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은...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예수를 말씀으로 만나서, 믿고 거듭나 한 몸 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그 느낌에 대한 반응이 찬양과 기도를 하게 되며, 결국 이 느낀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없는 신앙생활은 종교 생활로 영적 생명을 못 느끼기에 죽음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시간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치 계절을 느끼고 사는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에 찬양과 감사와 기도는 결과적인 것입니다.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느낌은 항상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존재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느끼는 느낌의 반응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는 것과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과는 별개 문제입니다.
무엇을 행동하게 될 때 그것은 말씀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의 느낌이 왔을 때 결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이 되고 후회스럽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어디서 근원이 시작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느냐? 하나님을 느끼면서 시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 1장이 전부 하나님의 느낌입니다. 빛도, 광명도,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느낌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창 1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요 1장 3절의 그를 통하여, 그분 안에(1:4) 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말씀과 행동이 다르게 나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르게 나오는 이유는 말씀의 느낌으로 하루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침에 느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런 느낌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일어나면 하나님의 느낌 없는 하루의 시작이 계속되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삶을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 없는 하루의 삶을 살면서도 비정상적인 삶이 아닌 줄 아는 겁니다.
요 1:3절에 Pavnta (판타=모든 만물)는 그를 통하여로 말미암아서 되어집니다. (엔 아우토=그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우리들의 빛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느낌 없는 시작은 어둠으로 시작해서 어두움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망과 불평과 짜증의 연속입니다. 느낌에 대한 감사로 살지 못합니다.
안 되는 것을 고쳐가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중에 나를 침상에 누워있게 하였다면 오늘 아침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어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어설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는 늦습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아무 말이나, 아무 곳이나 가는데 그런 삶이 바로 하나님 없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느낌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생활은 감사와 감격의 결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이 설교로 남아선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시간이 끝나면 다시 하나님 없는 생활이 반복이 되어 버린다면 정말 말씀이 너희(마음 안) 속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계명을 영접하여 마음 안에 가지지 않아서 지키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삶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보다 못하면 짐승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날의 원리입니다.
내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번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죽으면 그게 뭡니까? 종자가 바뀌고 본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완전한 새 피조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 육체(흙) 그대로 로 남겨 놓는데,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더 잘못된 자가 됩니다.
결정적인 문제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모두 내게 올 것이요 내게로 오는 자는 결코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다.”
주님은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밖으로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안으로 오는 자를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그분에게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6:39)“내게 주신 (모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이 모든 자를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사람에서 그분에게로 가는 자로 발전해야(바꿔져야) 하고, 그런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은 왜 그들에게 영생을 주어야 하느냐?
영생이 무엇인데... 그래서 3절에 ‘영생은 이것이다’라고 합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2절에서 영생을 (조엔 아이오니온=영원한 생명)으로 말씀합니다.
3절은 이 생명이 영원한 것인데 이 영생은 당신과 당신이 보내신 자를 아는 것(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이라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과 아는 것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느낀다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낌입니다. 모든 존재는 느낌을 줍니다. 들꽃 한 송이도 우리에게 느낌을 줍니다. 민들레의 느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을 가진 때부터 ‘영원한 생명이기에’ 참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고 했습니다. 어디로 무엇 하러 보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메시야 구원자로 우리에게 보내졌기에, 우리에게 오시었기에 우리는 그분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느낌으로 삽니다.
(요 6:29) “하나님의 일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를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오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눈과 손으로, 귀로 믿지 않습니다. 느낌으로 안다는 겁니다.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직스러움이 느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이것이다.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살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냐?
(요 6:40)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요 6:50) “사람을, 그(생명의 떡, 그리스도)를, 보고 죽지 아니한다.”
(요 15:12)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느낌입니다. 무슨 일을 시키면 본성이 나옵니다.
말씀을, 느낌을 통해서 감사가 나오면 일로서 나타나야 합니다.
일할 때도 말씀을 들을 때도 느껴야 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 것이 우선되어서 그 느낌을 묵살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에도 나오는 것처럼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이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로 나누입니다.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본문 3절 말씀을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느껴서 감사하든지 말든지 영생은 이것이라고 합니다.
당신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식을 위해 평생 희생하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를 느껴보고 싶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루만이라도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 영적인 것을 느끼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그분을 느끼며 사는 은혜가 주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