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것에 생각해 보았는가? - 3
어제의 길에 이어서
오늘은 계무생사契無生死를 이야기 하겠습니다.
계무생사契無生死는
‘생사 없음과 계합’하는 삶의 단계입니다.
계합이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생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자체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삶에 반영하는 것입니다.
‘생사가 없다.’는 말을 입처럼 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자기 자신이 죽음을 당하는 경우는
이론으로 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말의 유명한 선지식 가운데 경허스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경허 스님은 일찍 출가하여 모든 경전을 통달하고
이미 스물세 살 때에 동학사의 강사 스님으로
학인들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뛰어 났습니다.
하루는
속가를 한번 방문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대중에게 사유를 말하고 속가를 찾아 가던 중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므로
어느 집의 처마 밑에 들어섰는데
“빨리 가라.”고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몇 집을 더 찾아 갔지만
역시 똑같이 받아주지 않고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 한 집에서는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지금 이 곳에는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걸렸다 하면 바로 죽는 판국인데,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죽을 곳을 찾아 왔는가.”
경허 스님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마치 죽음이 목전에 다다른 것처럼 느껴지자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가
모두 꿈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일류 강사 스님인데
본래 생사가 없다는 것쯤 모를 리 없지만
죽음이 자기 자신에 이르렀다고 생각 하니
두려움이 사무쳤던 것입니다.
경허 스님은 그 마을을 빠져 나와
즉시 동학사로 되돌아가서 대중들을 해산 한 후
이 때 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참선을 시작해서
마침내 생사가 본래 없는 자신의 본래 진면목을 직접 깨닫고
결국 유명한 도인이 되셨습니다.
이론 적으로는 생사가 없다고 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직접 죽음이 목전에 당도 했을 때는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중국 스님 가운데 승조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은 구마라습 삼장법사의 제자로
겨우 31세에 폭군을 만나서 참수를 당하게 되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다음의 임종게를 남기셨습니다.
사대원무주 오온본래공
四大元無主 五蘊本來空
장두임백인 흡사참춘풍
將頭臨白刃 恰似斬春風
[지수화풍으로 된 이 사대육신은 본래 주인이 없고
색수상행식으로 된 이 몸도 본래 공한 것이라
머리 위에 흰 칼날이 번쩍인다 해도
오히려 봄바람을 베는 것 같다.]
이런 단계가 되어야
계무생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용무생사의 단계는
‘생사 없음을 활용’하는
이상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보살님들의 삶이 바로 여기에 해당 합니다.
중생제도를 위하여 태어나고
중생제도를 위하여 일부러 열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잠시 잠깐 살다가는 금생이지만
이 금생에 있어서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말씀처럼 믿음과 지혜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 집착의 무명토無明土를 갈아엎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후
신·구·의 삼업을 잘 단속하여 자신의 불성을 회복합니다.
그리하여 생사윤회를 단절하고 영원한 삶을 성취합시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지금 부처님 앞에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2024년 06월 26일 오전 05:20분에
남지읍 무상사 토굴에서 雲月野人 진각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