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페이스
- 김숙영
비밀을 안쪽에 숨긴 채로 나무는 천 년을 산다
가지 끝이 예민하고 집요해서
우주의 존재를 겨우 손금에 새기는 데도 흔들림이 없다
그런데 당신은 하루도 못 버틴다
단기 기억상실이 되어 일부를 지워도 좋으련만
감정을 부추기고 일제히 파란을 일으킨다
당신의 돌려 말하기는 처음부터 기묘한 역설이 아니다
그저 쉽게 들켜버린 표정이다
과열된 노이즈를 왜 자신만 모르는 걸까
물속같이 캄캄하고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살 떨리는 조바심을 삼킨 채
참을성이 부족한 낮과 밤을 통과하면 편할 텐데
때론 나무도 거리 두기가 못마땅할 때가 있다
움직일 수 없는 비밀을 보내주기 위해
바람에 몸을 잔뜩 뒤틀고 싶을 때도 있다
나무는 문득 발아래 바위를 본다
만 년 동안의 포커페이스를 읽는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누설하지 않은 저 무겁고 단단한 침묵
당신은 바위 속에서 반나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가끔 비밀의 맛이 못 견디게 꿈틀거리면
나무는 새를 날려 보낸다
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존재에게 슬쩍 속삭인다
ㅡ웹진 《님Nim》(2024,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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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러 나라 국민들 중에서 유독 우리 민족의 표정이 가장 근엄하다고 합니다
누구는 유교문화 때문이라도 하고, 다른 누구는 걍퍅한 현실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인류는 희로애락을 나름대로 수용한 채 살아가기 때문에 간직하는 것도 각양각색입니다
얼마전에 교황께서 세계 각국 희극인들을 초청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하더군요
무표정한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직업이 매우 소중하다는 걸
이승에서 하느님을 대리하는 교황의 인정이었던 셈이지요
혼자 있으면서 히죽거리면 '미쳤다'고 합니다만, 미치지 않고선 세상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은 미쳐야 가능합니다
나무처럼 바위처럼 무표정한 일상일지라도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할 때 세상이 고요에 듭니다
명상만이 천 년 만 년의 포커페이스를 읽을 수 있으니 오늘 반나절만이라도 고요에 발을 담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