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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기자, 김대중](1) 술과 사람 좋아한 평생 친구, 그의 칼럼은 '대한민국 지킴이'였다
조선일보
최명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5.06.01 05:45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29/2015052902311.html
김대중은 내가 존경하는 친구다. 그런데 금년이 그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한지 50년이 되는 해다. 한 직장에서 50년을 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신문사에서 이런저런 기념행사를 마련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에 문화부의 이한수 기자가 전화를 했다. 이만 저만하니 김대중에 관한 글을 하나 써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작년(2014년) 여름에 펴낸 수필집 '술의 노래'(도서출판 선)에 김대중에 관한 글이 있어서 나에게 청탁을 한 것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김대중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면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김대중이 한 신문사에서 반세기동안 기자 생활을 한 것은 경이롭다. 우리나라 신문 역사에서는 처음이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신문사고 어디고 오너가 아닌 이상 한 직장에서 50년을 보낸다는 것은 정년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요즘의 추세를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대중은 1965년 수습 8기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편집부, 외신부, 사회부를 거쳐서 1967년에 정치부로 갔다. 제일 적성에 맞았다고 했다. 물론 정치부로 가기 전에도 민완기자였다. 취재 잘하고 글도 잘 썼다. 그러나 다른 문제보다 정치 현실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 정치부로 가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50년 기자생활… 신문 역사에 처음 있는 일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그러다가 그는 주미특파원으로 발탁되어 1972년에 워싱턴으로 갔다. 유신이 막을 내린 1979년까지 미국에 있었다. 독재를 안방에서 목도(目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할 수도 있었겠으나, 외국에서 한국을 보면 더 잘 보이기 때문에 실은 마음이 편하지 않은 7년의 기간을 미국서 보낸 것이다. 7년이란 긴 세월동안 민주주의의 본향에서 그것이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배웠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은 이때 성숙된 것이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그는 철두철미 자유민주주의자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한마디 첨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1986년 김대중이 전두환 정권과의 마찰로 자의반타의반 다시 한국을 떠나 1년 남짓 영국으로 피신한 일이다. 영국은 근대민주주의의 발상지다. 여기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이 투철하게 재충전되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과 자유주의적인 사고는 군사독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근자에 대한민국이 기적적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 현실은 선진민주국가의 그것에 비하면 한참 후진인 것이다. 실은 민주주의도 아니다. 정치가 4류란 말도 있었지만, '개판'만도 못한 국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기구라고 한다. 50년 동안 쓴 김대중의 글을 내가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의 글은 한결 같이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가 우리나라에 정착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한국 사회가 바르고 질서 있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이 일류의 품격을 갖춘 국가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뤄왔다. 그는 현실주의자이다. 이상국을 꿈꾸지 않았다. 점진적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을 늘 제시했다.
내가 김대중을 알게 된 것은 1958년 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서였다. 그러니까 그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기 7년 전이고, 6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이다. 사실 처음엔 그를 잘 몰랐다. 물론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를 잘 몰랐다. 서울법대는 좀 이상한 곳이라 학생들은 대체로 개성이 강하고, 다는 아니나 대부분 고등고시(지금의 사법고시에 해당) 준비에 열중이어서 다른 곳에 한눈을 잘 팔지 않는다. 허기야 당시엔 바둑도 많이 두고, 당구도 많이 치고, 등산도 더러 다니기는 했어도, 대체로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끼리 몰려 다녔다. 그와 나는 물론 고등학교가 다르다. 그런데 나는 대학 2학년 때부터 평생의 지기(知己)가 된 김광웅(서울대 명예교수)과 어떻게 친해졌다. 일찍 혼자되신 어머니가 아마 그 해(1960년)에 돌아가시고, 김광웅은 두 살이 위인 누나 김문자와 수유리에서 살았다. 김문자는 우리와 같은 학년이고, 이화여대 영문과에 다녔다. 정말로 “남매는 단 둘”이었다. 그러다가 졸업 다음해인 1963년부터인가 김광웅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집에 어쩌다 놀러 가면 김대중이 와 있던 때가 많았다.
기사와 칼럼 못지 않게 연애편지 실력도 수준급
그때 김대중은 ROTC 1기의 통역장교였고, 휴가를 자주 나온 것 같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김대중은 김광웅의 누나와 친했다. 그는 문재(文才)의 기자로 평생을 보냈지만, 당시는 연애의 재주도 비상했다. 친구의 여동생과 사귀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러나 친구의 누나와 연애하는 경우는 드물다. 뛰어난 능력인 것이다. 김대중이 김문자와 가까워진 것은 아마 편지를 잘 썼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대중은 중학 시절부터 문학에 심취하여 “휴머니즘이 녹아 있는 촉촉한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 촉촉한 연애편지에 김문자가 녹아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 결혼했다. 그건 그렇고 나는 김광웅과 어울려 다니면서 김대중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친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64년 말에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동안 우리는 만나지를 못했다. 김대중이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이야기는 미국서 들었다. 나는 1970년 여름에 귀국했다. 그리고는 두세 번 만났을까? 그는 1972년 주미특파원이 되어 워싱턴으로 갔다. 장장 7년을 그 곳에서 보냈다. 그의 소식은 그의 칼럼을 통해서였다. 그러다가 1978년 여름 나는 워싱턴에서 그를 만났다. 나에게는 그해 8월에 하버드대학에서 있었던 ‘중국공산운동에 있어서 농촌기지’란 워크숍에 논문을 발표하러 갈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중국연구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혹시 워싱턴의 정부인쇄국에서 발간된 중국관계 자료에 어떤 것이 있나 궁금했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구입하려는 생각이 있어서 워싱턴에 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는 이왕 동부로 가는 길이니 오래 떨어져있던 친구 김대중이 보고 싶어서였다.
그래 나는 8월 13일 오후에 덜레스국제공항에 내렸다. 김대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김문자 여사가 철판에 연신 구운 고기를 안주로 1리터짜리 시바스리갈 한 병을 다 비웠다. 무얼 더 마셨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취한 김에 그랬겠지만, 염치불구하고 그 집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김대중은 나를 정부인쇄국에, 또 늦은 오후엔 공항으로 데려다 주었다.
다음 해(1979년)에 귀국한 김대중은 정치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기자를 지내면서 참으로 훌륭한 기사와 칼럼을 많이 썼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인의 자리를 굳게 지켜왔다. 다 아는 일이지만 지금은 고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그도 바쁘고 나도 바빠서, 또 직장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달라서,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는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라 글을 쉽게 술술 쓰는지 모르나, 무엇을 어떻게 쓸까하는 문제를 늘 생각해왔을 것이니 바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나는 없는 머리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으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1년에 서너 번 만나면 잘 만나는 그와 나였다.
이런 일은 기억에 남아있다. 20년 전이다. 하루는 어디선지 그와 엄청 마셨다. 당시 나는 서울 반포동에 살았고, 그의 집은 방배동이다. 강북에서 가자면 방향이 같다. 또 그에게는 기사가 딸린 차가 있다. 취하면 으레 나를 데려다 준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 집 앞에 먼저 왔는데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웠다. 주당들이 헤어질 때는 늘 미진하다. 그래 2차인지 3차인지 내 아파트에 들어가자고 했다. 선선히 따라 들어왔다. 취해서였을 것이다. 왜 그가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지는 모르나, 나를 위시하여 내가 아는 술꾼들은 다 외로운 존재들이다. 나의 경우에 술을 마시면 외로움이 좀 덜하다. 그도 그런지 모른다. 집에는 다른 술도 병깨나 있었겠지만, 법성포소주가 말로 있었다. 독하긴 하나, 맛이 기막히게 좋은 밀주다. 서울법대 박병호 교수를 통해서 구한 것이다. 몇 잔 같이 마시다가 그의 코를 보니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아마 나만 코가 비뚤어지게 마신 모양이다. 코는 비뚤어져도 정신은 있다. 그래 한 되를 따라주어 보냈다. 한동안 그 이야기를 가끔 하더니, 요즘은 안한다. 그러나 법성포소주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50년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김대중은 매우 많은, 그리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 만났을 것이고, 다니면서 밥이고 술이고 먹은 집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니 잘 아는 밥집도 많고, 음식 잘하는 집도 많이 안다. 자연히 미식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싼 집은 잘 다니지 않는다. 소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는 칼국수 같은 음식을 좋아한다. 자주 가는 국수집이 물론 있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돈암동)역에서 가까운 태극당 건물의 뒤편에 위치한 허름한 집이다. 김영삼 씨가 대통령되기 전에 자주 다닌 것으로 소문난 삼선교역 근처의 ‘국시집’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여자가 독립해 나와 차린 집이다. 옥호는 ‘밀양칼국수’다. ‘국시집’에서 여러 해 닦은 솜씨니 칼국수는 물론이고, 소고기 수육과 생선전이 특이하게 맛있다. 또 그 집의 김치가 일품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 집의 사장인지 주방장인지 하는 여자는 미인은 아니나 유명한 ‘국시집’에서 오래 일했기 때문에 장안의 명사들을 많이 안다. 독립해 나오면서 먼저 집의 명사고객, 단골손님들을 대거 끌고 왔다. 김대중도 그 중 하나다. 그런데 그녀의 취미는 대통령의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수집하는 것이다. 드나드는 명사들에게 부탁하면 대통령시계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시작된 취미인지 모른다. 그래 대통령시계를 갖다 주는 단골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면,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봉황무늬가 있는 시계를 만들어 새마을지도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대통령시계의 효시(嚆矢)라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 때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후 역대 대통령 모두가 시계를 만들어 청와대를 방문하는 인사들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대통령시계가 남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처음 몇 달은 시계를 만들지 않고 지냈다.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 그러다가 오륙 개월이 지나서 시계를 만들어 새누리당 의원 등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전처럼 남발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비교적 귀했다. 그런데 ‘밀양칼국수’의 그녀가 김대중에게 박근혜 대통령 시계를 하나 구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김대중도 그 시계를 받지 못했다. 갖고 있었으면 선뜻 주었을 것이다. 그래 청와대에 출입하는 기자에게 부탁해 구했다는 것이다. 그 시계를 받은 칼국수집의 그녀는 입이 함박만 해졌을 것이다. 시계사건 후 나도 김대중과 그 집엘 두어 번 간 기억이 있다.
'장지연 상을 반납해야 하나' 칼럼… 통렬한 역사 인식 인상적
우리 집에서는 다른 신문도 보나 오래 전부터 ‘조선일보’를 구독해왔다. 그러니 김대중의 칼럼을 매번 읽게 된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늘 나라를 걱정하는 글을 쓴다. 때문에 그의 글은 우국지사의 문장이고, 그의 글을 읽으면 우국지사의 면모가 약여(躍如)하게 떠오른다. 여기서는 그의 칼럼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4년 전 4월, 김대중은 ‘장지연 상(賞)을 반납해야하나?’라는 제목의 칼럼(조선일보 2011년 4월 18일)을 썼다. 김대중은 뛰어난 언론인이고 그의 글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몇 개의 큰 상을 받았다. 내가 시상식에 참석하여 축하한 상도 몇 개 된다. 그 가운데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 상’(2004년)도 있고, 경암학술상(2013년)도 있다. 여러 상 가운데 김대중이 가장 긍지를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상이 ‘장지연 상’(1991년)이 아닌가 한다. 다 알다시피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은 항일 언론인으로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유명한 논설을’황성신문’에 실었던 지사다. 그는 1962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국민장’을 추서(追敍)받았을 뿐 아니라, 같은 보훈처는 2004년 11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선정했다. 그런데 나라가 어찌되려는지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2010년 11월 위암의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고, 그 국무회의는 2011년 4월 5일 위의 취소결정을 확정했다.
그 몇 해 전부터 경술(庚戌) 이후 위암의 행적을 시비하는 좌파 무리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위암이 총독부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 주필이 되어 친일의 글을 썼다고 떠들어댔다. 민족문제연구소란 간판을 내건 그들은 2008년 ‘친일인명사전’을 만든다면서 위암을 수록 대상자에 포함시켰다. 짐작컨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는 김황식 총리가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작태에 부화뇌동한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취소결정의 배경이다.
이에 김대중은 노했다. “정부가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단정 짓고, 과거 정부가 그에게 줬던 훈장을 도로 빼앗기로 결정한 이상, 나는 ‘친일인사’를 기려서 만든 상을 더 이상 자랑스러워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개탄했다. 개탄의 이유는 여럿이다. 그 하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것이다. “언필칭 보수정권이라고 하고 또 실제로 보수우파 세력의 지지로 권력을 담임한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일들을 보면 ∙∙∙∙∙∙ 이쪽도 저쪽도 아닌 ‘기회주의적’ 집단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정부는 한마디로 ‘철학이 없는’ 정부다”고 일갈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김황식 총리의 ‘인식’과 서훈취소를 “말 한마디 없이 통과시킨 국무위원들의 무식함이 부끄럽다”고 했다. 대통령이 그 모양이니 그 밑의 총리나 국무위원들이 오죽하겠느냐는 의미가 여기엔 분명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김대중은 서훈취소를 의결한 국무위원들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읽어보기나 했는지,” “그의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 본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나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읽어보았자 무슨 얘긴지 이해할 수도 없는 집단일 것이라고 나는 지적했다.
나는 위암의 서훈취소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훈장을 추서한 정부와 그것을 취소한 정부가 과연 동일성 있는 대한민국의 정부인가를 물었다. 과거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면 뒤집을 수도 있다. 다만 왜 잘못되었는지를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다. 설사 위암이 친일적인 글을 썼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시일야방성대곡'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만큼, 친일적이고 매국적인가? 길고 짧은 것은 대보고, 조금이라도 길면 길다고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공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대약진과 문화혁명이라는 ‘엄중한 과오’도 있다. 그러나 1981년 중국공산당 11전 6중 대회는 마오쩌둥에게 ‘공적이 첫 번째이고, 과오[착오]는 두 번째라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아직도 천안문광장에 걸려있는 것이다.”
둘째, 결정의 번복이 가져올 결과도 생각하여야 한다고 했다. 상을 받은 김대중이 아니라도 절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위암을 항일지사로 알고 있다. 존경의 대상이다. 어려운 시절에 붓을 꺾지 않고 민족혼에 호소하는 항일의 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훈이 취소되면서 하루아침에 위암은 항일지사에서 친일매국노로 전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그를 존경 아닌 치욕의 대상으로 삼아야하나? 우리에게는 광화문 앞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말고는 존경하고 사표로 삼을 선대의 인물이 없다. 자라나는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너희 조상 가운데는 훌륭한 인물이, 존경할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가르칠 것인가? 예컨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훌륭한 인물들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친일분자로 억울하게 매도되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균형 있는 평가로 옥과 돌이 구분돼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셋째, 친일의 문제가 근자에 와서 왜 집요하게 우리 사회를 흔드는가? 문명의 충돌도, 종교의 갈등도 도처에 있는 것이 요즘의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와 같이 이념과 정치의 분열이 심한 사회도 드물다. 친일의 문제도 기본적으로 이념의 문제고, 정치의 문제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에서 시작된 것이다. 북한이 줄기차게 내세우는 것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고, 그 집단이 정권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한은 친일세력의 집단이라고 계속해서 비방해왔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작업으로 일관해왔다. 특히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좌파들이 기를 펴기 시작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과거의 친일문제가 고개를 들었다. ‘햇볕’을 보기 시작했다. 그 임시부터 친일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들 가운데는 분명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문제도 우리가 척결해야할 과제라고 믿는다.
김대중의 장지연 상과 관련된 문제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술의 노래’란 책(398-411쪽)에서 기술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또 위암의 서훈 취소가 무효라는 판결도 있었다. 보훈처의 서훈 취소가 나온 후, “장지연 선생의 유족은 법원에 보훈처 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상당수의 학자도 ‘문제의 글 가운데 장 선생이 쓰지 않은 것도 포함돼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올 1월 ‘대통령의 권한인 서훈 취소를 국가보훈처가 한 것은 월권’이라며 유족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법 행정9부(재판장 조인호)도 27일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하지 않았는데도, 국가보훈처장이 서훈 취소를 한 것은 절차적 하자가 명백해 무효’라며 1심과 같이 유족에게 승소판결을 했다.” (조선일보 2012년 12월 28일. A10 참조.)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이렇게 본다. 절차적 차원에서 서훈 취소의 무효판결도 있을 수 있지만, 법원은 실체적인 문제도 다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위암이 실제로 친일의 글을 얼마나 썼는지, 또 그것이 서훈을 취소할 만큼 중대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이 문제가 대법원에도 갔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자유주의자 김대중,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보수적 글 써
김대중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다. 그러나 장지연 상에 대한 칼럼에서와 같이 그에게는 보수적인 사고의 측면도 강하다. 다른 칼럼들의 색채도 그와 유사한 것이 많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김대중의 보수주의는 한반도가 처한 상황의 산물이라고. 또 자유민주주의와 보수주의가 상충하는 것도 아니라고.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는 현실에서, 종북 좌파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서 기승을 부리는 현실을 직시할 때, 그의 보수 성향은 당연한 것이다. 그의 보수는 대한민국을 위한 보수이며, 한마디로 그의 칼럼은 대한민국 '지킴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때 황인성 초대 총리발탁이 김대중의 추천작품이란 설이 있다. 문민정부라고는 하나, 오랫동안 정부의 운영기제(運營機制)가 군사정권에 익숙했던 만큼 군인출신에게 초대 총리를 맡기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취지였다. 나라를 위한 추천이었다. 그런 형편이니 왜 입각교섭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때마다 거절했다고 한다. 김대중(DJ) 정권 때도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언론에 하마평이 돈 적은 없지만, 비교적 최근까지 청와대에서는 그를 국무총리후보로 고려한 적도 있다고 한다.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또 그게 무슨 대수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은 있다. 1999년 5월 말에 김대중의 처남인 김광웅이 DJ 정권의 초대 인사위원장으로 입각했다. 김대중은 DJ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정책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벼슬을 살러 들어간 처남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2년 동안 김대중은 옹졸한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처남을 만나도 못 본척 했고, 말도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내가 목격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입각이고 자시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김대중은 줄기차게 한 직장을 지켰다. 나의 옛 기록을 보니 1985년 3월 27일자에, “김대중 국장이 전화했다. ‘월간조선’ 편집위원이 되어달라는 얘기다. 거절했다.”고 간단히 적혀있다. 편집국장 때였던 모양이다. 교수가 신문사잡지의 편집위원 노릇을 하는 것이 큰 외도는 아니지만, 나도 한눈을 팔지 않고 한 직장을 수십 년 지켰다. 나는 선생질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어서 그랬고, 김대중은 다른 재능도 많은데 외길을 걸었다. 족탈불급이다. 더 무슨 말을 하랴! 신문사를 그만 두더라도 건강히 오래 건필을 휘두르기 바란다. 술도 많이 마시고.
◎최명 교수는?
서울대 법대,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비교정치학 서설' '춘추전국의 정치사상' '현대 미국정치의 이해' 등 저서 외에도 '소설이 아닌 삼국지' '소설이 아닌 임꺽정' 등 전공 틀에 얽매이지 않는 책도 다수 냈다. 두주불사형 호주가(豪酒家)로 최근에는 자신의 음주 편력을 담은 수필집 '술의 노래'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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