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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예리코에 출현한 주님 군대의 장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예리코 정복을 앞두었던 시기, 여호수아기에는 독특하고 신비스러운 일화 하나가 소개됩니다. “주님 군대의 장수”라는 존재가 칼을 들고 등장하여 여호수아에게 ‘그가 있는 곳은 거룩하니 신을 벗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가까이 있을 때,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빼 들고 자기 앞에 서 있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적의 편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아니다. 나는 지금 주님 군대의 장수로서 왔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물었다. “나리, 이 종에게 무슨 분부를 내리시렵니까?” 주님 군대의 장수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네가 서 있는 자리는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여호수아는 그대로 하였다(여호 5,13-15).
당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의 첫 걸음을 떼려던 참이라 이 장수의 출현은 의미심장합니다. 그가 한 말이 호렙산의 떨기나무에서 나타난 주님의 천사가 했던 말(탈출 3,1-2.5)과 비슷해 더욱 그렇습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주님 군대의 장수’는 누구이고, 어떤 임무로 등장한 것일까요?
우선, 그의 출현은 탈출 33,2에 나오는 하느님의 약속과 관계 있어 보입니다: “나는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가나안족,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몰아내겠다.” 다시 말해,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이끌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수는 주님께서 예고하신 천사이며, 그의 등장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된 셈입니다. 그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한 것은 장차 예리코가 ‘주님께 성별될 곳’(여호 6,19)이기 때문인 듯합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주님 군대의 장수’는 하늘 군대에 속한 장수로서, ‘만군의 주님’이라는 하느님의 호칭과 관련된 존재입니다. ‘만군의 주님’은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뜻하며, 동시에 군대를 거느린 용사이심을 암시합니다. “전쟁의 용사”이신 하느님의 이미지는 탈출 15,3; 시편 24,8; 이사 1,24 등에 나옵니다. 이 호칭의 유래는 이렇게 추정됩니다. 천지창조가 마무리되었음을 알리는 창세 2,1의 “모든 것”은 히브리어로 [짜바]입니다. 그런데 ‘만군의 주님’이라고 할 때, “만군”은 [짜바]의 복수형인 [쯔바옷]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 단어가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호칭에 담겨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103,21-22에도 “주님의 모든 군대들”과 “주님의 모든 조물들”이 대구(對句)가 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나라를 세운 뒤 처음으로 패망을 맞은 곳도 예리코입니다.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함락당한 뒤,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가 “예리코 들판에서” 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2열왕 25,5-6). 예리코에서 일어난 이러한 역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도 죄를 지으면 그 죗값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오히려 주님께 많이 받았기에 그만큼 청구 받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묵시사회를 살아가는 신앙인] 아프고 기쁜 신앙(묵시 6,9-17)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애절하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들의 증언 탓에 그들은 죽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순교자로 해석하고 칭송한다. 살해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제단 아래’다. 살해된 이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화해하려 죽이고 불태웠던 성전의 동물을 대체한다. 하여 살해된 이들의 죽음은 묵시 5장에 나타나는 어린양 예수의 죽음과 닮았다.(살해되다, 라는 뜻의 동사 ‘스파조’를 같이 사용한다.) 예수의 뒤를 잇는 수많은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피흘림으로 예수와 하나가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살해된 이들의 영혼’에 대한 해석을 마무리한다. 그들의 값진 희생이 예수의 대속과 닮았다고, 그들의 숭고한 희생에 우리는 동참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은 순교의 자리에서 더욱 퍼져나가고 신앙은 순교의 피로 더욱 단단해지고 뜨거워지며 순교의 자리가 하느님의 현존과 하나되는 성전의 자리라고.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다섯 번째 봉인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절박하다.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는 그 시간에 절박하고 자신들이 흘린 피의 대가에 절박하다. 제단 아래에서 살해된 이들의 영혼은 울부짖는다. 죽었어도 죽지 않아야 할 외침이 있다.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내뱉는 그 외침을 따라가자면 그 끝에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이 계신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그들의 순교와 그 순교를 향한 칭송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주님께 아직 목마르다. 주님을 애절하게 찾고 있다.(에녹 47,1.4 참조) 그 애절함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그들에겐 희고 긴 겉옷이 주어진다. 천상의 영광과 기쁨, 혹은 승리를 가리키는 흰 겉옷. 주석서들을 살펴보면 살해된 이들의 외침에 대한 종말론적 보상으로 흰 겉옷을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보상받았는가. 그들이 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울부짖음 밖에 없었고 그들은 여전히 울부짖고 있다. 영광과 기쁨, 그리고 승리는 기뻐 환호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지금 울고 있는 이들의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좋은 것’, ‘행복한 것’,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우리에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입고 있는 흰 겉옷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다. 더우기 울부짖는 그 간절한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죽어가야 할 형제들을 위하여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묵시 6,11) 하느님의 개입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고 그분의 정의는 아직 이루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 그 결과 아직 죽어가야 할 순교자들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 하여, 흰 겉옷을 두고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겪은 희생에 대한 영광스러운 하느님의 보상으로 해석한 채 더이상 질문하지 않는 주석서들의 가벼움을 우리는 넘어서야 한다. 어쩌면 요한 묵시록의 가치는 우리 신앙이 마침내 다다라야만 하는 ‘관습적’ 목적을 다시 상상하는 데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증거하는 일이 고통이고 아픔이라서 그 끝을 알 수 없어 답답할 때, 그 순간 우리 신앙이 추구하는 영광과 기쁨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영광과 기쁨이 요한 묵시록의 흰 겉옷의 질감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얼마간 추정할 수 있다. 12절부터 14절까지 창세기에 서술된 창조의 질서가 역순으로 사라진다. 지금껏 당연시 여겼던 질서가 무너지고 떨어지고 사라진다. 더이상 우리 눈에 익숙해서 당연하거나 그래서 자연스러운 것들은 없다. 기존의 인간 계급을 일곱 개의 범주로 요약한 15절은 그야말로 사라짐의 백미다. 권력이 있건 없건, 돈이 있건 없건, 모든 인간 계급은 동굴과 산과 바위 속에, 혼돈 속에 묻히길 원한다.(이사 2,10.19 참조) 이 원의는 하느님의 진노를 피해 달아나는 이들의 외침이다.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던 순교자들의 외침과 전혀 다른 성질의 울부짖음이다. 계급화된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을 피하고 싶다.
찬찬히 인간들의 외침을 추론해 보자. 사실,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리면서 사라진 창조의 질서는 사라져서는 안되는 하느님의 작품이었다. 하느님께서 창조한 이 우주는 각자가 ‘제 종류대로’ 서로의 자리와 서로의 다름에 대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시스템’이었다.(‘시스템’이란 말마디는 그리스말 전치사 ‘쉰.(함께)’과 동사 ‘히스테미.(서 있다)'가 합성된 말마디다. '함께 존재하는 것’이 시스템이다.) 그것을 보고 하느님은 ‘좋으셨다.’(창세 1,25 참조) 그러나 본디 인간은 기어이 하느님‘처럼’ 지혜롭고 훌륭하고 거룩하게 되고 싶은 피조물이다.(창세 3,8 참조) 인간은 경쟁했고 ‘일등’을 원하고 그 ‘일등’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창세 11 참조)
문제는 그 ‘하나’에 모든 인간이 하나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다투고 인간은 서로를 죽인다는 것. 살아남은 인간들만이 누리는 ‘성공’과 ‘행복’과 ‘기쁨’은 누군가의 희생과 눈물이 뒤섞인 절반의 슬픔이다. 인간들은 제 계급과 제 권력과 제 재산의 사라짐을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어떻게 해서 얻은 것들인데, 그냥 없는 것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으로 만들 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면하지 못하고 피한다. 구원의 하느님을 분노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인간들은 기어이 제 욕망을 이렇게 토해내고 만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얼굴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숨겨 다오!”(묵시 6,16) 이를테면, 나는 너와 달라야 하고, 내 능력으로 일군 것에 다른 이가 함께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그래서 나는 함께 서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 ‘시스템’은 경쟁과 차별에 익숙한 인간들에겐 순진한 루저(loser)들의 변명으로 들릴 뿐이리라.
하느님이 ‘분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두고 주석학자들은 구약의 몇몇 구절들을 언급하며 하느님의 종말론적 개입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예컨대 요엘 2,11. “주님께서 당신 군대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신다. 정녕 그분의 군대는 많기도 하고 그분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는 막강하기도 하구나! 정녕 주님의 날은 큰 날 너무도 무서운 날 누가 그날을 견디어 내랴?” 하느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시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힘을 가지신 분이시라 세상의 어떤 것도 맞서지 못하는 절대 군주로서 마지막 시간에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하느님의 절대적 주도권을 강조한 나머지 왜 하느님이 그렇게 등장하셔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소홀히 다루는 경향이 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이기심과 절대 권력을 향한 욕망과 경쟁을 통한 성공의 갈증이 없었더라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권리, 곧 피조물을 일구고 돌보는 권리(창세 2,15)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에덴동산을 나와 바벨탑 같은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종말에 맞이할 절대 군주의 하느님은 등장할 이유가 없었다.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찾았고 인간들의 외침은 하느님을 거부했다. 순교자들의 울부짖음은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했고 인간들의 외침은 제 욕망을 방해하는 하느님을 분노와 저주의 주인공으로 해석한다. 갈라진 두 외침의 갈등을 아우를 수 있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흰 겉옷’을 입는 자격이 아닐까. 인간들은 묻는다.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묵시 6,17)고. 흰 겉옷을 입을 사람들은 이 질문을 다르게 상상해야 한다. “누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은 거냐?”고. 하느님을 만나는 건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영웅적 증언이나 희생이 아니라 제 삶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그 내려놓음이 슬프고 아픈 것인지 먼저 묻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추구하는 것들이 기쁨이 될 때, 다시 한번 우리는 그 기쁨의 실체를 흰 겉옷을 입고 다시 물어야 한다. 왜 기쁜지, 정말 기쁜 일인지…, 그 기쁨을 나 자신이 누리는 게 과연 정당한지,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과연 간절히 필요한 것인지. 이 질문의 답에 머뭇거릴 때, 우리의 기쁨은 슬픈 것이고 아픈 것이다. 그러나 그 머뭇거림으로부터 우리 신앙의 영광과 기쁨은 시작하리라. 여전히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그분의 정의에 간절한 흰 겉옷의 주인공이 슬프고 아프면서도 기쁘고 영광스러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의 기쁨을 전부로 여기는 인식의 덫에서 벗어날 때, 신앙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할 것을 찾아나서는 끝없는 항해와 같다. 늘 목마른 것이 신앙이다. 진정한 기쁨과 영광은 딱 한걸음 앞서 우리를 채근한다. 신앙은 그래서 늘 설레지만 애절한 것이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89)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예수 그리스도,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세운 대사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히브리서)은 신약 성경 정경에 포함된 다른 서간들과 달리 보낸 이, 곧 글쓴이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 정경 작업이 시작되던 2세기 때부터 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히브리서를 의심 없이 바오로 사도가 쓴 서간으로 여겼습니다. 교부들은 “우리의 형제 티모테오”(13,23)를 근거로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실제로 바오로 사도를 히브리서의 저자로 볼만한 근거는 서간 여기저기서 발견됩니다. 무엇보다 서간의 마지막 인사와 경고(13,16-15) 내용이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과 흡사합니다. 또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에서 히브리서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과 여러 일치점을 보여줍니다.
예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히브 1,1-4; 1코린 8,6),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죽음으로 낮추어졌다가 하느님 오른편으로 들어 올려졌다(히브 2,9; 로마 8,3.34; 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옛 질서를 폐기하고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다(히브 7,19; 8,6-13; 2코린 3,1-18)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서방 교회에서는 히브리서를 바오로 사도가 쓰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그 근거는 이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른 서간과 달리 히브리서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없다는 점. 바오로 사도가 즐겨 사용한 “그리스도 예수님”,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평화”란 표현이 히브리서에는 없다는 점. 구약 성경 인용 때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또는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고 했는데, 히브리서는 “성경”이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한 점.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대사제’라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구원을 설명할 때 믿음보다 경신례와 관련된 용어를 자주 사용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직접 복음을 받았다고 주장하지만(갈라 1,12),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을 들은 이들이 자신에게 확증해 주었다”(2,3)고 말해 차이를 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들 중 한 명이 히브리서를 썼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어떤 이는 레위 출신의 바르나바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다계 그리스도인인 아폴로라고도 합니다. 또 교리에 정통했던 프리스카와 아퀼라 부부라고도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가끔 자신을 ‘우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불분명하지만 받은 이는 당연히 히브리인들, 곧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히브리서에는 구약 성경을 인용하거나 구약성경 속 이스라엘에 비유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초대 교회를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로, 새 계약과 옛 계약, 레위인의 대사제직을 그리스도의 대사제직과 비유합니다. 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모세의 율법이 규정한 희생 제사 틀 안에서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성경학자들은 초대 교회에 유다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이 단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교회였다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서는 대략 60~90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서간에 언급된 티모테오가 감옥에서 풀려나 선교 여행을 하던 시기라면 1세기 후반이기 때문입니다. 또 로마의 클레멘스가 95년께 히브리서를 사용했기에 이보다 더 늦게 집필 시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ροs Εβραιουs’(프로스 에브라이우스),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d Hebraeos’, 한국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라 표기합니다.
히브리서는 총 13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1,1-4,13)·그리스도의 사제직(4,14-10,18)·그리스도인의 삶(10,19-13,25)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계시가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로 완성된 영원한 구원의 약속은 천사들이 선포한 말씀을 능가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 신임받은 사제이시며(3,1-6) 모든 사람과 굳게 결속된 자비로우신 사제이십니다.(4,14-5,10) 그분께서는 아론의 사제직을 이어받으셨지만(5,4-5) 그분의 사제직은 아론의 것을 뛰어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은 구약의 모든 제사를 대체하는 유일한 ‘참 제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천상 사제가 되시고(9,24) 죄를 없애는 정화를 실현하셨으며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세우셨습니다.(9,15; 13,20)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로,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아드님을 통해 인류에게 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셨습니다.(2,10)
그리스도인은 ‘단 한 번’(7,27; 9,12;10,10) 봉헌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4,3)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보기로 삼아 형제들을 돌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찬양 제물”(13,15)로 삼아 지속해서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고서, 또 형제들과 하나 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다다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39)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38) '하느님 - 엘리야 - 백성 이어준 다리' 엘리사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천혜의 방어망 라인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라인강은 강폭이 넓고 회오리치는 곳이 많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적지이다. 히틀러는 라인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중부 라인강변에 도착한 미군 일부는 아침 안개가 걷히고 포연이 사라진 뒤 기적을 목격했다. 라인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을 잇는 철교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에서만 폭발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특공대는 다리 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한발씩 전진해 1945년 3월 7일 다리를 접수했다,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셈이다. 연합군은 라인강 너머로 교두보를 마련했고 대공포대를 설치했다.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독일의 전략요충지로 계속 병력과 탱크와 물자를 수송했다. 히틀러는 크게 화를 내며 지휘한 장교들을 처형했고, 독일군은 여러 번의 공습과 심지어 실험 중이던 V2로켓까지 10발 이상 발사했지만 다리를 폭파시키지 못했다.
열흘 정도 지나 다리 중간이 무너졌지만 이미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는 연합군 심리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마겐의 철교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와 전쟁에서 다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레마겐 철교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예언자도 결국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이어주고 백성들에게 예언을 전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엘리사가 처음 예언자로 활동할 때는 아합의 통치 말년이었다.(1열왕 19,1-17)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와 같이 기적으로 유명하다. 엘리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 스승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야의 옷을 집어 들고 내리쳐 요르단강물을 갈라친 것이었다.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을 다시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엘리사를 그들의 지도자와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섬겼다.
대부분의 기적 설화들은 깊은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지닌 예언자 그룹과 목격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엘리사는 기적 설화들이 쌓여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기적은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고친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엘리사의 기적은 중단되지 않았다. 죽은 엘리사의 몸에 닿은 다른 주검이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탁월하고, 동정심 많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엘리사의 인간성이 예언자 그룹의 제자들 기억에 깊이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준 영향력에 대한 진정성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우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았다. 그가 행한 무수한 기적들도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평생을 스승과 제자단, 그리고 백성들을 이어주는 평화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했다.
[성경 속 기도 이야기] (10) 자기 착각에 빠진 요나의 기도(요나 2,3-10)
용서 청하며 타인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예언자 요나는 적국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명을 피해 달아나다 폭풍을 만나고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그는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니느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서 벌을 거두신 것을 보고 죽고 싶다고 떼를 씁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드린 기도는 사실을 왜곡하는 기도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폭풍이 일자 이방인 뱃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지만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는 기도하라는 선장의 요구를 받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로 집어 던지기 전에 주님(야훼)께서 폭풍을 일으키신 것을 알고 그분께 자신들이 하는 일에 용서를 청합니다.(1,14) 하지만 요나는 사흘 밤낮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1) 더구나 그의 기도는 왜곡된 사실로 그득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2,3)라고 하지만 그는 사실 ‘배 밑창에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1,5) 요나는 ‘당신께서 바닷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셨다’(2,4)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를 던진 이들은 뱃사람들이었고(1,15) 그것은 요나가 자신의 사명을 피해 도망친 결과였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2,5)이라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주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1,3)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2,9)라고 하지만 이방인 뱃사람들은 자신들을 불행에 빠뜨린 요나를 구하려 끝까지 애썼고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주님(야훼)의 용서를 구하며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1,13-16)
하느님이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 때문에 요나는 다시 기도합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면,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1-8)
요나는 적에 대한 미움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하느님이 자신의 적을 용서하신 사실을 자기 죽음으로 부정하려 합니다. 우리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이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바람과 달리 잘 되고 하느님의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왜곡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삐뚤게 이해하는 위선자의 전형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거듭 지적하십니다.(이사 1,15;29,13; 마르 7,6-7; 예레 7,9-10; 호세 6,1-3;8,1-2; 미카 3,3-4; 스바 1,5-6; 즈카 11,5; 마르 12,40; 마태 6,5-7) 내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사실을 왜곡하는 위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은총을 얻으리라 희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나의 거짓된 기도를 들으시고도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고(2,11) 죽고 싶다는 요나를 타이르시고 그에게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이 요나와 니네베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나 자신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휩 오스터하위스, 네덜란드 시인)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키드론 골짜기
오늘 제1독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 셋째 노래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알기에 얼굴을 차돌처럼 만들고’ 의연히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하신 뒤, 예루살렘 동쪽에 자리한 키드론 골짜기를 따라 겟세마니로 가셨다가 대사제의 무리에게 체포됩니다. 체포되신 뒤에는 다시 키드론 골짜기를 거쳐 대사제의 관저로 끌려가십니다. 그래서 키드론 골짜기는 예수님의 자취가 적어도 두 번은 남은 곳입니다. 당시 대사제의 관저로 추정되는 장소는 현재 ‘갈리칸투’라 칭해지는 성지인데요, 그 이름은 ‘닭이 울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불을 쬐며 사태를 지켜보던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던 장소임을 알려주는 지명입니다. 갈리칸투에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고 예수님도 밟으셨을 돌 계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키드론 골짜기는 요엘 예언서에 나오는 “여호사팟 골짜기”과 같은 곳으로 추정됩니다. 여호사팟 골짜기는 요엘 4,2에서 주님 심판의 장소로 등장합니다. 유다 임금 여호사팟과 이름이 같은데, 그 뜻은 ‘주님께서 심판하시다.’입니다. 이곳이 심판의 장소라는 점은 요엘 4,14에 나오는 또 다른 명칭, “결판의 골짜기”에서도 암시됩니다. 여기서 ‘결판’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하루츠]는 ‘타작기’라는 뜻도 지닙니다. 그러므로 ‘결판의 골짜기’는 ‘타작마당’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타작마당은 수확기에 바빠지는 곳으로 낟가리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하는 장소지요. 이런 점 때문에 타작마당은 성경에서 평생 쌓은 선과 악을 헤아려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심판장의 표상으로 자주 쓰였습니다(마태 3,12; 루카 3,17 등).
여호사팟 골짜기가 키드론 골짜기와 같은 곳이라고 확실히 단정짓기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호사팟 골짜기가 실재 지명이 아니라 미래의 심판장을 가리키는 상징이라고 봤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골짜기의 이름이 유다 임금 여호사팟과 같은 점에 착안하여 여호사팟이 이민족들을 상대로 승리한, 2역대 20,26에 나오는 “브라카 골짜기”라고도 풀이했습니다. 하지만 2역대 20,20에 따르면, 브라카 골짜기는 예루살렘이 아닌 트코아 가까이에 있는 곳이므로, 요엘서의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요엘 4,16에서는 하느님께서 호령하시는 곳이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예고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교부 에우세비우스는 즈카 14,2-5에 기초해 여호사팟 골짜기를 키드론 골짜기로 풀이하였습니다.
만약 여호사팟 골짜기가 키드론 골짜기라면, 유다인들이 예부터 키드론 골짜기에 무덤을 조성한 데는 이유가 있는 셈입니다. 바로 심판의 장소라는 상징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심판의 장소로 예고된 이 골짜기에서 속죄 제물이 되는 걸 마다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요엘서도 여호사팟 골짜기에서 ‘심판’을 받는 이들은 이민족, 곧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지 않는 이들이며, ‘구원’을 얻는 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