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는 인간의 말(Rede)이 지니는 청각적 요소를 구성적 요인(konstitutiver Faktor)으로 명시함으로써 나중에 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접하게 되는 것을 이미 분명하게 공식화했다. 아울러서 훔불트는 분절(Artikulation)이라는 루소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오늘날 음소(Phonem)라고 표기되는 것에 대한 명백한 관념을 전개시킨 바가 있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공되지 않는 유일한 자연음을 언어 속에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연음과 유사한 분절된 음성만을 만든다는 것이다.
뮐러-폴머는, <사고와 말하기, 표상 및 문법>이라는 훔볼트의 개념들이 초기 구조주의의 정적인 언어관에서 좀 더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바스크어의 단편들>은 훔볼트가 이전에는 시학에서 전개시켰던 원리들을 그때부터는 언어학에 전용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입증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올바른 평가인 것처럼 보인다. 훔볼트는 그의 시학에서 시적인 작품들을 시문학의 능력 및 시적인 조작방식과 관련시켜 고찰했다. 언어연구가의 과제도 이와 유사하게 규정된다. 즉 언어연구가에게는 언어를 고안하고 계발하는 인간의 처리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언어의 기초가 되는 법칙과 규칙들을 설명하고자 했던 일반 문법의 전통적인 과제는 훔볼트를 통해 생성적인 언어관의 입장으로부터 새로운 해석을 얻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서 일반 문법의 법칙들은 언어라는 대상에 대해 더 이상 정적으로 일반화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 법칙들은 인간이 지니는 언어능력의 규칙들로 규정되어야만 했다.
-<훔볼트의 언어철학>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위의 글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공부해보자.
먼저 “인간은 가공되지 않는 유일한 자연음을 언어 속에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연음과 유사한 분절된 음성만을 만든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보자.
무슨 말일까? 공부를 위해 인터넷에서 검색한 프레시안 강의 정리 기사를 인용해본다. 강의는 <노암 촘스키의 생각을 읽자> 저자 박우성 님이 한 것이다.
“동물들도 언어를 갖고 있죠. 그런데 자연계의 소리와 동물의 언어, 그리고 인간 언어를 구별 짓는 특징은 어디에 있을까요? '시냇물은 졸졸졸'이라는 동요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게 시냇물 소리인 줄 알지만, 실제로 시냇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요. 이처럼 자연계의 소리는 그 자체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고양이나 강아지, 닭의 울음소리를 언어마다 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시냇물이 흐르는 자연계의 소리를 처음부터 ‘졸졸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ㅈ, ㅗ, ㄹ’라는 분절된 음소를 가지고 ‘졸졸졸’을 생성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절‘은 무엇인가? <훔볼트의 언어철학>에 있는 각주이다.
“모든 개개의 음성은, 언어 공동체 내에서 자유롭게 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여타의 음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진술될 수 없다고 해도, 바야흐로 분절된 음성은 각각의 민족으로부터 각 언어체계가 요구하는 음성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무슨 말인가? 지역적으로 음소가 다르게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는 것이다. 즉 서양은 왜 알파벳이고, 동양은 왜 한자나 한글인지, 그 원인은 아직까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각 지역의 언어는 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음소를 가지고 언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한국인이 어릴 때 외국에 입양 가면 그쪽 말로 말하고 쓰는 것처럼 말이다.
이해를 위해 프레시안 기사를 더 인용해본다.
“인간 언어의 특징은 분절입니다. 제가 "엄마"라고 할 때와 다른 분이 "엄마"라고 할 때, 소리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단어로 인식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가 소리를 분명히 구분해서 인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언어의 분절은, 프랑스의 언어학자 앙드레 마르티네(1908~1999)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형태소로 구분되고, 다음으로 개별 음소(음운)로 나뉩니다. 형태소는 의미를 가진 최소의 단위이고, 음운은 기역, 니은 등 의미를 갖지 않는 언어의 최소 단위이지요. 이를 '이중 분절'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발성 기관으로 구분해 낼 수 있는 음운은 대략 오십 개쯤 된다고 합니다. 개별 언어마다 그 중에 스무 개에서 서른 개쯤 사용하고요. 일본 사람들이 능력이 떨어져서 영어 발음이 나쁜 게 아니라, 일본어에서 사용되는 음운이 열일곱 개로 적기도 하고 그게 영어와도 거리가 있어서 그런 겁니다. 또 프랑스 사람들은 우리가 히읗으로 발음하는 에이치(h) 발음이 잘 안 돼요. 88올림픽 당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앵커가 호돌이를 '오돌이'라고 발음하더군요. (웃음)
어쨌든 20~30개의 적은 숫자 가지고 무한한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참 대단하죠. 꿀벌도 물고기도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 표현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이런 동물들의 제한된 언어는 순전히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인간 언어가 가진 고차원적 생산성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것,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게 인간 언어의 무한한 능력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무슨 말일까? 이를 위해 다음을 잠깐 보자.
“하늘이 참 높고 푸르다.”
위 문장에서 음절, 형태소, 단어, 어절을 구분해보자.
“음절 : 하 / 느 / 리 / 참 / 놉 / 꼬 / 푸 / 르 / 다 → 9개
형태소 : 하늘 / 이 / 참 / 높 / 고 / 푸르 / 다 → 7개
단어 : 하늘 / 이 / 참 / 높고 / 푸르다 → 5개
어절 : 하늘이 / 참 / 높고 / 푸르다 → 4개”
[네이버 지식백과] 형태소(3일만에 끝내는 국어문법교과서)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왔다. 사실 이렇게 보다가 며칠 지나면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설명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들여다보았을까? 글쓰기와 관련해 정리해보자면 이런 것이다.
언어별로 다르지만 인간은 대략 50개의 음운을 가지고 무한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인간은 자연의 소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삶 속에서 생성해낸다는 것에 주목해보자. 그 개인들이 속한 공동체에 의해 언어가 다르게 나오기는 하지만, 모두 삶과 죽음, 그 과정을 상호존재적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언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결론적으로 글쓰기는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정신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에 방점을 두자는 것이다. 그래서 진화적으로 볼 때 글쓰기는 모두가 하는 쪽으로 되어가고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그 과정에서 여전히 기존의 글쓰기가 마련해놓은 틀을 기준으로 삼고 있어 안타깝다는 것이다. 물론 이 현상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지만,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자존감을 올리기에 목적을 두든, 삶을 더 풍성하게 살고 싶다는 목적을 두든, 힘겨운 삶에 긍정성을 불어넣고 싶은 목적을 두든, 치유를 목적으로 하든, 인정욕구를 꽃 피우고 싶든, 글쓰기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것, 그것이 언어를 만든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해 확실히 인식을 해두자. 그러면 터져 오르는 사유를 마음껏 글로 펼칠 수 있고, 글쓰기가 재미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