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글은
2016년 5월 16일 포스팅하였습니다.
뭔가를 추억할 것이 있는 인생은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소중한 인생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풍요한 삶은 어제의 결실이요,
성실한 오늘 하루의 씨앗은 내일의 열매로 영글 것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빛나는 인생은
그 손이 수고한 눈물의 보람일 것입니다.
맑은 날 보다 비 오는 날이 더 좋은 사람은
햇볕이 주지 못한 비오는 날의 사연을 가진 인생일 것입니다.
햇볕이 좋지만 비 오는 날의 서정은
그 만큼 땅을 기름지게 하며 새 싹이 돋고 자라 꽃피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흙의 서정은 비오는 날의 정서요,
모든 식물이 땅을 딛고 아름답게 자라나는 친환경 서정의 생태 환경입니다.
뭔가를 추억할 수 있는 인생은
흙의 서정으로 비 오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도심을 훌쩍 떠나 야외로 나가는 사람은
친환경 서정의 녹향과 푸른 나무가 마음의 향기로 그윽하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향토적 서정과 목가적 정서는
흙 길 따라 솔향 가득한 싱그러운 산책길을 호흡하게 합니다.
엽록의 초록향 그윽한 산자락은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청조의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창조의 서정 그리운 날의 행복은
빗방울 머금은 꽃잎과 나뭇잎을 싱그러운 생명의 호흡으로 느끼는 탄성일 것입니다.
문득 그윽한 향기를 따라 시선이 멈춘 곳은
백합과의 꽃인 주황색의 산나리꽃이었습니다.
지난 해는 싹대만 자라더니
드디어 올해는 주황빛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산나리꽃의 향기로 느끼는 산야초 산행의 추억이
주황빛 물결을 이루며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산나리꽃 향기에 묻어난 강렬한 삶의 추억은
벼랑 끝 낭뜨러지의 푸른 물결이었습니다.
지난 날 강원도 산촌의 안 목사님을 찾아 강원도 산악을 누비며
산야초 산행의 풍성한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산약초 산행의 달인인 안 목사님을 따라 백두대간을 주름잡으며 발품 팔아 거친 산행으로
산의 높이와 깊이를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열었습니다.
사진으로 출사의 여행을 다니며 산천을 주유하였지만
심마니의 산야초 산행은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이었습니다.
어떤 산이든 발을 들여 놓으면 산의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마침내 산마루 정상에 올라 인생의 정상을 향한 도전을 끝없이 반복하였습니다.
낯선 강원도 산악을 홀로 헤쳐 나갔던 몸에 밴 거친 흔적은
마음의 희망이 되어 주황빛 고운 베란다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베란다에 가득한 짙은 향기는
어느 이름 모를 강원도 산의 야생 산나리꽃이었습니다.
산행으로 만난 아름다운 꽃은 마음의 소원을 따라 베란다의 꽃이 되어
그 험한 산행의 흔적을 보람의 꽃으로 다시 피었습니다.
산나리꽃과 함께 베란다를 푸르게 수 놓은 하수오 줄기는
산야초 산행의 희망, 그 자체였습다.
비교적 가치가 높은 하수오 줄기를 찾는 발품은
베란다의 희망으로 가득 수 놓았습니다.
방안 가득 한쪽 벽을 차지만 담근주와 효소는
여전히 삶의 추억이 묻어난 표적으로 생생하기만 합니다.
산도라지와 더덕과 하수오와 잔대와 삽주와 지치와 연삼과 진삼과 야생 산삼으로 가득한 담근주는
세월을 묵히는 추억의 자락으로 그리움과 희망이 되었습니다.
산야초 산행의 달인인 안 목사님이 우하면 좌하였던 거친 산행은
산의 보물을 찾는 행복한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 산마루 정상을 향하여 길을 만들어 갔던 산행의 흔적은
오직 나만의 소중한 삶의 자산이 되었습니다.
산마루 정상에서 로프를 이용한 절벽에 가까운 험한 하산 길은
산야초를 채취하는 보람을 넘어서 크나 큰 인생의 도전과 모험을 즐긴 최고의 산악 레포츠였습니다.
길 없는 길을 뚫어 만들어 갔던 역동적인 산행의 흔적은
야생 벌과 뱀과 낙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강한 삶의 저력이 되어
오늘은 말씀 충만의 고지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을 넉넉히 채우고 있습니다.
베란다에 피어난 강원도의 산야초는
강원도의 산악을 종횡무진 발품 팔았던 인생의 추억이 보람의 꽃이 되었습니다.
정중동의 경지, 그 고요한 자아는
여전히 산마루 정상을 향한 힘찬 도약으로 끝없는 등정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삶의 일상이 된 일천고지 운동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투지와 집념으로 몸의 스피드가 되었습니다.
한 번에 천 회를 되풀이 하는 끝없는 운동은
일천고지 운동으로 쌍절지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온 누리에 빛이 비취고 흑암이 대지를 삼키듯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을 온 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누구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은 꿈에서 조우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은 무협의 전사가 되어 어둠의 전령으로 전설의 무협지를 완성합니다.
나의 가장 무서운 무기는
쌍절신공을 응용한 전동 철퇴입니다.
지난 날 산야초 산행을 하면서 야생의 온갖 위험에서 몸을 보호하고 길 없는 길을 만들었던
전동 톱날로 만든 철퇴로 야생을 평정하였고 그것은 몸에 밴 무협으로 나만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악을 향한 전사의 분노는
종말론적인 철장의 권세를 가진 성도의 길이요, 사명이요, 또한 비전입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계2:26-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2:7-9)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계12:5)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계19:14-16)
종말론적인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은 복음의 전사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셩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엡6:10-17)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을 가진 주의 성도는
성령의 검 곧 ,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또한 세상의 악을 주와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하며 천체를 움직이고
사무엘처럼 하늘에서 우뢰와 우박이 내리게 하며
엘리야처럼 입에서 불이 나와 악한 자를 사르고
엘리사처럼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가지는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연약하고 무력한 이름뿐인 성도가 아닌 하늘의 권세를 가진 강한 성도의 길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