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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듣기 싫어하는 설교(설교자는 필독!!!)
초대교회 홈페이지에서 펌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설교
설교의 주인은 바로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고 설교자나 세상의 온갖 사건들과 저속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만 보인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나가는 일은 아니다. 세상 이야기도 있고 예화도 있고 설교자 자신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데 방해되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은 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도 없다.
목사의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면 목사의 집이 보이고, 목사가 여행을 다녀오면 다녀 온 여행지의 모습이 보이며, 선거 철이 되면 강단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설교 강단의 주인 바꾸기는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고 설교에 식상하게 할 것이다,
어떤 목사의 말이다. "오늘의 한국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설교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이 보이지 아니함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설교자의 용모만이 감상되고 그의 개인적인 체험담을 들으면서 그와 관계된 연상(聯想)만을 계속된다. 그리고 회중은 거기에 도취되어 웃고 울다가 "기도합시다"의 구령에 따라 기도를 한 후 폐회 찬송을 부른다.
그들을 붙들고 오늘의 설교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서적인 설교는 바우만의 다음의 충고대로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전달하여야 한다."
바우만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종결어(終結語)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설교 종결어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 자신이다. 여기서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등장을 극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 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그가 즐겨 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된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어떤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순식간에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말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 온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으며 계시지 않는 설교는 생명 없는 자기 선전이나 세상의 무엇을 광고하는 연설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 성도들은 틀림없이 죄인의 본색을 드러내서 이를 들어 내고 목사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목사는 가끔 자기가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이 시대에 일어 나는 모든 일들을 분석하고 관조하여 성도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세상 이야기를 장황하게 불어 말하려 한다.
50-60년대 우리 나라가 전쟁과 기근과 혼란으로 한참 어려울 때에 목사들은 종말론적 설교를 많이 하면서 당장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자기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신 것처럼 소리 높여 설교했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모두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으며 세상을 비관하게 하고 공포와 공갈로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되고 말았다. 종말 즉 주님의 재림은 그 시간이나 정황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면 정황과 시간이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는 복음의 진수를 외면하고 혼란과 가난이 주님의 재림을 촉발하는 원인인 것처럼 설교를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 공갈 협박 식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오직 살아 역사하시는 참된 복음만이 죽은 심령을 살리며 그런 역동적인 새 삶을 주는 말씀의 은혜를 성도들은 사모한다. 그런 설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바르게 나팔을 부는 설교자의 인격과 생활과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거룩한 말씀이 없는 설교
나는 가끔 설교를 준비할 때에 내가 읽은 책의 이야기나, 누구에게 들은 예화나 신문에 보도된 어떤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즉 세상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어떤 특별함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전 건축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목사가 설교에서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목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데서 생긴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 수필 또는 교양 강좌가 아니다. 언제나 본문으로 봉독한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다. 그럼으로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전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튼튼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봉독한 본문을 인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선전하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설교 현실을 우리의 한국 교회에서는 너무 자주 본다. 이러한 선상에서 오늘도 설교하는 목사들은 다음의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재원(財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목사가 알아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설교와 간증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교는 단순한 신앙 간증과는 너무나 다른 구속력을 가진다. 신앙 간증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공감대만 형성되면 된다는 지극히 한정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는 그 기준이 그 날의 설교 본문에 있다. 그 본문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 의하여 함께 읽혀진다. 거기서 회중들은 그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유한 상태에서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자신들의 삶의 장에 적용시켜 주는지를 주시한다. 그러기에 설교는 수많은 회중의 감시를 받으면서 본문이 말씀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되는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설교자의 앞에 앉아 있는 무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말씀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될 것을 철저히 요구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만일 목사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하고 분명한 제한성을 다른 이야기들로 흐려 애매모호(曖昧模糊)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진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희석(稀釋)시켜 세상에서 흔히 듣는 잡담(雜談)이나 죄인들의 입에서 얼마든지 오르내리는 말로 전락시킨다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지 말라.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의의가 있을 수 없는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 맞추어 해석되는 일이 많다. 즉 자기를 선전하거나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생계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농담거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돌려 치려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땅에 글을 쓰신 일이 있으셨는데 그 글을 보고 살기 등등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기를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재미를 본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본 사람들이 놀라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낄낄거리며 웃는다.
우리들의 도덕적인 양식으로는 자기 아버지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강단에서 목사들이 성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과 주님을 농담거리로 삼는 일이 있다. 목사의 농담은 주님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심각한 말씀과 행동이 이런 식으로 격하되어 농담의 소재가 된다면 성도들은 분노할 것이다.
지져스 크라이스트라는 뮤지컬이 이화 대학의 강단에서 공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보며 극찬을 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뮤지컬이 어디선가 공연되었다. 그런데 그 뮤지컬의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연인으로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열매 맺지 못했다는 슬픈 내용이다. 주님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베푸신 더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한 여자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아니한 비정하고 매몰찬 사랑으로 묘사가 되고 그 사랑을 얻지 못한 타락한 여인의 슬픔으로 묘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공연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그 잘못된 짓을 꼬집어 항의하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 성경 학교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전도사가 강사를 한 사람 초청해 왔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뿐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다니면서 어린이 집회를 전문적으로 인도하는 유명 강사라고 했다. 그는 주로 인형극을 공연했다. 나도 전도사의 그런 소개를 듣고 상당히 기대를 하며 그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주님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공연을 보면서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일은 내용이 달라지겠거니 하고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 날도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한껏 잡고 음산한 목소리로 인형극을 진행하는 그 전도사의 이야기에 함빡 빠져들었다. 3일 동안 진행된 여름 성경 학교의 중요한 집회 시간이 이렇게 귀신 쫓아낸 이야기로 50%나 사용되고 말았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집회를 못하게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 인형극을 보고 난 뒤 얼마나 그 인형극이 충격적이었는지 다른 배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말만 외쳐 대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 속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 속으로,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척도(尺度)로,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현상이 정말 두드러지게 만연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단에 속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들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목사의 이런 설교를 듣고 함께 웃고 즐기는 것 같지만 되돌아서서 '오늘도 쓸데없는 잡소리만 들었다'라고 입을 삐죽인다. 하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왜곡된 말만 계속 전한다면 그는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은 정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그 말씀을 그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자기를 성찰하고 개선해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도록 설교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런 설교를 원한다. 흥미 위주의 설교를 하지 말라.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새롭고 충격적인 무엇을 주려는 유혹을 여지없이 떨어 버리라.
잘못된 성경 해석.
목사가 설교나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다 알다 싶이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은 성경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과 몇 가지 사례를 배웠을 뿐이다. 즉 신학교에서 성경 전체를 알 수 있도록 배운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완전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을 아주 잘 알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해 준다.
더욱 더 웃기는 것은 목사가 정통적인 보수 개혁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엄청난 오류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목사가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신학교를 나왔다면 그가 바른 성경 해석을 했더라도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즉 목사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에 따라 잘못된 성경 해석도 바른 것이 되고, 이상한 신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바른 것도 그릇된 해석으로 매도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가장 보수적이라는 교단의 강단에서 가장 들어 줄 수 없는 성경 해석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다.
150여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가정 주간에 설교를 했다. 나는 특별한 기회가 있어 그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하다가 성공한 이야기를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아주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 목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갖 손짓 몸짓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추었다 하면서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정말 열정적인 설교요 혼신의 힘을 다한 설교를 했다.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목사의 유도에 따라 연신 아멘을 외쳤다.
그러나 그 설교는 크게 잘못된 설교였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고생을 했어도 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고생을 견딜 수 있었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우리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현실이 답답하고 어렵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꿈, 즉 희망을 가지고 살아서 요셉처럼 크게 인생을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축원 소리에 성도들은 화다닥 놀라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설교 후에 하는 목사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요셉처럼 큰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크게 성공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아 멘" 언 듯 보기에는 그럴듯한 설교요 기도지만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며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다. 사람이 역경 중에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다. 희망과 성공 사이에 꼭 있어야 할 하나님 없어 복음이 아닌 '적극적 사고 방식의 강연'인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값싼 연설에 불과하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꿈꾸게 해 주신 꿈이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이상과 꿈이 아니며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요셉이 노력을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과 인내심에 의해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미리 애굽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에 의해 성공하게 된 사람이니 곧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요셉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늘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며 요셉은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의 설교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니 믿음의 생활을 잘해서 요셉과 같은 축복을 받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에 이런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가 한가지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이 이상과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요셉과 같이 성공할 수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강변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인생이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을 붙일 만한 연설인 것이다.
어떤 목사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린아이를 밴 여자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죄가 많다는 말씀이다"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60년대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닌 부흥 목사들이 단골로 쓰던 공갈 협박용 성경 해석이었다. 어린아이 잉태한 것을 죄가 많다는 것으로 해석해 버리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아는가?
이런 목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말씀 해석의 오류는 결국 그 목사의 목회 생명을 단축하게 한다. 성도들이 목사의 말씀 실력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지라고 하나님께서 그대로만 두고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설교 노트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 설교 노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 그 설교 가운데 얼마나 성경을 잘못 해석한 설교들이 있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가? 몇 번이나 성경을 통독하였으며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감격 감사하여 눈물을 흘린 일이 있던가? 진실로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라는 찬송가가 마음에 와 닫는 신앙 고백을 해 본 일이 있는가? 사단은 목사의 성경 무식을 틈타고 들어 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신령한 강단을 자기 말을 전하게 하는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런 사단의 장난에 놀아 난 일은 없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 노회에 수 십년 동안 중으로 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50이 넘어 개종한 그 분은 어떤 중소 신학교를 나왔고 목사가 되어 우리 노회에 가입했다. 하도 귀한 목사라고 생각되어 어떤 여 전도사가 결혼을 자원해서 오붓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 분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노회 목사들은 그 목사를 초청해 사경회를 하고 생활비를 도와주기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그래서 나도 순서대로 그 목사를 초청해 집회를 하기로 했다. 특별한 목사가 집회를 인도한다 하니 성도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그 목사가 하나님의 강단을 차지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참으로 어이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그가 승려로 어떤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인데 승려로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틀 동안 계속했다. 예를 들면 불교 승려들이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고승이 되는데 그들은 앞으로 되어질 세상일을 모두 잘 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여사가 시해(弑害)를 당하기 전에 서울의 모 사찰의 주지는 이미 그 날짜를 다 알고 있었으며 죽는 모습까지도 알았지만 천기를 누설할 수 없어 말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의 경지가 깊어지면 천하는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불교의 경전인 팔만 대장경이 어떻고, 목사 되기는 쉽지만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과 고행을 겪어야 하는 가라는 등 도무지 그가 목사인지 고승인지 구별을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 십년 동안 불교의 승려로 살았다.
그러나 목사 된지는 겨우 일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의 개종은 3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아는 것은 불경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석가의 말인 것이다. 그는 아직도 석가의 제자로서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성도들은 머리가 아파했다. 강단에서 보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사단에게 직격탄을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졸병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회를 도중에 중단하고 그만 두게 했으며 노회의 여러 교회에 집회를 취소하도록 했다. 나중에 그 분이 부천 어디에선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직 소식을 모른다.
성도들은 이런 엉터리 성경 해석과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여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지 잘못 해석된 말씀을 전해서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시험을 당하게 된다.
목사 자신을 말하는 설교.
설교를 듣기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동적인 복음을 듣기 원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자기 이야기를 싫어한다. 목사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선전을 하지 말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는 '말씀의 사자'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대사'라고 했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 교육의 초창기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목사는 성도에게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의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어떤 목사들은 이런 설교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 하나님의 복음 인양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이야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설교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 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고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단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어느 누구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설교의 주체로 한다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게 자기 이야기를 복음처럼 말하는 목사들을 보면 사실상 별 볼일이 없는 일들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말하고 그것을 본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자기가 빈곤한 가정의 출신이라든지 아니면 청년 떼에 엄청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성공담을 말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어느 누가 그런 설교 아닌 이야기를 듣고 있겠는가?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수 없이 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자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착각 잘하는 목사는 이 말씀을 "제가 길을 가는데 어떤 노인이 짐을 지고 가셔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복음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한다.
목사의 착각적 과신(過信)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일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그 분야에 전문인이 되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된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가진 도사(道士)의 경지에 이른다. 설교 사역도 같은 맥락에서 설교에 도사가 된 목사가 있다. 이렇게 설교 도사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목사는 강단에 설 때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 나아간다.
그 자연스러운 몸놀림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성도들은 목사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된다. 실제로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국에 부흥회를 다니는 어떤 목사가 설교에 넘치는 자신감을 보인 일을 보았다.
그는 우리 교회에 부흥 목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김 목사 이번 부흥회에 어떤 점을 강조했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질문했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 받게만 해 주세요"라는 주문 대로 그렇게 설교를 했다. 물론 원고는 한 장도 없었다. 그 목사는 건축이면 건축, 전도면 전도, 기도면 기도, 헌신이면 헌신, 모든 우리 기독교의 전문 설교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무엇을 알지 못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에 자신이 넘치는 목사도 자기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스스로 볼 필요가 있다. 나도 남 못지 않게 설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내 설교에 아주 실망한 일이 있었다. 친구 교회에서 장로, 집사, 권사의 임직식에서 설교를 맡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예식을 비디오로 찍었다. 며칠 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왔다. 나는 무척 반가워하며 그 테이프를 보게 되었는데 얼마 후 크게 실망해서 끄고 말았다.
내가 설교한 장면 대문이다. 25년도 더 넘게 설교한 내 모습이 겨우 저 정도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신경을 건드리는 놓은 목소리였다. 밀을 할 때마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아랫 이(耳)도 그랬다. 잘 한다고 며칠씩 준비한 설교 내용도 혼란스러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가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잘하고 있다고 했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의 설교를 잘하는 설교로 듣고 있는 아내와 성도들은 그 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정말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참담했다.
자신의 설교가 나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목사가 많을 것이다. 반대로 만족한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내 설교의 모습을 다시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 모습을 보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있어야 발전한다. 이런 자각과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없는 목사들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만족하며 설교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설교의 교조적(敎條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교만의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안주해 버린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자신은 초보 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본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목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성도들은 이런 교만한 자의 거만한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외식하는 목사의 설교
우리 한국적 상황과 인식에서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아직까지 목사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한 양심이며, 정(正)의 척도며, 죄인이 찾아 갈 마지막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목사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기대대로 목사가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들어 이런 의문과 회의(懷疑)는 더욱 더 깊어져서 과연 우리 사회가 목사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잇는가를 의심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목사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 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 교회와 비교해서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한 목사는 이런 현상은 "이 땅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고 방식에 의한 답이지 설교하는 목사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한 대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설교하는 목사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그렇다고 해도 목사 스스로가 하나님 앞과 자기 양심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해 보아야 한다. 정말 가장 고결한 성직자인 목사가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최근 들어 이런 자책(自責) 섞인 대답이 나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사들이 각종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에서 기인된다. 성전에서의 살인 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 낭비에 선두 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 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 출처를 알 수 없는 박사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간음과 모략 중상들의 사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 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사건들이다.
설교자가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과거 우리 한국 교회가 인구 비례 3%의 성도들이 나머지 97%의 국민을 선도했던 대의 목사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밤을 세워 나라와 민족의 죄 짐을 지고 통곡하며, 생명을 바쳐 애국 애족을 실천했다.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목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 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그러치 못한 몇몇의 목사들은 그 계층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작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목사는 자기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바로 전한다 하면서 자기가 선포한 설교와 자기의 생활의 이질 현상(異質 現狀)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미화(美化)하고 있다.
어떤 부흥 목사의 부인이 하루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남편에게 찾아 와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집에 가면 마귀가 되고, 교회에 오면 천사가 되니 나는 천사와 같이 살고 싶다'면서 강단에 이불을 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설교는 천사처럼 하면서 살기는 마귀처럼 사는 목사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기는 우리 한국 교회의 비극이 얼마나 클지도 헤아려 보자. 주님의 경고처럼 우리는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자기를 주님과 선지자로 말하는 설교.
내가 만난 다른 목사는 엄청난 비교를 했다. 그날의 설교는 본문이 엘리야가 아합에게 쫓겨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하는 말씀(왕상 19:4)이었다.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낙심된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죽을 고통에서 하나님을 믿고 승리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승리했다고 했다.
물론 목사와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자는 말은 정말 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자기도 몇 번씩이나 엘리야와 같은 낙심을 했다고 몇 번씩 강조해서 말했다. 그 목사는 인제 겨우 40대 중반이 이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어느 누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고통을 당하자고 해도 그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다.
그런데 그는 자꾸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을 주님과 비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과도 비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령된 이야기를 아주 거리낌없이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설교하는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만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지는 무의식적인 망말인 것이다.
이런 설교는 듣는 사람들, 특히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듣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역겨울 정도다. 나이가 40인 사람이 60인 사람에게 자기를 본 받아 세상을 살라고 해서는 좀 이상하다. 가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목사는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서는 안된다.
어디 설교가 목사를 본 받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본 받아 살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한다. 혹 성도들이 목사를 본받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과 주님과 엘리야는 모두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분들이다. 목사가 강단에 선다고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도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목회의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되는 설교
설교가 목회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젊은 목사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설교의 근본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이런 일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목회의 한 방법으로 된 예는 수없이 많다. '설교를 잘해야 교회가 부흥된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성전 건축 헌금을 충분히 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 같은 말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말들로 들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런 말들이 잘못된 발상과 인식에서 나온 말인가는 설교의 본질을 헤아려 보면 금방 판단된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설교자인 목사를 당신의 자녀들 앞에 세워 말씀하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설교에 대하여 이 이상의 무엇을 말해서는 안되며, 이 이하의 무엇을 말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말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했더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는 의미로 정립되어야 한다. '설교를 잘 하는 목사'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잘하는 설교',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작금(昨今)의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있지 않다. 잘 못 믿는 자에게는 잘 믿으라 하시고, 죄인에게는 회개하라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신다. 이미 받은 축복이 크니 늘 감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다.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다.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 하시며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하신다. 성경 이야기에서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칭찬보다는 경고가, 받는 축복보다는 헌신이, 선별된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자신보다는 이웃이 그리고 하나님이, 미움과 다툼과 시기 질투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가 이렇게 더 많이 강조된 죄 문제, 의무와 책임, 헌신과 희생, 자기 이익 보다 하나님을 위한 충성 등을 강조한다면 그 목사를 설교 잘하는 목사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설교 잘하는 목사'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설교자라는 정석(定石)대로 해석되지 않고, 듣는 성도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설교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라고 해서 모셔 왔는데 성경의 말씀대로 비례해서 설교를 한다면 성도들은 결단코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설교 못하는 목사'로 매도되어 이삿짐을 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전하던지 바르게 전하면 전하는 사람이 목사든 어린 아이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 발람은 당나귀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크게 놀랬다.(민 22: )
설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고 이익을 추구할 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자가 교회 성장을 목표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건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목사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질적인 성격이 퇴색하고 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의 무식과 개으름을 숨기기 위해 신비주의를 도입하기도 한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교를 사용한다. 그런 목사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한다. 이럴 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헌금을 모금하는 금고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을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말한다. 한 때 우리의 목사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었다. 부흥 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했다. 그 때 강사는 자신과 교회가 집회 중에 거두어 드린 수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혹시 지금도 이런 파안무치(破顔無恥)한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 교회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어떤 형태든 설교가 목사의 야망 달성을 위한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결코 목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 뿐이다.
발전 없는 목사의 설교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는 '설교의 위기(Empty Pulpit)'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여기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empty pulpit)을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설교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도 좌석에 앉아 있는 성도들은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비어 있는 강단'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했다.
이와 같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목사들이 설교에 대해여 공부하지 않으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되어진 결과다. 한국 목사 특히 앞으로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 갈 젊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바른 종'되기 위해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단적인 증거가 있다. 인터넷 싸이트 가운데 회원이 1,500명이 넘고 매일 접속하는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는 싸이트 운영자를 만났다. 젊고 의욕이 넘치는 강도사는 목회에 대한 유익한 세미나를 교통이 좋은 지역에서 그 분야에 실력 있는 강사 목사들을 초청하여 가졌다. 그는 적어도 1,500의 회원들 가운데 1/10인 150명은 오지 않겠는가 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회비를 한푼도 받지 않는 목회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은 겨우 10여명이었다. 강도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요즘 목사들은 공부하려 오라고 하면 안 옵니다. 그 대신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우면 많이 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Moksa 홈을 운영하면서 설교 게시판을 이용해 이런 광고를 한 일이 있었다. "나는 30여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 설교 분석을 해 드리겠으니 혹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설교 원문을 이 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이 기록되어 있는 친구 목사의 설교 한편을 분석해서 올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겨우 한 분 목사가 자기 설교를 보내 와서 분석해 보내 주었을 뿐이다. 물론 나의 이런 잘난 척하는 짓이 가소로워서 반응이 없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설교를 배우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나는 목사들이 자기 나름대로 설교에 대해 달관(達觀)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물론, 오늘의 한국 교회 설교 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많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목사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히 있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교회가 우리 교회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深醉性)이 강한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 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목사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는 생존 경쟁이 살아남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목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뛰고 설교하는데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안일과 자만은 목사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이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동시에 파괴시키는 무서운 사단의 병기다.
현실성이 없는 설교.
이런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성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내가 잠시 몸담아 있던 노회에서는 이상한 풍속이 있었다. 노회 때나 매월 모이는 교직자 월례회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하는 목사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정된 설교자는 회기(會期)의 노회 장이다. 그런데 그 해 노회 장은 나이도 40이 넘었고 목회도 상당히 오래 한 목사인데도 설교가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노회 목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말씀을 전하겠는데 늘 핵심이 빠진 뜻한 설교를 했다.
우선 그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어렵게 표현하고 목사들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를 주제로 했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가 자기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기록해 와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듣는 목사들의 요구와는 너무 많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를 그대로 가져 와 설교하는 것 같았다. 노회 목사들이 모였으면 목회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위로와 격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 목사는 으레 어디서 그런 주제를 가져오는지 '성도들의 애국심'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주제로 장황한 설교를 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설교는 목사에게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설교가 듣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전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설교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언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연구가 노회 적으로 있었으면 생각했지만 아깝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정의 달 5월에 목사들은 가정 문제, 자녀와 교육 문제들을 설교의 주제로 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들은 성도들 모두에게 아주 교훈이 되는 설교들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평신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의 없이 너무 많은 사상을 설교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감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를 심방 하면서 찾거나 부 교역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얻든지 아니면 장로나 성도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여 설교에 반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그 짧은 25분 동안의 시간에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지,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지를 알고 설교하는 중책이 목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성도들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설교를 매 주일 하고 있다면 그 목사를 틀림없이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목사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를 강단에서 몰아 내실 것이 뻔하다. 아니면 성도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이런 설교는 풍요 가운데 말씀의 기근을 가져 와 성도를 영적 아사지경(餓死地境)으로 내몬다.
연설 같은 설교
우리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소위 설교학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얼마나 엉성하고 배울게 없는지------ 그것을 배웠다고 해서 설교에 대하여 달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설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병아리 목사들은 대게 설교를 연설하는 것처럼 한다. 연설 같은 설교는 우리가 교회에 가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말한다. 평소에 쓰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 평소의 대화와 다른 높은 말소리, 일상 생활에서 쓰지 않는 언어들과 표현 방법, 얼굴 표정, 몸놀림이 동원되는 그런 설교를 말한다. 그야 말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서 소리를 지르고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으로 줄줄이 연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거 철에 유세(遊說)하는 후보자들이 연설하듯 하는 설교를 말한다.
강남의 어떤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아주 맹랑한 교육을 한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되기 위한 교육이다. 교육 과목 가운데 부흥사 목소리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게 좋은 목소리를 쇳소리가 나게 만들어 듣기 거북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목소리가 쇳소리가 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를 힘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아에 그렇게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새롭게 만들어 성도들을 기만하는 짓을 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변질된 듣기 싫은 목소리를 얻어 얼마나 부흥사로 태여 났는지 모르지만 그런 모조품 부흥사가 우리 한국 교회에 활개를 친다면 우리 목사들은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일상 생활과 다른 목소리와 표현들과 몸놀림은 듣는 성도들에게 설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설교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일으킨다.
주님의 설교를 자세히 연구해 보라. 그야말로 주님은 연설이 아닌 설교를 하시지 않는가? 늘 하는 일상 대화를 연구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대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라. 대화 식 설교는 배워야 한다. 한경직, 곽선희, 옥한흠, 김삼환 목사님들의 설교를 참고하라.
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분들의 설교와 여러분의 설교 차이를 모르겠거든 여러분의 설교를 녹음하거나 녹화해서 비교 해 보라. 그러면 확연히 구별이 될 것이다. 무엇이 대화 설교 인줄 모르겠거든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목사가 나와 설교하는 장면을 탤런트가 연기하는데 그 때 그들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고 들으면 대화식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잘하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긴 설교.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20분 내지 25분 정도면 족하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은혜를 받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라고 한다. 20분이 지나면 말이 청취되지 못하고 귓전을 때리며 흘러 버린다고 한다. 60-70년대는 설교를 길게 했다. 친구 목사는 부흥회를 가서 10시부터 시작한 낮 성경 공부를 오후 4시까지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옛 날 이야기다.
문제는 이렇게 인색하고 짧은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도록 설교하는가 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어 따로 설교 잘하기에서 말하겠다. 좋은 설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즉 감동과 감화력을 가진 설교를 말한다. 나는 일반 대중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에서 설교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3-5분 동안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얼굴과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땀이 날 정도로 큰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청소년들은 혼절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번만 들은 노래가 아니고 수 없이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노래지만 가수들이 부를 때는 감동되어 울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르면 장난이 되고 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목소리가 좋아서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수 천번 노래 연습을 하고 거기에 자기들의 모든 인격과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면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없고 성공할 수가 없다. 3-5분 동안 사람이 듣고 즐거워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이토록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죄인을 살린다는 목사들이 20-25분 동안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이는 이사야가 말한 '개는 개로되 짖지 아니하는 개'와 같을 것이다.(사 56:10)
이 글은 읽는 목사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사람들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그 교회가 이층이던 지하실이던, 임대 교회든 성전을 가진 교회든, 크던 작던 가리지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암사동에 있는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잘 생긴 목사가 상가를 분양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5,000만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잘했다. 누구든지 그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면서 마음 들어 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다시 그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회는 개척한 후 2년이 넘었는데도 의자가 텅텅 비어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성도들이 듣기 싫은 설교만 골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처럼 하루 종일 설교해도 들을 만한 설교를 할 수 없거든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주제가 많은 설교.
목사들은 설교에 욕심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되 많은 것을 충분히 잘 전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설교에 주제를 몇 개씩 설정하고 설교하면 듣는 사람이 혼란스러워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머리 아파한다. 목사가 설교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 복음 3:16절에는 성경 말씀의 모든 중요한 진리가 함께 들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론이고, '세상을'하는 말씀은 인죄론이며,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기독론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라는 말씀은 교회론 이며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신론도 기독론도 얼마나 그 범위가 넓고 그 진리가 심오한가. 그런데 목사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설교를 할 때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면 정말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한가지만 설명하고 설교하기도 사실 쉽지 않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성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사가 설교에 너무 많은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많은 사상들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
설교의 주제는 한가지만 해야 한다. 두 가지도 많고, 세 가지는 혼란하며, 네 가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가지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 다시는 설교들을 생각을 못하게 한다.
대지와 소지가 많은 설교.
20-25분 동안 설교를 하는데 대지와 소지가 많으면 아주 혼란스러워진다. 설교하는 목사는 설교를 질서 있고 알아듣게 하기 위해 대지와 소지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설교의 대지와 소지는 원고에만 있어야 한다. 첫째, 둘째, 둘째의 첫째 소지는 ---. 이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은 설교 내용 보다 대지와 소지의 숫자를 세는데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는 대지, 소지를 말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설교를 해서 앞뒤의 말씀과 내용이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대지는 많으면 세 가지 정도로 하고 적으면 한가지만 해도 좋다.
특히 대지 가운데 소지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소 소지를 나누어 설교를 한다면 정말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며 나중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대 소지를 나눈 설교가가 있다. 그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문이 그렇다. 그러나 그 목사는 설교할 때 대지, 소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성도들은 그 목사의 설교 원고가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어진 대 소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은혜를 받는다.
대. 소지를 나눌 때는 반드시 다른 색연필로 표시를 해서 설교자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는 설교
틸리케는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재미없고 지루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에 염증을 내게 하며 흥미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가 싫증 나고 재미없는 증거는 아주 쉽게 판단된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대부분 졸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재미없는 설교에 대한 무언의 질책이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졸고 있는 성도들 깨우기 위해 종을 치고 강대 상을 칠 필요가 없다. 졸리지 않도록 설교를 하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사의 설교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찾아 개선하지 않으면 밤 낮 잠만 자야 하는 목사가 되고 말 것이다.
알아듣기 어려운 설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면에서 전문적으로 공부 한 사람이다. 그럼으로 전문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전문 분야인 신학을 설교에 자주 이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신학을 말할 때에 목사는 아주 잘난 척하기도 한다. 듣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신학을 아느냐'라는 말투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목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학을 말하되 신학이 아닌 성경으로 풀어 말한다. 성도들도 목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알 것은 다 안다. 그들이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뿐이지 수 십년 동안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도 알고 성경도 안다.
그런 성도들을 앞에 두고 목사가 "인죄론이라는 것은. 신론이라는 것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칼빈을 어떻고 루터는 어떠하며, 발트는 어떠하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 가운데 속이 뒤틀린 사람들은 "칼빈이고 루터고 발트고 좋아하시네. 빨리 끝이나 내시지"하면서 주보에 안경 쓴 목사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신학 뿐 아니다. '무슨 무슨 적(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예술적등 가급적이면(여기서 나도 그 버릇이 나온다) 적, 적, 쩍, 쩍하지 말라.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아주 평소에 말하는 일상 용어로 바꾸어 알아듣기 싶게 바꾸어 말하는 고도의 표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전문 용어에 대한 해박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게 일상적인 대화 중에 '무슨 무슨 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가 무슨 대 학자나 된 것처럼 연신 '무슨 적, 어떤 적'을 찾으니 듣는 성도들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아프다.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는 설교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 내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는 사람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언어가 바로 설교다.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다. 그리고 설교는 말로서 이루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말도 있다.
몸짓으로 하는 말이 있고 음악이나 그림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이용한 말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입의 말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설교자의 말이 분명하지 않고 그 의사 전달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 잘하기를 위해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수사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말 잘하기를 배우지 않고 천연적인 말투와 어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쉴새없이 말 잘하기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 학원을 찾아 가 배우고 국어 사전을 옆에 놔두고 말의 바른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긴말을 짧고 간결하게 하는 법을 배우고 같은 말이라고 상대방에게 감동과 기쁨과 확신을 줄 수 있는 말 잘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바로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방편이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의사를 위해 설교자는 바디 렝게쥐(Body lange)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눈 마추기(Eye contact), 표정 관리, 손놀림, 발의 움직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시간 동안 설교했는데 내용 구성이 잘못되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해 하는 것 보다 설교하는 목사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호소적인 설교,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회개를 말하는 설교, 헌신를 말하는 설교, 사랑의 고백 설교, 위로와 치유의 설교들이 모두 한결 같은 어투로 설교된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연설이다. 설교 가운데 논술, 전개, 사건 설명, 대화, 이야기,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구원을 바라는 화급한 소리, 귀신 들린 아버지의 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대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는 말들이 한결같이 같은 음성과 어휘로 되었을리는 없다. 입체적인 언어 구사법을 훈련하라. 그래서 듣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상황이 눈에 보이듯이 설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까?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잔소리 많은 설교.
설교의 초보자들은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설명하는 말은 대개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결국 그 아까운 20분 동안에 말하고 설명하느라 다른 말씀 전할 시간이 짧아지고 그 설명은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잔소리' '다시 말하면---- 잔소리' ' 이 말에 대하여 누구누구는 이런 설명을 했다----잔소리', '본문에 말씀하신 이 말을 내가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이다---- 잔소리' '일테면----잔소리'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설명하는 말을 먼저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 부득이 설명을 해야 하거든 아주 짧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야 한다. 설명이 길어지면 하나님의 우리 사랑하심도 잔소리로 듣게 되어 버린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은 우리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잔소리로 말하는지----졸려 혼났네"라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혼이 나가면 되겠는가?
말을 많이 해야 설교자의 의사가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잔소리가 된다. 적게 말하고 강력하며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이제까지 한 설교를 다시 설명하고 계속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짜증을 낸다.
확신이 없는 말투와 불필요한 언어 사용
설교자의 확신 없는 말투는 그 정도가 참으로 심각하다. 그런 말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것입니다"와 '같습니다'가 있다. 조그만 신경을 쓰고 듣고 있으면 설교 중에 이런 말들이 거침없이 무수히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되는 것입니다.', '기원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또 확신이 없는 가정법의 언어사용이 심각하다. '인 것 같습니다.", "싶습니다.", '짐작됩니다.'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서 인가 이런 말이 우리 사회에 대 유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이런 '것입니다'와 '같습니다'의 말 버릇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저히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확신이 차고 넘쳐 한다. 여기서의 자기 확신이란 자신의 신념이나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하는 중에 "---인 것 같습니다.", "---인 듯싶습니다"등의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성을 흐리게 한다. 이런 말버릇을 가진 목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기도해야 주신다는 말인 듯 싶습니다." 또는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인 것 같다'는 완전한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싶다' 역시 관형어 아래에 `듯' `성'들과 함께 쓰이어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추측으로 전할 수가 있을까? 설교자 자신이 `이 말씀은 이 뜻이다'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메시지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설교자가 어정쩡한 표현으로 전하면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불 확실과 혼란만 가져 올 뿐이다.
일상적인 말버릇의 잘못 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한 목사도 있다.
'오늘의 이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발트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글쎄요,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 뜻이 성령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각자 적당히 해석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설교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말들이다.
설교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 가운데 '--라고, --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인용격 조사(따옴 자리토씨)로서 분별없이 사용할 때 그러한 폐단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들이다. 이런 문장에 '---라고', '---라는' 등등의 인용격 조사가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다라고"는 "---한다고"로 바로잡고, "---한다라는"은 "한다는"으로 바로잡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상의 경우는 거의 습관에서 울어나는 부작용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자의 단순한 분석이나 지식의 전달보다는 좀더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럴 때는 이상과 같은 인용격 조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되어서 필요 없는 곳에서까지 이러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세세한 언어사용 방법까지 공부하고 생각하며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한국말의 토씨와 형용사와 접두어와 접미어의 사용이 너무 어려워 여기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정확한 언어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은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은혜를 받는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설교자는 최소한 언어의 사용에서 이질감을 유발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설교자는 쉬운 말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므로 단호하고 결정적인 어휘를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짧게 해야 같은 말이라도 힘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 문장에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하였습니다 만, 같은 접두어를 계속 사용하면 설교의 진의가 흐려지고 혼란스럽게 된다.
외국어로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것.
목사가 외국어를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말로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낙원이라는 말도 그 중에 속한다. 사랑이라는 말의 차이는 이미 잘 알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천국이라는 말은 천국으로 안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는 불교의 지옥을 연상하고 낙원을 말하면 천국과는 조금 다른 세상으로 천국 가기 전에 임시로 머무르는 세상 정도로 안다. 케도릭식 사고 방식이다. 이럴 때 목사는 그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고 설명을 위해 그 말의 원래의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나 영어나 독일어나 다른 외국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구태여 그것을 말하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외국어들은 주석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단어들로서 누구든지 쉽게 찾아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요 단어의 해석이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외국어를 말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비웃음을 살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를 너무 잘 구분한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즉 신학대학원의 교수가 영어를 말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지만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설교 노트에 문장을 우리말로 기록해 말하고 설명한다면 비웃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 목사라고 생각해서 미국 사람이라도 오게 한다면 얼마나 망신을 당할까? 외국어는 가급적 안하는 것이 좋다. 우리 한국말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강단에서 누구든지, 그가 비로 신학교의 교수로서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해도 안하는 것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덕이 된다.
내 조카는 아주 큰 교회를 다닌다. 그 교회의 부목은 미국의 어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그 목사는 설교 중에 영어를 잘 사용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외국인을 위하여 영어로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 그 목사는 별 말이 없는데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한 성도가 듣다못해 잔소리를 했다. 그 부목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식한 단어 사용이 온 교회에 널리 널리 퍼졌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받았다는 박사 학위에 대해서도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았다. 그가 잘못 사용한 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그의 박사 논문까지 검토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박사 논문을 본 그 성도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 목사는 10년도 더 넘게 있었던 그 교회를 사임했다.
성도들은 목사의 한가지 허물을 목사가 가진 모든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안해도 되는 외국어를 해서 그런 부끄러움을 자초하겠는가? 우리가 우리말도 잘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옛날에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수사학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수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가? 차라리 외국어를 할 것 같으면 그만 두고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친 책이나 사서 탐독하는 게 훨씬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설교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설교를 성도들은 듣기 싫어한다. 위대한 설교가라고 이름이 알려진 어거스틴도 필요 없는 말을 반복했다고 자신의 설교 이론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그가 남긴 '크리스마스'라는 설교에서 동일한 대명사를 한 문장에서 12회나 사용할 정도였다. 이런 반복되는 말은 설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복잡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더욱이 설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을 반복하는 목사도 있다.
'에---에---', '그리고, 그리고', '일테면, 일테면', '말하자면, 말하자면', '에 또, 에또 가서는', '그러므로, 그러므로' 따위의 설교에 전혀 불필요한 말들이다.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그렇게 필요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반듯이 실제 설교를 녹음해서 설교의 언어 사용에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 한다. 이런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말의 사용은 듣는 성도들의 신경을 매우 거슬르게 하며 혼란스럽게 해서 설교가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한다.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자주 사용하고 해설하는 설교
설교자가 당하는 유혹 가운데 아는 체하려는 것이 있다. 이 유혹을 떨어버리지 못하면 필요 없는 유식(有識)을 자랑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 외국어들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동산의 과일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무엇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급적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듣는 성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꼭 써야 할 전문적인 용어들은 아주 쉽게 풀어 아무 저항 없이 듣도록 요리해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와 듣는 성도 사이에 의사 전달이 안되면 그 설교는 실패한 설교다.
너무 심한 사투리와 방언 사용.
너무 심한 사투리와 지방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듣는 성도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며 심한 경우에 협오 감을 준다. 그러나 가벼운 사투리와 호감이 가는 방언은 오히려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반복 설교
반복 설교와 예화를 하지 말라. 똑 같은 자기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라.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싫증이 난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특별히 절기 설교는 그 내용이 모두 같고 짧게 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언제가 한 설교를 대충 대충 손보아서 설교를 재탕 삼탕한다. 성도들은 아무 표정이 없이 듣고 있지만 알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 전하는 것은 잘 듣는다.
그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다윗의 이야기 같은 성경 인물에 대한 이야기와 사건의 이야기들은 수 백 번을 들어도 들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와 예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 수 십년 전에 했던 예화를 성도들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백 번도 더 많이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 개으르고 나태한 목사', '우리들을 무시하는 목사'라고 낙인을 찍는다.
과감하지 못한 어정쩡한 설교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고 듣는 성도들이 관심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르게 전한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저항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설교가 단호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현상을 가져 왔다. '여러분 새벽 기도회에 나와 꼭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정성을 다한 11조를 받으실 것입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 바쁘신 분들은 언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까?
요즘 시중에서 파는 성경 녹음 테이프를 사서 차를 타고 가시면서 듣도록 하세요.' 이런 말은 수 없이 많다. 다 나쁨 말은 아니지만 시류(時流)에 편승한 목사의 어정쩡한 자세가 잘 나타나는 말들이다. 목사가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미리 겁을 먹고 개으르고 나태하며 자기 변명을 일삼는 성도들과 타협점을 찾아 흐리멍덩한 설교를 자꾸 하면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도들도 싫어한다. 설교가 치유적이기도 해야 하겠지만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것을 믿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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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7).