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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지심(辭讓之心)
사단(四端)의 하나로 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으로 예(禮)의 근본을 이르는 말이다.
辭 : 말 사(辛/12)
讓 : 사양할 양(言/17)
之 : 의 지(丿/3)
心 : 마음 심(心/0)
이 성어는 사단(四端)의 하나이다.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 나오는 네 가지 마음씨 중의 하나로, 겸손히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을 이른다. 인의예지(仁義禮知) 가운데 예(禮)에서 우러나온다.
다음은 맹자(孟子)의 사단설(四端說) 가운데 나오는 말로, 맹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있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無惻隱之心非人也),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無羞惡之心非人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無辭讓之心非人也),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是非之心非人也)."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고(惻隱之心仁之端也),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고(羞惡之心義之端也),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고(辭讓之心禮之端也),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是非之心智之端也)."
이 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人性論)으로서 사단설(四端說) 또는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意志的)인 확충작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이 왕도정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4가지 덕을 완성하게 되고,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먼저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 다스리기를 손바닥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여기서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란,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사람의 불행을 앉아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이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마치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굴리는 것과 같이 아주 쉽게 공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이라며 성선설(性善說)을 입증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곧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겸허하게 양보하는 마음은 禮의 근본이다(辭讓之心禮之端也). 禮란 인류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는 원리이며, 인간행위에 규범을 세워 주는 원리이다. 맹자는 사양지심예지단야(辭讓之心 禮之端也) 혹은 공경지심 예야(恭敬之心 禮也)라는 말을 통하여 이 원리도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한다는 것이라 보았다.
개개의 인간은 하나의 주체이면서 동세(動勢)에 화자(化者)에 대해서는 하나의 객체로 존재한다. 사양지심(辭讓之心), 공경지심(恭敬之心)이라 하는 것은 남의 인격적 존재로서의 주체임을 내가 인정해 주는 인간성을 뜻하는 말이다.
맹자는 인자인야(仁者人也)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인(仁)은 인간성이라는 말이다. 이 인야(人也)의 해석을 보면 인(仁)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마주서서 서로 안부(安否)의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라 한다. 이는 서로 동정하는 정감을 통한다는 뜻과 피차 상대자를 자기와 같은 인격적 주체로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자를 인격적 주체로서 자기와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경(敬)을 뜻하는 것이다. 맹자는 이 경(敬)을 인간 상호관계를 원활히 하는 질서의 원리로 보았다.
🔘 맹자의 사단(四端)
단(端)은 실마리의 뜻으로,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란 뜻이다.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知)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이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어서 곧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정사(政事)를 하였다.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를 다스리기는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사람이 누구나 남에게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 사람이 문득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기 위한 것이 아니며, 향당(鄕黨)과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 그러는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발단이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발단이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발단이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은 지(智)의 발단이다.
사람이 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치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해치는 자요, 그 임금이 능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고 샘물이 처음 솟아오르는 것과 같으니, 만일 확충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부모도 섬길 수 없을 것이다.
🔘 사단칠정(四端七情)
조선 때 송(宋)나라 성리학(性理學)의 학설이다. 사단은 맹자가 주장한 것으로 사덕(四德)의 원천인 인(仁)의 단(端)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단(端)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단(端)인 겸양지심(謙讓之心) 또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단(端)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가리키며, 칠정(七情)은 예기(禮記)와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에 나오는 인간의 7가지 감정인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을 말한다.
사단론(四端論)은 이미 맹자가 밝힌 바이나(인간이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사단을 확충해야 한다고 함) 조선 때 이황(李滉)은 여기에다 칠정(七情)의 이론을 첨가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설명하였던 바, 사단은 인간의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인간의 기(氣)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이 후 이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유학자들 사이에 오가는 동안 논의되어 이른바, 사칠변론(四七辯論)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도 퇴계와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은 유명하여 사단칠정 분리기왕복서(四端七情分理氣往復書)라는 논집(論集)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인간의 감정이기는 하되 사단은 애초부터 선(善)한 것으로 규정된 것인데 반하여, 칠정은 그 자체로는 아직 선악의 판정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칠정(七情)은 구체적 상황과의 접촉 이후에야 비로소 선악으로 판정된다. 예를 들면 사단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언제나 선(善)이다. 그렇지만 칠정(七情)의 하나인 기쁨은 언제나 선(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만약 남의 불행을 기뻐한다면, 그것은 악(惡)이기 때문이다.
우(禹)임금의 사양지심(辭讓之心)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내게로 오시오, 그대 우여. 내가 임금 자리에 있은 지가 33년이나 된데다 나이도 90을 넘어 100살이나 되어가니, 일하기에도 게을러지는구려. 그대는 게을리 말고 나의 백성을 다스려 주시오.”
우가 말하였다. “제 덕이 모자라 백성이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요(皐陶)는 힘써 덕을 베풀었기에 그 덕이 아래에까지 미쳐 백성이 감복하여 따르고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잘 생각하십시오.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그 공적 때문이고, 그 사람을 버리더라도 그 공적은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의 말을 하는 것도 그 공적 때문이고,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이 우러나오는 것도 그 공적 때문입니다. 임금님께서는 그의 공적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고요여, 신하들 가운데 나의 정령(政令)을 범하는 자가 없는 까닭은 그대가 사(士)가 되어 오형(五刑)을 밝히고 오교(五敎)를 도와, 나의 다스림이 잘되도록 기약하였기 때문이오. 형벌을 쓰되 형벌을 쓸 일이 없어지도록 하여, 백성이 중정(中正)에 맞도록 한 것은 그대의 공이오. 더욱 힘써주시오.”
고요가 말하였다. “임금님의 덕에 허물이 없으시어 신하들에게는 수수하게 대하시고 백성은 너그럽게 다스리셨습니다. 벌은 아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시고, 상은 후대에까지 미치게 하셨습니다. 모르고 저지른 죄는 아무리 커도 용서하시고, 일부러 저지른 죄는 아무리 작아도 벌주셨습니다.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볍게 벌주시고, 공(功)이 의심스러울 때는 후하게 상주셨습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니, 차라리 법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임금님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백성의 마음에 흡족히 젖어 있어, 관리들을 거스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내가 다스리고 싶은 대로 다스려서 사방이 바람에 쏠리듯 따르게 된 것은 오직 그대가 훌륭했기 때문이오.”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내게로 오시오, 우여. 홍수가 일어나 내가 심려하였지만, 믿음을 이루고 공을 이룬 것은 오직 그대가 어질기 때문이었소. 나랏일에 부지런하고 집안일에 검소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잘난 척하지 않은 것도 오직 그대가 어질기 때문이었소. 그대가 자랑하지 않지만 천하에 그대와 더불어 재능을 다툴 자가 없으며, 천하에 그대와 더불어 공을 다툴 자도 없소. 내가 그대의 덕을 크게 여기고, 그대의 큰 공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소. 하늘의 돌아가는 운수가 그대 몸에 있으니, 그대는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오를 것이오.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오직 정일(精一)해야만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을 것이오. 근거 없는 말은 듣지 말고,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은 꾀는 쓰지 마시오.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임금이 아니겠으며,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백성이 아니겠소. 임금이 아니라면 백성은 누구를 떠받들겠소? 백성이 아니라면 임금도 나라를 지키지 못하오. 공경하며 그대의 자리를 삼가서, 그들이 바라는 일을 공경히 닦으시오. 천하가 곤궁해지면 하늘의 녹도 영영 끝날 것이오. 입이 좋은 말도 내지만 싸움도 일으키니, 나는 다시 말하지 않겠소.”
우가 말하였다. “공신들을 하나하나 점쳐서, 길한 사람을 따르십시오.”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우여, 관청에서 치는 점은 먼저 뜻을 결단한 뒤에 큰 거북에게 명하는 법이오. 그런데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여러 신하의 생각이 모두 같으며, 귀신도 따르고 거북점과 시초점(蓍草占)도 다 같이 따랐소. 점을 칠 때에 길한 것은 거듭 치지 않는 법이오.”
우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굳이 사양하자, 순임금이 말씀하셨다. “그만 사양하시오. 오직 그대만이 임금 자리에 적합하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요임금 사당에 명을 받고 백관을 거느렸는데, 순임금이 처음 임금 자리에 나아갈 때와 같이하였다.
이 이야기는 서경 우서 대우모 2, 3장에 나오는 순임금과 우(禹), 지금의 법무장관격인 고요(皐陶)가 정사를 논하는 장면입니다. 임금과 신하, 다음번 왕위 계승자가 나누는 아름다운 겸양과 사양의 미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천하의 임금 자리를 덕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사양하는 모습이 있고, 임금은 백성이 편안하고 법령이 잘 집행되어 정사가 평온한 덕을 신하에게 돌리고, 신하는 백성을 위하는 임금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이 백성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나라가 평온한 것이라며 임금의 덕을 칭송합니다.
단편적인 이야기이지만 우임금의 처세와 사양지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자리에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에도 국가조직이 있고 사회에도 단체나 모임이 있어 어디에나 그 지위와 역할에 따른 자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 자리는 인망(人望)과 신망(神望)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추천제입니다. 자신은 겸손하게 사양하고 주변의 추천에 의하여 주어진 자리는 오래갈 뿐 아니라 주변에도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의 덕이 크면 클수록 하늘의 태양이 말없이 군생만물의 생장에 혜택을 내리듯 그 덕은 지대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은 버려야 합니다. 처녀가 애 낳는 법을 배우고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고, 순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밭 갈고 뇌택(雷澤)에서 고기 잡을 때 선기옥형(璿璣玉衡)의 이치를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임금이 되고 나서는 선기옥형을 알게 되듯이 당하면 알게 되는 법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둘째,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우임금은 8년간의 치수사업 동안 자신의 집을 세 번이나 지나친 경우가 있었는데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三過其門而不入). 우임금인들 어찌 처자식이 보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천하사를 하는 사람이 공과 사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셋째, 바르게 처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 처리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 처리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지시가 있었을 때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그것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시를 받았을 때는 그것부터 즉시 처리하는 것이 바른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위의 장면에서는 또한, 요와 순과 우임금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이 나옵니다. 물욕에 의하여 일어나는 사사로운 욕심인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천성(天性)이며 양심(良心)인 도심(道心)은 미묘하여 간직하기 어려우니, 오직 정성과 일심으로 진실로 그 중정(中正)의 도리를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실로 성인들이 서로 전한 치세의 심법으로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마음의 근원처를 돌아보게 하는 심오한 경구입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여의고 천성(天性) 그대로의 양심(良心)을 회복하여 천자(天子)의 자리라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요순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이 진실로 양심의 자리에 거할 때 만승천자의 자리가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임금의 사양지심에 관한 교훈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나 남을 사랑하고 어진 마음을 가져 온공(溫恭) 양순(良順) 겸손(謙遜) 사양(辭讓)의 덕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리를 탐내지 말며, 맡은 바 직분에 충실히 복무하고, 지시를 받았을 때는 지체 없이 수행하여 조그마한 차질도 없게 전심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고전속의 사양지심(辭讓之心)
맹자(孟子)의 진심(盡心)편은 인간의 심(心)과 성(性)과 천명(天命) 등의 형이상학적인 인간문제를 깊이 파고 들어간 가르침이라 한다. 성선설(性善說)의 이해와 교육 문제라든지 천명에 대한 깊은 고찰은 추공(鄒公, 시호)의 중후한 노후의 학설이 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써 고지성왕 요순(堯舜)을 덕치의 연원으로 해서 맹자까지의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을 성립시킴으로써 유학에 대한 추공의 공헌이 실로 큰 바를 알게 한다.
여기에서 얘기하려는 '사양지심'은 지금의 시대상과는 조금은 거리가 먼 얘기일 줄 모르겠으나 유가의 학문적 가르침으로써 인의예지(仁義禮智), 곧 사단(四端)중에 하나이며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 발로에 따라 행동을 하면서 그것이 바로 귀중한 본성이라는 것을 살필 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간 군인이 자기가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는 사람을 사람답게 여기게 만드는 선한 심성이 사단(四端) 즉, 인의예지라고 했다.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남의 곤경과 불행을 함께 슬퍼하며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고, 의(義)에서 일어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자기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고, 예(禮)에서 일어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은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할 줄 아는 마음이며, 지(智)에서 일어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음과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 즉 분별력이다. 이 네 가지 마음에서 어느 하나만 없어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선거를 앞두고 수많은 인사들이 한번쯤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봄직한 사양지심은 예(禮)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한마디로 나보다도 더 남을 생각하는 심성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기꺼이 주려하는 마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겸허함의 미덕이다.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적이고 유아독존식의 세태에 자신의 내면을 추스르고 욕망을 절제 할 줄 아는 마음의 스톱워치는 인간다운 품위를 잃지 않게 해주는 최고의 자아실현이며 고매한 멋스러움이다.
자여(子與)의 제자인 공손추(公孫丑)편에 '무사양지심 비인야(無辭讓之心 非人也)'라 했다.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사양지심 예지단야(辭讓之心 禮之端也)라,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자신이 떠날 때를 알고 돌아서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이 뜻은 기욕입이입인(己欲立而立人)으로 통하니 자기가 영달을 누렸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영달케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천명(天命)을 알고 그것에 순응하는 지혜는 우리가 추구하는바 영원한 이상이며 진리일 것이다.
체면과 사양지심(辭讓之心)
체면은 우리 민족의 심리특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현상 내지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체면은 한국인의 여러 가지 심리특성인 눈치, 정(情), 한(恨), 핑계 등과 함께 다른 민족에 비하여 유독 돋보이는 정서적 변인이다.
우리말에 체면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체면이 서다, 체면을 차리다, 체면이 깎이다, 체면이 손상되다, 체면을 지킨다, 체면을 유지하다, 이거 참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체면 꾸겼다, 체면 차리지 말고 맘껏 드세요,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네' 등등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쓰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심리특성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체면은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차려야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가려서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체면을 차리거나 지키는 게 부자연스러운 경우도 더러 있다. 상대와 아주 친밀한 관계일 경우이다. 친구들과의 모임, 연인 사이, 부모자식 간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선생님과 학부모, 성직자와 신자, 은사(恩師)를 대할 때 체면을 지켜주어야 한다. 일상에서 지나칠 정도로 체면치레를 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어느 사회학자는 체면의 이중구조를 설명하였다. '속(裏)'은 본 마음, 사실 또는 사적자기(私的自己)가 될 수 있으며, '겉(表)'은 밖으로 표현된 마음, 외적명분 또는 공적자기(公的自己)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체면이 지나치면 표리부동과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체면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자기와 또는 사실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이나 지위나 외적명분을 높여주는 행동으로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과장하여 높이는 체면과는 달리 자신을 나추면서 겸손을 미덕으로 하는 예(禮)를 맹자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고 하였다. 그는 사양지심을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마음, 즉 남의 욕망에 대한 공감을 예라고 보았다.
이를테면 손님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경우에 자신이 먹고 싶은 게 따로 있지만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마음이 곧 사양지심이다. 그리고 접대 받는 입장에서 되도록이면 부담을 적게 주기 위해서 질은 떨어지지만 저렴한 음식을 주문하여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자의 심성 또한 사양지심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상대에 대한 예를 표현함에 있어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든지, 나이가 많다든지, 인격이 높을 때는 합리적인 의사결정보다는 비합리적으로 결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대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싼 음식을 시키면 상대방에게 행여나 소홀히 대접한다는 느낌을 주어 서운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심리적인 불안이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에 반해 상대가 자신보다 아래 사람이라면 메뉴를 선택할 때, 여유를 가지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접을 받을 때나 대접할 때를 막론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경우, 상대방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인생의 풍부한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예를 근간으로 한 인간관계의 내공이 축적되어 있기에 가능하리라.
체면은 우리 문화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심리특성이라면 사양지심은 동양의 인간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편적인 에티켓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체면과 사양지심은 둘 다 인간관계를 설명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를 인간관계망과 관련지어 차이점을 분석해보면, 체면은 적당하면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데 윤활유 역할을 하는 심리특성이지만 지나치면 체면치레가 되어 오히려 표리부동한 자로 취급받아 분명 인간관계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반면에 사양지심은 정적(靜的)이고 내면적인 관계에 더 치중하는 예를 근간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장되지 않는 적당한 체면과 예를 근간으로 하는 사양지심은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필요조건임은 분명한 것 같다.
▶️ 辭(말씀 사)는 ❶회의문자로 辛(신; 날붙이의 모양, 자르다, 명백하게 하는 일)과 (란; 뒤섞인다, 다스리다)의 합자(合字)이다.뒤섞인 것을 정리하다, 재판에서의 진술(陳述), 말(詞; 사), 사양하다, 그만두다 따위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辭자는 ‘말씀’이나 ‘알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辭자는 실타래를 손으로 엮고 있는 모습을 그린 란(어지러울 난)자와 辛(매울 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금문에서는 란자와 司(맡을 사)자가 결합한 사(말씀 사)자가 ‘말씀’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司자는 손을 들고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명령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금문에서는 이렇게 ‘명령하다’라는 뜻을 가진 司자에 란자를 결합한 자가 ‘(높은 분의)말씀’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관료들은 죄인의 죄를 묻고 따져 심판하는 역할도 했었다. 그래서 소전에서는 죄인들 간에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풀어 심판한다는 의미에서 辭자가 ‘말씀’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래서 辭(사)는 (1)사상(思想)을 말이나 글로 나타낸 것 (2)한문(漢文) 글체(體)의 하나. 소(騷) 및 부(賦)와 비슷하며, 흔히 운어(韻語)를 씀 (3)문법(文法)에서, 단독으로는 문장(文章)의 성분(成分)이 될 수 없는 말. 조사(助詞), 조동사(助動詞), 부사(副詞)의 대부분을 이르는 데 형식어(形式語), 허사(虛辭), 부속사(附屬辭)따위로 일컬어 짐 등의 뜻으로, ①말씀 ②문체(文體)의 이름 ③핑계 ④사퇴하다 ⑤알리다 ⑥청하다 ⑦타이르다 ⑧사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말씀 언(言), 말씀 화(話), 말씀 설(說), 말씀 어(語), 말씀 담(談), 말씀 변(辯)이다. 용례로는 작별하고 떠남이나 인사를 하고 떠남을 사거(辭去), 임금의 명령 을 전달 하는 내시 등의 벼슬아치를 사관(辭官), 응대하는 말을 사령(辭令), 맡아 보던 직임을 내어 놓고 물러남을 사면(辭免), 체로 쳐서 골라 가르는 일을 사별(辭別), 이 세상을 하직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일컫는 말을 사세(辭世), 사양하는 일과 받는 일 또는 사퇴와 수납을 사수(辭受), 맡아보던 일자리를 그만 두고 물러남을 사임(辭任), 말과 얼굴빛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사기(辭氣), 제사를 지내고 신을 보내는 일을 사신(辭神), 하고자 하는 말을 사연(辭緣), 사임할 뜻이나, 사직할 뜻을 사의(辭意), 사양하여 받지 아니함을 사절(謝絶), 맡은 바 직무를 내어놓고 그만 둠을 사직(辭職), 작별하는 인사의 말을 함을 사결(辭訣), 쓸데없는 말이 많음을 사비(辭費), 사절하여 물리치는 것을 사사(辭謝), 말과 얼굴빛이나 말과 표정을 사색(辭色), 늘어놓거나 기술한 말이나 글의 내용을 사설(辭說), 말에 조리가 있고 분명함을 사리명창(辭理明暢), 사퇴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함을 사불획명(辭不獲命), 태연하여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아니함을 사색불변(辭色不變), 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을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임할 뜻을 표함을 사의표명(辭意表明) 등에 쓰인다.
▶️ 讓(사양할 양)은 ❶형성문자로 譲(양)의 본자(本字), 让(양)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 언(言;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襄(양; 다툰다)으로 이루어졌다. 서로 말다툼하다의 뜻이 전(轉)하여 사양하다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讓자는 ‘사양하다’나 ‘양보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讓자는 言(말씀 언)자와 襄(도울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먼저 襄자를 살펴보면 衣(옷 의)자와 口(입 구)자와 같은 매우 복잡한 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상(喪)을 당해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襄자에 言자를 결합한 讓자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을 ‘(말로)도와주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讓자는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양보해준다는 의미에서 ‘양보하다’나 ‘사양하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讓(양)은 ①사양하다 ②양보하다 ③겸손하다 ④넘겨주다 ⑤꾸짖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겸손할 손(遜), 겸손할 겸(謙)이다. 용례로는 권리나 이익 따위를 남에게 넘겨 줌을 양도(讓渡), 지위를 남에게 사양함을 양두(讓頭), 길을 남에게 사양함 또는 길을 서로 비켜 줌을 양로(讓路), 토지의 경계선을 사양함을 양반(讓畔), 남에게 좌석이나 길이나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물러나는 것을 양보(讓步), 남에게 앞을 양보함 또는 먼저 하기를 사양함을 양선(讓先), 넘겨받음을 양수(讓受), 자기의 소유를 보상없이 남에게 넘겨 줌을 양여(讓與), 임금이 자리를 물려 줌을 양위(讓位), 나누어서 넘겨 줌을 분양(分讓), 겸손한 태도로 사양함을 겸양(謙讓), 남에게 옮기어 줌을 이양(移讓),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겸손하게 응하지 않거나 받지 아니함을 사양(辭讓), 겸손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을 사양지심(辭讓之心), 물려줌과 내침이라는 선양방벌(禪讓放伐), 상대방 또는 남에게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아니함을 일보불양(一步不讓), 겸손하게 사양하는 미덕이라는 겸양지덕(謙讓之德)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