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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를 찾는 사람들
요즘 다른 교회당에는 손님처럼 잠시 왔다가 가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늘 뒷자리에서 잠깐 앉았다가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면 조용히 사라집니다. 그리고 한 2주정도 그런 식으로 왔다가는 다시 보이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한 채,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이 교회를 떠나 옮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교회를 옮기는 문제를 막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을 옮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한국 땅에는 우리 교회 말고도 주님의 뜻대로 하려는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아니면 안된다는 식의 오만을 부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반드시 한가지 문제만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교회를 옮겨야 한다면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할까요? 과연 어떤 사람들을 섬기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까요? 내가 사귐을 가져야 할 교회를 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런 문제들을 오늘은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것들이라면 우리는 아주 열심히 했던 그 일에 대한 보상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일들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시험하게 될 경우, 우리는 다 타버리고 남는 게 없는 상태에서 주님의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일을 한다 하더라도 나무나 건초, 또는 지푸라기처럼 불에 타서 없어질 그런 일들이라면 그 일은 헛된 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많은 일은 아니더라도 불에 탈 때 불순물이 제거되고 오히려 더 빛을 내는 금이나 은, 보석과 같은 일이라면 그분들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날 터인데 그날이 그 일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 일이 불로써 드러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떠한 지 시험할 것임이라 누구든지 그 기초 위에 일을 세웠는데 그 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보상을 받고 누구든지 불타면 보상을 잃게 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로써 받는 것 같으리라』(고전3:13-15)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신실하게 따르기로 한 형제자매들이 모여있는 모임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점이 잘못되어 있다면 우리는 평생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으며 영적인 진보 없이 늘 쳐져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 웃을 수만 있다면 좋지 않겠냐는 식으로 가볍게 교회를 정하지 않기 바랍니다. 교회를 정하는 기준으로 적합치 않은 것들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2.가까운 거리?
여러분이 이사를 하셨을 경우 제일 가까운 예배당으로 먼저 발걸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예배당이 가깝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이 이사를 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다녀야 할 교회를 살피고 그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일임을 말씀드립니다. 지난 번 저희가 살던 동네에는 주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나타나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메가폰을 들고 동네 사람들을 깨우는 분이 있었습니다. 물론 전철에서도 종종 그런 분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하지만 저는 가까이 있는 교회들을 모두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약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 같다고 걱정하셨던 것처럼(마10:16)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되곤 합니다.
정말 우리가 교회를 찾을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것은 거리가 아닙니다. 그 교회가 말하는 바입니다. 그 교회가 가르치는 바입니다. 그것을 살피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어둠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오
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음이니라』(사8:20)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이 그 말씀에 따라 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 안에는 빛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말씀 안에 계신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입니다.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들 안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정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거리가 아니라 "그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말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느냐는 것입니다. 생명 없고 빛 없는 교회에서 애쓰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멀더라도 생명 있고 빛 있는 교회에서, 또 주님의 말씀대로 하려는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헌신하게 될 때 주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할 것이며 그런 교회 가까운 곳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할 것입니다.
3.화려한 건물?
많은 분들이 교회를 옮길 때 고려하는 것은 큰 건물입니다. 그런 교회는 시설이 최고급입니다. 때로는 극장처럼 바꿀 수도 있으며, 이층 베란다로 된 예배실, 그리고 상큼한 향기가 진동하는 큰 화장실, 잘 갖추어진 주차장, 칸칸이 준비된 교육실, 마치 카페 같은 식당, 멋진 조명,...사람들은 그런 것에 매료되기가 쉽습니다. 그런 모임은 분명 예배당 건축 때문에 무거운 재정적 참여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상가에 임대한 교회를 가기 꺼려합니다. 한마디로 품위가 별로이며 교회 건축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한번도 건물을 교회라고 지칭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건물이 시작된 것은 주후 약 200년 경이며 로마제국이 많은 이교사원을 확보하고 그것을 로마 카톨릭에게 주면서 더 확대되었습니다. 많은 카톨릭 교회당에 이교적인 요소들이 남아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성경의 몇구절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기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 안에서 너희에게 많이 문안하느니라』(고전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들에게 문안하라』(골4:15)
『우리가 사랑하는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동료 군사된 아깁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몬2)
이 말씀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려줍니다.
첫째,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그 건물에 모였던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실지로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피로 교회를 사셨는데(행20:28), 건물을 사시기 위해 피흘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기 위해서 피흘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을 맞이하게 될 신부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둘째, 초기의 교회들이 가정집에서 모였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아주 중요한 예를 더 하나 들겠습니다. 최초의 교회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나게 된 곳은 어디였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묵고 있었던 다락방이었습니다(행1:13). 물론 120명이 모였기 때문에 조금만한 집은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주님의 교회는 큰 집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이 왜 모이는 일을 위해 집을 전전했습니까?(행2:46) 그들에게는 아직 마땅한 예배처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모이기 시작했던 곳은 가정집이었습니다.
저는 큰 건물을 지은 교회가 나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교회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그것이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건물보다도 진정으로 다시 태어난 사실들에 감격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히 구별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편지하노니』(고전1:2)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입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난 사람만이 이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교회에서 구원간증을 하는 일없이 무조건 쉽게 그 교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니더라도 구원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일도 없이 그 교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그런 모임은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영적 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일부터 맡기려고 하는 교회를 조심하십시오. 그런 모임은 여러분은 부릴 수 있어도 생명은 나누지 못합니다. 그런 모임 안에서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4.많은 사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교회는 내가 들락거리는 것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무엇을 요청하는 일도 없습니다. 나는 편하게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학교에서 수강료도 안내며 시험도 안 치르고 단지 도강하러 들어온 대학생처럼 행세하려고 합니다. 얼마나 편합니까? 학비걱정, 시험걱정 끝입니다. 그러나 도강생에게는 졸업장이 없습니다.
『참으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1)
간섭받지 않고 신앙생활 하려는 분들,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분들은 그 자신이 정말 주님을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인지를 점검해보아야만 합니다. 부딪히는 것이 싫다면 그냥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간섭받는 것이 싫다면 혼자 지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에 매력을 느낍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힘이 있어 보이고, 사람이 많은 곳은 어떤 역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로마 카톨릭에서 돌아와 주님의 신실한 교회를 이루었던 챨스 치니퀴의 교회, 약 6000여명이 넘는 회중들이 말씀을 듣고자 좌석표를 구하고 줄을 서야 했던 스펄젼의 메트로폴리탄 타버네클 교회 ....저는 그러한 교회들 안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찬양하며 그런 교회들에게 도전을 받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수가 많아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또한 수가 많아지는 것 모두를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일축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살인자는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치다니요.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군중들 전체가 그런 식으로 외치다니요. 많은 사람의 외침이 곧 정의라는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수라는 조건으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고전10:5). 광야에서 쓰러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수가 죽었으며 오직 믿음으로 행한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습니다. 노아는 어떻습니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비, 그것을 기다리면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아가 배를 만드는 120년간 그를 조롱하며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대로 준비했습니다. 그 온 지면에 흩어진 사람들은 다 죽고 겨우 여덟명만 거기서 건져젔습니다(벧전3:20). 사람의 수가 많이 모인면 반드시 주님이 거기에 함께 하신다고는 간주하지 마십시오. 때론 향기가 있는 곳에 벌떼들이 모여들기도 하지만 죽은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기도 합니다.
교회에 대해 가르쳐주시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마18:20)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람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로 모인 것(요1:12,13)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라면 두 세 사람이 될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매우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7:13하)
많은 사람이 가는 대열에 내가 섞여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여기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결코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많은 수를 믿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갈보리에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셋째날에 부활하신 그분만을 의지하십시오. 그 한 분이 우리의 보장이 됩니다. 이 세상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였어도 그 무리는 우리가 가는 길이 안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안전한 보장이 되십니다. 그 한 분을 믿고 모인 사람들이라면 많든지 적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런 교회는 생명이 있는 교회입니다.
5.멋진 목사?
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정할 때 생각하는 것이 그 교회의 인도자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분은 유학을 다녀왔고, 그분은 외국어에 능통하며, 그분은 박식하고, 그분은 모든 면에서 인정받을 만하며 참으로 진지하고...."
제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신 분들을 험담하기 위해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만일 그런 노력과 땀을 흘렸다하더라도 나는 여러분들이 저를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모습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완전한 모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여러분을 위해 죽은 사실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속죄를 위해 피흘린 사실도 없습니다. 또 여러분 중에 아무도 제 이름으로 침례받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에게 매력을 느껴 이 교회에 출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주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주님께로 향하는 여러분의 시선을 가로챈 나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대언자들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니라』(눅6:26)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돋보이는 교회는 안전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예수를 전하는 교회도 있습니다(고후11:4).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지상에 특별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존경을 대신 받을 만한 대리자를 세웁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화가들의 상상으로 그려낸 긴머리의 장발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조각으로 꾸며진 우상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언제까지나 어머니 품속에 누워있는 아기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다른 많은 구원자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단지 선지자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구원사역에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지금 재림해서 살아있는 어떤 사람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구원자 곧 그리스도라기보다 선한 삶의 모델을 보여준 선생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하나님보다 격이 낮은 천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지옥과 죄에 대한 형벌을 말한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구원얻은 자를 지킬 수 없어서 구원을 잃어버리게도 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착한 사람은 구원으로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의 피로만 안되니까 행위도 요구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그의 교회에게도 유대인의 율법을 강요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전하는 예수는 여러분들이 말한대로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습니다. 참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모임이 교회라고 주장하는 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참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잃어버려서 목회자를 비롯해서 어떤 인물, 어떤 음악, 어떤 분위기, 어떤 시설, 어떤 시스템에 매료되게 만드는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쇼킹한 주제로 사람들을 놀래켜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어떤 인도자가 거기 있다고 해서 그 교회가 참된 주님의 교회는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그 인도자와 그 교회는 속담이 말한 그대로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꽝!
여러분은 어떤 분의 진지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선하다는 평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며 헛수고 하도록 만드는 신실한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얻게 된 지식을 전하고자 얼마나 진지한지 모릅니다. 텔레비젼에 나와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치는 발언을 하는 강사들이 농담으로 그런다고 여기십니까? 그들은 참으로 진지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려고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지하고도 성실하며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던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심판 때 꼼짝없이 형벌을 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어떤 사람이 진지하고 성실하고 신실하다고 따라가지는 마십시오. 예수를 공격하는 사람처럼 사악한 것은 비슷한 예수 곧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6.가족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일로 교회를 옮겨야 할 경우 부모님들, 혹은 형제들이 다니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아니면 인간적인 어떤 관계 때문에 교회를 정합니다. 어떤 분은 어떤 교회의 목사님이 영업상 중요한 고객이기 때문에 그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교회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사람의 생각이나 조언은 소용이 없습니다. 경건한 부모님들의 권고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지 않는다면 그 누구의 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정확한 제시입니다.
최근 어떤 분이 교회를 옮기고 싶어하는 일로 저와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에게 성경을 보도록 조언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내가 옮겨야 할 교회의 모습을 찾지 못한다면 당장에 교회를 옮기는 일은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나의 교회가 그 말씀에 일치하지 않았음을 발견했을 때에만 교회를 옮길 수 있는 명분이 확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교회를 살펴본 사람은 어떤 사람이 교회를 옮기고자 할 때 적절한 조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육적인 가족관계로 신앙의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보라,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말하고자 하여 밖에 서 있더니 한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보소서,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선생님과 말하고자 하여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그분께서 자기에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냐? 누가 내 형제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을 보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하시더라』(마12:46-50)
만일 가족끼리 여행하는 일이 생긴다면 여러분은 가족들과 의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의 의견은 여러분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동해바다로 가고자 했어도 가족들이 제주도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동해바다로 가는 일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를 찾는 일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열명의 가족 중에 아홉명이 그들이 다니는 교회로 와야한다고 설득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이 문제는 육적인 가족관계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혈육적인 가족들이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복 중에 하나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모임인데도 우리가 일부러 가족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쫓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도 분명하게 단지 혈육을 나누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혈육의 문제가 교회를 결정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면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많은 교회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벌이는 일에 넘어가는 것을 우리들의 집안에서 흉내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족들을 돌아보는 것은 믿는 자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그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께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마10:37)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마10:36) 가족들보다 우리를 더 잘 쟁켜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때로는 가족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에게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결정적인 일에서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옵소서』(눅9:59)
아버지가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주님을 따르는 문제를 아버지를 장사 치룬 후로 미루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도 주님의 말씀대로 가르치는 교회에 다니고 싶어. 그러나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까지는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어 드려야 해"
"나도 주님의 교회에 다니고 싶어. 하지만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신 후에야 그렇게 할래. 가정의 화평이 우선이잖아."
주님은 가족을 먼저 생각했던 것이 싫었습니다. 무엇이 먼저인지를 곰곰히 생각해보십시오. 가족들의 의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주님은 먼저 그 왕국과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했건만 여러분이 가족들 때문에 교회를 정하는 성경적 기준을 포기한다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아있는 시간만큼 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가족들이 여러분의 원수로 활동하는 시기를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좀 무서운 신앙을 여러분에게 강요하는 것 같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먼저 가서 내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하옵소서』(눅9:61)
육신적으로는 여러분들이 가족들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이 편하게 느끼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만큼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가족들을 만족시킨 후, 주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겠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합당치 않은 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로부터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방해받고 있습니까? 가족들에게 육신적으로 잘 해주십시오.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존중하며 부모님께는 순종하십시오. 하지만 신앙이 방해받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것을 지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면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주시는데 단서가 붙기를 주 안에서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적인 반대로 인해 부모님을 거역했을 때,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만, 시간이 흐른 뒤 부모님들이 여러분들의 신앙을 이해하고 "네가 그 때 그렇게 하기를 잘 했구나!"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말씀에 끌려가는데 방해하는 많은 것들로 인해 뒤돌아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성경을 펼치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라고 고백하시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함을 가증하게 보십니다.
문제점을 더 살펴보기 원합니다. 많은 교회들은 상당히 성경의 핵심을 비켜나갔습니다. 그들은 거듭난 사실이 없는 자들에게 세례를 줍니다. 또 주님을 통해 아직 변화받지 못한 사람들도 주의 만찬에 참여하도록 묵인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진실로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죄사함받았습니까?" 어떤 교회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며 접근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런 질문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전혀 준비 되지 않은 사람을 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복음을 통해 부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통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려는 열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그분의 도우심은 믿지만 그분이 죄를 미워하시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일하셨으며 죄와 싸우게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은 적습니다. 그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신기한 일들만 있다면 아무데나 쫓아갈 사람들입니다.
7.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교회를 정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이 거듭나지 못한 경우라면 무작정 많은 사람이 가고 있는 길을 가다가 멸망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넓은 문, 넓은 길, 많은 무리,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멸망이었습니다(마7:13).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성경적으로 삶의 원리들을 제시받지 못할 때, 평생 헛수고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이 했던 일들이 불타서 사라지는 경험을 하고 마침내는 주님께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않는다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법을 바르게 가르쳐주는 교회를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내 마음대로 변칙을 쓰며 신앙생할을 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법대로 가도록 인도해주는 교회를 만나야 할 것입니다.
거리를 따지기 전에 그 교회가 말하는 바가 기록된 복음의 말씀에 일치하는지를 따지십시오. 건물을 보기 전에 거듭난 감격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 지를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모여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려는 교회라는 것을 확인하십시오. 멋진 목사나, 시스템, 어떤 환경을 점검하기 이전에 복음이 말하는 예수를 정학히 제시하는 가를 점검하십시오. 가족들이나 그 어떤 인간적인 도리를 중요하게 간주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말씀의 인도를 존중하십시오.
나는 인천생명침례교회가 그런 교회이길 원합니다. 이 중에 많은 분들은 가족관계 때문에 여기에 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턱에 여기서 지금 함께 지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여러분은 내 가족 중에 누가 이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여기에 오시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이 모임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복음을 옳게 전하기 때문에 이 모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행하는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로 제시하기 때문에 이 모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보상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뛰어가고자 이 모임을 소중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지켜가실 겁니다.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지 않는 한 주님은 이 모임에 어떤 일들을 맡기실 수 없습니다.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여진 사람들의 모임이길 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