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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돌뱅이 (2)
이름 그대로 큰 강을 끼고 있는 빅부르크 성은 광활한 에이션투루트 반도의 동쪽 지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 ‘기사도의 나라’ 언폴드에 속한 서쪽 변경의 성이다.
비록 변경의 성이지만 언폴드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서쪽 국경지대에 위치해 주변국과의 이해관계에 있어 절대포기 할 수 없는 전략적/경제적 중요한 요충지이기도 하다.
특히 서쪽으로 국경을 맞댄 신국 릴리프와의 끝없는 크고 작은 분쟁을 숙명으로 안고 있는 언폴드에게 이 빅부르크 성의 존재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전쟁은 무엇보다 돈으로 하는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빅부르크 성에는 전쟁의 전운과 함께 각지에서 모여든 자금과 물자 그리고 그를 따라온 용병과 병사들이 심장에 모여든 혈액처럼 격렬한 박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더욱이 선대 때부터 불거진 릴리프와의 분쟁의 중심지이자, 과거 언폴드에 흡수병합 야가 연방의 연방수도이기도 했던 이 성의 기구한 역사는 반도의 어느 주막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소재다.
그 중요성을 입증하듯이 현재 빅부르크 성에는 언폴드 여왕의 집사인 라이펀 아이론의 외동딸인 나이베 아이론이 성주로 남편인 크리터 보래스와 함께 부임해 있다.
웨스트부르크, 빅부르크에서 더욱 서쪽에 위치한 지역.
사실상 빅부르크 성 서쪽 지역은 황무지나 다름이 없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서쪽 국경에 위치한 곳에서 더 서쪽에 살고 싶은 사람들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랜 전쟁의 상처만 간직하고 있는 지역에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유민들과 새로 정착할 곳을 찾고자 하는 화전민들 그리고 부랑자들이 그들이다.
또한 과거 야가 연방의 출신의 몇몇 호족들이 자신들이 살아 왔던 땅과 방식을 고집하며 언폴드의 간섭을 거부한 체 독립적인 자치지역을 주장하며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빅부르크 성에서 서쪽으로 닷새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웨스트부르크 마을은 지금 떠들썩한 분위기로 한층 들떠 있다. 그것은 이틀 전부터 열린 한 달에 한번 열리는 3일장 때문이다.
조용하기로 유명한 마을 사거리의 길 가득히 부보상들의 짐 보따리가 풀어지고 보통 때라면 상상도 못할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다. 늦여름의 긴 해와 따뜻한 날씨도 함께했다.
이날만은 마을 주민들도 일손을 접고 마을광장에 펼쳐진 물건들을 보러 오곤 한다. 게 중에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농산물 같은 것 들을 팔러오는 마을주민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무언가를 사거나 구경 온 이들이 대다수이다.
사거리 약간 오른편 구석 하지만 거리에 들어서면 막상 놓칠 수 없는 곳에 보따리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옆으로 얼마 떨어진 곳에는 주막도 있어 사람 끌기엔 명당이랄 수 있는 자리다.
헌데 막상 보따리를 푼 사람은 부보상임이 분명한데도 장사치 치고는 조용 일색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지나가는 길손들이 들르는 것을 보니 나름 수완은 있는 듯 했다.
그곳으로 어지간한 사람들은 들어 올리지도 못할 정도의 큰 등짐을 진 한사람이 다가가서 말을 건넨다.
“이보시오 내 옆에서 짐 좀 풀어도 되겠소?”
먼저 짐을 풀고 손님을 상대하던 자는 손님과 셈을 치른 뒤 물끄러미 말을 건넨 이와 등짐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연다.
“그러시오”
“아! 고맙소. 내 빨리 온다고 서둘러 왔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서 이래 늦고 말아서 어디에 자리를 잡나 했는데. 이해해 주어 고맙소.”
“아니오. 조금 있음 해도 중천이니 어서 짐이나 푸시오”
그래도 늦게 온 장사치는 나름대로 고마운지 몇 번 인사치례를 더하고야 등짐을 풀기 시작했다.
보니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자는 아직 젊다고 할 수 있는 나이고, 뒤늦게 온자는 이제 희끗희끗 세치가 나기 시작한 장년의 나이였다.
“나는 이스트부르크에서 온 숀이오”
아무래도 말이 많은 사람 인거 같다고 젊은이는 생각했다.
“나는 어진이오 ”
“이름을 보니 옛 신을 모시는가 보구려 근래에는 한동안 못 봤는데 어쨌든 반갑고, 자리를 내주어 다시 한번 감사 드리오”
숀은 약간은 의외라는 듯 한 표정으로 부지런히 짐을 풀고는 작은 나무판을 꺼내 들더니 작은 대패로 몇 번 밀고는 매끈해진 판에 숯으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물건의 가격인거 같다. 오면서 이것저것 다른 장사치들의 가격을 둘러보았을 테니 짐 푼 장소와 그날 장터의 분위기를 보고 나름대로 합당한 가격을 써넣으리라.
어진은 흘끔 숀의 보따리를 살펴보았다. 역시 자신과 파는 물품이 겹치지는 않았다. 남들보다 적당히 싼 가격에 적당히 물건을 파는 그였기에 그리 큰 걱정을 하진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어진이 서로 파는 물건이 다르니 이제 적당히 대꾸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되겠거니 하며 긴장을 풀었을 때 역시나 또 숀이 입을 연다.
“형씨는 잡품을 파는 모양이오? 근데 그리 팔아서 이윤이 남것소? 물건이 급하면 다른 장사치가 와서 사가것소”
지나오는 길에 어진의 행상도 살펴본 모양이었다.
“원래는 소금장수요. 물건 삵이야 뭐 내 원래 이랬으니”
어진은 퉁명스럽게 답하며 옆에 있는 소금 보따리를 툭툭 쳤다. 까끌까끌한 짠내가 순간 풍겨 왔다.
“소금이라 그랬구료. 거 이윤은 많이 남지만, 물건을 가져오려면 길도 멀고 나라에서 매점을 금하니 그리 많은 물건도 못 다룰텐데, 생각보다 담이 크구료. 내도 그거 한번 생각 안해 본것은 아니지만 길이 머니 집구석이 보통 걱정 되는게 아니라 포기했소.”
“아는 있소?”
“내 딸래미 셋에 이제 다섯 살난 아들 하나 있소”
말하는 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여자가 그리워 결혼을 했으나 진정한 위안은 아이들에게서 찾아온다. 결혼은 그런 것이다.
“힘드시것소..”
정말 힘들 것이다. 점포를 가지고 있는 붇박이 상인도 아니고 떠돌이 보부상이 가정을 유지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터가 없으니 돌아는 다녀야 하는데 가족이 있으니 멀리도 못가고 주변의 마을들을 돌며 물건을 띠고 팔며 이윤을 남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도 않소. 내 식구들 없었으면 벌써 떠돌다가 객사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더구나 딸래미 재롱에 다행이 늦둥이 아들도 하나 나왔으니 금술도 다시 좋아지고 있는 듯 하고~.”
“다행이구려~.”
이후 숀의 이야기는 부인을 만난 이야기부터 그가 어떻게 부보상이 됐는지, 그 이후에도 자신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여인들 흘려보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은 이정도로 가정을 소중히 하는 가장이라는 것을 어진에게 인정받은 후 겨우 끝이 났다.
미적지근히 해 가긴 늦여름이었다. 장터도 슬슬 달아올라 사람들은 하나둘 햇살도 피할 겸 낮 끼니도 해결할 겸 집과 주막 등으로 몰리는 시간인가 보다.
아침에 자리를 잡은 덕에 어진의 자리에는 큰 나무의 그늘이 적당히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늘이라고는 오른쪽 어깨에 살짝 걸친게 다인 체 뙤양볕에 앉아 있는 숀을 살펴보니 여간 안 쓰러운게 아니다.
더구나 다가오는 추수와 새해를 노린 김 씨의 물건은 잘 갈아놓은 농기구와 제기용품 일색이라 오른편에 적당히 떨어져 있는 어진조차 눈이 부실 지경이었으니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다.
“형님, 그늘로 조금 더 들어오시지요.”
어느덧 호형호제를 하기로 한 둘이었다.
“아니네 아우님, 아무리 그래도 상도가 있는데 내 어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3일장 마직막 날의 인연일 뿐이지만 나잇값을 하려는지 숀은 일단 거절하고 본다.
“그러지 마시고 좀 오세요. 오늘 보아하니 뜨겁고 긴해라 조금 있음 더 힘들 텐데, 어짜피 물건도 다르고 나는 수완이 적어서 김형이 조용해지니 나까지 손님이 적어져 그래요.”
정말이다. 원채 싼 가격으로 조용히 물건을 파는 어진이라 딱히 돈에 아쉬운 것은 없지만, 옆에서 수완 좋은 숀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준데다 손님이 필요한 물건 중 어진이 파는 것이 있으면 기분 좋게 소개까지 해줬던 것이다.
“고마우이. 내 아우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예가 아니니 몇 보만 옆으로 가겠네.”
원채 보부상들끼리는 나름의 규칙이 있다. 어찌 보면 갈 곳 없는 떠돌이 삶이 대다수라 길에서 오가며 마주치면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기도 하고 한다.
물론 각자가 경쟁상대인 것도 분명해서 이렇듯 장터에서 짐을 풀 경우에는 서로간의 거리를 띄어 짐을 푸는 것이다 예의였던 터였다.
잠시 후 숀이 그늘 안에 안도의 한숨과 함께 풀어진 긴장과 함께 늘어지며 곰방대를 입에 물기 시작했을 때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재들 끼니는 때웠소? 우리 어미가 조짝서 주막을 하는데 국밥하나 마는 솜씨는 일품이오. 내 금방 말아올테니 식사들 하실려우?”
환한 웃음과 일사천리한 말 품세를 보아하니 주막서 일 도우는 여식인듯 싶다. 어짜피 손님도 뜸한 시간에다 아직까지 식사를 안 한 둘이라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방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나무대기에 뭔가 죽죽 긋더니 냉큼 쪼르르 다른 장사치들 몇 명을 거치곤 이내 주막으로 달려갔다.
“내 몇해 전부터 저 주막 주모를 아는데. 저런 여식은 없었지. 얼마 전 새로 온 누이인가 싶군”
어느새 더위가 가셨는지 숀이 냉큼 아는체를 했다. 장터를 전전하다보면 그런 인연하나도 아쉽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귀여운 누이군요”
사실이다. 젊음은 아름답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밝은 누이 였다. 누구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젊은 여성을 사랑한다. 어진은 그 특별한 조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봤다.
“호~ 관심 있나? 아우가 관심 있다면 내 저 누리하고 다리 놔줄 수 있네 암! 내 주모하고 아는 사이라니까 그러네~”
숀이 눈을 반짝이며 주모와의 관계에 있어 말보따리를 풀어놓으려 하자. 어진은 얼른.
“놔두시오. 내 그런 것에 쓸 신경도 돈도 없소. 혹시나 임자라도 있음 난리가 날것을..”
“어허! 주막집 여식이 임자가 어딧나? 임자 있음 벌써 데리고 떠났지! 설마 주막에 놔뒀을 려구? 원채 저런 일을 하는 누이들은 외로운 법이야. 정을 쌓는 것도 나쁠 것 없지. 혹시나 저 누이가 머리 올릴 생각이 없으면 모를까. 생각 있다면 먼저 손 쓰는게 나을 것 아닌가?”
숀은 정색을 하며 어진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가정도 있고 이 동네에 이목이 있어 맘대로 못하는 것을 어진에게 강요하는 듯싶다. 속내는 무척 아쉬운 모양 이었다.
“애까지 딸린 사람이 못 하는 소리가 없소. 일 없습니다!!”
잠시 후, 한 여인이 국밥을 작은 상을 머리에 이고 왔다. 아침부터 바삐 일했는지 바짝 올려 묶어 들어난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고 가슴이 파인 블라우스와 앞치마 곳곳에는 음식 재료를 닦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새로 온 젊은 누이는 주문 만을 받는 모양이다. 국밥을 이고 온 여인은 숀과는 아는 사인지 바로 몇 마디 말이 오간다.
“이번 장날에는 왜 안보이나 싶더니만 결국 마지막 날에 보는구만. 잘 지냈소?”
“그것보다 방금 주문은 받은 누이는 뉘요? 내 다시 한번 테를 보려 했더니 주모가 올 줄 몰랐네”
주모 치고는 상당히 젊고 이쁘다고 어진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주막은 술장사도 매출에 한 몫 할 것이다. 주모의 깊이 파인 브라우스로 보이는 가슴골과 그 와중에도 곱께 발라진 얼굴의 분이 어진의 생각을 뒷받침 했다.
“어머~ 그러다 부인한테 걸리면 또 사단이 나라구요? 그 아이는 이미 맘을 주기로 한 임자 있으니 쓸데없는 소리마세요. 그 사람이 떠날 때 나한테도 신신 당부 한 게 있으니?”
주모가 얼굴이 다채로운 미소를 띄우며 이고 있던 상을 내려놨다.
“아니 아니 내가 아니라 이 아우 소개 시켜 주려고 했지. 이 아우가 이래 뵈도 사람 됨됨이가 진국이라 좋은 기회라 생각했는데. 임자가 있다면 뭐 그뿐이지 뭐 내가 어떻게 한다나? 그리고 약조라니? 주모한테도 몇푼 이라도 쥐어주고 간 겐가?”
“그건 모르지요 ”
그녀는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어진을 흘끔 보면서 뭔가를 재보더니 이내 숀을 쏘아보며 덧붙였다.
“보아하니 아직 바른 분인 듯한데 이런 사람과 어울리지 마세요. 젊었을 때 숀이 얼마나 부인 속을 썩였는지 이 근방 사람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답니다. 한때 저도 엮여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주모는 말을 마치며 숀을 바라보고는 ‘긴 꼬리 숀“ 이라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작별인사를 했다. 숀은 무안한 듯 빨개진 얼굴을 숙이고는 애꿎은 국밥에 수저를 꽉꽉 쳐 넣을 뿐이었다.
어느덧 해가 뉘엇뉘엇 서산을 넘어가고 있다. 사흘간의 장도 끝이 나고 이제 주위에는 장터의 활발함 보단 다시금 길을 재촉 길손들의 모습만이 붉은 석양을 통해 아른거린다.
“내 즐거웠네, 아우님”
“저야 말로 형님 덕분에 많은 이야기도 하고 좋았습니다. 언제고 또 뵙지요.”
“그러게 나도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이를 만나 어찌나 반가웠는지 몰랐네.”
“내 오늘 저녁에 바로 산을 넘는 일행이 있어 동행을 약속했으니 좀 서둘러 떠나야 겠네 이해해 주게.”
“물론 이지요”
“잠깐 아우, 혹시 서로 옷을 바꿔 입을 수 있겠나?”
부보상들은 언제 객사를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떠돌이 삶인지라 친우를 만나면 이렇듯 저고리를 바꿔 입고 서로를 생각해 주는 풍습이 있었다. 가만 살펴보니 어진이 입고 있는 옷도 제법 헐렁한 것이 소매를 많이 접어 입었던 터다.
“네, 그러지요”
“허허 내 옷도 아우에겐 좀 크겠구만. 아우님 덩치가 그리 큰 편이 아니니 옆으로라도 불리게 좋을 겡야. 남자라면 풍채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 이쁜 누이도 따르고 말이야”
숀은 자신의 옷을 건네며 어진이 넘겨준 옷을 받아 입고는 말했다. 다행이 어진의 옷 소매를 풀자 그럭저럭 숀에게 어울렸다.
“그럼..”
“동무 시오이까”
“동무 시오이까”
옷을 갈아입은 어진과 숀은 서로를 바라보고 한번 절하고는 바라보며 말을 주고 받았다.
“초인사도 제대로 못 올렸습니다만, 이제 말인사를 올리옵니다.”
“피차 그리 되었습니다.”
“어느 길에 계시든 진데 밟지 마시고 어느 장터든 해 저물기 전에 도착하시길 비 옵니다.”
“어느 길에 계시든 어느 장터에 계시든 해가 저물더라도 달님이 높이 돋아 멀리 발아래를 비춰 주길 비옵니다.”
둘은 한동안 더 서로의 안부와 인사를 전하고 교향과 임방을 묻는 식의 부보상 인사를 마치고는 등짐을 메고는 길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어진도 짐 갈무리를 끝낵고는 죽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어차피 다음 목표로 하고 있는 마을의 장날 까지는 여유가 있다.
몇 가지 사들인 물건을 들고 작은 화전민 촌락들을 거쳐 여느 때 처럼 또 가고 가는 것이다. 앞으로 또 얼마간 의 길 잠을 자야 할지 모르니 오늘만큼은 주막에 들러 몸을 추스르고 싶은 마음이다.
어진이 발길을 돌려 아까의 주모가 있던 주막에 다다르자.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남녀가 보인다.
살펴보니 그 밝은 누리와 젊지도 늙지도 않은 한 장사치이다. 둘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더니 장사치는 이내 품에서 노리개를 꺼내 누리에게 억지로 안겨주고는 뒤를 돌아 발걸음을 돌린다.
누리는 우는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결국 노리개를 품속에 갈무리 하고는 다시 일을 거들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그후 그 장사치는 주모와 한동안 어떤 이야기를 하더니 이내 작은 돈주머니를 주모에게 안겨주고는 아쉬운 듯 누이가 들어간 주방을 몇 번 쳐다보고는 자리를 떴다.
오늘밤 산을 넘는 이들이 좀 되는 모양이었다. 언제라도 크고 작은 국지전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하루라도 먼저 떠나고 싶은 것이다.
누이는 어진에게 곡주와 부침개를 가져올 때 까지도 복잡한 표정으로 주모와 장사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주막이다. 그것도 술을 파는 젊은 주모가 있는.
언젠가 누이도 그 사실을 알게 되리라. 그때에도 이 누이가 하늘이 주신 그녀의 밝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진은 곡주를 한 사발을 들이킨 뒤에 부침개를 입에 털어 넣고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확과 새로운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높은 가을 하늘에는 어느덧 희미한 달이 소리도 없이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