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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 (기원전 5,세기 ~ 기원후 494년)
부여국(기원전 5세기~494년)은 동명왕(기원전 5세기)이 만주 송화강 고리국(탁리국,색리국)에서 국왕의 시녀 어머니에게서 하늘의 기운으로 알을 받아 잉태하여 태어나 자랐는데,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잘하며 영민하자 차츰 왕의 시기와 질시가 심해지면서, 국을 탈출하여 나와 부여국을 건국하였다고 기록한, 후한 논형 길험 동명신화 편에 나오고, 고구려가 동명성왕, 백제의 동명 같이 부여계를 시조로 모시는 관행을 비추어 보면, 단군조선 삼한 중 마한의 소국 고리국에서 기원전 5세기경 부여국 태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부여라는 말은 고대의 구려 무리들이 자신들을 자칭 천제가 있는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 온 무리라고 칭하였는데, 이 말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천제는 '불'로, 무리는 '여'로 적어 불여로 적었으며, 이 불여를 뒤에 부여로 읽고 음을 따라 부여로 적었고, 산해경에는 부여가 불여로 적혀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것을 한자로 적음에 있어 '불'자 대신에 환, 고, 고(古), 백, 화, 화, 명, 일, 위, 위(魏), 불, 등으로 적었고, '여'자 대신에 이, 여, 로, 등으로도 적어서, 부여는 특정한 부족 명칭이 아니고 구려 지역에 거주하면서 해와 달을 숭배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송화강 유역에 살던 특정한 무리만 부여로 적혀 있습니다.
일설 기록에 시조인 동명이 북쪽 탁리국에서부터 이주해와 건국하였다. 하고, 당시 부여인들이 스스로를 옛적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유이민의 후예라 하였다고 전한다. 고 하여,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주한 후예라 유추하게 하며, 위치는 길림성 중부 길림시 송화강 동쪽 기슭의 동원산이나 남성자 유적이 있는 곳이며, 초기는 예족이 근간이었는데, 일설에는 고리국을 탈출한 동명이 건국한 부여가 현재의 아무르강 지류인 송화강 길림 지역이므로, 고리국은 내몽골 또는 바이칼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고리란 뜻도 하늘에서 내려온 뜻이 있습니다.
인접국은 서로는 오환 선비와 접하고, 동으로는 읍루와 잇닿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이웃하고, 서남으로는 요동의 한족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3세기 전후 무렵 영역은 사방 2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평야지대였으며, 중심지역인 부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장춘, 농안, 부근과, 아성, 창도 북쪽 사면성, 길림시 일대, 등이 있습니다.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로부터 시작되지만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가 있었다고 했는데, 사마천이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은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기서 여지지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를 그었다고 한다.' 하며,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록에 부여가 남쪽의 이인들을 평정하니 열수의 남쪽은 완전히 임금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과 변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하여, 진인은 홍수가 다스려진 후에 청구국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와 살던 사람들이고, 변인은 남쪽의 이인 가운데에 단군왕검에 교화된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산동성 줘청시 이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부근에 부산이 있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는데,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동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 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복희가 동이제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배달국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사회로, 기록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단군조선이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제족의 국조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하습니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으며,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으며,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처럼 고대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동성 일대가 노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대륙 산동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족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데,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동명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인데,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부여족은 사료로 보아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할 수 있으며,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이며 일명 부유, 어여, 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둥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부여이며, 북부여는 전연에 의해 멸망하고, 북부여의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졸본천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동부여, 또는 졸본부여라 칭하고, 동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며, 부여왕족의 또 다른 한 갈래는 남방 지역으로 건너가서 백제국을 세웠는데 뒤에 당태종에 의해 멸망했다. 하였습니다.
또 부여라는 말은 사기에 부여로 산해경에 불여, 일주서에 부루, 논어주소에서는 부유,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부' 란 말이, 불, 태양, 해, 를 말하고 있어, 천손족인 하늘의 자손이 되고, 태양·밝음·붉음·철·동쪽, 등은 하나의 범주로 파악되되는데, 예를 들면 제족말의 불은 새벽을 의미하는 고대어 배·태우다·뿌리·빨갛다·볕· 빛,별·벼리(그물의 중심) 등은 대부분 원알타이어와 일치하며, 다른설은 부여는 평야를 의미하는 벌(벌, 불, 화, 부리)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의 푸후라는 말에서 비롯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기록에 단국을 계승한 나라가 부여인데 부여에서는 단국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가뭄이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질병이 만연하게 되면, 모두 그것이 국왕의 탓으로 알아 임금의 부덕한 탓으로 알고,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었는데, 오늘날까지 비가 오지 않아 가물면 모두 최고집권자인 대통령이 부덕한 탓으로 돌려, 그가 정치를 잘못하기 때문이라 믿고 있는 것으로, 그것은 제족이 오랜 동안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때문이며,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다스린다고 믿어왔기 때문이고,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임금이 하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난 인재라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축제를 부여에서는 국중대회라 하였는데, 삼한의 옛 풍속에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 원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냈으며, 땅에 제사 지내는 것을 방구라는 네모난 언덕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 지냄은 각목이라 하니, 산에 웅상의 상을 만드는 것은 모두 그 유습이다.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행사는 환, 임금이 직접 제를 지내니 그 예가 매우 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날 원근에서 사람들이 각기 생산한 것을 제단에 바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온갖 놀이를 다 하였고, 또 여러 소국들의 사신들이 찾아와 그 나라 특산물을 바치니 진귀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였으며, 환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그 때문에 제천행사는 관경을 번식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였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을 일명 소도제천이라 하며, 소도체천은 백성을 교화하는 통치의 근본이었고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뜻이 담겨 있었는데, 소도제천은 곧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으며, 소도제천은 첫째, 화를 당하면 이웃을 위하여 함께 힘쓰고, 둘째, 있는자와 없는자가 서로 돕는다, 셋째, 문명으로 나라를 이루고 개화평등을 이룬다. 이리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일설에 개천절이 10월 3일이 아니라, 정월 초 사흘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설날은 천신에게 고하고, 정월 초이틀에는 지신에게 고하고, 인간에 선포한 것이 초사흘이 되기 때문이며, 축제의 기원인 영고가 20년 전까지만 해도 지켜지던, 설날에 시작하여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15일간의 '설'이라고 할수 있고, 지금도 설 동안에 행해지는 풍물은 국중대회에서 행해지던 가무음곡과 일치하는 풍속인데, 우리 민속학계에서 조차 은정월이 우리의 정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영고나 동맹, 무천, 등을 10월에 행해진 추수감사제라고 말하고 있으며, 추수감사제에 해당하는 것은 한가위 추석이지 은정월인 지금의 음력 10월에 행해진 국중대회가 아닌 것이고,
이 사실은 영고라는 이름 자체만 풀어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영은 맞이이고 이는 맏이와도 통할수 있으며, 고는 북이며, 북은 심장의 박동을 재현 해내는 악기로서, 태양의 상징인 불로 이해되고, 이 북을 솟터마당에서 피운 화톳불, 즉 지상에 강림한 태양을 둘러싼 무리가 두드리면 북과 불이 그 신전의 태양을 상징하게 되므로, 영고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뉴질랜드 원주민의 해맞이 제의와 같은 것이되니, 결국 '고'는 해이고, 따라서 영고는 영일이며, 우리말로는 해맞이가 됩니다.
동이의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 해맞이의 규모도 커지고, 지역에 따라 각 종족의 특색이 반영되면서, 고대사회의 여러 축제가 만들어졌고, 그 축제들의 꼭대기에는 동이들의 국중대회가 있었다는 뜻이며, 그리고 국중대회의 원형은 오늘날의 차례풍속에서 찾아볼수 있는데, 즉 모든 자손들이 종가에 모여 조상신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 세계 각지에 퍼져나간 천자들이 신전에 와서 아버지를 만나는 연중행사인 조회가 그것으로, 다른 명절과 달리 '설'에는 많은 금기들이 있는데, 이 금기들은 신전 밖에서 천자들을 수행해 온 사람들 앞에서 일거일동을 조심해야 했던 신전 사람들의 수칙이 변형된 것으로 볼수 있으며, 결국 영고와 다른 축제 명절들은 그 성격이 달랐다고 생각됩니다.
또 영고의 특징은 해와 달을 동시에 맞이한다는 것이니, 발 맞이로 이름을 붙인 이유가 발이 해와 달을 합한 밝음을 뜻하기 때문이어서 새날 햇날부터 보름날 볼의 날까지를 설로 정하여 축제를 벌렸었는데, 볼은 달의 옛말이며, 영고를 머리로 삼는 축제는 당시 여러국의 종주국인 관계상 연중 계속되었는데, 설(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삭일(2월 초하루), 삼짇날(3월 3일), 초파일(4월 8일), 단오(5월 5일), 유두(6월 보름), 칠석(7월 7일), 한가위(추석; 8월 보름), 중양절(9월 9일), 안택일(10월 첫 午일), 동지(11월 중순), 납(동지후 세 번째 未일)등과 같이 달마다 축제가 있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세시풍속이 전해져 왔으며, 홀수 월에는 그달의 숫자와 같은 날에 축제를 지내게하여 밝음이 겹치도록 하고, 짝수 월에는 보름날을 축제일로하여 음의 빛인 달빛이 가장 왕성해지도록 배려하였는데, 이는 이 행사들이 음양의 법칙과 깊은 관련이 있어, 양월에는 속세에 세워진 신전인 용궁에서, 음월에는 산 위의 신전에서 축제를 거행하므로써 음양의 중화를 도모했던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이라 하고 벼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이라 하였다. 산을 군생통력의 장소라 하고 업을 생산 작업의 신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라고도 한다. 집터에 빌기를 또한 터주대감이라 하고, 집에 빌기를 성조대군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을 이루는 신이다. 그밖에도 부모가 죽어서 장례를 지낼 때 지내는 산신제라든지 먼길을 떠날 때 지내는 제사가 그것이며,
묘 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를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모두 각기 제가 있으니 제는 반드시 날짜를 골라 목욕 재계하여야 복을 이루는 것이다. 소도가 서면 반드시 다섯 가지 계율을 읊었으니 이것을 충, 효, 신, 용, 인의 오상이라 했다. 소도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워서 글을 읽고 활을 쏘는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말을타고 격투하고 검술을 익히며 노래와 예절을 익히고 권박을 익혔으니 이것을 여섯 가지 기예 육예라 하였습니다.
또 모든 읍락에 삼로가 있어 지도자로 모셨고, 나라에서는 육정이 있어 국사로 모셨다. 모든 읍락에서는 자율적으로 삼로를 모셨는데 삼로는 일명 삼사라고도 하였다. 삼로는 덕을 갖춘 자와 재물을 베푸는 자 그리고 지혜 있는 자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모두가 이들에게 사사하였다. 또한 육정이 있었으니 현좌, 충신, 양장, 용졸, 명사, 덕우,가 그들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일설의 기록 호칭에서 불례구야 는 제족어 부리쥐야, 고대 음가로 한다면 퓨리기아 여서, 기원전 12세기~기원전 8세기의 고대의 중근동국가 프리기아에서 왔다고 유추 할 수 있으며, 부여에서 나온 신라와 가야가 기마민족이며, 이 나라들이 철기문명을 주도하고 열도에 말과 철기문명을 전파한 부여족의 일파였다고 보여, 가야의 명칭도 바로 여기서 온것으로 보이며,
프리기아는 터어키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당시의 철기문명의 발생국 히타이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 강력한 왕국과 대적할 만큼 힘을 갖추었으나, 기원전 6세기경에 종적을 감추었다고 전해지고, 프리기아의 유명한 왕으로는 미다스왕으로 무었이든지 손에 닿으면 황금으로 변하게 한다는 전설의 왕이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는 우리나라 옛전설의 주인공입니다.
이러한 프리기아는 언어적으로는 이란어등을 사용하고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존속하였던 국가인데, 지배층의 일부가 동진하여 단군조선 후기 삼한 중 일부세력을 형성하고, 이들이 부여를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며, 기록에 그 나라는 대대로 부유하고 선대 이래로 패해본적이 없는 강국이었다. 라는 기록과, 요녕박물관에서 수장 전시중인 부여 철검은 전통적인 환두대도가 아닌 다마스쿠스검의 형태를 띄고 있어, 그 검의 주인공인 부여족이 서쪽에서 이주해온 프리기아민족이라고 추정되는 설입니다.
시조 1세 동명왕(기원전 5세기), 2세 부태왕(2세기), 3세 구태왕, 위구태왕(2세기), 4세 간위거왕(2세게~3세기), 5세 마여왕, 의려왕(~285년), 6세 의라왕(286년~), 7세 현왕(~346년), 8세 잔왕(~494년)은 해씨로 부여국 마지막 왕이며, 고구려 문자명왕 3년(494년)에 나라를 고구려에 바치고 투항하여 부여는 멸망합니다.
기록에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3세 위구태왕은 다시 요동에 속하였는데,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가 두나라 사이에 있어, 종실의 여자를 구태왕의 처로 삼게 했으며, 위구태왕이 죽자, 4세 간위거왕이 섰으며, 현토 태수 왕기가 부여에 왔는데, 위거왕이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고,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왕이 계부의 아비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기록하고, 염송관으로 보내었으며,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왕이 죽자 여러 '가'들이 함께 마여를 세웠으며,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이니, 대사로 하였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하였습니다.
부여국의 왕조는 군소 부족연맹체적인 나라로 초기에는 연맹회의에서 왕을 선출하는 유습이 있었으며, 오래된 제족의 관습대로 농사에 흉년이 들면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했던 사실도 있었으며, 왕조와 제사장이 별도로 운영하지만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모습도 보이다가, 3세기 전반부터 왕권이 강화 되면서, 4세 간위거왕부터 마여, 의려왕 까지 부자 계승이 이루어지지만, 연맹공동체적인 요소는 오래 지속됩니다.
당시 부여국은 위치적으로 남으로부터의 고구려의 위협과 서쪽의 유목제족의 압박을 받고 있었는데, 부여는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요동의 한족세력과 연결을 꾀하며, 한제족국 측도 선비족과 고구려의 결속을 저지하고 제압하는데, 부여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해 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3세 구태왕은 120년 왕자 신분으로, 136년에는 왕으로서 한나라를 방문하고, 당시 요서, 요동, 중료,에 삼군을 독자적으로 거느린 공손탁 집안의 여인과 혼인을 하였으며,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244∼245년) 현도태수 왕기가 부여를 방문했고, 부여는 그들에게 군량을 제공하는 등 이후까지 밀접한 관계가 지속되었으며, 동으로 읍루족을 복속시켜 공납을 징수하기도 합니다.
일설에 5세 연나부 의려왕 정주는 국이 도읍한 땅인데,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으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 라고 하고, 은밀하게 아들 의라에게 국읍을 맡끼고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는데,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여,
혹자는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하고,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 라고 하였지만,
길림 지역에 중심부를 두고 있던 부여는 285년에 모용괴의 침공을 받아 왕인 의려가 자살하고, 부여인 만여명이 포로로 끌려 가는 국위의 위기상황을 맞이했는데, 이때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났으나, 그 다음 해에 진의 도움으로 다시 길림으로 돌아가 나라를 복구할 수 있었으며, 일부 세력은 옥저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들은 3세기 후반부터 길림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차에, 고구려의 도움으로 모용괴의 군대로부터 벗어나 옛날 북옥저가 있던 고구려의 동북 변경인 연변지역에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 나라가 곧 광개토왕비문 경술년조에 나오는 동부여이며,
동부여는 처음 얼마동안은 길림에 있던 부여 본국과 교통하기도 했었으나, 본국이 농안으로 옮겨간 다음 고구려가 길림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고, 이후 동부여는 형식적으로만 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며 고구려 영역 안에서 존립하다가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되게 됩니다.
5세 마여왕이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으며,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으며,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하여, 위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 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하였습니다.
341년 모용부의 모용황은 동진으로부터 연왕으로 책봉받게 되면서 나라를 전연이라고 하여, 342년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국원왕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를 사로잡고, 남하하여, 352년 전연의 모용준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업(현재의 베이징 서남)을 수도로 하여 제국을 선포하였는데, 3세기 후반 전연의 성장은 부여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
초기에 위나라 공손연과의 갈등이 부여계가 남하를 하게되고, 고구려와 모용부의 압박은 부여계의 남하를 초래한 것인데, 285년 모용부는 부여를 침략하여 수도를 함락하고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지만 그 뒤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근거지를 서쪽으로 옮겼으나, 346년 전연의 모용황의 군대가 침입하여 왕을 비롯한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가 사실상 궤멸되었습니다. 그 후 고구려의 보호국이 되었다가 494년 고구려에 완전히 흡수됩니다.
이처럼 부여국이 위치한 만주지역은 중동의 페르시아지역 처럼 많은 국가들이나 종교가 발생하는 지역으로, 물길 말갈 여진의 전신 '숙신'은 후에 금 청나라를 건국하며, 동호, 흉노전신 해, 실위, 거란, 이 후에 북위, 요, 원나라, 를 건국하는 그야말로 많은 나라들의 제족들로, 그 중 부여 또한 여러 소국들이 명멸하는 여러나라의 일부로, 위치나 족벌에 따라, 북부여국, 졸본부여국, 동부여국, 갈사부여국, 등으로 나누며, 그 영향력은 대륙 동중부와 반도 남방과 일본 열도까지 이르며 부족공동체를 이룬 나라들인데,
3세기 후반 당시 북옥저의 서북쪽과 남쪽 지역 모두에 고구려 세력이 진출해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부여의 망명집단이 연변지역에 동부여를 세우고 5세기 전반까지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양해와 적극적인 주선으로, 부여에서 망명 온 일부 정치세력이 고구려의 인도 하에 옛날 북옥저의 중심지이자 3세기 후반 당시 고구려의 동북부의 중진이었던 책성 주변 일대에 안치되어 고구려의 양해 아래 반독립적으로 살았다고 보이고,
이들 부여의 망명집단들은 조금 있다가 진의 도움으로 다시 길림지역으로 돌아가서 나라를 재건했으나, 일부는 그대로 북옥저 지역에 남아 있게 되는데,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까지는 고구려의 북쪽과 동쪽 두 곳에 부여가 있었으므로 고구려에서는 자국의 방위개념에 따라 길림에 있던 부여를 북부여라 하고 연변지역에 있던 부여를 동부여라 하였을것입니다.
기록에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니, 옛 숙신국의 지역인데, 읍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으며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고, 그들은 굳세고 흉폭하여 동이 중에서 가장 강하며, 언어도 그들 만이 다르다. 두막루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며 여러 나라도 이들을 두렵게 여긴다. 하여, 이 시기의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지역에 있었던 실위와 함께 덴마크 론강지역에 있었던 두막루가 동진하여 북부여국이 된것이라 추정될 수도 있게 합니다.
또 기록에 남부여 백제는 부여의 후예들이며, 4세기 중후반 백제 왕성이 부여씨였고, 고구려의 건국에는 고씨가 중심으로, 같은 부여족이라고 할지라도 부여와 고구려는 중심 세력이 좀 다르고, 고구려 건국의 중심 세력인 고씨는 부여의 주된 세력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고구려나 남부여 백제는 하나같이 동명묘에서 제사를 지내, 실제 시조와는 달리 동명왕을 시조로 간주하고 있으며, 두 나라의 왕들은 정기적으로 참배하고 있었는데, 고구려 대무신왕 3년 동명왕묘를 건립한 기록에 고구려가 시조묘를 건립한 기록은 없지만 시조묘에 가서 참배한 기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대 고구려왕들이 참배한 곳이 바로 동명묘로 간주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의 온조왕편을 보면, 도읍을 정할 때 신하들이 동서남북의 사방의 입지조건을 들어서 왕을 설득하고 있을때, 지배영역을 사방사비로 표현하는데, 이 같은 사분관적 의식은 부여인들의 공통된 특성인 사출도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여국의 권력구조는 왕 밑에 제가나 제가회의라는 귀족회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단군조선과 고구려에도 있었으며, 제가의 지위는 국왕 다음으로 권력은 매우 대단하며, 사건 심판과 국정 처리에 참여할 권한이 있었다 합니다.
기록에 수백호에서 수천호로 여러 부족장이 있는 '가'는 수도를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외부군인 사출도를 갈라서 맡고, 침입자가 있으면 여러 '가'는 스스로 전투에 나서고 노예집단들인 하호들은 식량을 담당하여 전투에 나선 사람들의 먹고 마시게 한다. 하며, 관인 직책 마가·우가·저가·구가·양가·대사·대사자·사자, 등 오가로 단군조선의 것과 같이 쓰고 있다 하였고, 대가는 수천호를 소가는 수백호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고추가 가 있었는데, 왕족이나 왕비를 배출한 가문을 말하고, 이 가 와 고추가 체제는 고구려로 전승되며, 참고로 고구려는 사출도의 마가에서 나왔을 수가 있습니다.
한편 이를 두고 단군조나 부여조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한족 사가들이 직책이나 족을 동물로 쓰인 것이라 비하투로 기록한 것이 보입니다.
이 부여의 지방 지배구조는 사출도에 중앙 한 도를 더해 오도가 되며, 각 도마다 신녀 가 있어 신궁에서 복을 기원하고 제사를 지내는데, 일설에 한나라 조정이 부여의 임금이 죽으면 미리 옥갑을 만들어 두었다가 보내준다고 한 기록이나 삼국지, 동이전에 한나라 때에 조복과 두건을 고구려에 바쳤다는 기록 등이 있어, 한나라가 부여나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긴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담으로 이 사출도라는 개념은 어린이들이 즐겨 놀았던 게임 사방치기의 원형에 해당한다고 보는데, 일설에 이 기원을 로마나 서방지역에서 온 것으로 본다 하였지만, 부여로부터 일본을 위시한 여러 나라들이 갈라져 나온것을 감안한다면 틀림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 시기에 제족의 체계가 부계왕권으로 돌아선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부여의 국호가 지아비 부로 상징되는 것은 이런 사정을 나타낸다고 보여지며, 진나라의 복생은 상서대전 속에서 해동제이 부여지속이란 기록이 있어, 제족에게는 여러 족명이 있는데, 이것들은 원류를 찾자면 모두가 부여에 속하는 것입니다.
기록에 3세기경 부여는 본래 '예'의 땅에 예맥계 제족으로, 현토 북쪽 천리에 있었는데, 남쪽에 고구려가 있고, 읍루와 옥저가 있으며, 서쪽에 선비와 접하며, 북으로는 익수가 있다 했는데, 익수는 동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이며, 지방이 2천리이며, 또 부여는 거연 호의 바로 남쪽지방에 있었으며, 이곳도 옛 '예'의 땅이었다. 하였습니다.
고고학 문화로 본다면, 부여의 동쪽에 연해주 지역의 폴체 문화의 읍루, 두만강 하류 유역에 분포하는 단결문화와 연해주 지역의 크로우노브카 문화와 동일한 옥저문화가 있고, 장례문화 무덤으로는 부여는 일차장과 단인장이며, 선비는 이차장과 다인장과 동물 순장과 두관족협 목관을 사용하였으며, 주로 내몽고 동부지역과 길림지역에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부여 문화는 기원전 2세기경의 청동기 시대의 길림시 서단산문화로 대별되며, 후에 철기시대 대해맹, 포자연문화로 이어 집니다.
기록에 읍루를 각 마을마다 대인이 있어 다스렸으며, 사람들은 산림에 거처를 마련하였는데, 매우 추워 움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깊이가 깊을 수록 귀하였다. 하여, 큰집은 사닥다리 9단을 딛고 내려가야 하며, 돼지고기를 즐겨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그 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았으며, 여름에는 벌거벗다시피 하여, 작은 천으로 앞뒤를 가렸고,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불결하였으며, 변소를 집들이 둘러 있는 가운데 만들었다. 고 하였고,
숙신씨는 다른 이름으로 읍루이다. 사람들이 깊은 산골짜기에 살았는데, 거마가 다닐 수 없었고, 여름에는 소거에 살고 겨울에는 움에 살았다. 라 하여, 소거는 바로 고상주거를 말하며, 겨울에는 움에 살다가 여름에는 소거에 산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소거는 쉽게 지을 수 있는 집이라 판단되며, 때문에 고구려 마선구 벽화의 고상구조로 된 귀틀집은 아니고, 바닥을 높게 만든 원두막과 같은 집이었다 보며, 번한도 그 나라는 집을 짓는데 나무를 횡으로 놓아 마치 감옥처럼 만든다. 하여 귀틀집을 이리 부른것으로 보입니다.
토기는 물동이, 굽접시, 사발, 쌍이호, 단경호, 완, 반두령토기, 시루, 등이고 건축물 소재의 토제품인 전와가 있었으며, 철기, 청동기, 금, 은, 석제 장식품, 등이 있는데, 크게 보면 무기, 생산공구, 생활용구, 차 마구와 장신구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들은 기원전 1세기에서 3세기에 한나라의 한사군 설치와 함께 선비 연나라가 등장하고, 전국시대에 돌입하면서, 서편 대륙문화와의 교류가 확대 되면서 더욱 풍부한 부여문화를 만들었으며, 교류의 결과 유물에 있어서는 새로운 토기 양식이 출현하고, 철제 농경 도구가 사용되며, 유적에서는 토광묘가 이전의 석관묘를 대체하게 되어 물질문화의 다양한 변화를 맞이합니다.
기록에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굳세고 용감하며, …외국에 나갈 때는 비단옷, 수놓은 옷, 모직 옷을 즐겨 입고, …또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조두를 쓰고, 모일 때는 벼슬 높은 이에게 절하고 잔을 씻어서 권하며 읍하고 사양하면서 오르 내린다. 하였고,
섣달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매일 연이어 큰 모임을 가져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데 이름이 영고라고 한다. 행인은 밤과 낮이 없이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며, 이때는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은 석방한다. 하였으며, 부여인들은 길을 갈 때 밤이든 낮이든 노인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여 사실상 노래와 춤을 좋아였습니다.
군사에 관한 일이 있을 때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그 발굽으로 길하고 흉한 것을 점을 치는데, 소 굽 이 갈라지면 흉하고, 모이면 길하다. 라 했으며, 돌궐과 거란의 풍속과 똑같다. 라 하였으며,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들이 스스로 전쟁을 하는데, 아래 백성들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이를 먹였다. 하고, 그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하였으며,
나라에서 좋은 제사용 소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오는데, 구슬이 큰 것은 대추만 하다. 하고,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무기가 있고, 나라의 늙은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 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하였으며,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하는 것도 있고, 익히는 것도 있고, 상주는 빨리 하고자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제로 잡아당겨 다투면서 이를 하며, 상에 거할 때, 남녀는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거리와 패물을 때어 놓으니, 대체적으로 한제족국과 비슷함이 있다. 하였으며,
또 그 풍속은 형벌을 행함에 엄하고 급하여, 죽음을 당한 자는 그 집안 식구들을 모두 노비로 삼는데, 한 사람이 도둑질하면 열두 갑절을 책임져야하며,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면 모두 죽인다. 하고, 강생(질투, 강샘)하는 여자는 더욱 악하게 다스리는데 이미 죽였는데도 다시 그 시체를 산 위에 갖다 놓는다. 하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사람이 죽으면 곽은 있어도 관은 없으며,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때는 백 명이나 되었으며, 그 왕의 장사에는 옥갑을 사용하여, 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현토군에 주어,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취하여 장사를 지냈다. 하였습니다.
부여 지역에 나타난 최초 대형 청동기물은 떡을 만드는 시루인데, 신석기시대에는 아마 쌀로 밥을 하지 못하고 떡을 만들어 먹은걸로 보이며, 이 지역에서 조나 보리를 주로 농사하였을 것인데, 역시 떡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떡 시루는 시라무렌강 부근인 천보동에서 발굴되어, 단군 왕검이 그 아들 부여를 보냈던 부여성은 바로 이곳으로 확정되며, 천보동 동남쪽 10여km 지점에 용두산 석성터가 있는데 제사터가 발굴되었는데, 이곳 고분에서는 청동도끼, 청동검 등이 묻혀 있어서 천년간 대대로 전해져온 부여왕권을 상징합니다.
천보동 지역은 시라무렌강 상류로서 보통 해발 1000m인데, 이 강변은 해발 700m로 일정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며, 부여성은 당시에 시라무렌강 북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시라무렌강에 성 중앙을 관통당하고 있고, 요나라는 이곳에 요주성을 세웠다 하며, 부여성이 있던 천보동에서는 상나라 때의 청동기물이 4점 발굴되었는데, 청동솥, 추, 부, 등이고, 용두산은 토성자진 6km 남쪽으로서 동으로는 위당하가 있어 옹고트 빈수와 이웃하고 남쪽에 용두산 유적지 규모는 600m x 400m 규모로서 해발 900m로, 제단 유적지를 비롯해 많은 유물이 나왔고 묘장은 토갱수혈묘제였습니다.
1기 유적지에서는 도끼 자루를 도끼 머리 양쪽에 매는 연병동부가 나왔는데 상나라 형식과 같고, 러시아의 바이칼 북쪽 앙가라고원과 예니세이강까지 퍼졌다고 하며, 공병식 직도검과 넓고 둥근 청동 화살촉과 가늘고 긴 두 종류의 화살촉이 나왔고, 동포, 연주 장식, 대식, 등 청동 장식품도 다수 나오는데, 주조용 석범까지 발견되어 자체 제작한 것으로, 연대는 기원전1,250년경이며, 용두산의 제단은 전방후원 모양으로서 40 x 40m 규모다. 이곳에서 사슴 문양 동패식이 나왔고, 2기 유적지에서는 흑룡강 백금보유지의 영향을 받은 기하문 도기들이 많이 나왔다. 이는 단군 왕검 시대 전파된 것이며, 기타 제사갱이 7개, 순장갱 2개, 그외 72갱이 나오고 별도의 묘장은 4개가 발굴되었습니다.
부여의 진출사레는 대륙이나 반도, 열도, 까지 있었지만, 대륙 서방으로는 4세기말경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캅카스지방으로 일단의 부여족이 이동하였는데, 이곳은 본래 비잔틴제국 속지였다가 동방 아발족의 영향에 속하는 곳에 부여족이 5~7세기까지 돈강 양안과 북캅카스지역에 흩어져 살았다고 서양사에 불가족이란 명칭으로 나옵니다.
635년경 이 부여족이 강성해지자 쿠브라트칸는 불가연합을 결성하여 아발족에서 독립하며, 대불가리아를 건국하며, 7년 후 칸의 다섯아들은 칸의 죽음 후 서로 헤어져고, 둘째와 셋째가 외세를 극복하고, 둘째 코트라그가 북으로 이동 하여 그들이 이름붙인 볼가(불가)강과 카마(고마)강 합류지점에 고추불가국을 건설합니다.
이 고추불가국은 14세기까지 이곳에 정착하며, 922년 바그다드 사절단으로 아랍세계에 볼가볼가국으로 알려지며, 현재 타타르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 사는데, 그 언어의 문법 구조는 한국어와 동일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 덜 돼 동양인의 모습입니다.
한편 세째아들 아스파르흐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 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에 도착했는데, 이때가 680년으로 이곳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누스 4세는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과 대치하다가, 다음해 결전을 벌여 불가족이 승리하고, 그 지역에 불가리아왕국을 건국합니다.
이 때 결전 전 후에 불가족은 단군에게 승전의 기원과 감사의 제천의식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불가족의 땅인 불가리아는 불가리아 제1제국으로 불가족은 귀족이 되어 '보야'(부여, 부유)라 불렀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 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나중 로마군과의 전쟁에 승리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기며, 수도 이름을 소비(사비, 소피아)로 정하고, 소비 동산 제천의식하던 산을 발칸산(밝안산, 밝산)으로 정합니다.
참고로 부여는 육국중 최초로 부여씨나 해씨 등 성을 왕족이나 귀족들이 쓰는 국가로 자리매김 하며, 또 기록에는 없지만 발해가 초기부터 자국 위주의 문자인 가림다와 한자를 썩어쓴 정황이 부여가 단군조선으로부터 전승된 과두문자 녹서와 가림다에 초기한자를 썩어 쓴 것을 이어받아 발해가 초기부터 써온 사실이라 추정해 보며, 동명이란 말은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사용한 칭호이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닙니다.
북부여국 (기원전 239 ~ 기원전 8년)
1세 해모수 왕(기원전 239~기원전194년) 고리국 사람으로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켜 단군조선 마지막 도읍 백악산 아사달을 점령한 후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 8년(기원전 232년)에 오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고 단군으로 추대 되었으나, 단군의 지위를 임의로 참칭한 기자계라는 것을 들어, 4대까지 왕들의 단군의 칭호는 같이 하지 않으며, 위치는 길림, 장춘, 농안 방면의 일대 지역입니다.
계해 2년(기원전238년) 이 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기사 8년(기원전232년) 왕이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고,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으며,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임신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하였으며,
경진 19년(기원전221년)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고,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는데,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으며, 신사 20년(기원전220년) 백악산 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7월 새로운 궁궐 336간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였습니다.
계미 22년(기원전218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왕정(진시황)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거를 박살냈는 사건인데, 당시 진나라는 진시황의 중앙집권제를 통하여 통치했던 최초의 나라였고, 제나라 사람 순우월이 비난하자, 승상 이사는 진시황에게 상주하여 분서를 단행하게 하였으며, 분서란 동이제족의 역서이며 춘추전국 제족 각 나라 역사서를 모두 불태운 사건으로, 신선사상 등의 동이제족 계통의 문헌들을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한제족국문헌에서 단군과 한웅의 기록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환국의 문화는 유교문화로 둔갑하고 말았으며, 갱유 또한 유교의 선비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신선사상의 방사나 그 문하생 460명을 매장한 것이며, 그때 진시황은 신선설을 믿어 방사를 신임했는데, 그 중의 후생, 노갱, 두 사람이 진시황을 비난하고 도망치자, 그 동료가 숨겨주었으므로 수도에 있는 방사들을 모두 잡아다가 산채로 묻어 죽인 사건이며, 이러한 동이제족 문화의 탄압은 한나라 때에도 계속되었고 유교는 계속 보호를 받았으며,
유교는 왕 또는 천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여 중앙집권을 하는 통치자에게 유리했는데, 그것은 한제족국 중화사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며,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춘추제국은 역사와 족보를 잃어버리고, 단군조선과의 유대를 잃어버리게 되어, 후한서 동이전 서문에 '진나라가 6국 춘추제국을 통일하자 회사, 지금의 황하와 장강일대에 있던 오랑캐(동이족)들이 모두 나라와 조상을 잃어버리고 백성이 되었다.' 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진시황의 탄압에 대하여 창해역사 여홍성과 한나라의 장량의 진시황 저격사건이 있게 된 것입니다.
임진 31년(기원전209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 하였으며, 기해 38년(기원전202년) 연나라의 노관(기원전247년)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오늘날의 난하입니다.
병오 45년(기원전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망명을 요구했으나 왕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고, 왕이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고, 이 해 겨울 왕께서는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 모수리가 즉위하였습니다.
일설에는 단군조선의 마지막 고열가 단군이 몽골초원에서 발견된 돌궐 제 2제국기의 비문 궐특근비에 단군(당골,탱그리) 올칸께선...키즈의 무리들을 피해 아사달로 피신하셨다가...잡혀 목이 잘려 돌아가셨다고 기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 키즈의 무리란 돌궐인들 역사 내내 한족을 거란 키타이로 불렀고, 그들 시각에선 중원 서북방의 중앙아시아 카라키타이 계통이 바로 고대의 한족의 원류가 되며, 기주지역의 제후, 기자, 무리라 추정합니다.
2세 모수리 왕(기원전194년~기원전169년) 정미 원년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매우 풍부하였는데,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며, 월지는 탁이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하고,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 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하였습니다.
무신 2년(기원전193년) 왕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으며, 이듬해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으며, 신미 25년(기원전170년) 왕이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였습니다.
3세 고해사 왕(기원전169~기원전120년) 임신 원년에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는데,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해모수왕 병오(기원전195년)년의 겨울이었고, 계축 42년(기원전128년) 왕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으며, 경신 49년(기원전121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으며, 이해 9월 왕이 붕어하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습니다.
4세 고우루 왕(해우루 기원전 120년), 까지가 해모수계입니다. 신유 원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고,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 하며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으며, 계해 3년(기원전118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자,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으며, 갑자 4년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 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자, 병인 6년 왕이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 모두가 항복해 왔다. 하였으며,
정묘 7년(기원전114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고, 계유 13년(기원전108년)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고,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하고,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와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하니 왕은 매우 곤란해져, 마침내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자,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기며, 국상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 동부여라고도 합니다.
졸본부여국 (기원전 ~ 108년)
5세 고두막 왕(기원전 ~108년)은 기원전 87년 4세 고우루 왕 단군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단군으로 등극하였으며, 도읍을 졸본 땅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여 동명계라 표명하고, 즉위후 5번 한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며, 요동군 서안평까지 수복하였다고 전하는데 이는 낙랑군을 모두 수복한 것이여서, 설치 20여년만인 한나라 소제 때, 기원전 82년에는 진번군, 임둔군을 폐지하였고 한의 낙랑군은 의무려산 서쪽으로 내려가며,
고두막 왕은 기원전238년에 해모수에게 단군조선을 빼앗겼던 고열가의 후손 영품리왕의 아들이고, 졸본성은 고주몽의 2번째 도읍 눌현성인 황성이었고, 고국천왕의 고국 이었고, 고국원왕의 동황성 이었고, 발해 서경압록부 신주성이었는데, 심양 북쪽 개원시 창도현 천두진이며, 고주몽은 광개토왕비문에서 비류수에 홀본성을 지어 건국하였고, 다음해 비류왕인 송양의 항복을 받고, 3년후에는 골령에 황룡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서 궁궐을 지었는데, 이 골령의 황룡성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졸본천의 졸본성입니다.
기록에 을해 3년(기원전106년) 왕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는데,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와 싸울 때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으며, 갑오 22년(기원전86년) 4세 고우루왕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를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하였습니다.
을미 23년(기원전86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왕이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으며,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으며, 임인 30년(기원전79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고, 신유 49년(기원전60년) 왕이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고, 태자 고무서가 등극하였습니다.
6세 고무서 왕(기원전 59년) 임술 원년 왕이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으며, 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 불렸는데, 이 때에 한나라가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우자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으며,
둘째 딸을 고주몽의 아내로 삼게 하여 장자 유리가 태어나 뛰어나므로 해서, 장차 고구려의 2대 왕이됩니다. 이때 나라에 연타발이란 군장이 있었는데, 소서노의 부 이며, 주몽은 6세 고무서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하나 확실치 않으며, 참고로 졸본의 졸은 높다란 뜻이 있어서, 후에 주몽의 성씨도 높다라는 '고' 자를 쓰게 되며, 고구려의 국호로 쓰게된다 했는데, 확실치는 않으며, 계해 2년(기원전58년) 왕이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으며,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하였습니다.
동부여 (기원전 89년 ~ 기원후 22년) 일명 가섭원 부여
1세 해부루 왕(기원전 86~)은 북부여 4대 고우루 왕의 동생으로 해모수계 4세 고우루 왕이 초대 졸본왕 5세 고두막 왕의 압력으로 죽자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두막에게 쫓기어 가섭원(길림방면)에 나라를 열었으니 이를 동부여라 하였으며, 2세 금와 왕(기원전 47년), 3세 대소 왕(기원전8년)을 끝으로 22년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멸망 당합니다.
기록에 기원전 86년 을미 원년 왕은 북부여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는데,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 3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으며,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으며, 기원전 79년 임인 8년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며,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하고,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데,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하였습니다.
기원전 77년 갑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큰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 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하였습니다.
2세 금와 왕(기원전 47년) 갑술 원년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고, 정유 24년(기원전24년) 유화 부인이 돌아 가시자,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으며, 갑인 41년(기원전7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습니다.
3세 대소 왕(기원전8년) 을묘 원년(기원전6년)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자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고, 고구려의 열제도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고,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으며, 계유 19년(A.D.13),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고,
임오 28년(기원전22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시 모아서 침범해 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 대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서 있다가 살해하였으나,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으며,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 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으며,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하였습니다.
갈사부여 (22년~ )
1세 갈사왕(22년~)은 동부여 2세 금와 왕의 6남으로 3세 대소왕이 죽자 동부여를 벗어나 새로이 갈사부여국을 세웁니다. 2세 왕은 갈사왕의 아들이며 3세 도두왕의 부인데, 미상이며, 3세 도두왕(68년 전후)은 마지막 왕이며, 고구려태조대왕에게 나라를 바치고 우태 벼슬을 부여 받습니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하였으며, 고구려는 도두를 우태라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시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으며,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 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 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는데, 그의 등에 떼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燕) 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494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하였습니다.
육국과 삼국의 정립
대다수의 역사서에는 삼국시대만 기술하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삼한분립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삼국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 보기 때문에, 여기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왜, 발해, 를 포함하며, 그 중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을 전통대로 묶고, 가야와 왜, 발해, 를 보태어 육국으로 기술합니다.
삼국을 굳이 강조하려는 이유들은 이 삼국이 단군조선의 삼한 삼조선의 부활이란 연장선상에서 보기 때문인 것도 있겠으며, 유목제국들의 삼의 체제 유습에 기인하는 측면 또한 있지만, 부여, 가야나 왜, 발해,에 대한 인식이, 제족들의 나라 중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들이 다른제족들과 혼잡성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여기서 육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한제족을 돌아보면, 그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중심영역은 장안이나 낙양 등 내륙 깊숙히 자리잡고 중원이라 하였으며,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나 초나라는 제후들의 회맹에도 참석치 않았습니다.후에 한나라가 서게되자 그동안 하족, 제하, 로 불리던 한족들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며, 그들의 정체성 형성은 동아시아 역사에 여러 부정적인 요소인 습합, 분리, 이간, 동화, 등의 책략들이 작용하지만, 육국들의 영역은 대체적으로 대륙 동부지역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륙 모든 한제족이나 제족들의 시원을 신학적이나 언어적으로 본다면, 그 뿌리가 제족의 신화와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밝 이란 말이 밝달 배달이 되고, 맥·해·밝마루·파미르·아사·아시, 가 되며, 밝아강이 볼가강이 되며, 밝한이 변한, 밝조선이 발조선, 번조선이 되고, 밝한반도가 발칸반도가 되며, 바 는 인도 바라문, 이집트 파 로, 앗시리아 바알신,이 되고, 부는 부루·부도·북악·가야나 인도의 부다·해부루 해브라이·히브리,가 되며, 불은 불타·불가리아,가 되고, 파는 밝나라·밝문·파라문·바 로, 파라오·페리·페르시아·페루·바리·파리,가 있습니다.
원래 골이란 말도 대홍수때 둥그런 동산, 높은 언덕, 고원 등에서 사는 마을 즉 고을을 말하며, 고산신앙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홍수기 후에는 사람들이 점점 평야지의 강, 호수, 바닷가나 계곡의 물가로 내려와 살게되니, 높은 곳의 뜻이 반대로 낮은 곳인 물, 계곡의 뜻으로 변하기도 하였으며, 나라라는 개념을 가지기도 하였는데, 고리아·만주리아·앗시리아·사마리아·이탈리아·불가리아 등으로 쓰이다가 끝에 골, 또는 고리의 리가 빠지고 아만 붙은 이름인 골 로 변하였습니다.
노아·수아·시므아·리비아·에티오피아·페니키아·아라비아·리디아·코카시아·게르마니아·인도네시아·알바니아·러시아·이디오피아·알제리아·필라델피아·콜롬비아 등인 '아' 는 물 또는 물가란 뜻으로 쓰였으며, 골은 싸릿골·골고다· 골란(고원),으로, 고는 고을·고리, 로, 구는 구리, 로, 구려, 고려, 원래 발음은 리 입니다.
알은 난생신화를 가진 대륙북방족들의 대표적인 말로, 주로 태양, 태양신, 태양의 정기, 한님, 씨 등을 뜻하는 말인데 우주란 뜻도 있으며, 알다이(알파벹 발음 알타이)는 태양신인 환인, 또는 태양신의 아들인 환웅이 인간으로 태어난 곳으로서 알다이산(금산)과 바이칼호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태양신 햇님(환님)이 직접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70,000년 전~6,5000년 전 사이에 처음 오신 분을 말하며, 그 이후의 환인들은 태양의 여러 신들이 내려와 사람으로 태어나 햇님의 가르침을 전하였습니다.
태양신 햇님으로 비유한 인물, 또는 햇님을 나타내는 알 에서 태어났다는 난생설화는 주로 한국, 몽골, 중국에서 나타나고, 태양의 정령 즉 성령새인 까마귀나 까마귀의 변형인 기러기, 오리, 늑대, 사자, 비둘기 등이 나오는 것은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어, 까마귀란 검(신)새-고마새-가마새- 까마귀(신귀)로서 하늘새, 성령새, 천둥새란 뜻입니다.
바람신 풍백, 구름신 운사, 비의 신 우사를 거느렸으니 태양에 비유한 천왕이란 뜻이며, 실제로 태양신 햇님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난 분은 시조한웅 한 분이며, 후에 약 5,000년 전에 7회 제신의 풍습으로 발전되어 해신(태양), 달신(달), 불신(화성), 물신(수성), 나무신(생명나무, 진리도덕, 목성), 대지신(지구)의 일곱신에게 제사드리는 풍습이 되었는데, 이것은 수메르에 전달되어 해신 우투, 바람신 엔릴, 물신 엔키, 달신 난나, 천둥신(불신) 아다드, 금성신 인안나, 등이 유물유적에서 발견되며, 이것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일주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우주의 별에 대한 신앙은 제족의 신앙이 유별난데, 그 중 대자연의 신비에 해당하는 칠성, 삼태성, 용, 등의 신앙에선, 서구는 별 숭배 신앙이 일반적이었고, 나중 천문의 사상으로 까지 나아 갔으나, 제족은 고대로 부터 별에 대한 신앙이나 별과의 동일시 하는 등 사상의 흔적이 고인돌에 성혈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구술 되어온 설화에서 많이 나오고 있으나, 지금까지 그 사상의 잔류는 북두칠성, 삼태성, 에 대한 숭배 신앙이 남아 있으며, 고대 유목제족들의 유습은 북극삼성의 원리에 따라 모든체제를 셋으로 나누게 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칠성신앙은 불과의 연관에서 환사상과도 관련되나, 세속적 요소인 비, 수명, 운명, 죽음, 탄생, 등과도 이어지며, 용 신앙과 더불어 물과의 친연성으로 보아 해안이나 강 주변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며, 실재로 칠성이나 용왕에게 기원하는 의식에는 물(정한수)이 등장하고, 근대 까지도 묘제와 관계된 칠성판이나, 삼신할미께 자손의 탄생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있어왔습니다.
한편 태호복희, 염제신농, 소호김천, 요임금, 순임금,을 해에 비유하여, 상고시대 제왕들은 모두 제족들이며, 또 부여시조 동명, 백제시조 구태, 북위 도무황제 척발규, 금나라 시조 아골타, 징기스칸의 선조는 알처럼 둥근 빛으로 임신하였고, 은나라 시조 설과 진시황의 시조 대업은 현조 까마귀 알에서, 신라시조 박혁거세, 가락국시조 김수로왕은 알에서 탄생하였으며, 수메르에서 알은 존칭, 말씀, 의 뜻이며, 최고신 안, 아누, 안나, 는 하늘, 꼭대기, 천국, 천주, 인데, 씨 나 알 과 같습니다.
까마귀는 견우 직녀를 잇는 다리로, 고구려시조가 대동한 오이, 백제시조가 대동한 오간은 까마귀를 상징하고, 수메르, 바빌론, 몽골, 성경 홍수설화에도 까마귀가 나오고, 일본 간 연오랑 세오녀, 스웨덴, 네델란드, 창조설화에도 까마귀가 등장하며, 길 안내하는 까마귀의 신무천왕, 까마귀와 늑대가 키운 오손왕, 캄차카 반도 코락족, 축치족, 알래스카, 그린랜드, 카나다 북부는 까마귀가 시조로 되어있습니다.
당시는 도교와 유가 등 많은 사상들이 대륙전체에 퍼져 있었으며, 육국들은 단군조선으로의 고유사상으로 말미암아 큰 변동은 없이 서서히 습합되는데, 다른 나라들 왕조는 육국의 삼신 상제를 알고 있음이 기록에 나타나며, 특히 도교가 신선가, 방선도, 라는 황로지술로 신비한 반종교적 색체인 노장철학이나 도가학설로 황제의 이름을 사칭하기에 이르러, 고구려에 까지 방사가 전교하는 등 도가는 여러나라로 퍼지며, 특히 진시황이나 한나라 무제는 불로장수의 연단술에 깊이 빠지기도 하여, 한제국 전반에 선풍적인 유명세를 탑니다.
그러나 이 선사상은 본래 제족의 신선사상에서 나온것으로, 역대 신선사에 나오는데, 동왕공이 기록한 천지개벽 초두에 자부선인이 제족에서 출생한 것과, 황제가 자부선인을 찾아간 신화를 적은 것이 신선사에 나오며, 또 도교경전에는 운급칠점에 적송자가 말하는 삼신산 중 봉래산에 대해 봉래산이 동해의 동북쪽 언덕을 오천리를 돌아서 북쪽으로 가면 그곳에 닿는데, 이곳은 중국의 밖이며, 천제 임금이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황화문화권에서는 북위 왕조와 강남지역은 선사상의 일종인 도교 문화를 꽃피웠으며, 적석목곽분 시대 인 대륙에서는 종교와 철학으로서의 도교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장철학과 강남지역 문화권의 전통적 무격신앙이 발해만 문화권의 신선사상과 완연히 결합을 이루며, 불로장생을 표방하는 도교신학은 이미 동진시대 갈홍(283~343년)의 포박자에서 완성을 이룩했으며, 남조 양대 도홍경(456~536년)에 이르러 더욱 완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로국의 묘제는 배달국 복희씨의 묘제인 통나무 목곽분을 이어받은 적석목곽분으로 선도영향이 보이며, 고구려에서 도교가 끼친 영향력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무수하게 포진된 고분벽화가 증명하고 있으니, 여기에 나타난 주된 사상사적 흐름의 대세는 배달국으로부터 내려온 선도를 바탕으로 하고, 일부 도교적 신선사상이 있었고, 장수왕이 건립한 광개토왕비문(414년)을 보아도 거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와 광개토왕의 위훈은 도교신학에서 일부 차용하였다고 봅니다.
백제 또한 적석목곽분이 축조되던 바로 그 시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이 있으며, 여기에서 확인된 매지권과 동경 및 환두대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장품은 선도의 영향을 확인하게 하며, 기록에 이보다 앞선 한성도읍기인 진사왕 7년(391) 봄 정월에 백제는 궁실을 고치고 수리하는 한편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와 이상한 화초를 길렀다고 했으니, 이 때 조성된 궁원지가 선도신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3신산인 봉래, 방장, 영주, 를 형상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신산에 대한 기록 일설은 한무제가 불로초가 나는 삼신산을 가려하고, 신하 동방삭이 이를 말렸지만, 발해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동부여에 협조를 구하는 등으로 노력했지만 고구려에게 패하여 창해군을 철수하였고, 후에 계속 발해 근방 태산에 행차하여 제사와 치성을 드리는 등으로 노력하다가, 또 동해 수군을 집결시켜 발해에서 일개 군단을 이끌고 군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삼신산 신선을 만나려 갔으나 또 태풍으로 실패하자, 포기 하기에 이르렀고,
이 삼신산을 모방하여 인공호수 안에 삼신산 모양을 만들고, 돌로 조각한 거북모양과 고래모양도 있게하여, 이를 태액지 또는 봉래지라고도 하였고, 발해연안이나 태산에서 치성드릴 때에는 단군조선의 박산향로를 모방하나 기단을 거북을 용으로 바꾸거나 아애 기단없는 향로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향료는 아라비아에서 수입해서 사용하였다는 것이며, 그 나무껍질에서 추출된 향료는 신명과 통할 수 있는 환각작용을 이르키는 특이한 효능이 있었다는걸로 이해되며, 한무제는 흉노의 우현왕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그 왕자였던 김일제를 끌고와 천리마를 조련시키는 책임을 맡겼다가가 차차 신임을 얻게되자 천제를 주관하는 투후로 봉한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흉노족의 천제 의식에 따라 금인(금불상)을 감천궁에 안치하고, 오직 향만을 태워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일제가 천제를 주관하는 투후가 된 배경에는 장도의 천후궁과 관계가 있다고 보이며, 장도에는 천제를 주관하는 신녀와 제관들을 훈련시키는 부서가 있어, 이를 파사부라 하고 천후궁에서 관장하였으며, 선도산 신녀였던 혁거세의 모친 사소나 수로왕비 허황후도 사문도의 천후궁에 있던 파사부 출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참고 일설로 본래의 삼신산은 삼신이 사는 곳으로, 삼신이란 국조삼신이신 환인, 환웅, 단군, 즉 천황 햇님, 지황 달님, 인황 별님이 사는 산이며, 그래서 삼신산은 달리 바다라고도 부르는데, 바다는 곧 밝달이고, 달은 땅의 고대어이기도 하고, 산의 고대어이기도 하여, 밝은 고대어에서는 해와 달과 별을 통털어 부르던 이름이어서, 결국 바다는 하늘의 다른 이름인 것이어서, 요즘 말로 바꾸면 신전이어서, 신전이므로 특정한 땅이 될 수 없고, 삼신의 궁전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삼신산이 되는 것이, 고대에 삼신산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이유는 여기서 해명되는 것입니다.
또 이 삼신산이 바로 고분인데, 그 중에서도 피라밋과 지구랏으로, 이 고분에는 햇님집인 산과, 달님집인 우물과, 별님집인 용궁이 삼층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 삼신산의 다른 이름이 곤륜산이었으며, 곤륜산이 삼층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며, 이렇게 지어진 집은 그 생김새가 수정과 같다하여 용궁을 달리 수정궁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되고, 이 수정궁의 주인은 천황 햇님의 큰아들로서 천황의 자리를 이어받는 별님인 인황인 즉 단군이 되므로, 단군이 바로 조선왕으로서 용왕이었던 것입니다.
단군은 환인과 환웅으로 이어지는 태양신의 혈통인 천손을 산에다 모셔놓고, 천하에서 선발하여 우물에서 교육시킨 신녀들과 동침시켜 하느님의 씨를 세상에 퍼뜨리는데, 단군 자신이 태양신의 직계혈통이므로, 실제로는 자신이 동침하게 되며, 이 여신들은 하느님 단군의 씨를 받은 다음, 삼신산의 조정에 조회하는 제후들의 왕비로 시집 보내져서, 왕들도 그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여신들이 낳은 아이가 왕이 되었을 때, 고대사에서 보이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의 막강한 태후의 권위를 행사하게 돠는 것이며, 이 삼신산은 지금도 그 흔적이 인왕산에 남아있는것이, 인왕산에 있는 국사당이며, 국사당의 원형은 왕손을 낳아주고 왕실을 뒤에서 지배하던 동이족 신들의 신전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에서 잠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현재까지 대부분 남아 있는 역사서는 대부분 중화주의 한족사가들이 쓴 것이며, 자신들 위주로 자신의 것은 그것의 기원이라 하고, 크고 위대하게, 상대는 그 아류가 되며, 작고 초라하게 쓰며, 하나의 인명이나 풍속 또한 비하하는 말을 습관적으로 써오고 있다는 사실인데, 그 중에도 한서가 유별나게 많습니다.
그 실례로 배달국에서 유습된 신선사상이 선도로 내려와 도가나 도교를 형성하였는데, 이 사상을 마치 황로교의 노장사상이 단독으로 기원한것 처럼 말하고 있고, 예맥이란 용어도 한자 '똥오줌이 붙은 표범이나 삵괭이 같은 짐승' 이라는 한자의 뜻으로,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하하여 거리낌 없이 쓰고 있으며, 자국 위주로 무역물품을 진상품이라 둔갑시키는 춘추필법은 보는이로 하여금 오독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실 돌궐비분에 나오는 복클리 라는 맥나라의 맥은 동물로 철이나 구리를 먹고 산다고 하고, 예는 발음상 쇠에 가까워 한자말이 되기 대문인데, 이러한 왜곡된 곡필은 사실 몇차례는 모르지만 계속 반복된다면 그 누가 이들의 말이나 기록을 신용할 것이고, 그들의 허황장세에 계속 속아 넘어갈 것이며, 실제 사실은 뒤바뀔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고로 육국들은 각기 여러 종족들의 집합체로 그들이 사용하였던 마시는 잔인 각배 만으로 본다면, 신라, 가야 지역에선 각배를 사용했는데, 고구려·백제 지역에선 각배를 사용하지 않아, 고구려, 백제 왕족과 신라, 가야 왕족의 고향이 달랐기 때문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동쪽에 살던 부여계이고, 신라와 가야의 지배층은 대흥안령산맥 서쪽에서 알타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출신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각배는 세계적으로 지중해, 근동, 중앙아시아, 대륙북방, 신라, 가야, 일본에 분포되어 있으며, 각배를 사용하는 풍습은 중앙아시아와 동북아시아의 스키타이족, 흉노족으로 연결되는 스텝지역의 기마민족 간의 접촉과 민족이동 과정에서 전파된 것 같습니다.
이상 육국을 기술하기 앞서 이 육국시대에 정신문화사적으로 제족들에게 커다란 변혁이 다가 오는데, 그것은 서방으로부터 온 불교의 전래와 대륙에서의 새로이 나타난 사상들입니다. 길게 논하기 앞서 기존의 신교인 무교에 대한 세계관과 인간관만을 요약정리합니다.
배달국부터 이어온 신교는 종교적 요소와 함께 나라와 사회를 구성하는 체계로부터 운영하는 모든 것들은 삼수분화체제의 원리에 입각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방법이 화백제도에 따라 의사가 상정되고 결정하며, 실행되어 이를 배달화백 혹은 영산화백이라 하고, 이러한 의사결정 장소는 나라의 우두머리나 왕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역이며, 이를 소도 라 부릅니다.
이 시대 초기에 군은 3종류가 있었는데, 국가의 영토를 지키는 강역군과 별도로 소도 혹은 탁평이라고 칭하는 곳을 중심으로 일반인 천독을 지켜주는 벅수군이 있었으며, 관경삼국의 왕들을 지키는 친위군이 있어, 이 세 가지 군대를 유기적인 조화로써 잘 운영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는 대륙에서 수많은 나라가 명멸해도, 겉으로는 셋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나라로써 천년 이상을 아시아의 국나라들 질서를 유지해 왔습니다.
더구나 정읍사 혹은 수제천 혹은 동동 이란 이름으로 내려오는 노래들은 소도의 벅수군의 제례곡으로, 벅수군의 상징이 달이며, 달에 대한 제례곡은 인류의 음악사 중에서도 그 비중이 매우 높음을 우리는 직감 할수 있을 것이고, 실제 부르는 자는 파사니사금기에 나오듯이 벅수군의 군모가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단군조선이 삼한으로 나누고 이를 삼한관경제라 하여 현실로 드러나며, 이 삼한관경이 붕괴 조짐이 있어지자 이 소도에서 화백회의가 열려 삼한관경제를 데체 할 새로운 삼국관경제가 구상되며,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 가 개국되며, 이 나라들은 모두 왕경을 두개로 가지는데, 하나는 왕이 통치하는 곳이며, 하나는 필히 호수가 있는 곳으로 소도나 화백을 열 수 있는 장소이며, 가야의 비화가야가 그 대표적 사례이며, 백제는 고마성이 되고, 이렇게 지정된 곳에는 왕이라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였고, 대륙내 오로군사라는 비상군체제가 왕비가 주도하고 암묵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제도는 삼국들의 중반기부터 불교 등의 여러 사상의 습합으로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덧붙여 배달국으로부터 있어온 관경제와 화백제는 단군조를 거쳐 사국까지 이어오던 제족만의 단순한 의사결정제가 아니라, 올바른 사람이 되게하는 홍익, 제세이화의 정신을 널리 선양 할 좋은 뜻으로, 동남아 전체나 인도, 서방지역, 중동, 미주지역까지 소도 지소와 이를 도울 군사조직까지 널리 퍼져 있어, 사실상 그 위세가 널리 떨쳤던 제도이며,
위에서 언급한 장도의 천추궁이나 이름난 소도들은 각나라의 치정자인 왕의 권력이 미치지 않은 독특한 구조이며, 그러기에 이 소도의 운영은 국왕들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었으며, 그 유습이 무속으로 전해지고, 신라가 백제와 그렇게 싸우는 와중에도 백제의 장인들이 소도의 조정하는 힘으로, 신라의 불국사나 여타의 공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대표적으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소도 중흥을 위하여, 여러 업적을 남깁니다.
제족의 말은 상황 지향적 언어로 상황을 표현하는 술어 중심의 언어이며, 대화할 때에 술어만 가지고 얘기할수록 친밀한 관계가 되어, 무속의 세계관을 비유한다면 태극의 음양이 상생상보하면서 윤회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 사람의 세계와 신들의 세계, 빛과 그림자, 선과 악, 행복과 불행과 같은 대칭적 세계들이 단절적 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를 이루면서 윤회공존하는 것을 우주의 질서라고 보고, 그 우주적 질서가 현실로 드러나는 중심공간이 바로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보는 것이 무속의 세계관입니다.
인간관에서는 무속의 인간관에서는 애초부터 사람은 자연과 분리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사람은 그가 속해 있는 세계와 더불어서만 사람으로, 사람이 사는 이 세상 전부와 관련되는 그 전체 그물망 속에서 인간이며, 우리말에서 인간이라는 말은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사람이 빠지면 세상이 불완전하게 되니 그렇다라는 겁니다.
따라서 무속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가능하며,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의 인 개념은 그 문장을 쓰던 13세기 그 당시의 우리 언어에서는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되며, 그러니까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야 참 세상이라고 보는 무속의 세계관과 인간관은 오늘의 시대상황에서는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가지 집고 넘어갈 사안은 샤먼과 무당의 용어 구분으로, 샤먼이란 배달국 풍이족 출신의 사모이고 여무와 남무의 구별이 없었으며, 무당이란 무巫 자가 생겨나고부터의 말로 수천년의 차이가 나는 말이고, 여무를 무무라 하고 남무를 무격을 의미하며, 또한 직능이나 권한에 있어서도 샤먼은 거의 절대적 권한과 직능을 가졌다면, 무당은 종교의 권한과 직능이 제한적이고 관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속에서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포괄적이며 입체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복합적인 내용의 대답을 제공하는데, 노래, 연극, 또 가락과 장단 춤사위, 인간과 신의 만남 같은 굿판의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실 속에서 체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터득하고 스스로 깨닫게 되는 자기정체감의 내용으로 되는, 이것이 무속이 가르쳐주는 인간관이고 세계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음과 양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규제하는 존재로, 같이 있어야 우주가 완성되는 것이므로, 따라서 어느 하나만이 규제할 수가 없이 서로 상보적인 관계이며, 어느 하나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 되면서, 우주의 질서를 벗어난 완벽성과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게 동양이나 특히 무속의 특징으로, 무속에서는 복잡하게 돌아가는 이 현실을 벗어나서 절대권력이나 절대진리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든다면 세상을 설명할때 음양으로만 설명하는 음양오행사상도 본래 역경 계사전에 역에 태극이 있어 이것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으며, 사상이 팔괘를 낳는다고 한 데서 시작되는데, 이 글은 역의 팔괘도형 성립을 말하고, 동시에 우주만물의 생성을 설명한 것으로 해석되며, 이후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걸쳐 여러 계통의 생성론에 태극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경우 태극이란 원기가 음·양 2기로 분화되기 이전의 근원이 되는 기로 여겨졌는데, 태극·원기를 만물생성의 최고 근원이라고 하는 설과, 그 위에 다시 형이상의 도와 무를 세우는 설이 있으며, 또 태역, 태초, 태시, 태소, 태극의 단계를 거쳐 만물이 성립한다는 오운설의 생성론도 있었으며, 그 뒤 북송의 주돈이가 태극도설을 저술하여 태극은 송학의 철학이론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습니다.
음양이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기운, 즉 음기와 양기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삼은 고대 한족의 철학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음양설이라고도 하며, 음양론은 태극이라는 원기가 변화해서 음양이기를 낳고, 다시 이 음과 양이 대립.교체, 소장을 통해 우주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원래 강과 유의 원리에 의해서 만물의 생성변화를 설명한 역학에서 강유를 대신해 음양이 받아들여져 만물의 이치가 설명되어졌으며, 양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하늘·해·낮·남·동·밝음, 등이 있고, 음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땅· 달·밤·여·정·어두움, 등이 있다고 하여, 이씨조선에서는 모든것들을 이러한 사상으로 설명하며, 심지어 한글 해례본 제자해에서도 이로 설명하고, 지금의 태극기 도형으로도 남아있어, 부지불식간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사실 배달국시절 역법으로 인해 탁록에서 치우천왕과 황제헌원과의 전쟁을 벌인 핵심쟁점으로, 한제족들이 주장하는 것이며, 이후 다시금 불거진 한제족의 사상이 제족에게 슬며시 스며든 사상으로, 무속에서도 저도모르게 쓰이고 있다고 보는데, 사실 이 태극도형도 초기에는 이태극이 아니라 삼태극으로 써지다가 이시절부터 슬며시 이태극으로 바뀝니다.
그것은 주나라대 초나라의 피리 '생'에는 분명히 삼태극의 변형문이 그려져 있고, 춘추, 전국 시대의 각종 종의 표면에도 삼태극이 그려져 있으며, 또한 악기이외의 다른 상, 주, 춘추, 전국 시대 청동기에도 삼태극 도형이 대단히 많이 보이는데 반해서 음양태극은 거의 보이지 않고, 각종 고고 유물에서도 삼태극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 때까지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며, 한서 율력지에 보이는 태극원기 함삼위일의 논리는, 한서 율력지의 다른 곳에서도 맹강의 주석을 통해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렴계가 무극, 태극, 음양, 오행, 만물의 순으로 우주론을 체계화하고, 이것을 주자가 집대성하여 성리학이 성립되는 송대 이후에는 음양태극 관념이 주류를 이루게 되며, 결국 도가계열에서는 3수 분화의 세계관에 입각한 3.1철학이, 유가계열 특히 송대 성리학이후로는 2수 분화의 세계관에 입각한 논리가 주류를 이루게 되면서 음양 이태극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시다시피 현재의 반도체가 이진수법으로 이 역에서부터 나왔다는 설이있어, 이수분화의 세게가 지금은 전개되고 있지만, 앞으로 양자미시세상에서는 이 이진수에서 하나를 보태어 삼진수가 되므로, 제족이 주장한대로 삼극세상이 돌아올 것으로 확신하는게, 세상이 음과 양, 양성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종간자가 필히 있다는 사실로,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도 양성을 동시에 가진사람도 있으며, 양자세계에서도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속의 세계관에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를 따라서 직선적으로 연결되는 구조가 아니라, 무속의 시간구조는 현재 중심적이며, 늘 현재 중심적이고 그 현재는 음양이 상보적인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고, 그 구조는 입체적으로, 선적이거나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공처럼 생각할 수 있으며, 그래서 현재 중심적이기 때문에 이게 오그라들면 좁쌀만 해질 수 있지만 번창하면 우주까지 꽉 찰 수 있는 구조입니다.
구조는 입체적이고 시간과 질의 의미는 다분히 실존적이라고 말하며, 실존적이란 말은 객관적으로 한 시간 일 초 그렇게 시계상의 시간을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나에게 있어서 순간이 영원 같을 수 있다는 것으로, 내가 체험하는 것, 그러니까 평생 고생해서 자식 키워서 자식이 출세하면, 부모들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죠. 그 순간, 그 한순간이 수십 년의 시간을 상쇄하는 그런 시간의 질에다가 의미를 두는 것으로, 이러한 것이 실존적인 것인며, 무속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를 않습니다.
또 무속은 조화적 평등주의로 이 남녀유별, 생자필멸, 반상차별 같은 위계질서, 서열질서, 자연질서를 부정하고, 그도 아니면 거부하며, 때로는 파괴하고 농락하는데, 그러한 행위가 오히려 무속현장에는 활력과 생명력을 강화해 주는 역할을 하여, 한마디로 인간세계를 불평등하고 부조화적인 현실로 몰아가려고 하는 지배세력에 대해서 순순히 승복하려고 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가려고 들지 않는 것이 무속사상의 속성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속은 현실주의적 가치관과 행동양식으로, 무속이 과거에 지배문화들로부터 끊임없이 탄압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밀은, 갈등 추방 투쟁 같은 대결적 상황에서조차도 위협하거나 제압하는 방법보다는 화해하고 타협하며 위로하는 상징적 절차를 반드시 포함시키며, 가치관과 행동양식에서 지배문화들이 자랑삼는 그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나 원리에 의해서 결코 사로잡히려 들지 않는 무속문화 나름의 야성적 본능 속에 비밀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무속을 종교의 견지에서 본다면 밀교를 들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본다면 밀교는 불교이전에 나온 제족 종교
의 한갈레로 에베레스트 산과 투루판 분지에 산정에 큰 호수가 있는 지역에서 탄생하여, 전불교시대를 열고, 밀교의 최고부처인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바로 대일여래로서, 태양신을 뜻하며, 대일은 큰 해로서 대환과 같으며, 여래는 부처의 별호 중 하나인데, 옴과 같다는 뜻이 되며, 이를 한족어로 읽고 해석하면 아무 뜻이 없으나, 제족의 말로 읽고 새기면 인도어의 뜻이 그대로 살아납니다.
여래의 래 는 오다 인데, 오다의 명사형인 '옴'은 불교 최고의 주문인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훔의 첫머리에 나오는 옴과 일치하며, 옴은 창조의 소리를 본뜬 것이라고 하니, 여래는 창조의 소리와 같다는 뜻이되어 곧 창조주의 다른 칭호가 되며, 결국 대일여래는 창조주인 큰 햇님으로 풀립니다.
밀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수행법은 탄트라이며, 탄트라는 씨줄, 강요, 주법적인 신비한 경전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고, 그 수행법은 성력, 특히 여성의 성에너지 숭배가 중심을 이루고, 남녀의 교합이 교리와 실천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하여, 이런 사실들은 지황의 신전인 우물(용궁)에서 행해졌던 씨받이와 쉽게 연관되는 사상들이고, 우상인 남녀화합상의 숭배가 밀교의 뿌리임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탑사는 인도에 있는데, 탄트라는 탄 틀이요 땅 틀의 뜻이고, 결국 탄트라는 씨받이의 규범을 뜻하게 되며, 원 황실이 밀교(라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이유도 여기서 이해되는 것이며, 한제국에서 변형된 유교와 불교에 물들지 않은 몽고족은 그들의 뿌리인 신교 풍류의 전통을 잊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또 밀교의 밀은 길게 발음하면 미르가 되며, 미르는 용의 고대어이며, 미륵의 한제족식 발음과도 같고, 진국이 미르나라가 되어 고조선과 연결되었으며, 단군이 바로 미륵이 되여, 밀교는 분명히 풍류의 다른 이름이됩니다. 티벳지역에 밀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있었던 토착종교는 본교라고 하는데, 여기에 불교가 들어가서 본교와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 혼융되어 탄트라적인 밀교가 정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티벳 고유의 종교인 이 본교는 샤만교의 한 형태로, 여기서 본은 뿌리의 뜻으로 이해되며, 또 제족말의 본은 모범, 틀의 뜻이며, 보다의 과거형으로 여기서 소개된 영어는 본(낳다, 뼈)와도 소리가 같으며, 결국 밀교는 신교 풍류의 원줄기로 생각되며, 여기에 그 지류인 불교가 수입되었다 하여 그 원형이 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족 전통음악을 예로들면 가야금에는 천원지방사상, 12지지와 12달의 배합, 12지지와 12율려 배합, 12지지와 사시의 배합, 천지인 삼재론과 3수의 배합 등이 전제되어 있고, 비파의 경우에는 천지인 삼제론, 오행, 사시 등이 배합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는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서로 연계되어 있고, 그것을 크게 나누어 보면 역사상과, 음양오행론, 천지인 삼재론을 하나로 잇는 동양철학의 세계이며, 한국 전통문화를 읽는 정당한 관점이라고 보며,
이것은 비단 위에서 살펴본 몇 몇 악기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악기도 마찬가지이며, 악기의
조율방법, 장단법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전통 음악의 모든 것이 이런 철학적 배경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고, 동양의 음악이란 이런 철학적 세계관을 음으로 드러내는 방편인 것이며, 비록 악기가 시대에 따라 혹은 나라마다 길이나 현의 수가 달라지기도 하고, 신라의 향비파가 당나라의 비파와 약간 다르기도 하지만, 그 기본적인 철학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미술, 건축, 문학 등 모든 것이 이러한 관점에서 읽혀야 합니다.
당시를 미학적 입장에서 보면, 제족의 신정시대는 삼극사상으로 대변되는 삼수분화의 관으로 하늘, 땅, 사람, 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막연한 상징이 아니라 다분히 신정의 정치 체계이며, 한제족에서 발생한 체계에 관한 것 일수록 이수분화로 체계를한 정치였거나 사상들이 대부분이고, 원론적으로 신정의 세계 즉, 제정미분화 시대의 미술은 기호라 할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대립이나 분열이 없이 하나의 전체적인 질서와 체계로 이루워진 사회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의 미술은 하나의 기호로만 존재하여 신탁을 기록하거나 이를 알리는 역활로 국한 되었을 것이며, 최소한의 미술 의욕이 작용하던 시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술의욕은 종교와 정치의 분화로 촉발된 분열과 대립은 보다 적극적인 미술의욕을 유발시키고 이 의욕은 바로 적극적인 미술 행위로 이어지게 되는 역사적 이행을 겪습니다.
이 시대 세계미술은 그리스는 북 도리스인의 남성성과 서 이오니아인 여성성을 결합하여 고전 미술을 완성(기원전 1,300년) 하고, 기하학적 양식 시대(기원전1,100~700년) 기하학적 문양 항아리, 이르카익 시대(기원전700~480년) 고식 봉납상, 엄격양식 시대(기원전480~450년) 영웅상, 고전주의 시대(기원전450~400년), 고전적인 이상미를 완성, 후기 고전 주의 시대(기원전400~320년) 개성적 조각 제작, 3대 거장으로는 스코파스, 프락시텔레스, 리시포스,헬레니즘 시대(기원전320~30년) 자연주의 현실주의적 양식이 유행, 초상 조각 제작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있으며,
페르시아 제국(기원전550년~기원전330년), 마우리아 통일 왕조(북인도 기원전500년경), 쿠샨 왕조(서북 인도, 아리안족)간다라 미술, 안드라 왕조(남인도 드라비다족) 불교 브라만 미술, 진 통일제국(아시아 기원전221~기원전206년), 게르만 메로빙거 왕조(유럽 500~800년), 사만 왕조(중앙 아시아 900~1000년), 한국사 중세(삼국시대 기원전 238~조선 중기 16 세기), 중국사 중세(위진 남북조 시대 220~청 말 16 세기), 서구 중세는(로마 제국 5세기~16세기 ) 암흑기로 초기 크리스트교 미술인 중세 미술은 크리스트교적인 교의가 기초가 되어 변천 하였는데, 반면에 아시아 인도, 동남 아시아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부합한 이야기를 한다면 신정 체제에서 종교와 정치의 힘의 균형이 깨어져, 종교 우위의 세계가 형성
된다면, 이때의 미술은 신을 찬양하고 그에 반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미워하는 그림을 그리게 될 것인데, 이러한 신정시대야말로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세계가 아니고, 초월적인 진리의 세계이므로 미술을 추상적인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신의 세계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것은 현세적으로 합리성을 주장하는 인간 본위의 정치를 추구하는 쪽이여서 이러한 미술은 결국 미술의욕을 감정이입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술행위의 동기가 되는 미술의욕은 이러한 이원론에 입각하여 설명되어 질때는, 미술이 정치와 종교의 대립이 심화될 때에는 크게, 그것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될 때에는 변형, 소멸 될 것이고, 기호의 기능이나 표피적 역활에만 그친다 할 수 있습니다.
실레를 들고 싶지만 제족 6국의 미술에 대한 기록이나 작품들이 없어서 제족과 비슷한 당나라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 때의 미술사가로 미술 평론서인 역대명화기는 당나라 때까지의 중국 회화사의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법서요록에서는 고인의 서론을 집성하고 있는데, 여기에 장언원의 역대명화기는 중국미술사에서 사마천의 사기에 비견 되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화지 원류중에, '그림은 원천적으로 글과 동일한 근거에서 출발 하였다. 그림이란 교화를 이룩하여 인륜을 돕고,신섭을 따지고 유징을 잰다. 이러한 의의는 육경을 아는 것과 동일한 노력이며, 아울러 사시의 운행을 겸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독서에 의해서라기보다 자연 발생적이다.' 라는 내용으로,
예술은 고대로 부터 신들에 봉사하여 왔고, 신들의 신정을 배격하고 인간본위의 정치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정치에 반하여 왔으며, 중국의 수많은 화가들이 인간들의 정치를 반대하여 그윽한 이상향인 신들의 품을 동경하고 향수 하였음을 이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삼황오제를 보고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삼대 하, 은, 주, 의 이주를 보고 비분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라 하여 제족의 신정을 거부하거나 반하는 정치체제의 나라들을 배척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도재의 뜻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를 그리는 일 즉 괘상, 둘은 식을 그리는 일 즉 자학, 셋은 형을 그리는 일 즉 회화가 곧 그것이다.' 하여,
이와 같이 이, 식, 형은 삼분의 변증법이며, 원래 동양화의 근거가 우리의 삼수분화 삼극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도 할 수있으며, 동양화를 그린다는 사람들은 그 기본이 되는 이러한 뜻을 정확히 알아야 겠으며, 진정한 동양화란 그 원초적인 태생이 삼극사상,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그러한 세계에서 거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 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왜 한자의 성립의 기원인 '역'에서 말하는 체불용 법칙에서 기본적인 체(○형)를 터부시하여 우리가 쓰는 ○을 한자에서 쓸 수 없다는 것도, 이 체가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우리의 신정체계를 '체'(환,동그라미)에 두기 때문이며, 이러한 신정의 시대인 삼황의 시절이 역대 중국의 예술가들에게는 이상향이며, 그들이 추구 하던 예술의 궁국적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훗날 중국 남송시절에는 채색화를 배격하고 검은 묵색 으로만의 그림을 그리는게 일대 유행이 되는데, 이러한 현상도 장언원이 말하는 묵색(체),채색(용)의 준법에 의한 진정한 '신정'의 회복과 현실 인정(人政)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들이 말하는 고대 하, 은, 주, 시대란 황하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정적 세계상에서 두루 함께 살았는데, 제족과 한족의 관계에서 우리는 신정의 종교적 세계이며, 한족은 인정 정치적 세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이러한 제족 종교의 역사는 망실된 경우도 많았으며, 그 근본적인 이유가 신정을 배격하는 현실적 인간의 정치와 신과 결합된 정치가 점차 괴리되여, 끝내는 우리의 역사가 한낱 신화적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술한대로 기본 바탕이 되는 체인 근본이므로 창조의 세계관이자 모태가 되고, 정치적 세계인 오제의 역사 기록을 신봉하는 한족에 의존케 되었는데, 한제족들이 자신들의 세계관마저 잃게 되자, 그러한 기록이 달리 말하자면 곧 우리의 기록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서로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며, 실례로 육국시절 당악이나 주례악들이 한제족에서는 없어진게 오래 되었으나, 되려 이를 수용한 고려나 조선에서 시전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한제족의 역사나 그들의 업적이 모두 우리것 이라는 망상은 있을 수 없는 생각일 것이며, 다만, 그러한 것이라는 원론적인 역사 인식은 올바르게 이해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랗게 제족의 고유사상이었던 신관은 당나라나 남송에 까지 전파되여 더욱 가치있게 되지만, 육국 후반부로 갈수록 한제족들의 음양 오행적 기복적 신앙들이 제족 나라들까지 스며들어와 오방신과 색채 사신적 개념이 형성되는 근간을 이루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제족의 자연스러운 기본 삼극사상이 퇴색되고, 삼국시대 이후 근대에 까지 본래의 우리의 것이 없어지는 문화의 공백상태가 지속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근원은 우리의 역사가 뒷받침해 주는데, 우리의 구석기 편년을 50만년 전으로 잡는 것이나, 신석기 기원전 8,000년의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특히 단군조선의 개국이 하, 상, 은, 주, 보다도 앞선 나라이므로, 문명의 흐름 또한 하, 상, 은, 주, 로 흘러가 삼황으로 불린 것이며, 강역 또한 양자 황하 유역을 위시하여 만주, 반도까지 아우르는 것이라 이지역 여러 매장 유물 발굴을 통하여 계속하여 증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관이 없었던 일제말 학자들은 우리의 미술을 말할 때는, 막연한 자연관으로 고대의 신정을 말할 수 밖에 없었고,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이 현재까지 정립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남아있는 미의식으로 자리잡아 오면서 대상으로서의 자연, 즉 소재로서의 자연적 개념과 심층의식으로서의 자연적 개념이 동시에 형성되어 생활의식 저변의 민예적 소산들 뿐 만이 아니라 가옥과 의복, 공예품, 회화 등 전반에 걸쳐서 가장 핵심적인 근원이 하나씩 발굴되어 왔습니다.
공예의 경우는 인위를 거부하고 마치 자연에서 탄생되어진 것처럼 무작위적인 경지를 추구하여 담백, 소박한 미감을 반영 하였으며, 청자나 백자의 경우는 기층민들의 민예적 미감과는 달리 고도의 정신적 고양이 반영되어 품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니는 자연미의 극치를 이루었으며, 무작위적인 미감과 백색주의, 곡선의 선율과 담백, 질박함 등은 조형예술 전반에 걸쳐 고루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공예등의 예술에서 무작위적인 미감은 생활깊이 스며온 자연동화의 미의식으로서 상류계층보다 기층민에게서 더욱 농도 짙게 배어져 있었고, 유산들 역시 기층민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제작되었다는 점이며, 양식, 형식화되고 미 그 자체를 위한 미술적 양식과는 개념을 달리하며 미 이전의 미라고 말했듯이 기교이전의 기교로서 생활과 일체화된 미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고,
삼교사상에 의한 유산들보다도 오히려 건국신화 이후의 무속신앙, 자연환경적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순연한 심성에서부터 비롯된 기층민들의 미의식이 철학적, 종교적 지식과 수양을 초월한 상태로 스며들어 있다고 보이며, 이는 삼교사상, 특히 도가에 있어서의 무위사상과 비교된 바 있지만 철학적, 학문적 체계나 수양에 의해 비롯되는 무작위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의 미감인 것입니다.
덧붙여 이러한 공예나 색감각이 고루 녹아나 있고 제의나 행사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떡문화가 단군시절부터 보이는데, 이것은 곡물의 생산량이 많아지는 것과 관련있으며, 청동기시대의 유적지인 나진초도패총이나 삼국시대의 고분군에서 시루가 출토되고 있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이 자세하게 나타나는데, 안악 3호분의 부엌장면에는 흰 포를 입은 여인이 큰 시루에 떡을 찌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를 근거로 당시에 떡은 주식이자 즐겨먹는 음식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며, 고려시대에 와서는 한층 더 발달하게 되어 상류층이나 세시행사와 제사 음식으로는 물론 하나의 별식으로서 일반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으며, 또한 농경을 바탕으로 형성된 절기와 세시풍속은 다양한 세시음식을 발전시켰고, 이 떡이 절기의 의미는 물론이고, 제철의 재료를 활용하여 다양하게 발달되었으며, 한제족은 밀가루가 보급된 한대 이후에 떡을 가리키는 용어로 병 이라 하였지만, 제족의 떡문화는 없는것으로 보이는데, 여담으로 송나라 시대 수호전에는 떡이 나와 제족의 유습과 같다고 보이며, 이렇게 제족의 정신적인 감각은 공예나 생활 전분야에서 하나의 소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단락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