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人들의 讀書觀
李 應 百
서울大 名譽敎授
1. 讀書의 基本態度
栗谷은 『栗谷全書』 學校模範에서 다음과 같이 讀書에 관해 규정지었다. 每讀書時, 必肅容危坐, 專心致志, 一書已熟, 方讀一書, 毋務汎覽, 毋事疆記. 언제나 讀書 할 때에는 엄숙한 姿勢로 正坐하여 精神을 集中시켜야 하며, 한 책을 完全히 익힌 다음에 다른 책을 읽도록 할 것이요, 너무 이것 저것을 읽으려 들거나 억지로 외려 들지 말아야 한다.
順菴 安鼎福은 그의 著 『順菴集』에서 주자의 讀書法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居敬持志, 循序漸進, 熟讀精思, 虛心涵泳, 切己體察, 着緊用力. 몸과 마음을 敬虔하고 굳건히 가지고, 차례를 따라 熟讀하면서 자세히 생각하여 텅 빈 마음으로 어디라 拘碍됨 없이 이렇게 저렇게 吟味를 하고, 自己에게 절실한 부면을 살펴 단단히 몸에 붙이도록 힘쓸 것이다.
2. 마음의 姿勢
安鼎福은 『順菴全書』에서 다음과 같이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했다. 讀書必須虛心, 可以專治虛心之道, 除去雜念, 平氣一之然後, 可以領會, 旣讀不可不思, 思古訓照檢身自己身上, 言行懼違於古訓, 志業懼遜於古人, 古人之善者師之, 過者誡之. 讀書如是, 方大有益, 不然則讀書無益, 何必抛衆務勞脣吻, 畢竟歸於能言之鸚鵡乎. 讀書에는 마음을 비워야 하므로 마음을 비우는 길을 닦고, 잡스러운 생각을 덜어 心氣를 平靜하게 고루어야 理解가 잘 될 수 있다. 읽고서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자기 身上에 비추어 言行이 혹 옛사람들의 가르침을 어겼을까, 學業에 뜻 둠이 혹 옛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할까를 생각하여 옛사람의 좋은 점을 본받고, 잘못된 점은 자성을 해야 한다. 讀書는 이와 같이 해야 크게 有益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無益할 것이니, 何必이면 여러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입술을 수고로이 하여 마침내 말하는 鸚鵡새가 되게 하겠는가.
朱熹는 童蒙須知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余嘗讀書有三到, 謂心到眼到口到. 心不在此, 則眼不看仔細, 心眼旣不專一, 却只漫浪誦讀, 決不能記, 記亦不能久也. 三到之中, 心到最急, 心旣到矣, 眼口豈不到乎. 마음이 책읽는 데 있지 아니하면 눈이 仔細히 보지 못하며, 마음과 눈이 쏟히지 않으면 그냥 건성으로 읽게 되어 記憶이 되지 못하며, 기억이 된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三到 가운데 心到가 가장 急하니, 마음이 이미 이르면 눈과 입이 어찌 이르지 않겠는가.
3. 부지런하고 着實히 읽을 것
옛사람이 螢雪의 功을 쌓았다는 것은 너무나 보편적인 이야기로 돼 있지만, 다음 말들도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는 단적인 표현이다. 帶經而鋤, 映雪而讀, 以蒲習書, 鑿壁代燭. 經書를 허리춤에 끼고 김을 매며, 눈빛에 비추어 글을 읽고, 창포 잎에 글씨를 익히며, 벽구멍을 뚫어(비쳐 들어오는 달빛으로) 촛불에 대신한다. 옛사람들이 눈빛이나 달빛, 또는 반디불빛에 책을 읽었다는 것은 결코 誇張은 아니었다. 예전 책들은 글자가 몹시 커서,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李晬光의 『芝峰類說』에는 다음 글이 보인다. 宋張無垢謫居有短窓, 每昧爽抱書就明而讀凡十四年, 石上雙趺之跡, 至今猶存云. 古人用心勤苦可想已, 今人有明窓淨几, 終日宴處, 而不讀一行書者, 獨何心哉, 攻文如此, 況望治心爲己之學乎. 宋나라 張無垢란 이는 귀양살이를 하는데 자그마한 窓이 있어 매양 이른 새벽이면 책을 안고 밝은 곳으로 가서 읽기를 14년 동안이나 하여, 돌위에 두 개의 앉았던 자취가 이제에 이르기까지 있다고 한다. 옛사람이 얼마나 애를 썼는가를 가히 짐작할 만 할지라. 지금 사람은 밝은 창과 깨끗한 책상에 하루 종일 느긋이 앉아서 한 줄의 글도 읽지를 않는 것은 대체 무슨 생각에서일까. 글을 읽는 것도 이렇거든 더구나 마음을 가다듬어 自己修養을 위한 學問을 하기를 바랄까보냐. 環境이 좋은데도 게을러 책 읽기를 하지 않는 것을 탓한 것은 요새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통하는 말이다.
『順菴集』에는 책을 읽되, 本文의 뜻에 충실할 것이요,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讀書只求本文上義理, 不可徑約而求別義, 不可漫衍而爲他說. 讀書에는 다만 本文에서의 뜻과 條理를 구할 것이요, 겉핥기로 슬쩍 스쳐 다른 뜻을 구해서는 안 되며, 쓸데없이 늘어놔 다른 이야기를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4. 字句에 구애되지 말고 全體를 읽을 것
朱熹는 朱子全書에서 아래위 文意의 어떠함을 볼 것이요, 어느 한 글자에 구애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凡讀書, 須看上下文意是如何, 不可泥著一字.
『眞文忠公讀書記』에도 이것이 그대로 소개가 돼 있고, 나아가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誦其言辭, 解其訓詁, 而不及道, 乃無用之糟粕耳. 그 말을 외고 訓詁를 풀되, 道에 미치지 않으면 쓸데없는 재강일 따름이라. 말은 形式이요, 訓詁는 理解의 手段인데, 그것에 멈추고 萬事畢矣의 心情을 갖는 이를 경계한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의 국어 敎育 現場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가령 杜詩諺解를 다룰 때 잘된 句節을 외게 한다든지, 語句의 뜻풀이와 文法的 解明을 하면 모든 일은 다 끝났다는 식으로 다음으로 넘어가는 例가 그것이다. 杜詩, 自體로서의 讀解, 鑑賞, 吟味를 함으로써 그것이 지니고 있는 文藝的 價値, 그 속에 깃들어 있는 時代相, 人間相, 그리고 諺解의 側面, 國語史的인 面에서의 價値判定 등 여러 일이 잊혀진 채 하나의 反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5. 줄거리와 段落의 把握
峿堂 李象秀는 『峿堂集』에서 讀書에서의 줄거리와 段落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先求宗旨, 次尋結構, 結構不尋, 則宗旨肯綮之所在亦不出. 鋪置次第, 脈理段落, 支分節解, 瞭然昭晰, 乃可以貫其全體, 而作者妙處始露. 먼저 宗旨(大義 또는 主題)를 구하고 다음 結構(짜임)를 찾아야 한다. 結構를 찾지 못하면 宗旨가 걸려 있는 실마리가 드러나질 않는 것이다. 敍述해 간 順序라든가 文脈의 段落, 文節의 分解가 瞭然하게 分析되어야 全體의 文意가 꿰뚫어지고, 지은이의 妙한 趣意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文의 짜임의 分析이 文意 把握에 얼마나 所重한가를 지적한 것으로, 오늘날 국어의 讀解指導에서 大意를 把握하고, 文段 나누기를 하여 節義를 考究하고 文義를 自證, 나아가서는 文의 鑑賞, 吟味를 하는 데까지의 路程을 그대로 보여 주는 敍述이라 하겠다.
全體를 파악하기 위하여 分段的 考究가 필요하다는 例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芝峰類說』에 다음 글이 보인다. 史記伯夷傳, 是叙事體, 語意錯綜, 讀者多不解. 余謂太史公文字軼蕩, 不甚關鎖, 出於繩墨之外, 此傳分作數段, 觀之可矣. 『史記』의 伯夷傳은 敍事體인데 語意가 얼크러져 讀者가 많이 解讀하지 못한다. 내가 생각건대 太史公(司馬遷)은 文章力이 매우 넘쳐 조금도 拘束을 받지 않고 規則 外로 벗어났기 때문이니, 이 傳은 두어 文段으로 갈라서 보아 가는 것이 좋을 줄로 여긴다.
6. 精讀과 要約
李象秀는 『峿堂集』에서 글을 읽을 때는 內容을 精審하게 살펴가면서 속뜻을 읽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逐字逐句, 不要放過, 尋繹其意義, 究索其旨歸, 使句句段段, 皆自相發明有着落, 首尾相顧, 表裏相襯, 必要全篇昭晰通曉, 於心下毫髮無疑, 睡中喚覺, 急趣其對, 亦如注水於壑, 沛然不滯, 此是十分工夫也. 한 자 한 句를 허부렁하게 지나칠 것이 아니요, 文脈을 探究하여 모든 句와 段落의 처음과 끝, 겉과 속이 서로 呼應해서 全篇이 환하게 通하여 마음 속에 조그마치의 疑問도 없이 되어, 자다가 깨서도 골짜기에 물을 쏟아 붓듯 시원스레 막힘없이 대답해야 흡족한 工夫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童蒙須知』에 그러기 위하여는 자세하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고 했다. 凡讀書 (中略) 詳緩, 看字仔細, 分明讀之.
7. 천천히 熟讀 玩味할 것
요새 速讀이 매우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것이든지 다 速讀의 방법으로 읽을 수는 없다. 「에밀 파게(Emile Faguet)」는 그의 著「讀書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옳게 읽기 위하여서는 우선 매우 천천히 읽어야 하며, 그 다음으로도 또 매우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여러분이 읽게 될 마지막 책에 이르기까지 매우 천천히 읽어야 한다. 책이란 읽고 즐기기 위하여서나, 읽고 배우기 위하여서나, 또는 비평하기 위하여서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천천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읽을 수 없는 책들이 있으며, 느릿한 독서에 합당치 않은 책들이 있다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과연 그런 것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조금도 읽을 필요가 없는 책들이다. 천천히 읽는 것의 첫째 혜택은 읽어야 할 책과 읽혀지지 않기 위해서 밖에는 만들어지지 않은 책을 대번에 구분하여 주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천천히 읽는 것을 권한 까닭을 생각하면서 읽으라는 뜻이다.
『朱子全書』 권 6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汎觀博取, 不若熟讀而精思. “널리 보고 取함에는 熟讀하고 자세히 생각함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했다. 今人讀書, 務廣而不求精, 是以刻苦者, 迫切而無從容之樂. “이제 사람이 글을 읽음에 널리 읽으려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자세히 읽으려 하지 않기에 애를 써도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어 조용한 가운데 즐김을 맛볼 수 없다.”
李象秀는 『峿堂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鄕里兒童, 上學者假爲百人, 而後能文者, 不過一二何也, 以其文理不透也. 文理不透何也, 以其讀書不精也. 讀書不精何也, 以其讀而不能思也. “鄕里 兒童으로서 글을 배우는 사람이 가령 100명이라 친다면 글을 잘하는 사람이 하나둘에 不過한 것은 文理가 通하지 못함으로써인데, 그것은 글을 자세히 읽지 않기 때문이요, 글을 자세히 읽지 않는 것은 읽기만 하고서 생각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생각한다는 한계는 어디에다 둘 것인가. 海東小學의 다음 글을 보자. 兪元淳常曰, 至妙之辭, 久而得味, 鄙近之辭, 一見卽悅. 學者看書, 當熟讀之, 深思之, 期至於得意而後已. “兪元淳이 늘 말하기를 지극히 妙한 말은 오래 생각해야 맛을 알 수있으나 鄙近한 말은 보자마자 금방 기뻐할 수 있다. 책을 볼 때엔 마땅히 熟讀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속뜻을 攄得하고야 말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속뜻, 곧 意味는 어떻게 해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峿堂集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塞者必通, 昏者必明, 於文理始見罅縫, 見罅縫然後見意味. 凡讀書以見意味爲消息, 未見意味, 則雖於辭義已曉, 此皮膜而已, 不能以文矣. 此乃天下讀書, 能文之要訣. “막혔던 것이 터지고 어둡던 것이 밝아지면, 文理에서 비로소 터진 데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발견된 뒤라야 意味를 볼 수 있다. 무릇 讀書에서는 意味를 발견한 것으로서 效果가 났다는 信號로 여긴다. 意味를 발견하지 못하면 말의 뜻은 깨쳤다 하더라도 겉핥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글을 깨쳤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天下에서 讀書하여 글을 깨치는 要訣이다.”
이러한 熟讀 玩味의 過程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退溪年譜』의 記錄이다. 旣而棄官, 東歸人居退溪之上, 世味益薄, 而讀書求道之志, 則愈堅愈確. 在京嘗得 朱子全書, 讀而喜之, 自是閉門靜居, 終日危坐, 專精致志, 俯讀仰思, 要以眞知, 實得爲務, 而其信之篤, 悅之深, 無異於耳承面受. 由是, 所見日益精明, 所造日益純固. 於諸經. 微詞奧旨, 如探淵採珠, 入海觀龍, 因其所已知, 益致其精, 推其所未盡, 以達其餘. 盤錯肯綮之處, 悉皆爬梳剔抉, 極探硏幾, 求之未得, 則或諮於人, 得之於人, 則必求於心, 昔所未解者, 今悉融釋. 이것은 退溪의 이야기다. “이미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退溪上에 살면서 世上 맛은 점점 엷어가고, 책을 읽고 道를 求하는 뜻은 더욱 굳고 確實해 갔다. 서울에 있을 때 일찍이 朱子全書를 入手하여 읽고서 기뻐했었는데, 이로부터 문을 닫고 고요히 머물러 終日토록 正坐하고 온 정신을 쏟아 엎드려 읽고 우러러 생각하며 요컨대 참다운 앎으로써 실제로 攄得하는 데 힘써서, 그 믿음의 도타움과 기쁨의 깊음이 직접(朱子로부터 가르침을) 귀로 듣고 마주 앉아 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보는 바가 날로 더욱 精明해가고, 이르는 바가 날로 더욱 純粹하고 굳어졌다. 여러 經書에서 微妙한 말씨와 깊은 뜻을 연못 속을 더듬어 구슬을 찾듯, 바다 속에 들어가 龍을 보듯, 이미 아는 것은 더욱 精微하게 하여 未盡한 나머지 부분에까지 미루어 通達하게 하였다. 錯雜하게 얼크러진 곳은 파헤치고 가리를 잡으며 긁어내고 도려내어, 探索을 極하고 기틀을 갈아, 구해서 얻지 못하면 혹은 남에게 묻고, 남한테서 얻으면 반드시 마음 속에서 구했으므로, 그전에 풀리지 않았던 것이 이제엔 다 충분히 풀리게 됐다.”
그 努力 精進의 度가 얼마나 했던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른바 그 意味란 儒學者들에게는 道요, 일반적으로는 眞理가 되겠는데 讀書의 목적은 바로 그런 내실을 구하기 위함이다.
8. 疑問의 提起
「에밀 파게」는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언제나 잘 이해하였는지, 여러분이 받아들인 사람이 저자의 것이고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지를 항상 自問해가면서 읽어야 한다.과연 그 말인가?이것도 독자가 끊임없이 자기자신에게 제출하는 질문이어야 한다.”
李瀷의 星湖僿說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朱子有訓, 小疑則小進, 大疑則大進, 多著疑不妨, 故無疑處有疑看也. “朱子遺訓에서 조금 疑問을 품으면 조금 나아가고, 크게 의심하면 크게 나아가며, 많이 의심해도 해롭지 않다. 그러므로 分明한 곳도 疑問이 있는 것처럼 볼 것이다.”
退溪도 그의 文集에서 弟子 金而精에게 보내는 글 가운데서 張橫渠의 말을 援用하여「於不疑處, 有疑方進」곧“의심되지 않을 곳도 의심하는 것이 바야흐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眞西山도 眞文忠公讀書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讀書須有疑, 然後能進. 今人讀書, 元不知疑, 所以不及古人. “글을 읽을 때는 모름지기 의심을 품어야 능히 前進한다. 이제 사람은 讀書에서 애초부터 의심을 품을 줄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
그는 또 讀書에서의 疑問의 提起와 그 消滅이 理解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讀書始讀, 未知有疑, 其次則漸漸有疑, 中則節節是疑, 過了這一番後, 疑漸漸減, 以至融會貫通, 都無疑, 方始是學. “讀書에서 읽기 시작함에 疑問이 있는 줄 모르다가 그 다음엔 점점 疑問이 생기고, 中間쯤 해선 마디마다 疑問이 일며, 이렇게 한번 지나간 뒤에는 疑問이 점점 줄어서 뜻이 잘 통하고 전혀 疑問이 없게 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배운 것이다.” 疑問을 제기해 가지고는 그것을 풀어 나아가는 것이 內容 理解에 얼마나 소중한가를 층계를 두어 論及한 것이다.
9. 讀書 體認, 浹洽
책을 읽어 몸에 붙여야 자기 것이 된다. 『退陶先生言行通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讀書之要, 必以聖賢言行, 體之心, 而潛求黙玩, 然後方有涵養進學之功, 若怱說過泛誦說而已, 則是不過章句口耳之末習, 雖誦盡千編, 白首談經, 亦何益哉. “讀書의 要는 반드시 聖賢의 言行을 마음에 붙이고, 그 속에 잠기어 잠잠한 가운데 玩味한 뒤에야 바야흐로 푸근히 學問에로 나아가는 功을 기를 수가 있다. 만약 바쁘게 지나치고 그냥 외기만 하면 이것을 章句를 입과 귀의 末端的 익힘에 不過할지니, 千編을 다 읽고, 머리가 허옇도록 經을 談論했댔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順菴은 『順菴全集』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楊龜山曰, 讀書以身體之, 以心驗之, 從容黙會於燕閑靜一之中, 超然自得於書言象意之表. “楊龜山이 말하기를 讀書는 몸으로 體驗하고, 조용히 閑暇하고, 고요함이 한길같은 가운데 잠잠히 理會하고, 超然히 스스로 글에서 뜻을 그려 나타낸 말을 攄得함이다.”말하자면 매우 次元 높게 自得 體認함을 나타낸 말이다. 體認의 度가 좀더 높은 次元에 이르면 浹洽의 경지에 도달한다. 온 心身에 그득 스며 찼다는 뜻이다.
『退溪先生言行通錄』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問讀書之法, 先生曰止是熟, 凡讀書者, 雖曉文義, 若未熟則旋讀旋浹, 未能存之於心, 必也旣學, 而又加溫熟之功, 然後方能存之於心, 而有浹洽之味矣. “讀書하는 方法을 물으니 先生은 말씀하기를 단지 熟讀이 제일이다. 무릇 讀書하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을 깨쳤다 해도, 만약 熟讀하지 않으면 금방 읽고 금방 놓쳐 마음에 남지 못하게 된다. 그러기에 이미 배운 것이라도 더 익혀 가야 마음에 남게 되고, 浹洽의 맛이 있는 것이다.” 이미 배운 것도 자꾸 익힘으로써 완전히 자기 것이 될 뿐 아니라 아주 體質化한다는 것이다.
맺음말
以上에서 先人들의 讀書觀을 편의상 몇 부문으로 나누어 典據爲主로 소개하여 보았다. 이를 요컨대 末端에 구애되지 말고, 늘 생각하면서 천천히 속뜻(意味)를 읽어내어 자기의 人格形成에 직접적인 糧食이 되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위의 각 節을 吟味하면서 읽어 가면, 우리 先人들의 後學을 위해 차근차근 타이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함을 느낄 것이다.
끝으로 『近思錄』의 讀書深度에 관한 글을 援用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論語有讀了後全無事者, 有讀了後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知好之者, 有讀了後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論語를 읽고서 아무렇게도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읽은 다음에 그 중의 한두 句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읽은 後 좋아하게 된 사람이 있으며, 읽고서 너무도 기뻐 자기도 모르게 손발이 춤추는 사람도 있다.”
이는 讀書의 深度의 차이와 그 到達點을 단적으로 보인 좋은 글이다.
浹洽하여 愉悅境에 도달한 경지를 보이는 것은 바로 독서의 理想境이라고 하겠다.
출처:월간 한글+漢字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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