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가인에게한 질문이다. 그러자 가인이 대답한다. ‘모릅니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창세기 등장하는 하나님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향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순히 혈육관계의 형제를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이웃이 어디에 있냐는, 특별히 성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았을 때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웃은 어디에 있냐는 질문이다.
본인은 이 질문 앞에 오랜 기간 특정한 대상들을 떠올렸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 참사 유가족,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자, 전쟁난민 등 누구나 보편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 질문에 고민하거나 약자들을 떠올릴 때를 제외하면, 이들이 내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었다. 사실, 본인은 조금은 과감하게?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많았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간 다양한 집회나 예배에 참석해 참사 유가족들을 만나기도 했고, 현장에 들어가 그들의 삶을 함께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제외하면, 일상에서 이들을 향한 관심은 크게 없었다. 정직하게 나의 시간 혹은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면, 형제가 어디있냐는 질문 앞에 나는 당당하게 일상에서 내 형제들을 보살피고 챙긴다는 말을 쉽게 고백하기 어려웠다. 왜 그런가 떠올려보면, 그들의 나의 삶과는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지 않았다. 즉, 내가 지속적으로 만나는 이들이 아니다. 집회나 예배처럼 일회성으로 만날 때가 있지만, 그 외에는 서로 무관심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니 그들과의 만남 혹은 만남 직후를 제외하고는 크게 관심갖기 어렵다. 그보다는 내 일상이 중심이었고, 내가 마음이 더 끌리는 관계에 치중된 삶을 살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질문하시는 ‘네 형제는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먼저 우리가 만나는 이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일상에서 자주 만나는 생명들이 가인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악과를 따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것이다. 내 주변의 형제들부터 보살펴야 한다. 최근, 평화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은 적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떠올리지만, 그렇게 된다면 전세계가 핵무장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평화도 관념화되어 거대담론으로만 이야기된다면 그것은 우리 삶에 큰 괴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평화도 일상에서 출발해야 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주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은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약자들만 섬기려 하면 필히 일상의 괴리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웃사랑도 내 주변 관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주변의 생명들부터 바로 세우며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내 주변인들에게 진실하게 관심 없으면서, 나와 직접적인 관계 없는 이들에게만 관심있다면, 그들과도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관용 혹은 존중이라는 명목 아래 무관심을 감추고 있는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