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걱정은 나와는 상관없는 듯 빗소리에 기대어 한 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주위는 죽은 듯 고요하다.
비가 그쳤는가? 물기 머금은 시원한 맞바람이 앞문과 뒷문을 통하여 무거운 눈자위를 쓸어내리고, 잠에서 막 깨어난 눈꺼풀에 힘을 실어준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대청으로 나가 반가부좌 틀고 앉아 처진 몸뚱아리 얼빠진 모습으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다만 한 손으로 온 얼굴에 난 상처가 아물어 가며 생기는 가려움에 약간씩 끌쩍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나는 미륵반가사유상이 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당 저 끝 산사과나무에는 파릇한 사과열매가 물기에 젖어있고, 나뭇잎은 남은 물기를 떨구며 처져있다. 그 아래 묶여 있어야 할 바람난 갑돌이 새끼는 묶여있던 고리만 흙탕물에 뒹굴고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동네 순이네 암놈 점박이 년이 내지르는 냄새에 뻑 가서 꼬랑지 요란하게 흔들며 침 질질 흘려가며 주위에서 맴돌고 있을 게 뻔했고, 아니면 운 좋게도 용식이 집 개새끼를 제키고 지놈이 차지하여 엉덩이 붙여먹기 하는 중인지도 모를 일이다.
늘 부지런 하신 어머니는 아마도 오늘이 오일장이 서는 날이라 읍내에 가셨을 법 하니 조금 있으면 달 싸한 참외나 수박을 맛 볼 수 있겠다.
그렇듯 넋을 놓은 모습으로 오만 잡생각의 상념에 빠져 있을 때 빗물 흥건히 고여 있는 옆마당으로 들어오시는 아버지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움츠렸다.
순간 나와 아버지 사이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음으로써 둘 만의 은밀한 공간에 두고 서로를 견제하며 모른 척 지나칠 때의 기묘한 순간이 그것이었다.
어제까지 엉덩이를 짚으시며 약간 기울어진 모습으로 다니셨지만 오늘은 완쾌한 모습이셨고, 언제나처럼 검은 태가 둘린 흰 중절모에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고 어디서 비에 홀딱 젖은 모습이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다소 흥분된 표정이라는 것을 내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곤 얼굴엔 상처투성이가 된 아들이 보일 듯 말 듯 묘한 웃음을 짓는 표정에, 속으로 ‘에이, 이놈아...!’ 하듯 잠시 눈을 올려 뜨곤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홀로 무엇엔가 불만을 표로하면서 사랑으로 들어가신다.
이처럼 일찍 돌아오신 걸 보면 아마도 며칠 전 나와의 은밀(?)한 일이 있고 난 후의 그것과는 별도로 오늘 경로당에서 누구엔가 불쾌한 도전을 받고 그 응답으로 한판 진검승부를 펼친 것임이 틀림이 없었다.
“니 보다 못난 놈에게는 무조껀 져주어야 하고, 니보다 잘 난 놈에게는 기필코 이겨야 한다!”
라는 지론을 아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가르치시는 분이라 오늘은 진정 대단한 상대를 만나신 게 틀림이 없었다.
옆에서 아버지 친구 분들 또한 상대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눈치껏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중간자 역할을 묵묵히 해 버린게 분명했고,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 상대가 베푸는 승리의 만찬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걷어차듯 해 버리고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추적추적 돌아 오신게 분명했다.
아마도 지금 아부지의 눈앞에는 그 만찬이 좌르르 펼쳐지며 남아있는 자들의 화기애애한 자리에 질투의 눈길로 마음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이 틀림이 없었고, 무리 속에서 동떨어진 외로움에 분을 삭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또 한편으론 아들놈과의 미묘한 만남 이후로 느끼는 그 복잡한 감정을 소화시키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때를 기다리는 듯 했다.
이토록 아버지와 나와의 기묘한 기운이 감돌게 된 동기는 이랬다.
며칠 전, 친구 섭이란 놈이 밤늦게 찾아와 뒷산 터밭에 널려있는 당파를 서리하자는 은밀한 제의를 해 왔다. 당파란 굵은 파가 아니라 파전 붙여먹는 작은 파를 말한다.
여름방학 중 이런저런 이벤트도 없이 무료한 날들이라 친구 놈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를 했고 그길로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비탈진 터밭을 특공대처럼 가로질러 골골이 심겨있는 연한 당파를 뽑아 한 자루 가득 담고 낄낄 거리며 도둑질 해와 섭이 놈 집도 아니고 우리 집은 더더욱 아닌 바로 아버지 놀이터인 경로당 할머니 주막으로 달려갔다.
이미 시간은 밤 열시를 넘기고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어린 늦둥이 딸아이랑 둘이서 경로당 하부영역에 자리를 틀고 주막을 차려 기거하며 경로당 청소나 뒷설거지를 해 주며 막걸리나 매운탕이나 전을 붙여 안주로 내어 파며, 그 낙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할매가 경영하는 토방주막이었다.
그곳은 그리 손님이 많은 편도 아니고, 대게가 경로당에서 시켜먹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우리같이 고등학생이 교복만 입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막걸리 몇 되박은 내어주는 더없이 편하고 아름다운(?)장소였다.
그날도 때 늦은 밤이었지만 경로당 안방에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경로당 할매는 우리가 건네는 파 자루를 보자 출처가 어디인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손에 들어왔는지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견물생심이라, 파보기가 반가워 입이 가로로 쫘악 찢어진다.
두 세장만 찌짐으로 구워주면 나머진 몽땅 자신의 것이 될 것이며, 더불어 막걸리까지 팔게 되는 형국이니 할매로선 우리가 더더욱 반가운 손님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름 하여 장물 취득죄이나 무지몽매한 용어를 알 턱이 없었다.
우리는 간혹 간식꺼리 서리한 감자나 아니면 한천 냇가에서 어항으로 유혹해서 잡은 모래무지나 챔피리, 미꾸라지, 꺽지, 꾸구리 등등... 민물고기를 잡아다 할매 토방에 던져 놓으면 할매는 그것으로 고추장 풀어 넣고, 민물 매운탕을 끓여서 우리 것 일부만 남겨 놓고 경로당 어르신들의 안주나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양식이었으니 간간히 무료한 우리들에게 바람을 넣기도 하였고, 그 맛을 못 잊은 경로당 손들께서는 우리들의 안부를 물어오곤 하셨다. 그 중에는 대단한 우리 어르신이 끼여 있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었다.
우리 두 놈은 자리틀 틀고 앉았고, 할매는 우리가 건네준 파를 다듬어 전을 굽기 시작했다. 우리 손으로 직접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장독에 담겨있는 뽀얀 속살의 막걸리를 한 가득 퍼 와선 잠시 짬을 내어 던지다시피 하는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전이 눈앞에 여러 장 펼쳐있고 우리는 낄낄거리며 먹성 좋게 막걸리 안주삼아 찢어 넣고 있었다.
얼마를 마셨을까? 초보음주라...... 우리는 화장실 들락거리기에 바빳고, 그 사이사이 몇 번의 술상이 경로당 안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직 불 켜진 경로당엔 시끄럽게 토론하는 소리가 밖으로 들려왔다. 아마도 우리 아버지도 함께 동참을 했으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그곳에 계시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나는 안심을 하고 있었다.
물론 출입구가 별도로 되어 있으니 화장실 갈 때 말고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몇 번의 양은 주전자가 비워지고 우리는 슬슬 취기에 오르다 결국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대단한 용기가 우리에게 생겨났고 취기에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몸뚱아리 속에서 스믈스믈 역모의 기미가 알게 모르게 약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내 몸속의 반란군은 강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사내인지라 앞에 앉은 섭이 놈 보다 먼저 퍼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을 했다. 취기에 그것이 무슨 대단한 것인 양 내부로부터 터져 나오는 반란군을 운기조식으로 제압해 가며 더불어 막걸리를 쏟아 붓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의 시선을 진적부터 방해하는 훼방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화장실을 집삼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만 집중 공략하는 몸집이 대 빵 큰 똥파리였다.
앞에 앉은 이놈 섭이놈도 아까부터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며 날아다니는 똥파리가 무척 거슬렸었나 보다.
이놈이 갑자기 찌짐을 접던 젓가락으로 중국영화에서 무공의 달인이 하던 짖꺼리를 흉내 내듯 휘~휙, 하더니 어느 사이 공중을 마음껏 유영하던 그 대빵 큰 똥파리는 재수가 오지게도 없지, 거짓말처럼 섭이 그놈의 젓가락 사이에 탁 잡혀버리고 말았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대단했고, 술기운에 잡은 그놈도 믿기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리며 좋아라 박장대소를 한다.
헤롱헤롱 풀린 눈동자 한 가운데 검은자위를 모으더니 재수 없는 그놈을 가엾이 바라본다. 그러면서 하는 말,
“니 놈이 비록 더러운 뒷간에서 태어났다고는 하나, 비록 나와 이렇게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바, 내게 기쁘기 그지없는 하산길로 접어들게 맹글어 주는 내공의 실험 대상이 되었으니, 내 오늘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노니 이제 다시는 나의 안전에 얼씬 거리지 말라!”
이렇게 길고 긴 씨부랑을 몇 번이고 하더니 한 손으로 그놈을 잡고 양쪽 날개를 톡톡 뜯었다.
그리고는 날개 없는 천사 아니, 날개 없는 똥파리를 거침없이 내 술잔에다 퐁당 빠트린다.
이런 씨부랄 놈이, 그렇지 않아도 내 속의 반란군을 몰아내기 위해 엉딩이 비벼가며 간간히 입을 손으로 막아가며, 운기조식으로 승천의 기를 억누르고 있었고만,
새끼손가락 마디만한 그 똥파리가 내 술잔에서 자유롭게 유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속이 튀 틀리며 그동안 참았던 ?문이 샴페인 코르크마게 열리듯 터져버리고 말았다.
내 입을 통한 하얀 물이 굵은 분수를 내 뿜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그렇게 날아가고 있었다. 내용물 사이사이 걸쭉한 푸른색의 건더기도 함께 걸려있었음은 당연했고, 그것이 향하는 목적지는 바로 날개를 찢어 뜯던 그 젓가락 무술의 달인 섭이 놈 얼굴을 향했다.
그놈은 이미 내 낌새를 알아채고는 옆으로 몸을 비틀며 물러났으나 이미 늦어버린 뒤였고, 내용물은 이미 그놈의 얼굴을 덮쳐버리고 말았다.
환희와 고통에 찬 일그러진 그 소리를 들어 줄 시간도, 내가 만든 그 작품을 감상할 시간도 없었다. 제 이차의 반란군들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경로당 마당으로 통하는 뒷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내공이 출중한 나라도 강력한 폭발의 화력을 지닌 이차 반란군을 몰아내기에는 무리였다.
이미 한 번 터진 봇물은 더 넓은 공간으로 밀려오기 마련이었다.
그리 멀지않은 화장실을 다 가진 못했다. 바로 화장실 옆 문 앞 싸리나무 우거진 곳에서 벌이는 전투는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했다.
아래 위, 속에 남은 패잔병들까지 몽땅 몰아내고는 잠시 얼얼해진 몸뚱아리에 양팔을 벌려 땅을 짚고 입은 여전히 헤벌래 벌린 채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뒤 누군가 비틀비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속으로 한 참이 지난 지금쯤 섭이 이놈이 아마도 내가 만든 작품을 걷어치우고 나를 위해 오는가 보다 했다.
그리곤 다가와서 내 등을 정답게 토닥토닥 두드려 주는 줄 알았다.
역시 등줄기에 무엇인가 감촉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토닥거림과는 거리가 먼 따뜻한 느낌이 찬 등줄기에 전해져 온다. 점점 더 더운 기운이 전해져 오더니 그 더운 기운이 내 가랑이 사이로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것은 물기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술 취한님의 오줌 빨 이었다.
그 오줌 빨이 내 등에서 흘러 한 줄기는 내 목 뒷덜미를 지나 볼을 타고 입으로 흘러 고여 입술위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한 줄기는 내 엉덩이 계곡을 지나 가랑이 사이로 흘러들어 헐거운 바짓가랑이 사이에 달린 두 쪽(?)을 지나 고여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묘한 기분을 주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것을 빌어 흐르다니....?
‘섭이 이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보다! 그 것을 못 참고 내게 복수를 가하는가? 이 나쁜놈의 시끼! 니 놈은 오늘 제삿날인줄 알아라!’
나는 따스한 정신에 온 몸을 집중하여 일어날려 했지만 비틀비틀 몸이 내 뜻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작금의 이 꼬락서니에 복수를 해야만 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운기조식에 들어갔고, 대단한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뒤에서 무슨 속 기침 하는 소리가 ‘음음’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온몸에 힘을 가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돌아섰다.
“이 씨팔 놈이 ~~!”
입에선 거침없는 욕설이 튀어 나왔고, 내 오른 손 주먹이 허공을 휘두려는 찰나, 뒤에 서서 볼일을 보던 섭이 놈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내어 지르며 놀라 뒤로 벌러덩 자빠지고 만다.
아니다? 가만가만...... 그 내지르는 소리에 내가 놀라 경로당 대청에 켜진 희미한 불빛을 빌려 고개 바싹 내 밀고 내려다보니 그 곳에는 있어야 할 섭이 놈은 보이지 않고 어떤 노친네 한분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허공에 양 팔을 벌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첫댓글 ㅎㅎㅎ 웃을까요?
슬픈 이야긴데....ㅜㅜ
슬픈데 왜 웃을까여?
조타 당파 서리며, 그 서리해온 파로 만든 파전.... 껄쭉한 막걸리 한잔, 옛날 이때쯤인가, 생각이.... 궁금하오이다, 뒷편이................... 음악 쥑이네 ^^*
웃어야되나요? 슬퍼야되나요? 멋있습니다. 아버님과 말썽쟁이 아들이... ㅎㅎㅎㅎㅎ 늘건강하시기를..
ㅎㅎㅎ
미쳐요 이넘아! 애비도 몰라보는 hladn 같으니라고 ...그래도 글은 참 조~~~타 막걸리 한잔 하러 와라 파전 부쳐줄께
ㅎㅎㅎㅎ 그래도 초시님 막걸리 좋아 하시는거 보면 이해가 안가요. ㅋㅋ 다신 안먹을것 깉은데~~~
픽션?? 베싸메미쵸!!~
ㅋㅋ 일명 요것이 유행하는 '팩션'장르? ㅎㅎ 미~쵸~ 미쵸 미쵸 미~쵸~~
걍, 너무 웃길 때 내가 써먹는 것 베사메무쵸를 좋아하거든.ㅎ
푸하하....모놀 글쟁이 초시님 오래만이와요... 2편 빨랑 올려주삼^.~ 음악 쥑이네(2)
ㅎㅎㅎ 그래서...그들은 다시는 못보는 사이가 되었다고라고라...? 음악 쥑이네(3)
아이고마~~~ 길다..........이따가 읽을랍니다..헷튼 재밋는 얘긴거 맞죠?
ㅋㅋ 오늘은 초시님 따라잡기~ 2편 따라 발길 서두릅니다.
에구~~ 지난 자료 찾다 보니 반가운 님께서 지난 글 찾아읽으셨군요^^*~~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