름다운 무지개도 볼 수가 있다.
내가 조금만 참던지, 다음 차인 3시 17분
차를 타던지 아니면 8호칸 대신 1호칸에
탔더라면 동일한 패턴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영혼이 될 텐데,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똑같은 전철에서
지박령(地縛靈)의 흉내를 내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2025. 3. 7.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