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만이 내 본질을 볼 수 있다
태양은 늘 밝은 광명을 비춥니다.
엄청난 밝은 빛을 비추는데 왜 어둠이 생기는가.
왜 본래 청정한 부천데 왜 죄가 생겼느냐.
이것은 어째서 이 우주가 창조되었느냐 하는 물음과 꼭 같습니다.
저 허공에다 침을 뱉어 봐요. 허공에는 침이 안 묻습니다.
허공에다 먹물을 끼얹어 봐요. 허공엔 안 묻습니다.
텅 빈 그릇은 더럽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이 욕망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고
미움을 느끼고 하는 것이지 감정이 더럽혀 진 것이지
본래 마음에는 더러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광명에 등을 돌려 어두운 것이다라는 겁니다.
완전하게 밝은 내 마음 광명에 무엇이 등을 돌려서
죄업에 끄달리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 몸뚱이 한 번 보십시오.
우리 몸이라는 컴퓨터 안에 입력된 정보는
우주에 있는 정보다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입력시킨 사람이 있을 때만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력시켰다는 것은
내가 내 욕망 따라 업을 만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고죽고 나고죽고 하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야겠다고 하는 것,
부처님 법 만나고,
정법 만났을 때 마음 발심한 번 못했다면
천추에 한이 될 것입니다.
부디 마음 공부하십시다.
오늘 나는 내 마음을 위해 얼마만큼 농사를 짓고 있는가.
그러려면 시간만 나면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
내 번뇌 망상 업을 따라 산다는 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입니다.
인간된 몸보다 더 공부하기 좋은 때는 없다.
아들딸 아들딸 하지만
아들딸들은 자기 복만큼 밖에 못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복이 없으면
아무리 천금을 줘봐야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마음 수행하는 법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감정에 따라 가고, 유행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남과 비교하면서 사는 것은 아닌가,
얼마만큼 내 마음을 돌아보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도 감정의 노예가 됐구나,
정말 인간 몸 받았을 때 내 마음 농사 지어
이 공부 하면서 내 마음 한번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내가 아닙니다. 잠깐 빌려 쓰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그럼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 나는 누구인가,
참 나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법으로 ‘나’고 인연법으로서 ‘나’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 들국화가 만발했습니다.
손가락에 불을 태우고
소백산 도솔암에서 오직 공부만 해야지 했는데
온갖 망상이 다 떠오르니 공부가 안 된단 말입니다.
솔잎 한 되 박 짊어지고 지리산을 헤매다
그만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할 때 그때 하얗게 핀 들국화가 있었습니다.
그 향기와 모양이 얼마나 곱던지,
그 들국화는 남이 보든 안보든 최선을 다해 피었단 말이지요.
그걸 보면서 알았습니다.
이 공부는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구나라는 걸.
들국화 향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의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향기는 줄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수화풍 인연에 의해 꽃이 핍니다.
인연에 의해 생겼단 말입니다.
대지가 여러분들에게 흙기운을 보시하고
허공에선 공기가 보시하고
하늘에선 태양 열에너지를 보시하고
연기법에 의해 내가 살고 있습니다.
내 혼자 난 게 아니고 연기법이 우주 전체구나,
그 연기법을 알려주시려고
부처님은 홀연히 꽃 한 송이를 떡 들어보이셨구나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내가 아니고 내 마음이 내가 아니고
본래 연기가 맞아 떨어졌을 때만 생겨났다면
이 몸뚱이가 점점 없어져 버리면
이 공부하기도 어렵겠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땐 정말 쉬웠는데
없어져 버리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바깥으로 바깥으로 향하는 마음은
내 안에 있는 기운을 바깥으로 낭비하는 것이고
이걸 ‘이 뭣고’로 바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마치 물이 흘러, 바다로 흘러 모든 것이 하나로 되듯
나와 너는 둘이 아니구나,
여자와 남자는 둘이 아니구나 할 때,
그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발심을 했다고 합니다.
부디 주력이든 절을 했든
기도든 참선이든 열심히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연기법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에
번뇌 망상은 내가 만들어놓은 환영이다,
마치 영화 화면처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기법으로의 ‘나’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영화 화면 같은 그림자를 보고
‘나’라고 착각하고 있구나를 아셔야 합니다.
‘화두’만이 내 본질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설사 안 맞는 게 있더라도 시간만 나면 이 뭣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인가를 물어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입니까.
부디 번뇌 망상이 날뛰는 몸뚱이
감옥을 만들지 마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이 뭣고’로 바꾸고 바꾸다 보면
번뇌 망상이 부처가 되면 만리창천에
우주 전체가 가을날 보름달 환히 비추듯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환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화두의 고마움이여.
부처님께서 꽃을 든 고마움이여.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