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1-15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천자문을 반밖에 배우지 못한 아이
어느 대학에 근무할 때에 그해 경쟁률이 아주 높아서 전국의 수재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입시 전날 예비소집에서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는 것이 “여러분 모두 합격의 영광을 누리기 바랍니다.”라고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들이 웅성거리더니 막 웃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학생들 중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10분의 1도 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정작 하느님 나라에 선발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의 말은 할 수 있어도 그 말에 내 인생의 아주 짧은 순간 때문에 영원한 세상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머물면 소름이 끼치는 일입니다.
어려서 서당에 다니면서 귀동냥으로 옆구리 공부를 할 때입니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형들 옆에 끼어서 그들의 얘기에 넋이 빠져서 듣기도 하고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아는 것이 없으면서 많이 공부한 사람처럼 으스대고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쓸 때였지요. 잘 모르는 우리들이 아는 체를 하는 것을 보고 훈장님이 이런 지혜의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시골의 한 훈장님이 출타를 하셨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답니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은 미끄럽고 날씨는 아주 춥고 어두워서 기척이 드믄 산언덕을 오르던 훈장님은 눈이 하얗게 덮인 길옆의 무덤에 예닐곱 정도 먹은 어린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 옆에는 하인인 듯한 사람이 조랑말을 세워놓고 지켜 서 있는데 아이가 울면서 사설을 하더랍니다. “스승님, 이제 스승님이 돌아가셨으니 저는 누구한테 천자문을 공부할 수 있답니까? 원통합니다. 제게 천자문이라도 다 뗄 수 있도록 살아계시지 않고 이렇게 돌아가시다니요?" 그래서 그 훈장님은 그 아이가 하도 기특해서 “너는 천자문을 얼마나 공부하였느냐?”라고 물었더니 “이제 절반도 배우지 못했는걸요.”라고 대답하기에 훈장님은 약속을 했습니다. “얘야, 나도 서당 훈장이란다. 나머지 천자문은 내가 가르쳐 줄 테니 그만 울고 집에 가렴, 감기 걸리겠구나.” 그러니까 그 어린 아이가 아주 반색을 하면서 스승의 예로 인사하고 7일 후에 찾아뵙겠다고 약조를 하더랍니다.
그날 훈장님은 집에 와서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부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보 나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늦은 시각에 스승님의 무덤을 찾은 아이가 천자문을 공부하며 나이가 여섯 정도 먹은 어린 아이라면 너무 어른스럽지 않습니까? 이제 그 아이를 한 번 시험해 봅시다. 당신은 대문에다가 거칠 황(荒: 천자문의 여덟 번째 글자)자를 크게 써서 붙여놓고, 겨울이라 땅을 파기 어려우니 내(川)에다가 무덤처럼 만들어 놓고, 집에 와서 눈치를 한 번 보시오.” 그 훈장의 부인은 참으로 현명한 분이었나 봅니다. 훈장님은 부인의 말대로 그렇게 준비를 하였는데 과연 약속한 날 아침에 그 꼬마 아이가 조랑말을 타고 하인과 같이 대문에 이르더니 대문에 붙여진 글자를 보고 곧장 냇가로 달려가서 무덤처럼 만들어진 곳에서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박복(薄福)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신다는 선생님조차 잃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하고 울더니 총총히 돌아가더랍니다.
그 훈장님은 하도 괴이하게 생각이 들어서 부인에게 그렇게 한 연유를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그 아이는 글자 천자(千字)를 배운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물리를 아주 깊이 공부한 아이인 것 같았습니다. 그 아이는 우리 지비에 오자마자 대문에 써 붙여놓은 거칠황(荒)자를 보는 순간 <네가 찾아온 선생님은 돌아가셔서(亡), 냇가에(川) 무덤을(艸)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대충 천자문을 가르쳤다가는 당신은 크게 망신을 당할 뻔 했습니다. 한 글자를 배워도 그 안에 있는 모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아이라고 생각되어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오.” 하더랍니다.
우리의 훈장님은 이야기의 끝을 이렇게 맺으셨습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아주 깊이 정성을 다하여 그 안의 모든 뜻을 파악하고 익히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 혹은 설게 공부한 학자가 학문을 망친다. 명심하여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 나라의 공부도 대충 공부할 것은 아닙니다. 더욱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수박 겉만 핥아서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살펴보고 길을 닦을 모든 준비를 갖추라고 소리 지르는 세례자 요한은 사람의 아들 중 가장 훌륭한 인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느님 나라에서 결점으로 가득 찬 인간은 결국 가장 작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각각의 몫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없고 모든 사람들이 그 몫을 다하려고 한다면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몫은 예수님의 길을 닦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도록 인도하는 사람의 몫을 맡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인물은 결국 인도자입니다. 회개하라고 설득하고 세례를 베풀어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림시기에 나의 역할과 몫은 무엇입니까? 그냥 대충 그리고 대강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입니까? 성경도 대충 읽고, 교리도 대충 알고, 사람들에게 복음의 전파도 대강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 살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